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수원뉴스 시민기자들이 워크숍을 떠났다. 매년 10월 수원화성문화제가 끝난 다음에 실행하던 워크숍이 올해는 8월 말에 실행에 들어갔다. 애초 30명 정도가 워크숍에 참가 할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정도 인원이 선정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출발 하루 전날에 갈 수가 없다고 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28일 오전 830분에 시청 인근에 모인 시민기자들은, 9시경에 출발을 하여 제일 먼저 해미읍성으로 향했다. 적 제116호인 해미읍성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교황의 순방지로도 유명하다, 이렇게 교황이 이곳을 순방한 것은 해미읍성이 성지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해미읍성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해미로 옮기기로 하면서, 조선 태종 17년인 1417년부터 세종 3년인 1421년까지 축성, 충청도의 전군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이다.

 

천주교의 순교지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해

 

해미읍성 순교의 아픔은 곳곳에서 만날 수가 있다.

첫째는 수령 3백년 경의 회화나무 한 그루이다. 이 나무는 현재 기념물 제172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1790년부터 1880년에 이르기까지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 동쪽으로 뻗어난 가지에 철사 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을 한 현장이다.

 

 

오래 전 해미읍성을 찾았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옥사. 천주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옥사는 터만 남아있던 것을 발굴 작업 뒤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1935년에 간행 된 '해미 순교자 약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한 옥사는 내옥과 외옥이 있었으며 각각 정면 3칸 건물로 남녀 옥사가 구분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자리개질을 했던 돌다리

 

자리개란 곡식을 타작할 때 사용하던 방법이다. 짚으로 만든 굵은 줄인 자리개로 곡식 단을 묶어서 타작하는 것이다. 즉 곡식 단을 굵게 묵어서 어깨 위로 올렸다가 힘차게 내리쳐 단에 묶인 곡식들을 기구에 내리쳐 낱알을 털어내는 방법을 말한다. 그런데 해미읍성 서문밖에 이런 자리개돌이 있다.

 

 

그런데 이 자리개돌은 자리개질로 사람들을 죽이던 순교의 형장이다. 서문 밖 수구위에 놓여있던 돌다리로 이 돌다리위에서 자리개질로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는 것이다.

이 자리개 돌은 서문 밖 순교지에 보관중이던 것을, 생매장 순교 성지인 여숫골로 옮겨 보관하고 있고 현재 볼 수 았는 자리개 돌은 모조품이다.

 

시민기자들이 워크숍 첫발로 내딛은 해미읍성. 교황의 방문지이기도 했던 해미읍성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의 순교지를 돌아보고 있는 사람들. 옥사 안을 돌아보던 한 관람객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마디 한다.

 

 

이곳이 교황님이 다녀가신 곳이란다. 옛날에 이 성 안에서 많은 분들이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거든. 저 옥사에 칼을 쓰고 있는 사람들처럼 저렇게 고통을 받다가 죽은 것이지. 그런 많은 분들의 순교가 있어 우리가 편하게 종교의 자유를 갖는 것이란다.”

 

e수원뉴스 시민기자들이 23일의 워크숍 일정 중 가장 먼저 만난 해미읍성과 순교지. 그 안엔 '왜 교황이 굳이 이곳을 찾아왔을까'라는 해답이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99호 서산 김기현가옥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99호 김기현 가옥은 살아있는 집이다. 현지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서산버스터미널에서 해미행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중간 유계리 입구에서 하차 도보로 5분정도가 소요된다.

 

승용차로 찾아가려면 서해안고속도로 해미I.C 해미 유계리 입구 서산 김기현가옥을 이용하거나, 경부고속도로 천안I.C 아산 예산 덕산 해미 유계리입구 서산 김기현가옥으로 찾아갈 수가 있다.

