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에는 사적 제217호인 '당성(唐城)'이 자리하고 있다. 이 당성이 소재하고 있는 남양 지역은,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이라 불린 중국과의 교통 요지였다.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삼은 중요한 곳이었다.

 

지난 3월 말경 오후 6시. 이제 30~40분 후면 일몰시간이라 사진조차 찍을 수가 없다. 당황성과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당성을 찾아보기 위해, 늦은 시간이지만 당성으로 향했다. 올 들어 첫 황사가 심하게 끼는 날이다. 설상가상으로 화성은 서해와 인접해 딴 곳보다 황사가 심하다. 온통 시야가 뿌옇게 보일 정도이다.

 

 

 

이런 날 산성 답사라니...

 

당성 입구에 도달했는데 난감한 일이 생겼다. 카메라의 배터리 양을 나타내는 표시가 깜빡거린다. 셔터를 눌러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몇 번을 벼르고 별러 찾아온 곳인데, 그리고 이제 얼마 후면 해도 떨어질 텐데 정말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동행을 한 아우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밭 옆에 서있는 전신주로 가서 무엇인가를 살펴본다.

 

다행히 가방 안에 항상 충전기는 지니고 있어, 전신주에 있는 계량기 안에 코드를 연결할 수가 있었다. 배터리를 충전시키면서 기다리는 10여 분이 여삼추다. 벌써 날이 점점 어두워온다. 10여 분을 기다리면서 충전을 해 성으로 올랐다. 저 아래로 보이는 마을에는, 한 집 두 집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비탈길에 조

 

 

 

성한 성벽 위로 걷는데, 숨이 가쁘다. 그도 그럴 것이 오후에 나선 답사 길을 재촉하느라, 무리를 했기 때문이다. 다리도 뻐근하고 숨도 차다. 이렇게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마시는 황사의 먼지는 도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정말로 내가 문화재 답사에 미친 '미치광이'가 아니라면, 이렇게 황사가 심한 날, 숨 가쁜 산성 답사를 할 일이 없을 듯하다.

 

삼국이 번갈아 차지했던 교통의 요지

 

당성은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은 남북으로 기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당성은 동문과 남문, 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성은 현재 복원 중이다. 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니 세 곳 정도로 나누어서 복원을 하고 있는 듯하다.

 

 

 

 

 

당성은 화성 남양반도의 서신, 송산, 마도면의 3개면이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향으로 경사진 계곡을 이용하여 석루를 돌려 축성을 하였다. 전장이 1.2km 정도가 되는 이 당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불렀다.

 

후일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했다.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처음 이 당성의 성벽은, 쌓은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서 쌓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복원을 마친 곳 외에 드문드문 옛 성의 흔적들이 잡풀과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얼마를 돌아보니 지대가 높은 곳에 돌이 쌓여있고, 뒤편으로는 넓은 터가 보인다. 아마도 건물이 들어있던 곳 같다. 앞에는 '망해루 터'라는 석비가 있다. 이곳에 망해루라는 누각이 서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은 복원이 되지 않은 곳에 문지인 듯한 곳이 보인다. 벌써 날이 컴컴해진다. 시간을 보니 7시가 다 되어 있다.

 

당성을 한 바퀴 다 돌아 내려오니 기진맥진이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보다. 앞에까지 가서 성을 돌아보지 못할까봐 맘을 졸인 것이, 한꺼번에 피로를 몰고 온다. 삼국이 번갈아 가면서 차지했던 당성. 그만큼 중국과의 교역에 있어 중요한 거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해가 떨어지고 있는 당성의 마른 숲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또 하나의 소중한 문화재를 보았다는 것에 마음이 뿌듯하다.

 

나무는 그 사용되는 용도에 따라 가치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그런 용도와는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는 나무들이 있다. 바로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 있는 나무들이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이 나무들은 학술적으로도 매우 소중하기 때문에 보호를 받아야할 소중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나무 한 그루가 360년 세월동안 한 곳에 서 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주변에 사람들이 벌써 10대 이상을 바뀌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말을 하지 못해 우리에게 지난 사람들에 대해 고변을 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꽤 많은 이야기꺼리를 갖고 있지나 않을까?.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149-2 웅지마을 뒤편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470호인 전곡리 물푸레나무의 이야기이다.

