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군은 군청이 소재한 읍명이 ‘가야읍’이다. 그리고 함안면이란 곳이 따로 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군명을, 행정의 중심인 곳을 읍명으로 사용하지 않는 곳은 함안군뿐인 듯하다.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에는 ‘큰절마을[大寺谷]’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이곳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고목 곁에 석불이 서 있다.

보물 제71호인 함안 대산리 석불. 양편에는 온전하게 보존이 된 협시불 입상 2기가 서 있고, 조금 뒤편으로 물러 선 중앙에는 목도 잘리고 깨어져, 훼손이 심한 석조 좌불이 한기가 있다. 이 양편에 선 입상이 협시불이고, 좌불이 본존불인 듯하다. 이 3구의 석불을 합해 보물로 지정을 하였다.


생김새가 같은 협시불

양편에 서 있는 협시불은 손 모양만 다르다. 두 기의 석불입상은 모두 머리에 관을 쓰고 있다. 일반적인 불상에서 보이는 관이 아닌, 마치 두건 같은 것을 머리에 쓰고 있다. 조금 길쭉한 얼굴에는 눈, 코, 입 등이 평면으로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눈은 훼손이 심해 알아보기가 힘들다.

법의는 일반적으로 석불에서 나타나는 법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마치 우리 고유의 한복을 보는 듯하다. 왼쪽 어깨에는 매듭으로 묶은 것처럼 자세히 표현을 하였으며, 가슴 밑으로는 매듭을 지었다. 치마는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타원형의 주름이 양편으로 드리워져 있다. 법의의 표현이 조금은 무겁게 보인다.




두기의 협시보살은 손의 형태가 다르다. 석불입상을 바라보면서 좌측의 보살은 오른손을 가슴께로 끌어올리고, 왼손은 배에 대고 있다. 우측의 보살의 좌측 손은 아래로 내렸는데, 손에 병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약사여래불인 듯하다. 이 협시보살은 어깨의 매듭과 무릎 아래로 늘어진 타원형의 옷 주름이 특징적이다.

발은 대좌에 새겨져 있어

이 두기의 협시불은 연꽃 대좌 위에 서 있다. 그런데 발이 석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밑에 있는 대좌에 조각을 해 연결을 하였다. 대좌는 연꽃을 두텁게 새긴 상대와, 8각의 면에 앙련을 새기고 안상을 새겨 넣은 하대로 구분이 된다. 그리고 윗면에는 석불입상의 발을 새겨 넣어, 석불을 올려놓은 것이다.




이런 형태는 통일신라 초기 석불의 형태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의 석불입상으로 추정하는 이 두 기의 협시불은, 지방의 특성화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경남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석불입상의 형태는 거의가 이렇게 흡사한 모습으로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아보기 힘든 본존불

뒤편에 앉아있는 석조불상은 목이 없다. 광배가 남아있는 이 좌불은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있다. 남은 부분은 훼손이 심해 알아보기가 힘들다. 광배의 형태나 석질로 보아, 고려 때의 석불로 추정이 된다. 그리고 한 옆에도 목이 없는 석불과 석조물들이 몇 점 보인다. 이 대산리 석불은 마을에서 섬기고 있다고 한다.




2월 20일 찾아간 대산리. 마을 안쪽 동구나무 곁에 서 있는 이 석불들은 언제부터 이곳에 서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 형태로 보아 이곳 어딘가에 절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마을 이름도 ‘큰절마을’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일대에 상당히 큰 절이 있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절 경내에 있었을 석불들. 그저 지금의 형태로나마 남아있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나마 양편의 협시불이라도 온전한 모습이기에.

