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양에 있는 <오색한과>를 찾았다. 한과의 전통적인 맛을 찾아보기 위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과자를 과정류라고 하여 외래 과자와 구별했다. 유밀과와 다식, 정과, 과편, 숙실과, 엿강정 등을 통틀어 한과류라고 한다. 과정류란 곡물에 꿀을 섞어서 만드는 것으로 과란 말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수로왕조 제수로서 과라는 것이 나온다.

 

제수로 쓰는 과는 본래 자연의 과일인데, 과일이 없는 계절에는 곡분으로 과일의 형태를 만들고, 여기에 과수의 가지를 꽂아서 제수로 삼았다고 한다. 과정류는 농경문화의 진정에 따른 곡물 산출의 증과와, 숭불사조에서 오는 육식의 기피사조를 배경으로 신라, 고려시대에 특히 고도로 개발된 제례, 혼례, 연회 등에 필수적으로 오르는 음식이다.

 

 

삼국시대부터 기름과 꿀을 사용

 

과정을 만들 때는 삼국시대부터 기름과 꿀을 사용했으나, 이 재료들을 응용하여 과정류가 만들어진 것은, 삼국 통일시대 이후로 보인다. 과정류가 차에 곁들이는 음식으로 만들어지고 음다풍속이 성행된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불교가 융성했기 때문이다.

 

숭불사조가 고조되었던 통일신라에서 음다풍속과 육식 절제풍습이 존중됨에 따라 채식 음식과 곡류를 재료로 한 과정류가 발달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다. , 신문왕 3(683) 왕비를 맞이할 때 납폐품목으로 쌀, , , , 기름, 메주 등이 있었는데 과정류에 필요한 재료가 있었으므로 과정류를 만들었다고 추정할 수 있으나 문헌의 기록은 고려시대부터이다.

 

 

유밀과 대신 나무열매를 사용하기도

 

고려사형법금려에 의하면 명종 22(1192)에는 유밀과의 사용을 금지하고 유밀과 대신에 나무열매를 쓰라고 하였다. 공민왕 2(1353)에는 유밀과의 사용금지령까지 내렸다고 한다.

 

고려시대 또한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살생을 금했던 만큼, 육식이 절제됨에 따라 차를 마시는 풍속과 함께 과정류가 한층 더 서행하게 되었다. 과정류 중에서 특히 유밀과가 발달되어, 불교행사인 연등회, 팔관회 등 크고 작은 행사에 반드시 고임상으로 쌓아 올려졌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과정류는 임금이 받는 어상을 비롯하여, 한 개인의 통과의례를 위한 상차림에 대표하는 음식으로 등장하게 된다. 한편 과정류 중 강정은 민가에서도 유행하여 주로 정월 초하룻날 많이 해 먹었는데, 민가에서는 강정을 튀길 때 떡이 부풀어 오르는 높이에 따라 설 승부를 가르는 놀이까지 있었다고 한다.

 

요즈음은 양과에 밀려 우리 한과산업이 많이 쇠퇴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양양, 충주 등 일주지역에서는 꾸준히 우리 한과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입맛이 변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전통을 어찌 소홀히 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 기회에 우리 전통음식을 한번 쯤 더 맛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단 두, 세줄의 색색의 끈만 있다면 아름다운 매듭으로 거듭난다. 우리나라는 매듭에 관한 많은 작품들이 있다. 하기에 매듭장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을 하고 있을 정도이다. 매듭장이란 끈목(=多繒)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종류의 매듭을 짓고, 술을 만드는 기술 또는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끈목은 여러 가닥의 실을 합해서 3가닥 이상의 끈을 짜는 것을 말하는데, 그 종류에는 둘레가 둥근 끈으로 노리개나 주머니끈에 주로 쓰이는 동다회와, 넓고 납작한 끈으로 허리띠에 자주 사용되는 광다회가 있다. 복식이나 의식도구 장식으로 사용되는 매듭은 격답, 혹은 결자라고 한다.

