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1973710일에 지정이 된 파장동 노송지대. 정조의 효심이 가득한 이곳이 요즈음 더럽혀진 주변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파장동에서 길게 지지대비로 향하는 약 5km 정도의 이 길은, 예전 정조대왕이 능침에 잠들어 있는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만나러 다니는 길목이었다.

 

이 길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느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수령 200여년을 넘는 소나무들이 줄을 지어 있는 노송 길. 전국 파워소셜러 팸투어 둘째 날에 지난 317일에 찾아간 노송지대에는, 2차선 도로를 따라 양편으로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이 소나무들은 정조대왕 당시에 심었다고 하니, 아마 수령이 200여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500주의 소나무를 심은 정조

 

경수간 국도를 따라 5km 정도에 조성되어 있는 노송지대. 기록으로는 이곳에 500주 이상의 소나무들이 살고 있어야 한다. 정조대왕이 부친인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륭원의 식목관에게, 내탕금 1,000량을 하사하여 이곳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하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소나무들은 자라면서 솔씨를 퍼트려 새로운 종자를 키워내기 때문에, 200년이 지난 세월이라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현재는 대부분 고사하고 38(효행기념관 부근 9, 삼풍가든 부근 21, 송정초등학교 부근 8) 정도의 노송만이 보존되어 있다. 낙락장송이 울창한 이 자연경관은,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사도세자의 슬픔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어 길손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곳이다.

 

 

노송지대 주변 정비 아쉬워

 

이번 파워소셜러 팸투어에 찾아간 노송지대 주변은 어지러웠다. 여기저기 주변이 어수선 해 이곳이 문화재 지역인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문화재는 주변이 정리가 되어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소나무 길 사이로 차들이 지나다니고 있어 소나무의 생육에도 지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나무는 매연에는 약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차량. 그리고 정리가 안 된 주변 환경. 정조대왕의 효심을 이야기하기에는 조금은 낯이 뜨겁다. 500주나 심었다는 소나무는, 당시에 심은 것들은 이제 겨우 40주 정도이다. 남은 소나무는 다 어떻게 된 것일까?

 

 

지금도 몇 그루의 나무는 생육이 좋은 편이 아니다. 파워소셜러들은 이구동성을 이야기들을 한다. 이곳의 차도를 변경하고 아스팔트를 걷어낸 후, 흙길로 조성을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걸어 다니는 길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또한 소나무 주변에 모든 잡목을 옮겨, 소나무들을 온전히 괸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 가을 막걸리라도 부어 주어야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68-7에 소재한 운문사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제180호인 운문사 처진소나무가 있다. 이 소나무는 수령이 400년이 훨씬 지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처진소나무는 매년 봄, 가을에 운문사의 스님들이 막걸리를 물에 타서 뿌리 주변에 뿌려준다. 그래서인가 항상 푸른빛을 띠고 있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파장동 노송지대에 소재한 소나무들. 이 소나무들은 정조대왕의 효심을 알려줄 수 있는 귀한 나무들이다. 이 소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수원도 봄, 가을로 소나무에게 막걸리를 주는 날을 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변의 나무들로 인해 영양분을 빼앗겨버려, 제대로 생육하지 못하고 있는 노송지대의 소나무들.

 

 

더 이상 이 나무들이 주변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강구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5월과 10월 날을 정해, 믹걸리를 주는 날을 정해주어야 한다. 그런 행사 하나로도 노송지대의 소나무들이 더 잘 자라날 수 있으며, 이 행사 자체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노송지대를 알릴 수도 있어, 모두에게 나무를 더 귀하게 여기는 계기도 될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가 보면 가끔은 팍팍할 때가 있습니다. 더욱 주변에 함께 하는 사람이 없는데, 몸이 아프다거나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이면 무엇인가 모를 허전함도 생겨나고요. 그런 날은 괜히 누군가 해질녘이 되면, 전화라도 걸어 한잔하자고 하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바로 어제 같은 날이 그런 날이죠.