다방리, 마을 입구를 들어서면서 마을 이름을 보고 한참이나 웃었다. 다방리라니, 참 별 마을이 다 있다는 생각에서다.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다방리, 운주산에 소재한 신라 때의 절인 비암사. 비암사는 공주 마곡사의 말사로 창건연대는 확실치가 않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비암사는, 극락전 앞의 3층 석탑에서 소중한 문화재가 3점이 발견이 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이 3층 석탑에서 나온 문화재는 국보 제106호인 비암사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비상과 보물 제367호인 비암사기축명아미타불삼존비상, 그리고 보물 제368호인 비암사석조비상반가사유상이다. 이 중 보물 제368호는 통일신라로 이어진 반가사유상의 조성과 미륵신앙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곳 충남과 전북일대는 미륵신앙과 관련되는 문화재가 유난히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야기꺼리가 많은 절 비암사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전각을 벌려놓은 비암사. 돌계단을 오르다가 보면 우측으로 수령 840년이 지난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느티나무의 수령이 800년이 지났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높이 15m, 나무의 둘레가 7.5m나 되는 이 나무는, 흉년이 들면 잎이 밑에서부터 피어 위로 올라가고, 풍년이 들 해는 위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온다고 한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의 풍년과 흉년을 알려주는 나무로 유명하다.

수령 840년인 보호수 비암사 느티나무

느티나무 계단을 오르면 바로 앞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충남 유형문화재 제11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3층 석탑은 화강암으로 조성이 되었으며, 고려 때 제작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는 이 석탑은 기단부가 없어진 것을, 1982년에 보완하여 현재의 자리에 세웠다. 이 3층 석탑에서 위에 열거한 문화재 3점이 발견되었다.


상륜부에서 국보와 보물 등이 발견 된 비암사 3층 석탑

3층 석탑 뒤편으로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79호인 극락보전이 자리하고 있다. 극락보전은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았다. 기둥은 배흘림이 뚜렷한 원형기둥을 사용했는데, 밑 부분을 보면 오랜 세월 보수를 한 흔적이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인 극락보전은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아미타좌상을 주불로 모신 극락보전과 소조아미타좌상

극락보전에 주불로 모신 아미타불은 영원한 수명과 무한한 광명을 보장해 준다는 부처님으로 서방극락의 아름다운 정토세계로 인도한다고 한다. 극락보전에 모셔진 아미타좌상은 소조로 제작이 되었으며,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18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아미타불좌상은 전체 높이가 196cm로 좌상으로는 큰 편이다. 이 아미타불의 특징은 결가부좌를 한 무릎의 높이가 유난히 높다는데 있다.



이어붙인 기둥이 역사를 말하고 있다. 대웅전 현판 양옆에는 멋진 용이 조각되어 있다

이 외에도 비암사에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182호인 영산회괘불탱화가 있다. 이렇게 소중한 문화재와 800년이 넘는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있는 비암사. 가파른 비탈 위에 세워진 산신각으로 올라보니, 사람들이 정성들여 작은 돌을 쌓아올려 놓았다. 절집을 찾아 간절히 기원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간구하는 것일까? 아마 이렇게 오래된 고찰에서 수많은 시간을 빌고 간 사람들의 기운이 정성을 들어주는 것은 아닐까?



산신각에서 내려다보는 비암사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저 멀리 떠가는 한 점 흰 구름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혹 아미타불이 계시다는 극락정토를 가는 것은 아닌지. 그 구름을 따라 길을 나서고 싶다. 복잡하고 늘 머리가 아파야하는 이러한 세상을 왜 '고해'라고 했는지 이해가 간다. 살아가는 나날이 고통속에서 살고 있다는 인간들이다. 작은 고통 하나 없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저 가을 하늘처럼 저렇게 파아란 물살을 헤치고 고해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무엇이던가? 비암사 산신각 앞에서 내려다 본 절집의 지붕들이, 뒤집기만 한다면 고해를 벗어날 수 있는 곳을 찾아갈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비암사를 찾는 것이나 아닌지. 

절은 왜 그토록 산을 올라 지어야할까? 높은 산에 있는 절을 찾아 산으로 오르면서, 늘 의문을 갖는다. 딱히 그 해답을 찾기는 어렵지만, 아마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수도에 전념하고자 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천안시 안서동에 자리한 성불사. 고려 초기에 도선국사에 의해서 세워진 절이라고 한다.

