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실홍실 엮어서 이 명당에 놀구나 가시오. 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 저승에서 이루소서”

구성진 가락이 울려퍼진다. 2012년 3월 13일(화) 오전 11시.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 381번지에 소재한 쌍룡사 굿당. 그 굿당 안 한 방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이다. 이 날 굿은 살아생전 결혼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뜬, 청춘남녀를 결혼을 시키는 ‘영혼결혼식’이다.

영혼결혼식이란 죽은 망자들끼리 결혼을 하는 것이다. 결혼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청춘남녀들은, 아무래도 부모나 가족들의 마음속에 깊은 한을 남기게 된다. 그런 남녀를 맺어주는 자리이니, 결혼이라고 해서 기쁘기보다는 오히려 더 깊은 슬픔이 배어있다.




주무 고성주가 큰머리를 얹고 굿을 하고 있다. 굿상을 마주하고 좌측에는 신랑이(2) 우측에는 신부가(3) 마주보고 있다. 옷가지와 패물까지 마련한다. 


“이승에서 못 이룬 사랑, 저승에서 이루소서”

이날 결혼을 하는 망자 신랑은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에 거주하는 평창최씨의 아들이고, 망자 신부는 충주지씨의 딸이다. 이들은 일찍 세상을 떠나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양쪽 집안의 굿을 주관한 당주는 이미선(여) 무녀이고, 굿에 동참한 주무와 무녀는 고성주(남)와 이정숙(여)이다. 그리고 굿청에 들어선 악사는 박노갑(피리, 태평소)이 맡아했다.

아침부터 굿상을 차린 일행은 인형으로 된 신랑과 신부를 모셔드렸다. 그리고 상 위에는 한복이며 패물들이 진열이 되고, 전통결혼식과 같은 준비를 했다.



당주 이미선의 대신거리와 여무 이정숙의 창부, 서낭이 이어졌다. 그리고 굿상 앞에는 초례청이 마련되었다.


“낮이면 물을 건너고 밤이면 용을 타고 정처 없이 가는 길이 저승의 신혼여행 길이라네. 부디 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 저승원문 들어가서 원도 없고 한도 없이, 부디부디 잘 사시오”

들으면 왈칵 눈물이라도 날 것만 같다. 남무 고성주의 앉은부정으로 시작한 굿은 상산으로 접어들었다. 큰머리를 머리에 이고, 그 위에 갓을 올린 고성주의 소리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는다. 벌써 이 길로 들어선지 40년 가까이 되었다. 어딜 가나 당대 최고의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통한다.

“마른나무에 물이 오르고, 산천에 싹이 돋고, 계절이 좋은 시절이라. 좋고 좋은 날 가려내어 선남선녀 신방꾸미고, 저승원문 함께 들어가 만년천년 해후 하시라고..”




전안례가 시작이 되었다. 먼저 신랑측에서 기러기를 신부측에 전달하고, 신랑신부가 초례청으로 입장을 했다(2) 합근례(3)를 마친 신랑과 신부는 미리 마련한 신방으로 들었다


보기 힘든 영혼결혼식, 끝까지 지켜봐

영혼결혼식은 정말 보기가 힘든 굿이다. 자주 있지도 않지만, 제가집(망자의 가족)이나 당주(굿을 맡은 무녀)들도 별로 반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좋게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가 있었다. 30여년 굿판을 누비면서도 영혼결혼식은 3~4번 정도 밖에는 볼 수가 없었으니, 그 귀함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청춘남녀가 죽었다고 해서 모두가 다 영혼결혼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망자들도 모두 택일을 하고 사주를 다 본다. 수십 쌍을 사주를 보아도 이루어지는 것은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그만큼 더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 영혼결혼식이다. 영혼결혼식은 일반 굿과는 다르다. 먼저 안굿을 하고 난 다음, 굿상 앞에 초례청을 차린다. 신랑과 신부는 전통혼례와 같은 방법으로 혼인식을 마치고 나면, 신방을 꾸미게 된다.

이 신방을 꾸미고 나면 바로 지노귀굿을 하게 된다. 망자의 천도굿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날 굿은 고성주의 상산다음에 당주인 이미선의 대신거리와 이정숙의 창부, 서낭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난 다음 초례청을 차리고, 전안례부터 시작이 되었다. 신랑이 신부에게 기러기를 전하고 난 뒤, 초례청으로 신랑과 신부가 입장을 했다.


말미에서 바리공주를 하는 고성주.


초례청에 마주한 신랑신부는 서로 맞절을 하는 교배례를 하고, 술잔을 서로 나누는 합근례를 하게 된다. 서로가 세 번을 술을 나누어 마시는 합근례를 하고 난 다음에는, 신랑신부는 미리 준비해 놓은 옆방에 신방을 차렸다. 작은 이부자리가 깔려있고 두 망자를 상징하는 인형을 누인 후 불을 껐다.