 

 

원시시대부터 전해진 매듭

 

매듭의 기원은 원시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 전승되어 오는 장식과 실용으로 삼았던 고유의 매듭 기법이나 염색법은 삼국시대에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 소속된 매듭장이 있었을 정도였다. 매듭의 재료로는 명주실, 모시실, 닥나무실, 삼베실, 털실 등이 쓰인다. 끈의 색감, 굵기, 맺는 방법에 따라 형태가 다양하며 지방에 따라 그 이름도 다르다.

 

매듭의 이름은 생쪽, 나비, 잠자리, 국화 등 우리가 쉽게 보고 사용하는 온갖 물건과 꽃, 곤충에서 따왔다. 끈이나 매듭의 하단에 다는 것을 술이라 하는데 각종 악기, 교통용구, 불교 도구 등의 장식에도 사용하였다. 술 또한 쓰임새에 따라 딸기술, 봉술, 호패술, 선추 등 다양하다. 같은 종류일지라도 궁중과 지방에 따라 그 품격이 달랐다.

 

요즈음은 매듭이 실용에서 많이 사용한다. 가방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주변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많은 양의 형태로 매듭을 사용한다. 매듭과 규방공예를 운영하고 있는 매듭공예사 이미영(, 50, 정자동 거주)씨를 만나보았다.

 

 

고등학생 때 매듭에 빠져

 

이미영씨는 고등학생 때 우연히 동네 수예점에서 매듭과 인연을 맺은 후 30년 이상을 매듭과 함께 살아왔다고 한다. 어릴 때는 그저 취미생활로 시작하였으나, 그 아름다움에 빠져 6년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공예기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는 원래 한국사를 지도했어요. 화성박물관 전시 해설사로 봉사도 했고요. 그런데 아이들의 체험실에서 봉사를 하다보니 무엇인가 아이들과 함께 할 것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간단한 것을 만들다가 보니, 아이들이 집중력도 생기고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아이들에게 매듭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동안 화성박물관 평생학습축제 등에서 체험교실을 운영했다. 아이들에게 예절교육을 가르치다가도 매듭을 함게 만들어보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매듭은 두 줄의 색끈을 갖고 다양한 것들을 표현할 수 있어 아이들도 좋아하더라는 것.

 

매듭은 단 두 줄의 끈을 갖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죠. 매듭은 앞뒤는 똑 같고 상하좌우는 대칭이 됩니다. 두 줄 끈을 갖고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작품 등 다양한 것들을 만들 수가 있죠.”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매듭공예

 

매듭의 쓰임새는 다양하다. 실생활에서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요즈음의 추세라고 한다. 벽걸이는 물론이려니와 가방, 벨트, 귀걸이, 목걸이, 심지어는 핸드백 등 모든 것에 매듭을 인용할 수가 있다고 한다.

 

요즈음의 매듭은 실생활에 이용을 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만들어요. 심지어는 벽걸이만이 아니라 팔찌, 휴지걸이, 노리개 등 무한한 상품이 가능해 실생활에 인용을 할 수 있죠. 저는 주로 주부들에게 강의를 하는데, 주부들의 경제력이나 시간을 감안해 강의를 들으로 오실 때 강의료와 재료비를 그때마다 받고 있어요.”

 

이야기를 하면서도 연신 손놀림을 계속하고 있는 매듭공예사 이미영씨, 8월 정도에는 작은 개인전을 열고 싶다고 조심스레 욕심을 낸다. 화성박물관과 화서동 청소년문화원, 정자3동 청솔마을 공예교실 등에서 강좌를 개설하고 있는 매듭공예사 이미영씨. 8월 전시장에거 만날 작품들을 미리 기대해 본다.

전북 장수군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만난 거대석불입상. 장수군 산서면 마하리 477번지 원흥사 미륵보전 안에 모셔진, 전북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된 원흥 석불입상이다. 이 석불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나, 그 형태로 보아서는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입상에 속하는 것 같다.

