서울 청계천광장시장명동 등 돌아봐특화된 먹거리 매대가판대 놀라워

 

20일 오후, 수원화성 행궁광장 앞에 수원시상인연합회 회장단이 모였다. 수원시 22개 전통시장 상인회장 중 2명을 제외한 20명과 수원시 경제정책국 원영덕 국장, 지역경제과 심언형 과장 등 7, 수원시 상인연합회 김춘홍, 이원영 자문위원, 상인연합회 홍보위원장인 하주성 기자 등 30여 명이 버스 한 대로 수원을 출발하여 서울상권 벤치마킹에 나선 것이다.

 

이날 서울 벤치마킹을 주관한 수원시상인연합회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지역경제와 이웃도시 전통시장의 현재 모습을 돌아보고, 수원시 상권의 변화와 각 전통시장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등을 고민하고 시장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오후에 수원을 출발한 것은 서울 상권의 야시장 등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수원시상인연합회 최극렬 회장은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오늘 돌아볼 서울 청계천 광장시장과 명동 등을 돌아보고 우리시장과 무엇이 다른지, 또 어떤 정책으로 전통시장을 활성화 시킬 수 있을 것인지 등을 알아보는 시간을 갖기 위해 서울상권 벤치마킹을 실시하는 것"이라며 "상인회장들이 돌아볼 곳을 잘 살핀 후 좋은 정책을 마련하기 바란다"고 했다.

 

서울에 도착하기 전 김춘홍 자문위원은 "오늘 여러분이 벤치마킹을 하는 광장시장과 명동은 서울 상권 가운데도 가장 외국인이 많이 찾는 곳"이라면서 "광장시장도 어려움에 처한 상인들이 점포 문을 닫아 빈 공실이 늘어나고 있지만, 또 다른 정책으로 가장 많은 외국인들이 찾아오는 관광명소가 되었다"면서 시장을 잘 돌아볼 것을 주문했다.

 

이원영 자문위원은 "명동을 나가보면 서울이라는 거대도시가 명동으로 어떻게 많은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었는지 알 것"이라면서 "수원 전통시장들도 각 시장에 알맞은 특화정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명동의 야시장을 돌아보면 왜 전통시장이 시장에 맞는 특화정책을 고민해야 하는지 알 것"이라면서 명동을 돌아보고 난후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갖자고 제의했다.

 

 

서울 청계천이 시작되는 곳에서 하차한 회장단일행은 기념촬영을 한 후 청계천을 따라 2.5Km 정도를 걸어 광장시장으로 향했다. 광장시장을 오후에 찾아간 것은 오전에는 한복 및 원단 등 위주로 판매하는 시장이지만, 오후 4시부터 이곳 광장시장 시장통이 모두 먹거리를 판매하는 매대가 들어서기 때문이다

 

넓은 광장시장의 모든 통로마다 자리를 잡은 먹거리 매대. 넘쳐나는 사람들. 오후에 광장시장을 찾아오는 관광객들 중 50%는 중국인, 그리고 나머지가 일본인과 동남아 관광객들이라고 한다. 매대에서 판매를 하는 먹거리들도 다양하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이렇게 시장통로에 진열된 먹거리들을 맛보기 위해 일부러 온다는 것이다.

 

 

회장단 일행이 시장에 들어섰을 때도 인근에 관광버스 10대가 늘어서 많은 중국인들을 하차시키고 있었다. 이들 모두가 먹거리 천국이라는 광장시장을 돌아보기 위해 찾아왔다고 한다. "광장시장 통로에 먹거리 매대가 들어서는 시간이면 기존의 점포들은 문을 닫고 철시한다"고 최극렬 회장이 말한다. 이렇게 특화된 먹거리 매대들로 인해 광장시장은 외국 관광객들이 꼭 들려가는 곳이라는 것이다.

 

오후 8시가 넘어 찾아간 곳은 젊은이들과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명동이었다. 명동은 중국 관광객과 동남아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과거에는 이곳에서 판매하는 유명화장품을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구매했지만, 요즈음은 피부미용을 위한 각종 의료기구들이 판매되면서 유명메이커 화장품보다 중소기업이 생산하는 피부건강에 도움을 주는 화장품을 선호한다고 귀뜸한다.

