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118-1에 소재한 백제시대의 고찰인 무량사. 일주문을 지나면 담장 옆에 서 있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인 무량사당간지주(無量寺幢竿支柱)’가 서 있다.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기 위한 것이다.

 

이 깃발을 걸 수 있도록 길게 만든 쇠 등으로 만든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의 양쪽에 서서 이를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청주,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 등에 드물게 철당간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당간을 붙들어 매는 버팀돌인 두 기둥만이 남아 있다.

 

고려 전기에 마련한 무량사 당간

 

이 당간지주는 무량사 천왕문 동쪽에 남아 있는 것으로, 두 개의 돌기둥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기둥 끝은 안쪽면 에서 바깥쪽으로 둥글게 다듬었고, 앞뒷면의 가장자리에는 테두리 선을 돌렸다. 또한 양 옆면 가운데에는 세로로 돌출된 띠를 새겨 넣었다. 마주보는 기둥의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2개의 구멍을 위 아래로 각각 뚫어 놓았다.

 

돌기둥 사이에는 당간을 세울 수 있는 받침돌이 끼워져 있는데, 그 중앙에 당간을 받는 기둥자리를 파고 그 주위를 둥글고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무량사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통일신라시대에서 굳어진 제작방식을 따라 고려 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천년 세월 그 자리에

 

눈이 하얗게 쌓였다. 그 눈을 밟는 것만으로도 죄스럽다. 당간을 보기 위해 담장 밑으로 다가선다. 당간을 받는 중앙에 돌 위에도 눈이 수북이 쌓였다. 눈을 대충 손으로 쓸어내니, 가운에 당간을 받는 자리가 보이고, 주변은 둥그렇게 돋을새김을 해 놓았다. 이렇게 돌로 다듬어 세워 놓은 당간지주.

 

남들은 그저 두 개의 돌기둥을 왜 세워놓았을까 조차도 생각지 않는 듯 무심하게 지나친다. 하지만 이 두 개의 기둥은 나름대로 절의 크고 작은 행사 때 당을 매달기 위한 구조물이다. 이 당간에 얼마나 많이 당이 걸렸던 것일까? 천년 넘는 세월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당간지주가 새삼 경이롭다.

 

 

많은 문화재로 인해 선조들을 만난다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들. 그리고 그 오랜 세월을 자리를 지켜낸 석조물들. 절을 찾을 때마다 그런 옛 문화재들에 대해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든다. 지난 선조들과의 조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찾아다녀 무엇을 할 것이냐고 질문을 한다. 그렇게 문화재를 찾아 사철을 돌아다니고 있는 내사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문화재를 만나면서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선조들의 장인정신과 마음을 만난다. 그리고 그 선조들의 숱한 정성을 만난다. 그런 문화재들을 만날 때마다 그저 눈물이 나도록 감동적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담장 옆에 서서 비바람과 눈을 맞으면서 천년 세월을 서 있는 무량사 당간지주. 그 아무렇지도 않게 버틴 천년의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까?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고마움을 간직해야 하는 이유이다.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고찰 무량사. 무량사는 신라 문무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신라 말 무염선사가 중수하고, 고려 고종 때 중창을 하여 요사채 3-여 동과 산내 12개의 부속암자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된 것을 조선 인조 때 대중창을 하였으며, 1872년 원영화상이 중창을 해 오늘에 이른다.

 

천년 고찰인 무량사에는 보물 5점과 충남 지방문화재 8점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중 보물로 지정된 2층으로 조성된 극락전 앞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오층석탑과 석등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이런 사찰의 배치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이는 배치형식이다. 백제불교의 혼을 지니고 있다는 무량사. 눈이 쌓인 무량사는 정취가 남다르다.

 

선이 고운 무량사 석등

 

극락전 앞에 오층석탑을 세우고, 그 앞에 자리한 보물 제233호로 지정된 무량사 석등이 석등을 볼 때마다 참 선이 곱다는 생각이 든다. 지붕돌인 보개석 위에 눈이 한 편에 쌓인 석등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부여 무량사 석등은 선이나 비례가 매우 아름답다. 이 석등을 볼 때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새색시의 버선코 같다는 느낌이 든다.