 

원흥 석불입상은 현재 이곳에 있는 원흥사 미륵보전 안에 소재하고 있는데, 그 전체 높이가 4m나 되는 거대석불이다. 이 석불은 문화재청 소개에는 삼국시대의 석불, 장수군청의 소개에는 고려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 또한 이외에도 석불입상의 무릎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어,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땅속에 묻힌 부분이 또 있다는 것인지

 

문화재청 안내에도, 장수군청의 소개와 절에 세워진 문화재 안내판에도 현재 1m 정도가 땅 속에 묻혀 있다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원흥 석불입상은 땅 속에 묻힌 부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가 맞지 않는 이러한 문화재 안내문들 때문에, 종종 혼란을 겪기도 하는 것이 우리 문화재의 현실이다.

 

 

이 석불입상을 보려고 원흥사를 찾아가 사진을 좀 찍겠다고 부탁을 했다. 절의 공양주 인 듯한 분이 나와 곤란하다는 듯 이야기를 한다.

 

우리 스님은 부처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신문에 내려고 하는데, 사진 몇 장만 찍을게요.”

지금까지 수도 없이 그런 소리를 들었어요. 홍보를 해주겠다고

그랬나요?. 저는 꼭 소개를 하겠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너무하지. 사진만 찍어가고 나온 대는 없어요.‘”

 

이런 경우는 참 난감하다. 요즈음은 문화재답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아 진듯하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도 그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듯한데, 소개가 되지 않아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다니. 이런 경우 내 잘못은 아니지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둔탁한 느낌이 드는 거대석불

 

원흥 석불입상은 머리가 큰 편이다. 소발에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분명하지가 않다. 큰 얼굴에 비해 눈과 입은 작고 코는 큰 편이다.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늘어져 있다. 이 석불입상은 노천에 방치가 되어 있던 것을, 1904년 마을에 사는 이처사 부부가 꿈을 꾼 뒤 전각을 조성해 모셨다고 한다.

 

그 뒤 1972년 주지 김귀수씨가 법당 중앙에 위치하도록 설계하여 안치하였는데, 석불의 머리 위에는 모자가 얹혀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석불은 모자가 없으며, 몸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다. 신체의 어깨와 몸의 너비가 같은 것이 전체적으로는 둔해 보인다. 더욱 목이 매우 짧게 표현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 드는 것만 같다.

 

 

고려시대 거대석불로 추정되는 입상

 

어깨에 걸친 법의는 통견으로 옷 주름이 다리부분까지 늘어져 있다. 양 어깨를 감싼 법의는 가슴이 거의 노출되었고, 양 소매와 배 아래쪽으로는 형식적인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배 부분에 댄 손은 양 소매에 넣어 감추고 있으며, 배 아래쪽으로 표현한 옷 주름은 양편으로 갈라져 있다.

 

형식적으로 표현한 옷 주름은 무릎 아랫부분에서 마무리를 하였고, 그 밑으로는 안치마를 겹쳐 입었다. 현재 놓여있는 발은 원래의 것이 아닌 듯하다. 석불입상의 크기나 표현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거대석불로 추정되는 원흥 석불입상. 찍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문까지 열어주는 바람에 촬영을 할 수 있었지만, 바로잡지 않은 안내판으로 인해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그래도 부처님의 마음으로 이해를 하고 다녀야 하는 것인지.


 

문화재청 설명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마하리 팔공산 기슭에 있는 원흥사 법당 안에 모셔져 있는 높이 4m의 거대한 석불입상이다. 원래 노천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1904년 이 마을에 살던 이처사 부부가 꿈을 꾼 뒤 불상을 만들어 모셨으며, 그 뒤 딸 청신과 손자 김귀수가 현재의 원흥사를 세웠다고 한다.