성불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왕위에 올라 도선국사에게 명하여 전국에 사찰을 세우도록 했는데, 그 때 지어진 절이라고 한다. 이 때 도선국사가 이 자리에 와보니 백학 세 마리가 어디선가 날아와, 바위를 쪼아 불상을 제작하고 있다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미처 불상을 완성하지 못한 채 날아가 버렸다고 하여 ‘성불사(成不寺)’라 했다가, 후에 몇 번 중수를 거치면서 ‘성불사(成佛寺)’가 되었다는 것이다.

전설 속의 성불사 마애불상군. 세 마리의 백학이 만들다가 날아가 버려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작은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상군

산비탈에 절을 조성한 성불사. 차로 오르면 그리 어려운 길은 아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대웅전을 찾아 오르다가 보면, 돌을 이용해 축대를 쌓은 것이 마치 계단처럼 보인다. 높게 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전각을 마련하였다. 산비탈을 이용해 터를 잡은 성불사는 여느 절집들처럼 웅장하지가 않다. 그저 작은 전각들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대웅전을 바라보니 삼존불을 모셨는데, 중간에 부처님이 보이지를 않는다. 법당 안에서는 신도들이 무슨 큰 잔치라도 있는지, 기물을 닦느라 부산하다. 들어가 볼 수도 없어 밖에서 보니, 대웅전 뒷면이 유리벽으로 되어있다. 뒤로 돌아가 본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인 대웅전 뒤에는 편편한 바위가 있다.



산 비탈에 축대를 쌓고 전각을 마련한 성불사(위) 대웅전(가운데) 가운데 석가모니불의 자리가 비어있다(아래)

그런데 그 바위에는 무엇인가가 가득 새겨져 있다. 완성되지 못한 채 있는 마애불상군. 아마 도선국사가 이곳을 찾았을 때, 세 마리의 백학이 바위를 쪼아 만들던 그 마애불상인가 보다. 바위 양편을 갈라 대웅전 뒤편에는 불입상을 도드라지게 새겼고, 그 옆으로는 삼존불과 16나한상을 새겨 넣었다.

전설로 전해지는 내용 그대로인 마애불상군

세 마리의 백학이 절벽을 쪼아 불상을 제작했다는 성불사. 대웅전 뒤편으로 돌아가 보니 정밀로 놀랍다. 그냥 전해지던 전설이 아니었을까? 대웅전 뒤편 바위면에는 겨우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불입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그러나 그 형태가 불입상인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아마 부리로 쪼아 이 불상을 만들다가 그냥 놓아둔 채 날아가 버린 듯하다.



대웅전 뒤편에 있는 바위에 조각이 되어있는 마애불상군 

그 옆의 우측 절단면에는 삼존불을 비롯한 16 나한상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을 중심으로 16나한상이 이렇게 새겨진 것은 매우 드문 예이다. 현재 충남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마애불상군은 전설 그대로이다. 채 완성을 하지 못한 마애불상군. 그리고 돌출이 되어있는 불입상의 형태 등이 그렇다.

삼존불은 연화대에 좌정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와 좌우에 협시보살 입상이 새겨 넣었다. 남아있는 흔적을 보면 연화대와 좌정을 한 석가모니불은 그 윤곽이 뚜렷하다. 그리고 좌우에 협시보살과 16나한상은 아직은 완성을 하지 못한 채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바위 면을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어 자세한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16나한상은 각각 그 자세가 다르게 표현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미완성인 불입상(위)과 그 옆 바위면에 마련한 삼존불과 16나한상(가운데, 아래)

수도를 하는 모습, 서로 마주보고 있는 듯한 모습 등. 다양한 형태로 구성을 한 16나한상은 바위 면을 파내고 부조를 하였는데, 마치 감실에 있는 듯한 형태로 꾸며놓았다. 자연스럽게 조성한 삼존불과 16나한상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마애불상군의 형태이다. 이 마애불상군은 14세기 불화에서 보여주는 도상이 남아있고, 도식화가 덜 된 점 등을 보아 14~15세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옛 전설 속에 전하는 그대로 남아있는 성불사 마애불상군. 그래서 산을 오르면서도 힘이 들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소중한 문화재를 만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성불사 대웅전 앞에서 내려다보이는 천안시가지. 비가 오는데도 찾아올라간 성불사에서, 옛 스님들이 산 위에 절을 지은 까닭을 조금은 알 듯도 하다.