 

 

석등은 부처나 보살의 지혜를 밝혀 중생을 제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탑 앞에 조성한 석등의 불을 밝히면, 33천에 다시 태어나 허물이나 번뇌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무량사 석등은 아래 받침돌 위에 기단부를 놓고 그 위에 간주석과 불을 밝히는 화사석, 그리고 맨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올렸다.

 

부여 무량사 석등은 화려하지가 않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넘어오는 시기에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이는 석등은, 한 마디로 단아한 형태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보존이 되어있는 이 석등은 간결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보인다. 이 석등을 만날 때마다 기품있는 반가의 새색시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다.

 

 

간결한 연꽃이 기품을 더해 

 

무량사 석등의 기단부에는 안상을 새겼으며, 아래받침돌에는 연꽃 8잎이 조각되어 있다. 가운데 간주석은 팔각의 기둥으로 길게 세워져있으며, 그 위로 연꽃이 새겨진 윗받침돌을 놓았다. 윗받침돌인 상대석과 아래받침돌인 하대석에 새긴 연꽃은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간결한 조형에 비추어 풍성한 느낌을 주는 연꽃을 조각하였다.

 

상대석은 좀 좁은 편이지만 간주석인 팔각기둥이 짧은 편으로, 그 덕에 전체적으로 둔중하지 않고 날렵함을 표현하였다. 팔각으로 조형한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네 군데로 난 화창은 넓고 그 나머지 면은 좁게 했다. 화사석의 8면 중 넓은 4면에 화창을 내어, 전체적으로 조형미에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마의 경사가 버선코를 닮아

 

화사석 위에 얹은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의 추켜올림과 처마의 경사가 잘 어울린다. 이렇게 경쾌하고 자연스럽게 올려진 귀퉁이의 선이 새색시의 버선코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 위에 올린 작은 연꽃봉오리모양의 보주 또한 단아함의 극치이다. 많은 상륜부가 없는 것이 오히여 이 석등의 아름다움을 더하는 듯하다.

 

눈이 쌓인 날 찾아간 부여 무량사. 그곳에서 만난 석등 한 기가 발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언제 이렇게 단아하고 기품있는 석등을 본 적이 있었던가? 전체적으로 지붕돌이 약간 큰 감이 있긴 하지만. 경쾌한 곡선으로 인해 무거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연꽃 문양 역시 신라시대의 화려함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만 같다.

 

부여 무량사. 참 이곳은 아픈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어찌 보면 우리 판소리사에 가장 비극적인 일화 한 마디가 이곳에서 전하고 있으니. 무량사는 신라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고찰이다. 천년 넘는 세월을 그렇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 고난의 역사와 아픔의 문화를 속으로만 숨죽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눈이 내려 가득 쌓인 날 무량사를 찾았다. 미처 치우지 못한 경내에는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길만 내놓았다. 만수산 무량사라고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들어서면, 천왕문을 지나게 된다. 그리고 보물로 지정된 석등과 오층석탑, 극락전이 나란히 일렬로 배열이 되어있다. 보물 제356호인 극락전은 중층으로 지어진 전각으로, 밖에서는 2층이지만 안으로는 위아래가 통해 있는 독특한 건물양식으로 축조되었다.

 

 

김시습의 초상화를 모신 무량사

 

무량사는 보물 제1497호로 지정된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화를 모신 전각이 있다.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사람이며, 조선 전기의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학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남원 민복사지를 주무대로 한 <금오신화>를 남겼을 뿐 아니라, 그의 저작은 다채로우며 15권이 넘는 분량의 한시를 남겼다.

 

비단에 채색하여 그려 놓은 이 그림은 조선 전기 사대부상 중의 하나로,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야인의 옷차림에 패랭이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옅은 살색으로 맑게 처리하였고, 윤곽선과 눈··입 등은 옅은 갈색으로 그렸다. 의복은 옅은 홍색인데 필요한 부분만 약간 짙은 갈색으로 묘사했다. 이로써 얼굴과 의복을 옅은 살색과 그보다 약간 짙은 갈색을 대비시켜 조화있는 화면을 만들었다.