 

 

전체적으로 자 형의 고택

 

서산 김기현가옥은 한다리라 부르는 평지 마을의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동향한 전통 목조 한와가로 건축의 기법과 목부재의 상태, 가옥의 배치 등으로 보아 19세기 중엽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원래 이집은 태안에 살던 이씨가 건립했는데, 풍수지리설에 이씨가 살터가 아니고 김씨가 살아야 할 터라고 하여, 경주김씨인 김기현의 선조가 이 가옥을 사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가옥은 자형의 안채와 자형의 사랑채가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자형의 평면을 이룬 가옥이다.

 

 

평야마을에 자리잡아 북동향하고 있는 기와집으로, 지은 연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건축양식으로 볼 때 19세기 중반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자형의 행랑채 안쪽으로 ''자형의 안채가 있고, 안채의 동쪽 옆에 사랑채가 ''자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행랑채는 7칸 규모로 왼쪽 끝에 바깥대문이 설치되어 있고, 부엌과 광,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향한 안채는 중문을 들어서서 안마당의 오른쪽에 있다. 이는 대부분의 중, 상류주택이 몸채를 안마당 건너편에 두는 것과는 달리, 한편에 안채를 두었다는 것이 이 집의 색다른 구조이다. 아마도 이는 일조를 고려한 것이 아닌가 생각든다.

 

 

차양지붕이 특징인 김기현 가옥

 

사랑채는 안채보다 간결한 구조를 한 3칸 집으로, 사랑채 남쪽에 단 차양지붕이 돋보인다. 차양지붕은 사랑채 1칸 앞에 팔모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의 맞배지붕을 얹은 것이다. 앞면에는 겹처마를, 뒷면에는 홑처마를 달아 앞쪽을 더 길게 처리하였다.

 

안채의 뒷뜰에는 3칸의 초가집이 있는데 일종의 공부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집으로, 공간의 짜임새가 빈틈없이 구성되었으며 호도나무나 감나무 등이 어우러져 소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김기현 가옥은 정말 사람이 살고 싶은 그런 집이었다. 보기만 해도 여기저기 소박함이 배어나오는 그런 집이었다.

 

 

전국의 많은 고택들을 돌아보았지만 서산 김기현 가옥만큼 정갈한 집은 그리 많지가 않았던 것 같다. 안채며 사랑채의 구성이나 행랑채의 소박함. 그리고 팔모기둥 위에 놓은 차양지붕 등. 올 가을에 단풍이 들 무렵 다시 한 번 찾아보고 싶은 곳이다.

남섬부주 고려국 서산 부석사 당주 관음주성결연문

 

무릇 모든 불, 보살님들은 큰 서원을 세워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하는데 비록 너나없이 평등하게 보고자 하지만, 부처님 말씀에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 없다고 하셨으나 이 말씀에 따라 함께 큰 서원을 세워 관음존상을 주조하여 부석사에 봉안하고 영원토록 봉안, 공양하고자 서원합니다. 이로써 현세에는 재앙을 소멸하고 복 받도록 할 것이며, 후세에는 모두 극락에 왕생하기를 서원합니다.

충숙왕 1712982월 일에 쓰다.

 

700년 전인 고려 충숙왕 때 서산 부석사에 금동관음보살좌상을 봉안하고 복장으로 보살좌상에 넣은 결연문이다. 이 금동보살좌상이 어쩌다가 일본으로 건너 간 것일까? 부석사의 당주라면 그 금동여래좌상이 크기가 작다고 해도, 본존불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관음보살좌상이 지난해 106 ~ 8일경에 일본 쓰시마 카이진신사와 관음사에서 도난당한 후, 국내에 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여래입상관음보살좌상2점이 전문 절도단에 의해 쓰시마에서 다시 국내로 들어왔다가, 123일 문화재청과 대전지방경찰청이 공조수사를 통해 회수하였다. 하지만 이 금동관음보살좌상 등을 쓰시마에서 한국으로 반입을 한 피의자들은 자신들은 절도범이 아닌 애국자라고 하면서,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것이 아니라, ‘국민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서산 부석사

 