 

놀라운 것은 명동대성당 인근부터 명동전철역 입구까지 도로에 늘어선 가판대들이다. 저녁이면 이곳에 가판대를 설치하고 장사를 한다는 거리점포들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의류, 억새사리, 각종 모자와 머플러 등을 판매하는 가판매점이 끝나면 양편에 늘어서 있는 먹거리 매대들이다. 줄지어 서 있는 먹거리 매대는 젊은 상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명동을 찾아오는 관광객 중 90%가 외국인"이라고 김춘홍 자문위원이 알려준다. 명동거리에 넘쳐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의 외국인이다.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 진 날이지만 명동을 찾은 외국관광객들은 손에 먹을 것을 들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다. 커피숍도 사람들로 만원이다. 젊은이들과 관광객들로 성시를 이룬다는 명동야시장. 그런 모습을 보는 회장단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오후 9시가 넘어 서울을 떠나면서 최극렬 상인연합회장은 "우리 수원 전통시장은 거대한 기업이 종합쇼핑몰을 열기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 전통시장이 각 시장에 맞는 특화시장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 오늘 서울상권을 돌아본 것을 상인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2019 서울상권 벤치마킹'.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서울상권을 돌아본 수원전통시장 상인회장들이 앞으로 어떻게 자신이 맡고 있는 시장을 특화된 시장으로 만들어갈지 궁금하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 595 소재한 흥천사. 흥천사는 조선 태조 4년인 1395년에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능을 정릉으로 정한 후 세운 사찰이다. 당시 이 절은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기원하던 170여 칸 규모의 큰 사찰이었다. 흥천사, 이 절은 어릴 적에는 정릉 신흥사라고 불렀다.

 

정릉 신흥사라고 한 까닭은 이 절이 정릉의 원찰이었고, 이름이 신흥사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이 근처에서 살던 나로서는 이 신흥사가 늘 벗들과 함께 뛰어놀던 놀이터였다. 지금도 삼각산 흥천사라고 하면 왠지 생소하다는 기분이 든다. 그것보다는 어린 시절 우리가 부르던 정릉 신흥사가 더 마음에 와 닿는 곳이다.

 

 

조선 태조 5년에 창건한 신흥사

 

신흥사는 조선조 태조 5년인 1396년에 왕실의 발원으로 지은 사찰이다. 170여 칸의 대가람으로 사명을 신흥사라고 하였으며, 극락보전에 태조 왕궁의 궁중원불인 42수 관세음보살존상을 봉안하였으며, 국제를 거행하던 절이었다. 이 절은 왕실의 위엄을 모아 나라의 명찰이라 하여 조계종의 본사로 명명하였다.

 

1409년 선덕왕훙의 능을 숭신방 사아리로 이전하고 흥천사도 능방에 소암으로 이건해 이름을 신흥사로 불렀다. 중종 5년인 1510년에는 화재로 인해 혜진하고 대종은 덕수궁에 보관되어 왔다. 정종 18년인 1794년 성민화상 등의 발원으로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철종 4년인 1853년 계장화상의 발원으로 극락보전을 중수하였다.

 

 

철종 6년인 1855년 순기화상의 발원으로 명부전을 건립하였으며, 고종 22년인 1885년에는 대방을 중수하였다. 현재 흥천사에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대방, 삼성각, 종각, 칠성각, 용화전, 연화대 등이 자리하고 있다.

 

흥천사 극락보전과 명부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극락보전은, 10겁 이전에 성불하고 서방 극락세계에서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철종 4년인 1853년에 계장스님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정면 3, 측면 3의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인 다포양식 건물이다.

 

 

흥천사 극락보전은 19세기 사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화려한 목조 건축으로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극락보전의 정면에 달아 낸 창호의 조각인 상당히 독특한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다. 극락보전은 서울에서는 희귀한 사찰의 건축물로 매우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1985125일 극락보전과 함께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이 된 명부전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해 주는 지장보살을 모시는 법당으로, 철종 6년인 1855년에 순기스님이 세웠다. 지장신앙은 아미타신앙과 함께 조선시대에 널리 유행한 민간신앙으로서, 조선시대의 사찰에는 거개가 명부전이 건립되었다.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내부에는 시왕을 거느린 지장보살상을 모시고 있고, 그 뒷면 벽에 지장보살의 모습이 담긴 불화가 걸려 있다. 흥천사 명부전은 옛 목조 건물의 전통을 이어 받았으면서도 단순하고 소박하게 꾸며진 이 법당은 조선 후기 사찰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경내를 뛰어다니면서 노닐던 신흥사. 정릉신흥사는 삼각산 흥천사라는 다른 이름으로 눈에 들어온다. 조금은 낯선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은, 정겨웠던 이름 때문인가 보다. 하지만 무엇이 대수이랴. 어차피 그곳에 많은 조형물들이 그대로 있었던 것인데.

서울을 다녀 온 동생뻘 되는 녀석이 볼멘소리를 한다.

 

“도대체 길을 갈 때도 고개를 들어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으니, 길을 가라는 것인지 집구석에 처박혀 해주는 밥이나 처먹고 살라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네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 녀석 말도 일리가 있기는 하다.