 

 

그의 저서인<매월당집>에 의하면, 김시습은 생전에 두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 그림이 그 자화상인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약간 찌푸린 눈매와 꼭 다문 입술, 눈에서 느껴지는 총명한 기운은 그의 내면을 생생하게 전하는 듯하다. 서유영의 <배관기>에는 찌푸린 눈썹에 우수 띤 얼굴이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어, 이 초상화와 같은 표현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애통의 소리꾼의 이야기가 전하는 곳

 

영화 서편제는 우리나라 영화의 한 획을 그었다고 표현들을 한다. 흔히 문화적 요소를 띤 요소들이 성공을 하지 못하는 영화계에서, 서편제라는 영화는 그런 고정관념을 깨고 흥행에 셩공을 했기 때문이다. 그 서편제에 제자들을 키우고 난 뒤 쓸쓸히 아편쟁이로 세상을 마감하는 한 인물이 있다.

 

 

극락전 뒤로 난 소로길을 따라가면 작은 전각 하나가 보인다.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고, 커다란 늙은 나무 한 그루가 풍취를 자아내게 한다. 삼성각(예전에는 산신각이었다)이다. 이 삼성각에 한 사람의 명창이 10년 세월을 피를 토하듯 소리공부에 전념하여 득음을 하였다고 한다. 그 주인공은 조선조말 5대 명창이던 김창룡 명창의 동생인 김창진이었다.

 

비운의 소리꾼 김창진의 숨은 비사

 

김창룡은 조선창극사에서 조선의 소리는 김문에서 되다시피 했다고 극찬한 김성옥과 그의 아들 김정근(무숙이 타령의 대가), 그리고 김창룡과 김창진으로 이어지는 3대의 명창 가문이다. 김성옥은 여산의 한 굴에 들어가 맛소리의 멋을 더하는 진양조를 창안한 본인이다. 굴 속에서 소리공부에만 전념한 김성옥은 관절염의 일종인 학슬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 박동진 명창이 KBS-TV 다큐멘터리 '중고제'에 출연하여 부여 무량사에서 김창진 명창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그의 아들 김정근은 두 아들을 데리고 서천 장항 빗금내로 이주를 해서 살았다. 형인 김창룡에게는 소리를, 동생인 김창진에게는 북(고수)을 가르쳤다. 하지만 당시에는 소리꾼은 대우를 받지만, 고수는 천하게 대접을 항 때였다. 김창진은 당대 5명창의 수행고수 노릇을 하면서 지내다가, 큰 뜻을 품고 부여 무량사로 숨어들었다.

 

10년 세월, 당대 5명창의 수행고수 노릇을 하면서 명창들의 특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김창진이기에 그 소리의 장점을 따서 만든 그의 소리는 원각사로 올라가 소리 한 판으로 5명창을 능가한다는 소리를 들었단다. 자신들의 판에 끼어든 김창진이 반가울 수가 없었을 명창들. 특히 친형인 김창룡명창이 가장 싫어했다는 것. 그런 고통을 잊고 싶어 내려온 곳이 서천 너더리(판교). 그곳에서 마지막 제자인 고 박동진 명창을 만났단다.(이 이야기는 KBS-TV 다큐멘터리 '중고제' 제작시 출연을 한 박동진 명창의 증언)

 

김창진 명창이 10년간 독공을 하여 득음을 했다는 무량사 산신각(현재는 삼성각)을 돌아보고 있는 다큐멘터리 화면속의 고 박동진 명창

 

그렇게 슬픈 한 소리꾼의 이야기가 전하는 무량사다. 눈 쌓인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다. 여기저기 자국을 남긴 발자국이 오히려 죄스럽기만 하다. 날씨가 춥긴 하지만 쉽게 무량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어디선가 김창진 명창의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백제탑의 우아하고 선이 아름다운 점과, 신라탑의 장중하고 무게가 있는 이점만을 골라 탑을 조성하였다.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고찰 무량사에 소재한 오층석탑이다. 무량사는 통일신라 문성왕(서기 839~856)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무량사는 고려 초기에 대중창을 하여 30여동의 요사와 12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두 전소가 된 것을, 조선 인조(서기 1623~1649) 때 진묵대사께서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절이다. 무량사를 찾은 날은, 절 경내에 하얀 눈이 꽤 많이 쌓여있다. 경내에는 사람들이 다닐만한 길만 치워놓았을 정도이고, 탑 주변에도 눈이 하얗게 쌓여있다.

