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은 답사를 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이라고 해서 답사를 떠났는데, 그냥 쉬고 있을 수는 없다. 우비를 하나 구해 입었더니 온 몸에 땀이 흐른다. 바람이라고는 들어올 수 없는 비닐이고 보니, 온몸이 후끈거리고 금방이라도 몸에서 쉰내가 날 듯하다.

함양군은 정자가 많은 고장이다. 정자뿐 아니라 수많은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다. 하루에 몇 곳을 돌아본다는 것은 쉽지가 않지만, 이곳을 둘러본 블로거 ‘바람 흔적 김천령’님이 동행을 해주는 바람에, 짧은 시간에 여러 곳을 돌아볼 수 있었다. 비는 내리고 전날 과음을 한 탓에 몸은 무겁지만, 그래도 쉴 틈 없이 돌아다녔다.


일두 정여창을 생각해 지은 군자정

군자정,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정자 이름이다. 군자란 일두 정여창을 말하는 것이다. 정여창(1450~1504)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요 학자이다.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가 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으며, 1504년 사후에 갑자사회가 일어나자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러나 광해군 10년인 1610년에는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5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군자정은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에 소재한 경남 문화재자료 제380호이다. 이 정자는 정여창의 처가동네로, 이곳에 들려 유영을 할 때는 군자정이 있는 영귀대를 자주 찾았다고 전한다. 정선 전씨 입향조인 화림재 전시서의 5세손인 전세걸이, 일두 정여창을 기념하기 위해 1802년 군자정을 지었다고 하니 벌써 200년이 지난 정자이다.


자연암반을 그대로 주추로 삼아 정자를 지었다.

자연암반을 그대로 이용한 군자정

군자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이다. 아래는 자연 암반위에 그대로 기둥을 놓았다. 주추를 사용하지 않고 암반을 주추로 삼은 것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군자정은 아래를 조금 높은 기둥을 세우고, 짧은 계단을 이용해 정자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로 다가가니 앞으로 흐르는 내는, 비가 온 뒤라 물이 불어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 주변은 온통 바위로 되어 있는데, 이런 아름다운 풍광을 즐겼던 것 같다.

정자 안에는 여기저기 작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나 많은 시인묵객들이 거쳐 갔을 것이다. 정자는 난간을 둘러놓았으며, 계단은 오래도록 보수를 하지 않은 듯 아래쪽이 다 썩어버렸다. 기둥에는 음식물을 반입하지 말라고 적혔는데, 주변 음식점들이 이곳에서 손님을 받는다고 귀띔을 해 주는 사람이 있다.



정자 안에는 많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군자정은 아름답다.

문화재주변에 늘어놓은 술병 불쾌해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군자정. 가까이 다가가보니 참 가관이랄 밖에. 주변에 음식점이 있는데 이곳에서 손님이라도 받았는지, 재떨이로 썼을 그릇들이 정자 밑에 보인다. 한편에는 바위에 빈 술병을 늘어놓았다. 여기가 아니라고 해도 술병을 모아놓을 공간은 얼마든지 있는데, 하필이면 문화재 옆에다가 놓은 것일까?


군자정 옆에 빈 술병들이 늘어서 있어 볼썽사납다. 계단도 보수가 시급한 편이다.

문화재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보존해야 한다. 꼭 담당을 하는 공무원들만이 보존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렇게 많은 술병들이 늘어서 있다면, 어제 오늘 놓아 둔 것이 아닐 텐데 아무도 관리를 하고 있지 않은 것일까? 하루 빨리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이 사라졌으면 한다. 말로만 하는 ‘문화대국’이나 ‘문화국민’이란 소리가 이젠 듣기조차 역겹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이란 문화재가 있다. 문화재청에서 지정을 하는 이 문화유산은 문화재청이 개화기인 1876년 무렵부터, 한국전쟁 전후에 조형된 건축물, 산업물, 예술품 등을 포괄한 근대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등록문화재 제도」를 도입했다. 이 등록문화재는 개화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와 광복 당시 등의 연관성을 지닌 것들 중,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을 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하여 보존하자는데 있다.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 중앙동 일대를 ‘소주가’라고 부른다. 중국인 거리라는 뜻이다. 이 중국인 거리는 사적 제288호인 전주 전동성당을 건축할 때, 중국에서 들어 온 100여명의 중국인 벽돌공들이 살게 되면서 시작하였다고 한다.