 

모처럼 서울 번화가를 나갔단다. 그런데 이 압구정동이라는 곳이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길을 걷는 젊은 여성들의 치마길이가 장난이 아니다. 남자들의 심리라는 것이 뻔하지 않은가? 날씬한 여인들이 벌건 다리를 내놓고 앞서서 걷다가 보면, 괜히 눈길 한 번 더 가게 되니 말이다.

 

문제는 그런 눈길에 있다. 자연스럽게 걸어야 하는데, 당최 그게 안 된다는 것이다. 절로 눈길이 그리 간다는 것. 그렇다고 길을 걸으면서 하늘만 바라보거나, 아니면 눈을 감고 갈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다리를 다 내놓고 걷는 여성들의 뒤를 따라가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금거리며 다 쳐다본다는 것이다. 졸지에 치한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더란다.

 

쳐다보는 남자가 잘못인가?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잘못일까?

 

사람의 눈이란 보라고 있는 것이다. 나잇살께나 먹어 그런 여인들의 아름다운 모습에도 별 관심이 없는 어르신들이라면 모를까, 한참 혈기왕성한 30대의 총각들이야 절로 눈이 그리로 갈 수밖에.

 

그런데 요즈음 들어 빈번한 강간, 살해 등으로 인해 불심검문을 한다고 하니, 길을 걷기가 여간 불편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눈을 어디다가 두고 다녀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생각을 해보세요, 그렇게 입고 다니는 여자분들, 솔직히 보아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자신의 몸매자랑을 하는 것인데, 그것을 보면 치한으로 몰리기 십상이니,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럼 그런 번화가에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들이 바글거리는데, 남자들은 눈을 감고 다니란 말입니까?“

 

딴은 그렇다. 길을 걷는 사람이 눈을 감고 걸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버스야 자리가 앞으로 나란히 나 있으니 그나마 조금 낫지만, 지하철을 타면 간혹 그럴 경우가 있다. 맞은편에 짧은치마를 입은 여성이 앉아있으면 정말 불편하다. 눈을 들어 눈길이라도 마주치면, 이건 머 완전히 변태나 치한으로 몰고 갈 듯한 눈초리다. 이래 갖고야 바깥나들이나 온전히 할 수 있을까?

 

도대체 이 불쌍한 남자들을 어찌할까?

 

“정말 대한민국이 싫어지네요. 어디선가 보니 여성들의 치마길이가 32cm가 절대방위선이라고 해요. 그런 절대방위선도 조금 높은 곳에 서있거나, 앉아있으면 불편한 장면이 보이는데 요즈음은 그보다 더 짧게 입고 다니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입고 다니는 사람은 괜찮고 그 뒤에 따라가면 치한입니까? 우연히 같은 길을 갈 수도 있는데요. 이젠 길조차 마음 놓고 활보를 할 수가 없으니, 이 나라에서는 절대로 남자로 태어나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생전 얼굴 한 번 붉히지 않는 녀석인데, 무엇인가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진 모양이다. 아마도 말은 하지 않아도, 불쾌한 일을 당한 것 같다. 이 녀석 이야기를 듣고 보니, 갑자기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길조차 마음대로 걸을 수 없는 이런 현실이 말이다. 이젠 서울도 그만 올라가야 할까보다. 무슨 곤욕을 치를지 모르니. 참 여자들은 좋겠다. 마음대로 짧게 입어도 누가 머라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이 녀석 하는 말이 ‘여성들이 많은 길거리에서는 절대로 휴대폰을 손에 들고 돌아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말 하는 것을 보니, 곤욕을 치루기는 치렀나 보다. 세상 참 씁쓸하다. 이래저래. (사진출처 / 인터넷검색사진 인용. 기사와는 무관함)

그동안 정말 그런지 몰랐다. 아니 몰랐다기보다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매일 발을 씻으면서도, 이것은 당연히 내발이려니 하고 살았다. 당연히 내 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니 내 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오늘 왜 ‘발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달 타령이라면 혹 몰라도.

아마 나처럼 발을 혹사시킨 인간도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만 같다.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이 발은 위로 자그마치 작지 않은 키에, 몸무게도 만만치 않은 몸을 싣고 팔도를 돌아다녔다. 그 발은 한 번도 나에게 불평을 한 적도 없다. 때로는 심한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아직도 나를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양말을 신었을 때는 정말 볼랐다.

알고 보니 무지하게 혹사를 시켰네.

누구에게 발을 보여 줄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일도 없다. 그저 답사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들어오면 찬물에 발을 담근다. 그리고 피로를 조금은 풀기 위해 오래도록 주무른다. 그리고 다음 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다시 길을 나선다. 하루에 10km를 걸었다고 쳐도, 그 동안 걸었던 길은 모두 24,000km 정도라는 거리를 걸은 셈이다.