진한슬픔을 목으로 넘겨

가족들이야 이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갈래갈래 찢어질까? 아마 그 깊은 슬픔은 어느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굿을 주관하는 무녀들은 연신 듣기 좋은 말을 한다. 그것이 바로 굿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를 얻게되는 것이다.



말미에 이어 망자상을 돌면서 도령을 돈다. 그 뒤를 당주 이미선이 신랑신부를 안고 뒤따른다. 밖으로 나와 저승길을 잘 갈 수있도록 길을 가르고 있다(아래)


지노귀굿은 말미라고도 한다. 바리공주부터 시작해, 망자의 상인 말미상을 놓고 고성주가 춤을 추면서 돌영을 돈다. 그 뒤로 망자의 옷과 신방에서 나온 두 신랑신부를 안고 있는 당주 이미선이 뒤따른다. 그렇게 돌영이 끝나고 나면, 바로 밖으로 나가 길을 가른다. 저승길은 험하고 또 험하다고 한다. 그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길을 닦는 것이다.

길가르기가 끝나고 나면 가시문 넘기기를 한다. 저승길은 가시밭이 있다고 한다. 그 가시밭에 걸리지 않고 저승원문에 들어갈 수 있기를 축원하는 것이다. 8시간에 걸친 영혼결혼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끝으로 뒷전을 하면서도 두 사람의 영혼이 저승에 들어가 백년해로를 할 수 있도록 축원을 한다.



길을 가르고 난 뒤에는 가시문을 넘긴다. 저승원문을 들어가는 길은 가시가 많다고 한다. 가시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의식이다. 끝으로 상식을 올린다. 상례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족들이 망자를 위해 올리는 상식이다


“그저 저승원문에 들어가 백년해로를 하실 적에, 두 사람 모두 인도환생 하시어서 이승에서 다시 만나 못다 한 사랑 이루시고....”

여막(廬幕)’이란 오두막집을 말한다. 사람이 기거하기 위해 짓는 정상적인 집이 아니라, 임시로 필요에 의해 일정기간 사용을 하는 움막이다. 그런데 이 여막은 일반적인 움막과는 다르다. 바로 선조의 묘 옆에 짓는 집이기 때문이다. 여막에서 생활을 하는 것을 우리는 ‘시묘살이’리고 부른다.

‘시묘(侍墓)’란 말 그대로 묘를 섬긴다는 뜻이다. 즉 성분을 하고 난 후 그 서편에 여막이라는 초막을 짓고 3년을 평소처럼 부모님을 모신다는 뜻이다. 시묘는 효의 근본이며, 가장 힘든 상례 중의 하나이다. 하기에 시묘를 마친 자손을 사람들은 극진히 대우를 하기도 했다.


2대에 걸친 시묘를 한 조씨일가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 소재한 문의문화재단지. 단지 안에는 묘와 함께 여막 한 채가 지어져 있다. 이 여막은 묘소 또는 혼백이나 신주를 모신 ‘궤연’ 가까이에 지어놓고, 탈상을 할 때까지 3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묘를 보살피는 것이다.

이 여막은 청원군 강내면 연정리에 한양 조씨 문중의 조육형과, 2000년 4월 작고한 부친 조병천이 대를 이어 시묘를 하였던 곳이다. 이 여막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고 있어, 효의 근본으로 삼고자 현지에 잇던 여막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현을 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특히 부친 조병천은 1957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3년간이나 시묘를 하였다. 그것도 하루도 빠짐없이 생식을 하면서 견디었다는 것이다. 선친묘소에 공장이 들어서자 이장을 하고 난 후, 또 다시 여막을 짓고 3년간을 다시 시묘를 했다고 한다.

효의 근본이 되는 여막

여막은 돌과 흙, 그리고 짚을 이용해 지었다. 3년이라는 시간을 눈비를 피할 수 있고, 겨울 추위를 막기 위해 돌을 쌓아 단단하게 지은 움막이다. 한편에는 불을 땔 수 있도록 하였으며, 안에는 만장과 상복 등이 걸려있다. 안은 제상 위에 음식들이 차려져 있고, 하루에 세 차례씩 제상을 차리고 상식을 올린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3년이라는 세월을 묘를 지키며, 생활을 일체 접어야 한다는 시묘살이. 요즈음에도 시묘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여 방송 등에 소개를 한 적도 있다. 효의 가장 근본이 된다고 하는 여막과 시묘.

아마도 ‘시묘’라는 말도 어찌 보면 ‘시집’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시집살이’라고 하는 것도 ‘시묘살이’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도합 9년을 보내야 시집살이에서 조금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말의 뜻처럼, 시묘살이도 그와 같은 힘든 나날은 아니었을까?


요즈음 패악으로 치닫고 있는 세상을 보면서, 여막과 시묘살이라는 것이 새삼 얼마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문의문화재단지 안에 소재하고 있는 여막. 물론 재현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 안에 녹아있는 우리의 부모에 대한 효에 대한 깊은 뜻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다시 한 번 깊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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