서산 부석사(浮石寺). 우리는 흔히 부석사라고 하면 영주 부석사를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서산 부석사도 영주 부석사와 같이 한자로도 사찰명이 일치한다. 서산 부석사는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4년인 650년에 복흥사라는 절에 의상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의상은 큰 뜻을 품고 당으로 가서 지엄법사 밑에서 공부를 했다. 의상이 있던 지장사 아랫마을에는 젊고 예쁜 <선묘낭자>가 살고 있었는데, 이 낭자가 의상스님에게 반하고 만 것. 그래서 문무왕 1년인 661년에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려하자, 선묘낭자는 자신의 마음을 의상에게 밝혔다. 하지만 의상은 스님이기 때문에 허락을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의상이 배를 타고 떠나려하자 선묘낭자는 스님의 복색을 하고 의상을 따라가 평생 시종을 들 것이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그도 물리치자 선묘낭자는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 뒤 선묘낭자는 용이 되어 의상을 따라 해동 조선으로 나왔다고 한다. 의상은 자신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묘낭자를 위해, 절을 세워주기로 하고 절터를 찾던 중 서산 도비산 중턱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도비산 중턱에 절을 짓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이 심하게 반대를 했다. 마을 사람들이 반대를 하는 것도 무릅쓰고 절을 계속 짓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절에 불을 지르려고 하였다. 그 때 큰 바위 하나가 허공에 둥둥 떠 오더니 공중에서 큰 소리가 났다. “너희들이 절 짓는 것을 방해한다면 이 큰 바위로 너희들의 머리를 다 부수어놓겠다. 지금 당장 물러가라고 꾸짖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 달아나버렸다.

 

이렇게 허공에서 소리를 친 것은 바로 선묘낭자의 화신인 용이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이 절 이름은 도비산 부석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부석사 일원은 도비산 강무지

 

부석시 일원은 도비산의 강무지로 알려져 있다. 강무지란 임금이 직접 참여하여 군사훈련을 한 곳임을 말한다. 조선조 제3대 태종이 14162163남인 충령대군(후 세종)과 함께 군사 7,000명을 이끌고 이곳에서 사냥몰이를 하였다. 임금이 직접 참여한 이러한 군사훈련을 강무(講武)’라 칭한다.

 

훈련이 끝난 후 태종과 충령은 해미현에서 숙박을 한다. 원래 이 강무일정은 28일에 서산에 도착하였으나, 비가 내리는 바람에 210일까지 서산에서 머물고, 11일에 태안 순성에 이르러 15일까지 굴포의 개착상황과 여러 곳을 거쳐 도비산에서 강무를 연 것이다. 태종이 이곳을 강무지로 택한 곳은 도비산 일원에 왜구의 침입이 잦았기 때문이다.

 

 

기증이 아닌 약탈해 간 우리 문화재

 

금동관음보살좌상을 잃은 일본의 사찰에서는 이 불상을 부석사에서 기증을 받았다고 했단다. 그러나 이 기증이란 것은 허무맹랑한 소리이다. 왜구들이 약탈을 한 것이지, 어찌 기증이 될 것인가? 세상에 누가 자신들이 사찰에 모셔놓은 불상을 내어줄 것인가? 약탈해 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찾아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점의 문화재가 일본의 사찰에서 잃어버린 것이 밝혀진다면 돌려준다는 것이다. 문화재보호법 제20조 외국문화재의 보호 조항 때문이다.


 

문화재보호법 제20(외국문화재의 보호)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국가 간의 우의를 증진하기 위하여 대한민국이 가입한 문화재 보호에 관한 국제조약(이하 조약이라 한다)에 가입된 외국의 법령에 따라 문화재로 지정·보호되는 문화재(이하 외국문화재라 한다)는 조약과 이 법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보호되어야 한다.

문화재청장은 국내로 반입하려 하거나 이미 반입된 외국문화재가 해당 반출국으로부터 불법반출된 것으로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그 문화재를 유치할 수 있다.

문화재청장은 제2항에 따라 외국문화재를 유치하면 그 외국문화재를 박물관 등에 보관·관리하여야 한다.