 

얼굴은 살찐 모습이며 눈과 입이 작은 편이나 코는 큰 편이다. 목은 매우 짧게 표현되었으며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는 분명하지 않다. 신체는 어깨와 하부의 너비가 같아 둔한 느낌을 준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데 가슴이 거의 노출되었고, 양 소매와 배 아래쪽으로는 형식적인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손은 양 소매에 넣어 감추고 있으며, 무릎 이하는 땅속에 묻혀 있다. 머리 위에 모자가 얹혀져 있었다고 하는 이 불상은 손모양이 특이하며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구불구불 돌아서 바쁜 숨을 헐떡이며 오른 적상산(1,034m). 덕유산 국립공원 내 소백산맥에 있는 적상산은, 한국 백경 중 하나로 손꼽힌다. 상산(裳山) 혹은 상성산(裳城山)이라고도 불리는 적상산은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을이 되면 온 산이 빨간 치마를 입은 듯 하다고 하여 적상산이라고 했다는 이 산 정상 밑에 적상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10월 중순 답사일정의 끝 날에 찾아간 적상산성은 붉은 나뭇잎이 떨어져 성곽주변을 온통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적상산성은 붉은 나뭇잎이 떨어져 성곽주변을 온통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성곽 안편의 높이는 현재는 1m 남짓하고, 넓이도 1m정도 되게 쌓여있다.


사적 제14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적상산성은 언제 축성이 되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용해 축성을 한 산성은 보기에도 천연의 요새다. 성곽의 높이는 현재는 1m~1m 50cm 남짓하고, 넓이도 1m정도 되게 쌓여있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험한 지세로 인해 성의 구실을 충분히 할 것 같다.

 

총 길이 8,143m에 이르는 적상산성은 본래 동서남북에 4개의 성문이 있었고, 성문에는 2층으로 된 문루가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안국사 주차장 밑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적상산성 호국사비가 남아있어, 이곳 산성 안에 사고를 짓고 사고를 지키는 승군을 모집하던 호국사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적상산성 호국사비가 남아있다.

  
가울이 되면 온통 붉은 치마를 펼친듯 하다는 적상산. 성곽 주변도 온통 붉은색으로 닾였다.


적상산성은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이 있었을 때는 마을 주민들이 산성으로 피난을 하였으며, 고려 공민왕 23년인 1374년에는 최영 장군이 탐라를 토벌한 후 귀경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산의 형세가 요새로서 적당하다고 하여, 왕에게 축성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이곳에 산성을 축성할 것을 건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 산성의 형태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그 후 이 산성의 중요성을 느껴 증축하기를 건의했을 것이다.

 

  
적상산성은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이 있었을 때는 마을의 주민들이 산성으로 피난을 하였을 정도로 난공불락이다

  
낙엽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적상산성

 

산성을 따라 거닐어본다. 저 밑에 가물거리는 곳에 마을이 보인다. 그 위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어, 이곳을 적이 기어오르기란 수월하지가 않을 것 같다. 설령 이곳을 오른다고 해도 성벽 자체를 허물어 버린다면, 오르기도 전에 다 돌에 묻힐 것만 같은 형국이다. 축성을 한 돌은 이리저리 모서리가 날카롭다. 그런 자연스런 돌들을 다듬지도 않고 쌓아올렸다. 성곽 주변은 온통 붉다. 성벽에 난 작은 배수구에도 붉은 단풍이 쌓여,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적상산성에서 내려다 본 마을. 저 밑에 가물거리는 마을이 있다. 저곳에서 적들이 기어오를 수가 있었을까?

  
성에 나있는 배수구에도 온통 붉은색으로 도배를 하였다.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오랜 세월 이 산을 지키고 있었을 적상산성. 가을이 깊어 그 마지막 불을 태우고 있을 때 찾아간 산성이다. 일요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안국사를 찾아든다. 적상산 정상을 밟아보기 위해서다. 산성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보니, 이 높지 않은 성곽이 얼마나 자연과 동화가 되어 있는지를 깨닫는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축성. 우리 선조들의 자연과 하나 됨이 참으로 놀랍다. 늦가을, 붉은 칠을 한 적상산성은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오랜 세월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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