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문화재를 찍고 있는데, 동행을 한 아우 녀석의 질문이다. 처음에는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의아스러웠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나더러 참 답답하다고 한다. 무엇이 녀석이 보기에 그리 답답해 보인 것일까?

“왜 문화재 블로거를 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거야?”
“형님도 생각해 보세요. 드라마 평이나 가수 이야기나 쓰면 편할 것을,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문화재 이야기를 무엇하러 쓰세요. 이 더위에 왜 고생을 하면서 이렇게 문화재를 찍어대는지 원”
“그럼 이런 거 하지 말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편히 사시라는 거요”

이렇게 오래 묵은 나무는 상처를 입고도 버티고 있다. 저 나무의 끈기를 배울 수는 없는 것일까?


내가 생각해도 답답하다. 정말로

하긴 그렇다. 이것이 무슨 돈 되는 것도 아니다. 시간과 돈, 그리고 체력까지 고갈이 되어가면서 땀을 흘리고 있는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답하기는 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문화재를 찾아다니면서 글을 쓴지는 오래되었다. 방안 가득한 CD와 외장하드. 그 안에는 전국을 계절 없이 찾아다니면서 찍어 놓은 자료들이 그득하다. 누군가 그것을 보고 ‘저것만 보아도 배가 부르지 않느냐?’고 한다. 절대 아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배가 부르기는커녕 더욱 고파진다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저렇게 자료를 모으느라 그동안 길에 쏟아 부은 돈이 아마도 수억은 될 것이다. 그렇다고 누가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한 달 동안 땀 흘려 돈을 받기가 무섭게 길에 나가 쏟아 부었으니, 참 내가 생각해도 답답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도 팔자려니 생각하고 해야지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가 있다. 수원에 사는 아우 녀석이 스포츠 마사지를 한 번 받아보라고 한다. 생전 그런 것을 받아 본 기억도 없다. 처음에는 더운데 무엇 하러 그런 것을 하느냐고 했다가, 몸이 안 좋으니 손해 볼 것이 없다는 생각에 몸을 맡겼다. 그런데 스포츠 마사지를 하시던 분이 한 마디 하신다. ‘어떻게 이렇게 몸을 혹사를 시켰느냐’는 것이다.

"아마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쉬는 날마다 더운데도 나가서 돌아다녀서 그런가 보네요.“
“그런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좀 쉬셔야 할 것 같아요.”
“아직은 쉴 때가 아니란 생각입니다. 다닐 수 있을 때 좀 더 다니려고요.”
“그러다가 큰일 납니다. 돈도 좋지만 몸 생각부터 좀 하세요”
“.... ”

딱히 할 말이 없다. 알고 보면 좀 오랫동안 정말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다. 시간만 나면 밖으로 나가 문화재를 찾아 헤매고 돌아쳤으니. 그래도 아직 우리 문화재의 10분지 1이나 돌아다녔나 싶기도 하다. 마음이 바빠서 몸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아니 그럴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생길 수가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이야기다.

여유가 조금 생기면 하루라도 더 답사를 나가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으니, 몸에다가 무슨 투자를 할 것인가? 생활이 찌든다는 생각을 해 본적도 없다. 신발 하나를 사면 그것이 다 헤어져 너덜거려야, 신발을 살 생각을 하고 살았으니 말이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이젠 좀 쉬고 싶기도 하다.

아우 녀석의 볼멘소리가 듣기 싫지가 않다. 예전 같으면 별 말을 다한다고 핀잔이라도 주었을 텐데. 이젠 오히려 그런 말이 마음에 와 닿는 것을 보면, 나이가 먹긴 먹었나 보다. 더구나 몸이 개판이라는 말에, 조금은 걱정도 된다.


이젠 좀 쉬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내가 충성스럽게 글을 올려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이웃 블로거들의 걱정과 격려가 그동안 나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을. 괜히 여유까지 잃어가면서 기를 쓰고 글을 올려야 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형님도 그냥 드라마 줄거리나 쓰세요. 광고도 달고요”

그래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그리고 그런 것을 쓸 재주도 없다.

“머리 두상을 보니 한번 고집을 피우면 아무도 못 꺾겠네요.”
마사지를 하시는 분의 말씀이다. 맞습니다. 그래도 이 고집 하나로 버티고 있는 중입니다. 만일 그것마저 버리면 살아갈 의미도 없겠죠. 그래서 난 또 주섬주섬 오늘도 가방을 챙긴다.

빙의란 ‘죽은 생명의 원혼이 살아있는 생명에 붙는 것’을 말한다. 요즈음 드라마 ‘여우누이뎐’인가의 막바지에 빙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듯하다. 나야 원래 드라마하고는 담을 쌓은 사람이니 여우누이뎐이란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빙의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원혼이 붙는 현상이 아니다.