문화재청장은 제3항에 따라 보관 중인 외국문화재가 그 반출국으로부터 적법하게 반출된 것임이 확인되면 지체 없이 이를 그 소유자나 점유자에게 반환하여야 한다. 그 외국문화재가 불법반출된 것임이 확인되었으나 해당 반출국이 그 문화재를 회수하려는 의사가 없는 것이 분명한 경우에도 또한 같다.

문화재청장은 외국문화재의 반출국으로부터 대한민국에 반입된 외국문화재가 자국에서 불법반출된 것임을 증명하고 조약에 따른 정당한 절차에 따라 그 반환을 요청하는 경우 또는 조약에 따른 반환 의무를 이행하는 경우에는 관계 기관의 협조를 받아 조약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해당 문화재가 반출국에 반환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외국의 문화재가 아니다. 우리 것을 약탈을 해 간 것이 왜 그 나라 것일까? 이 금동관음보살좌상 등 문화재들은 당연히 부석사에 봉안해야만 한다. 700년 만에 제 자리를 찾아 온 것이다. 자신들이 잃은 문화재 하나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다면, 어찌 고개를 들고 살 것인가? 1130일 찾은 서산 부석사가 달리 보이는 까닭은, 이곳이 선묘낭자의 전설이나 강무를 한 역사적인 곳이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개심사(開心寺). 말 그대로 ‘마음을 여는 절’이란 뜻이다. 이 절에 가면 절로 마음이 열릴까? 그렇다면 그 마음이 열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 앞에 머리를 조아려 108배를 하면 마음이 열릴까? 아니면 도력 높은 스님의 법문으로 인해, 꽁꽁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릴까? 참 알 수 없는 절 이름이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이 절에 들어서면서 만나는 전각들에게서, 그만 마음이 열리고 말았다. 괜히 넋 나간 인간처럼 비실거리고 웃다가 보니, 절로 마음이 열렸다. 충청남도에 있는 절집 중 4대 사찰의 하나로 백제시대에 혜감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개심사는, 처음에는 개원사였다고 한다.

 

백제 때의 기단이 남아 있어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11-5에 소재한 개심사는, 아직도 백제 때의 기단이 남아있는 절이다. 현대의 대웅전은 성종 6년인 1475년에 산불로 소실이 된 것을, 성종 15년인 1484년에 중건하였다. 1484년에 중건한 대웅전이 아직 보존이 되어있으니, 대웅전은 530년이라는 세월을 지키고 있는 전각이다.

 

대웅전의 기단은 백제 대 것이라고 

 

보물 제143호로 지정이 된 대웅전은 다포식과 주심포식을 절충한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개심사 경내에는 보물인 대웅전 외에도 보물 제1264호로 지정된 영산회 괘불탱, 충남 문화재자료 제194호인 명부전, 충남 문화재자료 제358호인 심검당 및 아미타본존불, 관경변상도, 칠성탱화, 오층석탑, 경전 목판 등의 자료가 있다.

 

여름에 처음으로 만난 개심사

 

개심사는 벌써 4~5 차례나 찾았던 절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았을 때는 모두 가을이었다. 굳이 가을을 고집했던 것은, 가을이 참 아름다우 절이기 때문이다. 7월 28일(일), 이번에 처음으로 한 여름에 개원사를 찾은 셈이다. 개원사는 아름다운 절이다. 전에는 계단과 흙길로 오르막이었으나, 이번에 찾아가니 계단을 말끔히 정리하여 사람들의 보행에 편하게 해 놓았다.

 

해탈문서 부터 기둥이 틀어졌다(위). 종각 역시 마찬가지

 

절집을 찾아갈 때 바쁠 이유가 없다. 삼사순례로 찾아간 개원사였지만, 일행의 뒤에 쳐져 혼자 길을 걷는다. 장맛비가 오락가락 하고는 있지만, 빗방울 몇 방울 더 맞으면 어떠하랴. 계단을 오르다가 보니, 저만큼 개심사가 보인다. 계단 끝에는 아름드리 고목과 연못이 있고, 연못가에 자란 배롱나무는 꽃이 지고 있다.