전주 다가동에 있는 중국인거리. 그러나 이제는 몇 집만이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100년이 된 전통적 거리

전동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중국인 거리는, 이제는 몇 집 남지 않은 중국인들이 살아갈 뿐이다. 전동 성당은 서울 명동 성당의 내부 공사를 마무리했던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보두네 신부가 1908년에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914년에야 우여곡절 끝에 외형공사를 마쳤다.

이 때 벽돌은 중국인 인부 100여명이 직접 구워서 사용을 했다고 하는데, 당시 이곳으로 이주해 온 중국인들이 집단으로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상권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신흥상회와 전주화교소학교 등 몇 집이 남아 있다.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던 중국인 거리는 이제 그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등록문화재 제174호, 포목점 건물

이 중국인 거리에는 중국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생긴 포목점이 있다. 4대 째 포목점을 열었다는 이 집은, 완산구 다가동 1가 28번지에 있는 왕국민의 소유이다. 등록문화재 제174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1920년대에 1층 건물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전주 전동성당을 짓기 위해 이곳으로 정착한 벽돌공들에 의해서 지어졌으며, 중국 상하이의 전통 비단 상가 건물의 형태를 따랐다고 전한다.

옆에는 같은 형태로 지어진 중국화교소학교가 자리 잡고 있어, 당시 화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제 건물의 주인은 나란히 붙은 신흥상회를 운영하고 있고,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에는 이발소와 실사출력소가 자리를 하고 있다. 건물이 지어진지 90년이 지나 건물은 낡고 퇴락했으며,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샌다고 현재 이 건물에 세입자들은 이야기를 한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 4대째 중국인이 포목점을 이어가던 집이었으나,
현재는 이발소와 실사출력소가 세들어 있다.

지정만 해 놓으면 당상인가?

이 집이 등록문화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벽에 붙은 등록문화재를 알리는 작은 동판 하나이다. 주변 어디에도 이 문화재에 대해 알리는 안내판이 보이지를 않는다. 명색이 등록문화재라고 지정을 했으면서도, 안내판 하나 없이 서 있는 건물.




중국 상하이에 있는 포목점의 건물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물이다. 건축양식이 우리와는 달라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다. 이발소 앞 벽면에는 등록문화재임을 알리는 동판이 부착이 되어있다.

이 건물의 특징은 창문을 모두 아치형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문은 쇠창살을 사용했으며, 건물 전면 상단에는 둥그런 원과 꽃그림을 새겨 넣었다. 붉은 색을 칠한 벽돌이 깨어진 틈으로 보니 안에도 붉은 색이다. 그러나 그 점질이 약해 보인다. 건물은 낡을 대로 낡았지만 보수를 마음대로 할 수도 없어 불편하다고 한다. 4대를 포목점으로 운영을 한 이 등록문화재는 이제 건물의 외형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건물이 소중한 역사적인 자료로 인정을 하여 지정을 했으면, 거기에 합당한 보존이 되어야 할 것이다. 등록문화재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우고, 비가 새고 헐어지는 부분은 보수를 해야 하지 않을까? 지정만 해놓고 나 몰라라 하는 식의 보존방침은 차라리 지정을 안 함만도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건물자체가 망가져가고 있다. 비가 오면 천정이 샌다고 한다. 보수신청을 했으나
이루어지지도 않는다고 푸념을 한다. 문화재 앞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안내판조차 서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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