 

 

이 나무 임신한 것 아니오?

 

전국을 다니면서 크고 작은 나무들을 보았다. 물론 그 나무들은 모두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나무들이다. 그런데 11일 화성에서 만난 이 물푸레나무는 조금은 사람을 황당하게 만든다. 나무가 마치 임신을 한 듯하다. 굵은 줄기 중간에 속이 들여다보이는데 그곳에 줄기 같기도 하고 뿌리 같기도 한 것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지만, 이런 경우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6,25 한국전쟁 때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이 동신제를 지낸 나무라고 한다. 가뭄이 들어 비가 오지 않으면 이 나무에 정성스럽게 기우제도 지냈다는 것이다.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수형이 아름답다. 나무의 높이는 20m 정도에 밑동의 둘레는 거의 5m 가까이 된다. 가지는 동으로 10m 정도, 서쪽으로 6.3m, 남으로 5m, 북으로 8.3m를 뻗어 동서로 16m, 남북으로 13.3m 정도를 뻗고 있다. 각종 농기구나 생활용품의 재료로 사용하던 물푸레나무, 여름철 입을 실하게 달고 있는 나무를 찬찬히 돌아본다.

 

잡풀 무성하고 관리도 하지 않는 듯

 

물푸레나무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자라는 키가 큰 나무로, 목재의 재질이 단단하여 괭이자루 등 각종 농기구와 생활용품 등의 용도로 널리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무껍질은 건위제나 소염제 등의 한방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농촌에서는 여러 가지로 쓰임새가 많은 나무가 바로 물푸레나무이다.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보기만 해도 압도당한다. 우선 거대한 밑동의 둘레도 그렇지만 실하게 잎을 달고 있는 나무가, 상당히 생육이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2년 전 이 나무를 만났을 때는 11월 말이라 나뭇잎을 달고 있지 않았다. 이런 나무를 마을에서 신성시 하는 것도, 이 나무를 잘못 대했다가 예전에 혼을 난 일이 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석연휴가 끝난 11일 찾아간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한 마디로 실망스럽다. 마을에서 신성시 했다는 것 외에도,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는 나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 주변은 잡풀이 무성해 안내판에 접근하기조차 어렵다. 나무를 촬영하려고 주변을 돌아보아도 높다랗게 자라난 잡풀이 발목을 붙들고는 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전곡리 물푸레나무, 어째 이렇게 관리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항상 이유는 많다. 비가 많이 와서 풀을 미처 베지 못했는데 갑자기 풀이 자랐다. 추석연휴가 끝나면 정리를 하려고 했다. 언제나 판에 박은 이런 핑계들을 댄다. 하지만 문화재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그런 이유를 다 이해를 하고 다닌다고 생각을 하는 것일까?

 

360년이라는 긴 시간을 마을을 굽어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곡리 물푸레나무. 앞으로도 이 나무가 얼마를 더 이 마을을 지키며 살아갈 것인지 아무도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 나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을 때라야 가능한 이야기이다. 담당 관청에서는 소중한 천연기념물임을 깨닫고 주변 정리를 속히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 세상을 살다가 보면, 아주 가끔은 길에서 횡재를 하는 수가 있다. 이런 글을 쓰면 무슨 ‘돈지갑이라도 주웠나 보다.’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요즈음 통 답사를 나가지 못했다. 하는 일이 많다가보니, 하루 종일 취재하고 글쓰기도 바쁘기 때문이다.