비를 맞으면 찾아 올라간 성불사에서 내려다 본 천안시가지.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모악산 중턱에 소재한 대원사는, 백제 의자왕 20년인 660년에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대원사 대웅전에는 전북 유형문화재 제215호로 지정된 대웅전 삼존불이 있다.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비롯하여 왼쪽에는 아미타부처님, 그리고 오른쪽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이 자리한다. 목조로 조성된 이 삼존불은 조선후기의 불상 양식을 따른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삼존불은 1670년에 조성된 것으로, 회감 보혜스님 계보의 맥을 잇고 있는 스님들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 약사여래부처님은 중생의 병을 치료해주고, 생명을 연장해주는 의왕부처님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안락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모악산 대원사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 좌측부터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이다 

약사여래부처님 손은 약손

어제(9, 17) 오후 모악산 산사에 볼일이 있어 산을 올랐다. 잠시 밖을 나가기만 해도 카메라 하나는 꼭 지참을 한다. 지난 번 산에 오르다가 렌즈를 박살내고 나서, 가급적이면 산에 오를 때는 작은 동영상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를 지참한다.

산을 올라 산사에 도착을 했는데, 대웅전 지붕 위에 벌떼가 까맣게 날고 있다. 무슨 일일까? 올 해는 한봉을 치는 분들이 모두 망했다는 소리를 한다. 날이 너무 뜨거워 벌들이 다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절집에도 10여개의 벌통이 있었는데, 모두 다 비인 상태였다. 그런 차에 저렇게 벌이 날아왔으니 반갑기도 하다.

약사여래불 오른손 목안으로 벌떼들이 까맣게 드나들고 있다.

그런데 그 벌들이 연신 대웅전 안으로 날아 들어간다. 궁금하여 따라 들어갔더니, 이게 무슨 일일까? 세분의 부처님 중 오른쪽에 좌정한 약사여래 좌상의 오른편 손의, 손 목안으로 벌들이 들락거린다. 그 안에 새롭게 집을 지은 것인가 보다. 이런 일이 있을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얼른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몇 놈이 공격을 한다.

벌침은 약이라는데, 따갑기는 해도 동영상으로 촬영을 하였다. 예전 어릴 때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가 손으로 배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엄마 손은 약손, ○○배는 똥배’라고 하시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하면 희한하게도 살살 아프던 배가 가시고는 했다. 약사여래 부처님 손 목안으로 들어가는 벌들을 보면서 그 생각이 난다.



저 벌들도 올해 무더위에 많이 아팠던 것일까? 그래서 약사여래부처님 손 안으로 들어가 치료를 받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괜한 생각을 하면서 키득거리고 웃고 있는데, 갑자기 뒷덜미가 따끔하다. 헛된 망상 버리고 정신 차리라고 벌이 한 대 쏘았나보다. 이래저래 약사부처님한테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만 같다.

답사를 하다가보면 아주 가끔이지만, 주변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헤매는 수도 있다. 만일 그 문화재가 있는 곳이 산속 같다면, 이렇게 헤매다가는 날이 저물기 일쑤다. 그래서 답사를 나갈 때는 늘 비상용 손전등을 지참을 해야만 한다. 이번 원주 지역 답사는 비가 온 뒷날이라 힘도 들었지만, 보이지 않는 마애삼존불을 찾아 인근을 이 잡듯 뒤져야만 했다.