 

개심사 경내로 접어든다. 대웅전과 안양루가 남북으로 배치가 되어있고, 심검당과 무량수각이 동서로 나뉘어져 자리하고 있다. 무량수각 뒤로 돌면 명부전이 있고, 그곳을 지나 산길로 오르면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언제나 이 절을 찾아가면 그리 마음이 느긋해진다. 왜 그렇게 마음이 편해질까?

 

심검당이라고 무엇이 다를까? 자연은 개심사 곳곳에 있다 

 

스님, 치목이 안 되었나 봅니다.

 

상왕산 개심사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안양루 옆으로 작은 해탈문이 있다. 그 해탈문을 들어서다가 그만 웃고 만다. 괜한 생각이 들어서이다. 제 멋대로 구부러진 나무를 이용해 조성을 한 일각문. 스님이 치목을 하기 싫으셨을까? 아니면 그냥 제멋대로 갖다 맞추신 것일까? 일각문의 묘한 생김새가 사람을 즐겁게 한다.

 

안으로 들어가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다. 종각의 기둥들도 제멋대로다. 얼마나 자연스런 스님이 머물다 가셨기에, 자연 그대로를 이렇게 기둥으로 사용을 하셨을까? 심검당의 배흘림 기둥도 눈길을 끈다. 심검당 한 편으로 돌아가니 이 곳 기둥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면 그렇지,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생각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틀어짐의 압권인 전각(위) 과 명부전도 틀어지기는 마찬가지

 

무량수각 앞에서 대웅전을 향해 합장을 하고 난 뒤, 무량수각을 지나 명부전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예스런 전각 하나가 서있고 앞에는 사람들이 담소를 하고 있다. 이 전각의 기둥 역시 제멋대로이다. 개원사의 스님들은 나무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왜 치목을 하지 않으셨을까?

 

산신각에 무슨 까치살창이 있어?

 

명부전 앞을 지나치려는데, 삼사순례를 도는 일행들이 명부전에서 나온다. 잠시 안을 향해 합장을 한다. 명부전 기둥 역시 뒤틀려 있다. 산신각으로 오르는 길을 걷는다. 몇 해 전인가?, 가을에 이곳을 찾았을 때 단풍이 떨어져 만든 아름다운 관경이 눈에 선하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는데. 산신각 앞에도 무리가 지어 있다.

 

 

일행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돌아가려면, 어디를 들어가 제대로 108배 한 번 할 수가 없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모든 것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답사를 다닐 때마다, 혼자 호젓하게 길을 떠나는 이유도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그저 108배를 하던지, 아니면 피곤한 다리를 쉬던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아서이다.

 

비바람에 산신각의 기왓장이라도 날아갈까 봐 그랬는가? 끈으로 묶어 놓았다. 산신각 앞에 서서 합장을 하고 뒤돌아서려는데, 전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 보인다. ‘산신각에 무슨 까치살창이 있지’. 이런 것은 부엌이나 광에나 사용을 하는 것인데. 그러고 보니 개심사라는 이절, 하나도 정해진 틀이라는 것이 없다.

 


 2007년 11월 11일 단풍이들고 낙엽이 가득한 깊은 가을의 개심사 모습입니다


 

“스님,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하나같이 제멋대로입니까? 그래서 닫혔던 마음이 비틀어진 기둥사이에 난 틈으로 바람이 들어와, 빗장을 열어주었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이 절에서 스님 덕분에 마음을 열고 갑니다.”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닦고, 달을 보고 깨우쳤다고 하여서 ‘간월암’이라는 붙였다는 서산 간월도의 간월암. 무학스님은 20세 때 이곳이 들어와 토굴을 짓고 열심히 수도를 하다가 달을 보고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나옹스님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하여 법호를 무학(無學)이라고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 간월암이 처음부터 간월도나 간월암으로 불린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피안도 ‘피안사(被岸寺)’로 불리다가, 밀물 때가 되면 마치 섬이 연꽃과 비슷하다고 하여 ‘연화대’ 또는 낙가산 ‘원통대’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이렇게 부르던 것이 결국 고려 말에 이곳에서 수도를 하다가 깨우침을 얻은 무학대사로 인해 ‘간월암’이 되었다.