 

11월 22일(수), 모처럼 멀리는 가지 못하고, 가까운 곳인 화성시로 답사를 나갔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제대로 가보지 못한 몇 곳을 돌아볼 생각으로. 그런데 두 곳을 돌고 보니 속이 허하다. 어제 과음을 좀 한 탓인지, 아침에 밥맛이 별로 없어 몇 술 뜨는 둥 마는 둥 길을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땅히 들어가 속풀이를 할 만한 음식이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속이 깊은 냄비에 가득한 칼국수(위)와 마치 카페같은 분위기가 나는 호호락 전경

 

즐거운 맛이 있는 곳 ‘호호락’

 

어차피 내선김에 대부도를 들어가 얼큰한 매운탕이라도 한 그릇 먹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대부도로 가는 길인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189-2에 간판이 보인다. ‘즐거운 맛이 있는 곳 호호락’이란 글이 쓰여 있다. 그런데 식당을 찾아도 비슷한 것이 보이질 않는다. 그 대신 꽤 괜찮은 카페 같은 집이 있다.

 

‘설마가 사람잡는다.’고 그 아름다운 집이 바로 호호락이라는 식당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깔끔한 곳이 여느 식당 같지가 않다. 메뉴판을 보니 해물 얼큰이 칼국수, 샤브샤브 칼국수, 그리고 부대찌개가 주 종목이다. 속을 풀려고 얼큰이 칼국수를 시켰다. 그런데 이 집은 점심특선이 11시부터 13시까지 한사람 1인분에 한해 8,000원이란다.

 

 처음에는 카페로 이 집을 지었다고 한다. 실내가 상당히 심플하다. 

 

그것도 좋지만 우선은 ‘해물 얼큰이 칼국수’를 시켰다. 반찬은 김치 딱 2가지, 그런데 8,000원이면 좀 비싸지 않은 것인지? 실내를 돌아보니 정말 깨끗하고 특이하게 꾸며져 있다. 하기야 이 정도 분위기라면 반찬이 김치 2가지라고 해도, 그 분위기에 젖어들 것만 같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조개

 

커다란 속이 깊은 냄비에 가득한 칼국수가 물 위에 올려졌다. 그런데 2인분치고는 양이 상당하다. 속을 한번 휘저어 본다, 바닥에서 무엇인가 달그락 거린다. 한 번 뒤집어 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냄비 안에 조개가 가득하다. 거기다가 버섯과 새우를 넣어 국물 맛 또한 일품이다.

 

 해물 얼큰이 칼국수(위)와 밑반찬으로 나오는 김치. 이 집은 모든 음식재료를 유기농으로 지은 화성에서 생산된 것들만 사용한다고 한다.

 

이렇게 장사를 해서 도대체 무엇이 남을까? 먹으면서도 걱정스럽다. 음식을 먹으면서 미안해 보기는 이번이 또 처음이다. 둘이서 한 참을 먹었는데도, 밑에는 조개가 가득하다.

 

“지난해 8월에 이 길을 지나다가 보니 집이 너무 예쁜 거예요. 그래서 이 집을 사버렸죠. 그리고 칼국수를 팔았는데, 요즈음처럼 물가가 비쌀 때라 남는 것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요새는 입소문을 듣고 이리로 일부러 찾아오시는 분들도 계세요”

 

‘왜 안 그렇겠습니다. 이 분위기에, 이 냄비 가득한 해물에, 거기다가 맛까지 일품인데 누군들 한번 찾아오지 않을라고요.’ 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이 집은 원래 카페로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그리고 난 후 한 때는 영양탕을 팔기도 했다고. 세상에 이 아름다운 집에서 어쩌자고 영양탕을 판 것일까?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도 조개와 새우 등에서 우러난 국물이 시원하다. 거기다가 고추가루를 최상품을 사용한단다. 칼구수 안에는 조개와 새우, 그리고 버섯까지 가득하다(위) 아래는 칼국수에 들어있는 조개(이것이 반 정도의 양이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 호호락에서 먹는 얼큰이 칼국수. 아마도 한 동안은 그 맛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이런 음식을 먹고 나면 또 얼마동안은 힘을 얻어 답사를 한다. 답사길에서 만난 음식 한 그릇이 주는 행복. 아마도 땀을 흘리거나, 눈길에 미끄러지거나, 혹은 비를 맞으며 답사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느낄 수가 없는 행복이다.