 

오랜 기억에 남아있는 무량사

 

무량사는 인연이 깊은 절이다. 벌써 20여 년 전부터 이곳을 찾아왔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가 1993년이었으니, 올 해로 20년 째 이곳을 몇 번이고 찾아왔었다. 아마도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을 때는, 명창이신 고 박동진 선생님과 동행을 했었다. 판소리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서 들린 곳이었기에, 남다른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때도 무량사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기억이 난다. 다만 김창진 명창이 10년 세월을 득음을 위해 독공을 했다는 삼성각 앞에, 또 한 채의 요사가 자리를 하고 있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하다. 무량사는 늘 정겨운 곳이다. 전국의 사찰을 문화재답사를 위해 찾아다니지만, 가끔은 너무나 많은 변화로 인해 당황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려전기의 균형 잡힌 오층석탑

 

무량사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보물인 석등과 오층석탑, 그리고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 극락전이 일렬로 서 있다. 맨 앞에는 보물 제233호인 석등이 서 있고, 그 뒤편에 보물 제18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그 뒤편에는 외부를 중층으로 지어진 보물인 극락전의 웅장한 자태를 볼 수가 있다.

 

눈이 쌓인 한 겨울의 오층석탑. 이 무량사 오층석탑은 고려 전기에 조성한 탑이다. 이 탑은 백제탑의 아름다움과, 신라탑의 장중함을 이어받아 조성한 것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기단은 잘 다듬은 석재를 이용을 했다. 기단부에 조성한 석재의 면을 둥글게 깎아내어,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선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무량사 오층석탑은 한 마디로 균형이 잘 잡혀있다. 그런 점이 안정감이 보이기도 한다. 몸돌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덮개석인 지붕돌과 몸돌의 줄어드는 비례가 알맞아, 어디 하나 군더더기가 보이지를 않는다. 다만 지붕돌의 넓이가 몸돌에 비해 넓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이 탑의 장점이기도 하다. 그만큼 낮은 몸돌을 지붕돌이 무게감을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탑, 어디한 곳 흠잡을 데가 없어

 

무량사 오층석탑을 보고 있노라면, 백제와 신라의 문물이 합쳐 낸 문화의 극대화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두 고대국가의 서로 다른 문화가 이곳에서 만나, 석조문화의 정점을 이루었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무량사 오층석탑은 볼 때마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만든다.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하 10도를 밑도는 날씨마저도 추운 줄을 모르니 말이다.

 

기단부 상단에는 우주와 탱주를 서로 다른 돌을 이용해 표현을 했다. 그리고 아래지석과 위 덮개석의 면을 둥글게 깎아, 석재가 주는 딱딱함을 없앴다. 그 위에 몸돌은 층이 올라 갈수록 줄어들면서, 적당한 안정감을 주고 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아랫면을 홈을 내어, 몸돌이 겉돌지 않게 조성을 하였다. 몇 장의 돌을 이용해 지붕돌을 조성하였다는 것도 특이하다.

 

무량사 오층석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많이 닮아있다. 몸돌이 이층부터 차츰 줄어든다가나, 받침돌의 면을 둥글게 조성한 것들이 그러하다. 아마도 이 오층석탑을 조성한 장인이 백제와 신라의 많은 탑을 돌아본 후, 이 탑을 조성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무량사 오층석탑의 아름다운 선의 정점은, 바로 지붕돌의 처마 끝에서 보인다.

 

 

한 장의 돌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양편의 처마 끝이 날아오르듯 위로 적당히 솟아있는 모습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선을 표현할 수가 있었을까? 많이 치솟지도 않고, 그렇다고 처지지도 않게 솟아오른 처마 끝. 그저 석탑 하나에도 이렇게 아름다움을 표현 할 수 있었던 선조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언제나 이런 감탄이 끝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발길이 닿는 날까지 이어지지 않으려는지.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소재한 무량사. 신라 문무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고찰이다. 이 무량사 뒤편 고즈넉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산신각. 이 산신각에는 명창가문에서 태어난 피를 토한 한 소리꾼의 이야기가 전한다. 3대 명창 가문은 바로 명창 김창룡의 가문이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는 ‘조선의 소리는 김문에서 되다시피 했다’고 적고 있다.