 

 

한 때 폐사가 되었던 간월암

 

세상은 참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다. 조선이 개국할 때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끔을 해몽하면서 이미 이성계가 태조가 될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성계에게 500일 기조를 시키고, 한양의 도읍터를 잡아주기도 했다. 더구나 한양터를 바을 때 그 문을 창여문이라 부르고 28칸을 지었으니, 조선이 28대로 마친다는 것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난 뒤, 간월암과 황도(태안) 등을 사폐지(절에 소유된 토지로 실질적인 절의 땅이다)로 주었다. 하지만 조선조 때 배불정책을 펴, 얼마나 많은 고초를 당했는가는 알고 있는 바이다. 조선의 개국을 도운 무학대사. 그리고 이성계에게서 두 곳의 섬을 사폐지로 받은 무학대사. 하지만 조선은 500년 동안 수없이 배불정책이 이어졌다.

 

 

결국 무학대사가 토글을 짓고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어 조선이라는 나라까지 개국이 되는 것을 도왔지만, 그 억불정책으로 인해, 간월암이 폐사가 되었다. 아마 조선의 왕이 28대를 전해 질 것을 알았다는 무학대사인데, 간월암이 훗날 당한 고초를 알지는 못했던 것일까? 그 후 1941년 만공선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공선사는 이곳에서 광복을 의해 천일기도를 드리고 해방이 되었다고 하니, 이 절에 기운이 남다른 모양이다.

 

삼사순례로 찾아간 간월암

 

삼사순례, 하루에 세 곳의 절을 돌아오는 불교의식이다. 7월 28일(일)아침 일찍 버스로 수원을 출발했다. 수원시 지동에 소재한 고려암의 신도들이 삼사순례를 떠난 것이다.  출발하기 전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막상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더 세차게 퍼붓는다. 오늘 들릴 세 곳의 절에 나름 문화재가 많이 있어 기대를 하고 떠난 길이다. 홍성 나들목으로 나서 천수만 방조제를 지나 간월암이 보이는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비가 오는데도 바닷바람이 조금은 세찬 듯하다. 모자가 바람에 날려 몇 번이고 날아간다. 그래도 간월암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려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간월암은 조수의 차에 의해 섬도 되었다가, 육지와 연결이 되기도 하는 절집이기 때문이다. 물을 빠진 길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바위에 붙은 것들을 열심히 줍고 있다.

 

간월암으로 들어가니 마침 사시예불 중이다. 작은 섬 위에 옹기종기 앉은 전각들이 정겨운 곳. 벌써 몇 번째 이곳을 찾았지만, 올 때마다 늘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주변에 부는 바람과, 일렁이는 물살 때문인 듯하다. 잠시 예를 마치고 주변을 돌아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닷가 쪽으로 지어진 작은 전각 앞에서 열심히 잘을 하고 있다.

 

무학대사의 신통력이 절을 지키는 것일까?

 

아마도 이 작은 전각이 바다 쪽으로 조성을 한 것을 보니, 용왕각인 모양이다. 열심히 절을 한 사람들이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마치 썰물처럼 간월암을 빠져나간다. 나오는 길에 절 입구에 사람들이 쌓아올린 돌탑을 보면서 잠시 고개를 숙인다. 이 돌탑을 정성으로 쌓은 사람들도 마음에 다 서원이 있었을 것. 나도 잠시 고개를 숙여 행로의 무사함을 빌어본다.

 

고려 말의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깨들음 을 얻었고, 그 이전에도 이미 피안사라는 절이 잇었다고 하면, 간월암의 역사는 500년이 훌쩍 지난 고찰이다. 하지만 옛 흔적이 보이지 않아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간월암이란 이름으로 또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절집이 있으니, 그도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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