이 계산은 이렇다. 답사를 나가면 기본적으로 하루에 걷는 거리가 10km 정도이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이 걸을 수도 있고, 덜 걸을 수도 있다. 평균 잡아 한 달이면 10일 정도 답사를 한다. 그러면 한 달에 100km를 걷게 되고, 일 년이면 1,200km를 걸은 폭이다.

20년을 답사를 했으니 24,000km 정도를 걸은 셈이다. 서울서 부산은 400km로 잡을 때 편도 60번, 왕복 30번을 걸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걸으면서도 한 번도 탈이 난 적이 없었다. 이런 발에게 한 번도 미안한 감을 표현하지도 않았고, 감사를 한 적도 없다.

더운 물에 담구고 주무르면서 보니, 정말 발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다. 붓고 굳은 살 박히고, 찢어진 것이

통증 때문에 바라본 발

갑자기 발에 통증이 온다. 양말을 씻기 전에는 벗지 않는 사람인지라, 늘 맨발을 들여다 볼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발에 통증이 오는 바람에 우연히 양말을 벗었다. 따듯한 물에 발을 담구고 주무르기라도 할 셈으로. 그런데 발을 보다가 놀랐다. 내 발이 정말 형편없이 생겼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발톱은 그동안 산을 타면서 걸려 넘어지고 깨어지면서, 몇 번인가 빠지고 새로 돋았다. 그런 발톱이 제대로 생겼을 리가 없다. 주로 걸어서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그동안 발을 혹사시킨 정도가 아니라, 고문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통증이 오는 곳을 살펴보니 발 뒤꿈치다. 그것에 굳은살이 박여 터지고 피가 난다.

그래서 그렇게 심한 통증은 왔나보다. 그런데 그 발을 보면서 참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괜히 발을 보기가 미안스럽다. 아직 한 번도 발에 대해서 고마워 해 본적도 없다. 그리고 발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진 적도 없다. 그런데 양말을 벗고 들여다본 발은 충격 그 자체였다.

터지고 깨어지면서도 나를 버티게 해주었던 발. 그 소중함을 이제야 새삼 깨닫는다. 아파서 깨우친 것이다. 아마도 나를 깨우치기 위해 아픈 것은 아니었을까? 앞으로도 얼마를 더 걸어야 하는 것일까? 과연 이 발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일까? 발을 보면서 정말 미안하다. 그래서 발에게 미안함을 이렇게라도 적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나쁜 발의 주인이 될 것만 같아서.

“발아 정말 미안하다. 그 동안 너무 혹사를 시켰나보다. 이젠 좀 쉬게 해주고도 싶다”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소재한 운현궁은 사적 제257호이다. 운현궁은 많이들 알고 있듯이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집이다. 운현궁은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운현궁은 제일 앞 남쪽에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이 자리 잡고, 뒤쪽인 북쪽으로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안채인 노락당이 자리하고 있다.

노락당과 통로로 연결이 된 이로당은 노락당에 기거하는 여인들의 별채의 형태로 꾸며졌다. 이로당은 밖에서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막힌 ㅁ 자 형으로 구성이 되었다. 여인들만이 기거하는 곳이기 때문에 은밀함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운현궁 안채 담장의 특별함 


여인들이 기거하는 노락당과 이로당은 안 담장으로 연결을 했는데, 이 담장의 문양이 특별하다. 담장은 일반적으로 같은 문양을 사용한다. 그러나 운현궁의 안 담장은 글자를 넣어 문양을 각기 다르게 꾸몄다. 운현궁만의 특별함이 보인다. 담장에는 ‘수벅강령락’이라는 한문으로 문양을 넣었고, 그 글자마다 다른 문양을 넣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오늘 (8월 19일) 아침. 출장길에 잠시 운현궁을 들렸다. 사진을 촬영하려면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블로그에 올린다는 말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운현궁을 한 바퀴 돈 후 본 안채의 담장. 당당한 세도가의 집답게 온갖 치장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담장에는 '수복강령락'이란 한문과 함께 각기 다른 문양으로 꾸며졌다.

운현궁에서 만난 문화해설사를 하시는 한 어르신은 담장의 문양 위에 요철로 굴곡진 것을 “저것은 사람이 살다가보면 파란만장하게 굴곡된 삶을 살기도 하지만, 그런 것을 이겨내고 전주 이씨가 대대로 왕위를 계승해 나가기를 바라는 뜻이다”라고 말씀을 하신다.


운현궁은 이 담장의 문양만 갖고도 훌륭한 문화재적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만큼 여러 건물을 다녀보지만, 한 담장 안에 이렇게 화려한 문양을 새겨 넣은 것은 보기가 힘들다. 그래서 운현궁이 더욱 특별한 것이겠지만.  




안채인 노락당과 이로당을 연결하는 바깥 담장은 문양만 갖고도 훌륭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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