원주시 소초면 수암리에는 고려 전기에 조형된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길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만날 수가 있다. 큰 길에서 마애불을 찾아 걷는, 비가 온 뒤의 시골길은 기분이 좋다. 물기가 축축하게 젖은 풀들이 가끔 발길을 붙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한 땀을 흘리지 않아도 좋기 때문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8호 마애삼존불이 선각되어 있는 바위(우측)

갑자기 사라진 이정표

큰길가에 세워진 이정표에는 마애불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알려준다. 몇 km 쯤이야 답사를 나가면 늘 걷는 길이다. 천천히 걸어가다가 보니 마을이 끝나는 곳에 이정표가 서 있다. ‘수암리 마애삼존불상’이라는. 가슴이 뛴다. 답사를 하면서 늘 새로운 문화재를 만날 때는 이렇게 가슴이 벅차다. 수암리 마애삼존불은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길을 꺾어들어 작은 도로를 따라간다. 저수지가 보인다. 그런데 양 갈림길인 이곳에는 정작 이정표가 없다. 할 수 없이 앞으로 향하는데 길이 막혀있다. 원주시청에 전화를 걸어 길을 물어보고 다시 주변을 살핀다. 여기저기 한참 찾다가보니, 저 건너편 길 끝에 이정표가 보인다.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었다.


걷고 또 걸아야 하는 답사길. 과수원 길을 지나(위) 발이 빠지는 논둑길을 걸어 찾아갔다(아래)

젖은 길에 빠지며 찾아간 마애불


저수지를 끼고 논길을 따라 걷다가 보니 과수원이 나온다. 올해는 잦은 비로 과수농가가 피해를 많이 당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그래도 열매가 실하게 달려있는 것 같다. 이정표에는 마애불이 100m 전방에 있다고 표시를 하였다. 그런데 마땅한 길이 없다. 할 수 없이 논둑 길을 올라서니 젖은 논둑은 발이 푹푹 빠진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빠지는 발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마애불 안내판이 서 있는 곳까지 들어갔다. 근처에는 큰 돌이 없는데, 이곳만 큰 바위가 모여 있다.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마애불이 눈에 뜨이지가 않는다. 한참을 주변을 돌다가 보니, 위쪽에 있는 바위에 선으로 죽죽 그은 것 같은 선각한 마애불이 보인다. 그저 얼핏 보아서는 누군가 바위에 날카로운 것으로 낙서를 한 것처럼 보인다.



마애불이 선각되어 있는 바위군과(위) 흐려서 찾기조차 힘든 마애불(가운데) 확대된 사진(아래)

형태를 알아볼 수조차 없는 마애삼존불

이 마애삼존불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는 좌불상을 선각하고, 양편으로 보살상을 새겨 넣었다. 입상으로 처리된 불상의 좌측보살상은 알아보기도 힘들다. 아예 있었다는 자취를 찾기도 힘이 들 지경이다. 연화대 위에 좌정을 한 부처는 얼굴은 마모가 되었다. 아래쪽에 대좌를 그리고 그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았는데, 손은 가슴께로 끌어 올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왼손은 아래로 오른손은 약간 위로 한 것으로 보아, 지권인을 하고 있다. 이러한 수인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의 형태이다.

불상의 우측에 서 있는 보살상도 얼굴의 형체는 알아보기가 힘들다. 굳이 이 마애불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강원도 지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삼존불이 선각으로 조성이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심하게 마모가 되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법의를 나타낸 선이 유려하고,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아 뛰어난 마애불임을 알 수 있다.


중앙의 불상은 연화대 위에 앉아있고(위) 양편에는 보살입상이 선각되어 있다(아래)

걷고 또 걷고 한참을 헤매고 난 뒤에도, 발목까지 빠지는 길을 걸아 찾아간 마애삼존불. 비록 그 정확한 모습은 찾지 못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하나의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뛴다. 그런 가슴 벅찬 느낌이 좋아 답사를 계속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바위군에는 풍화작용으로 인한 바위와(위) 마애불을 새겨 넣을만한 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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