김문은 바로 중고제의 명창이자 판소리 진양조를 창시한 김성옥으로부터, 무숙이 타령으로 유명한 그의 아들 김정근. 그리고 정근의 아들인 김창룡으로 이어지는 3대 명창집안을 말한다. 이 3대 명창 집안에서 이름을 떨치지 못하고 쓸쓸히 서천 판교(너더리)에서일생을 마친 비운의 명창이 있다. 김창진 명창이 바로 그이다.

한 명창이 10년간이나 득음을 위해 피를 토하는 독공을 한 산신각

명창의 수행고수 노릇을 하던 김창진

김창룡의 아버지인 김정근은 장항 빗금내로 두 아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곳에서 창룡에게는 소리를, 창진에게는 북을 가르쳤다고 한다. 예전에 명창들은 수행고수라 하여 자신의 소리를 전문으로 장단을 맞추는 고수와 동행을 했다. 그러나 그 대접은 판이했다. 명창은 대우를 받지만, 고수는 밥을 먹을 때조차 댓돌 아래서 먹었다는 것이다.

형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수행고수 노릇을 하던 김창진. 그는 고수의 한을 풀기 위해 부여 무량사로 들어갔다. 그곳 산신각에서 10년간이라는 긴 세월을 소리공부에 전념하였다. 형 창진의 수행고수였던 김창진은 자연스럽게 당시 5명창의 소리반주를 하는 일이 잦다보니 5명창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장점만 찾아내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 형인 김창룡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같은 서천 출신 명창 이동백과 쌍벽을 이루던 김창룡. 7세 때부터 아버지인 김정근에게서 소리공부를 시작해, 10살이 되던 해에는 이날치에게서 1년간 공부를 한다. 이날치는 진주 촉석루에 올라 새타령을 할 때, 새가 어깨에 날아와 앉을 만큼 뛰어난 명창이다. 근세 5명창 중 한사람인 김창룡은 수많은 일화를 남긴 명창이다. 당시 관서지방에서는 창룡의 이름이 없으면 극장 대관을 해주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비운의 명창 김창진. 마지막 제자 박동진 명창에게 소리 전수를 하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인터넷 검색자료)

피를 토하는 독공 10년으로 일군 득음

부여 무량사 산신각에서 10년간 독공으로 득음을 이룬 김창진 명창. 10년을 사는 동안 입고 있는 옷이 다 떨어져, 거적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했다고 한다. 밑이 다 드러날 것만 같은 그런 꼴이 안타까워 무량사의 주지스님이 옷을 한 벌 주었는데, 그 옷을 입으니 사문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당시에는 소리만 잘해도 어딜 가나 대우를 받던 때였으니. 그런 마음이 들자 옷을 벗어버리고 다시 거적을 쓰고 소리에만 전념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스스로 독공으로 득음을 한 김창진 명창은 서울로 올라와 소리판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명창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소리꾼의 세계는 비정한 것인지. 형에게서 조차 시기를 당한 김창진은 쓸쓸히 서천 너더리로 낙향을 하였다. 일설에는 이동백의 여인을 빼앗아가 피신을 했다고도 한다.

10년 피를 토하는 독공으로 얻어낸 득음. 그러나 너더리로 내려 온 김창진 명창은 그 아픔을 아편으로 이겨보려 하였고, 당시 소리를 하고 싶어 찾아 온 박동진 명창을 소리제자로 만나게 된다. 심청가를 박동진 명창에게 전수를 한 김창진 명창은 그렇게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김창진 명창의 일생은 제자 박동진 명창으로부터 세상에 전해졌다. 무량사 한편에 자리 잡은 산신각. 그런 깊은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리 없는 무심한 사람들의 발길만이 거쳐 간다.(이 이야기는 스승이신 고 박동진 명창으로부터 전해진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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