 

마침 전화가 한통 왔습니다. 날도 꾸무럭한데 막걸리나 한 잔 하자고요. 예전에는 막거리를 잘 마시지 않았지만, 요즈음은 아주 좋은 막걸리에 푹 빠져 있습니다. 이 막걸리를 아무데서나 팔지 않는다는 것이, 좀 불편하지는 하지만요. 대충 정리를 하고 만나기로 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갖은 양념에 한 냄비 가득한 도루묵 찌개가 단돈 만원입니다

 

항상 정갈한 찬이 마음에 들어

 

수원천 변 화성박물관 길 건너편에 있는 ‘소머리국밥’집은 제가 가장 자주 가는 곳 중 한 곳입니다. 우선은 이 집 주인은 항상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리고 음식솜씨가 또 일품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집의 밑반찬은 모든 것을 직접 만듭니다. 그리고 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도 물론 다 좋지만, 이 집을 가는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좋은 막걸리가 있고, 안주 값이 딴 곳에 비해 아주 저렴하기 때문입니다. 한 달에 몇 번을 가보아도 늘 정갈한 음식에 싼 가격, 술을 가볍게 한 잔 하고 싶을 때는 참 부담이 없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이 집의 정갈한 밑반찬(위)과 서비스로 내주는 소머리국입니다. 소머리국에는 수육이 가득합니다

 

착한 가격에 먹을 수 있는 계절별 음식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71 -1 에 소재한 ‘소머리국밥’집. 이 집의 사장을 우리는 주모(김정희, 여, 55세)라고 부릅니다. 주모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미모를 자랑하고 있죠. 아름다운 데다가 음식까지 잘하니, 어찌 일석이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집은 일석삼조나 됩니다. 바로 음식 값이 정말 저렴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집의 특징은 바로 서비스가 좋다는 점입니다. 국물을 달라고 하면, 수육이 많이 들어간 소머리 진국을 내어 줍니다. 딴 곳에 가면 이것도 7,000 ~ 10,000원을 받습니다. 또 하나는 바로 계절별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가을철에는 전어가 상당히 쌉니다.(이 집만 그렇습니다)

 

 도루묵에 알이 꽉 차 있습니다. 요즈음이 제철이죠

 

요즈음에는 꼼장어와 도루묵찌개, 거기다가 꼬막 등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요즈음이 제철 들인 것들이죠. 어제 세 사람이 자리를 함께 해 도루묵찌개를 시켰습니다. 냄비 안에서 맛을 내며 끓고 있는 도루묵찌개는 정말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단 돈 10,000원이라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집은 없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  

 

계란찜 하나에도 딴 곳에서는 최하 5,000원입니다. 그런데 이 집은 3,000원입니다. 가오리찜을 딴 곳에서는 12,000 ~ 20,000원 정도 받습니다. 이 집은 6,000원입니다. 이렇게 싼 가격에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코앞에 재래시장에 세 곳이나 있기 때문입니다. 하기에 항상 싱싱한 어물을 사용해 멋이 일품입니다.

 

 도루구 하나를 접시에 옮겼습니다. 누르자 알집이 쏟아집니다. 휴대폰으로 찍어 화잘 엉망입니다

 

아무튼 이 집만 가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어제 세 사람이 먹은 것은 도루묵찌개 한 냄비 10,000원, 계란찜 하나 3,000원에 막걸리 9병입니다. 막걸리는 형평에 의해 딴 집들처럼 3,000원씩을 받습니다. 그래서 세 사람이 정말 포식을 하고 난 뒤 지불한 돈이 4만원입니다. 거기다가 막걸리 한 병을 또 서비스로 더 마셨지만. 이 집 주모는 늘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집에는 어려운 분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이랬거나 저랬거나 이 집 이렇게 장사하고도 망하지 않는 것을 보면 참 이상합니다. 아무리 손을 꼽아가며 계산을 해보지만, 남는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장사를 계속하는 것을 보면, 참 이 집에 무슨 화수분이라도 있는 듯합니다. 다음에 수원을 들리시거든 꼭 한 번씩 찾아가 보세요. 애주가들에게는 정말 끝내주는 집입니다.