 

 

즐거운 맛이 있는 곳 호호락

주소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189-2

전화 : 031)357-6432

중요민속문화재 제124호인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 109번지에 소재한 정용채 가옥은, 고택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집안의 짜임새가 돋보이는 집이다. 조선조 말기에 지어진 살림집인 정용채 가옥은 뒤편에 나지막한 동산이 자리하고 있어, 마치 삼태기처럼 집을 감싸고 있다.

 

대문채와 행랑채, 사랑채, 안채 등 50여 칸으로 꾸며진 이 집은 대문칸의 상량문을 통해 1887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는데, 안채의 경우에는 그보다 앞 선 19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은 15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오는 동안, 원형에 가깝게 관리를 해온 집으로도 가치가 매우 높은 집이다.

 

 

 

ㅁ자형의 구조, 공간 배치가 뛰어나

 

솟을대문으로 구성된 대문채는 좌측으로는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 있고, 들어서면서 우측으로는 부엌과 방을 드렸다. 좌측으로는 방을 드려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있다. 행랑채는 14칸 정도의 규모로 일자형으로 길게 늘어진 줄행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ㄷ 자형의 안채와 쪽문으로 연결을 하였다. 부농의 집답게 행랑채는 각종 광이며 곳간 등을 두었다.

 

대문채와 떨어져 지은 사랑채는 4칸으로 구성이 되었으며, 바라보면서 우측에 대청을 두었다. 이 사랑채의 특징은 남쪽 두 칸 방 뒤편에 안채 대청과 연결이 되는 복도를 두었다는 점이다. 번잡하게 식솔들의 눈을 피해 사랑에서 바로 안채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외견상으로는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을 명확하게 짓고 있으면서도 생활의 편리함을 생각한 집의 구조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안채의 날개채 부분과 행랑채가 맞닿아 있고, 중문을 달아 구분을 하였다.

 

폐쇄적인 안채의 구성에도 채광을 생각해

 

안채는 ㄷ 자형의 구성으로 되어있다. 양편 날개채는 모두 행랑채와 연결이 되어 중문을 두어 폐쇄적이다. 가운데 세 칸 대청을 마련하고 양편에 방을 두었으며, 날개채는 부엌으로 꾸민 것이 특징이다. 바깥마당으로 나가면 안채에 달린 남향받이의 방이 있다. 이는 폐쇄적인 안채의 공간 구성상 채광에 유리하도록 꾸민 것이다.

 

 

 

바깥마당에는 우물과 장독대 등을 두었는데, 이 집의 특성상 폐쇄적인 안채를 벗어나 모든 실생활의 살림을 바깥마당에서 했음을 알 수 있다. 바깥마당에 접한 방 앞에는 마루를 두어 생활하기에 편리함을 꾀했다는 점도 정용채 가옥의 특징이다. 한 마디로 폐쇄적이면서도 한 편에 여유를 부린 그러한 구성이다.

 

반듯한 가옥, 집안 전체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

 

한 마디로 정용채 가옥의 특징은 반듯하다는 점이다. 집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 듯, 집안의 곳곳은 윤기가 흐른다. 마당은 잘 정리가 되어있고, 집안의 마루 등에도 먼지가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 뒤편 바깥마당 우물에는 덮개가 덮여 있어, 이 물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서 보면 가장 위편에 자리하고 있어 행랑채 담 밖으로 나오면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바로 아래편에는 초가로 지어진 중요민속문화재인 정용래 가옥이 보인다. 폐쇄적이면서도 실생활에 편리하게 구성이 된 정용채 가옥은, 주변의 지형을 고려한 배치수법이 뛰어나다. 구성에 있어서도 각 채별로 뚜렷하게 공간구성을 하고 있으며, 실질적인 쓰임새에 따라 면밀한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마당과 안마당, 바깥마당의 공간이 나름대로 용도에 맞게 구성이 되어있고, 폐쇄성이 짙은 안채에 날개를 달아 채광에 도움을 주고 있는 정용채 가옥. 고택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꾸밈이 잘 되어있는 집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