요즈음 들어 빙의현상을 체험하는 사람들도 있고, 사람에게 붙은 원귀를 떼어준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빙의와는 달리, 빙의에 접한 사람의 입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귀신들림’ 혹은 ‘귀신접함’이란 형태의 빙의의 실체는 무엇일까?

망자의 넋을 위로하는 지전춤(기사의 특정사실과는 무관합니다 

한 몸에 두 영혼이 존재할 수 있는가?

우선 빙의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몸에 두 개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틀린 것은 아니다. 빙의에 걸린 사람은 때로는 본인으로, 때로는 몸에 붙은 귀신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개의 영혼이 어떻게 한 몸에 공존을 하는 것일까? 흔히 ‘귀신 들린 사람’들의 형태를 보면, 때로는 정신이 멀쩡했다가 때로는 미친 것 같아 보인다. 이런 형태를 우리는 흔히 ‘반미치광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왜 빙의가 들린 사람들이 이렇게 반은 자신으로 반은 원혼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일까? 오래도록 굿판을 다니면서 ‘귀신 쫒는 굿’, 흔히 ‘ 귀(逐鬼)굿’ 혹은 ‘축사(逐邪)굿’이라고 하는 굿을 수도 없이 보았다. 엎어놓고 소금을 뿌리고 불로 위협하고, 무검(巫劍)을 갖고 찌르는 시늉을 한다. 그럴 때마다 몸에 붙은 귀신은 앙탈을 부리기도 한다. 이런 형태를 흔히 ‘귀신이 집을 짓는다’라고 이야기 한다.


굿을 할 때는 무격(巫覡 - 여자무당은 巫, 남자무당은 覡이라 표현한다)들과 몸에 붙은 귀신들이 협상을 벌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혼만 있는 귀신이 자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사람을 택해야 하는데, 그것을 바로 집을 짓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빙에 걸린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풀려나지는 않는다.

“제가 저를 바라다보고 있어요”

이런 빙의에 걸린 여자가 굿을 했다. 23살인 여자는 8살짜리 남자 아이가 빙의가 되었다고 한다. 굿판에서 여자는 어린아이 목소리를 내면서 안 나간다고 울고불고 한다. 그러다가 학용품과 옷을 사다주면 나가겠다는 것이다. 사람을 시켜 가방이며 옷 등을 사다가 주었더니, 나가겠다고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 들어왔느냐고 물으니, 길에 있다가(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이 아이는 교통사고로 생명을 잃었다고 한다) 마음 좋은 누나가 지나가 길래, 얼른 따라갔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6시간이 넘게 실랑이를 벌리다가 아이가 간다고 인사를 하고 나갔다. 눈에 보이는 실체는 물론 없다. 하지만 그 순간 여자가 한숨을 토하더니 일어난다. 그리고 제 정신이 돌아왔다. 놀라운 이야기는 그다음에 벌어졌다.

“언제 아이가 몸에 들어온 것 같아요”
“두 달 전인가 직장에 갔다가 집에 오는데 갑자기 몸이 섬뜩했어요. 그때인 것 같아요”
“나이가 있어서 본인이 정신을 차리면 괜찮을 듯도 한데”
“그럴 수가 없어요. 그 아이가 내 몸을 뺐으면 저는 몸에서 쫓겨나요. 그리고 그 아이가 마음대로 하죠”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제가 저를 보고 있어요. 제가 들어가려고 해도 그 아이가 나가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어요”

세상에 어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빙의란 한 사람의 몸을 두 개의 영혼이 공유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공유가 자신이 있고, 귀신이 접하는 것이 아니라, 몸은 하나를 갖고 서로 번갈아가면서 몸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결국 ‘여우누이뎐’에서도 자식의 병을 고치려고 딴 아이를 죽여 간을 먹은 초옥에게, 죽은 연이의 원혼이 씌었다는 것이다. 결국 초옥이의 몸을 초옥이와 연이가 공유를 했다는 것이다.


드라마의 설정은 초옥이 연이가 되어 구산댁과 모녀사이가 된다고 하지만, 이런 설정의 경우 설득력이 부족하다. 몸의 주인인 초옥이가 없는 연이는 그 몸을 지탱할 수 없는 것이다. 즉 몸의 주인이 살아있을 때라야 귀신도 그 몸을 함께 공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인 경우와 같이 귀신이 씌었다고 해도, 언제나 연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여우뉴이뎐’이 방영되면서 여러 사람이 빙의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해오기에, 굿판에서 본 내용을 정리를 해본다. 결국 빙의란 우리가 알고 있듯 의지가 약해 들린다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흔히 무속에서 이야기를 하듯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무당이 될 수 있듯, 누구나 빙의에 접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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