 

속리산 자락 지하 250m 암반수에서 길어올린 물로 빚는 막걸리입니다. 우리는 이 술만 먹습니다. 탄산을 섞지 않는 술입니다(위) 아래는 이 집의 가격표입니다. 정말 대단히 착한 가격이죠. 요즈음 조금 올린 것들도 딴 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주 소 : 수원시 남수동 71 -1(수원천 변)

문의전화 : (031) 253 - 6363)

느릿느릿
하늘로 오르는 산이 있습니다
산의 속도로 머리 허연 사내가
세상을 비우고 있고
비워지는 만큼
채워지는
잘 익은 바람이 있습니다
광교산 오르다
살아서는 술
죽어서 식초가 되는
막걸리 한 생애를 마십니다
인간 한 세상 섞어 마십니다

산 위로
구름과 바람이 지납니다
잔 속에
한 생이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막걸리를 생산하는 도가의 대표인 이수원 시인의 '막걸리를 마시며'라는 시이다.

 

"제가 워낙 막걸리를 좋아해서 좋은 술을 마시려고 막걸리 도가 하나를 차렸습니다. 홍보 차 여기저기 다니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술 한 잔 들어보시죠. 맛 괜찮습니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충남집이라는 선술집에서 지인들과 함께 명절 전 날의 쓸쓸함을 풀고 있는데, 누군가 술 한 잔 마셔보라고 권한다면 이보다 더 한 횡재는 없다. 꼭 돈이 붙어야 횡재가 아니다. 거의 한 달이면 25일 이상을 막걸리를 마시는 나에게는, 이보다 즐거운 말이 어디 있겠는가?

 

본인이 좋은 술을 마시기 위해 도가를 차렸다고?

 

'속푸리 생 막걸리'의 대표인 이수원(남, 57)은 본인이 즐겨 마시는 막걸리를 찾아 전국을 헤맸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막걸리 도가를 찾아 돌아다녀 보아도, 마음 놓고 먹을 만한 술이 그리 많지가 않았다고. 막걸리는 맛은 좋은 물이 좌우한단다. 우리나라에서 물이 좋기로 유명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술맛을 보았지만, 두 세 곳을 빼고는 물맛이 그리 좋지가 않았다고 한다.

 

"술이라고는 막걸리 밖에 안마십니다. 그래서 한 때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막걸리를 마셔보기도 했죠. 그러나 정작 한 두 곳 빼고는 물맛이 좋은 곳이 그리 흔치가 않았죠. 그래서 이왕이면 내가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좋은 막걸리,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마실 수 있는 막걸리를 생각하다가 대부도에 '광교산 생 막걸리' 공장을 차렸습니다."

 

 

10여 젼 전에 처음으로 도가를 차렸단다. 그러나 본인이 마시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술도가를 차린다는 것도 쉽지가 않은 일이다. 거기다가 계속해서 술을 생산하려고 하면, 그만큼 판매가 되어야 하는데, 그도 만만치 않을 일. 결국은 기존의 대형 막걸리 도가로 인해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단다.

 

"참 마음이 아팠죠. 정말 좋은 술을 생산했는데, 기존의 대형 도가와 저는 경쟁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판촉을 하려고 하니, 그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고요"

 

다시 물을 찾아 전국을 헤매다.

 

속푸리 생 막걸리 이수원 대표는 그런 상처를 잊고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정말 좋은 물을 찾기 위해 무진 고생을 했단다.

 

"저희 술 공장은 충북 괴산군 문광면 속리산 자락에 있습니다. 지하 250m의 암반수를 사용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물중에 한 곳입니다. 막걸리의 생명은 좋은 물입니다. 그 물을 맛보고 나서 다시 막걸리를 생산해야 되겠다고 결심을 했죠."

 

 

그래서 다시 생산한 것이 바로 속푸리 생 막걸리라고 한다. 따라주는 술을 한 잔 먹어보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일까? 막걸리를 마시는데 혀끝에 매운 맛이 돈다. 왜 막걸리에서 매운 맛이 도느냐고 물었다.

 

"예, 원래 엣 문헌에 보면, 막걸리는 매운 맛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운 맛은 항상 나는 것이 아니고, 발효 중에 몇 시간 정도 매운 맛을 감지 할 수 있습니다. 매운 맛이 돌았다면 그 막걸리가 최고로 맛이 있다는 것이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과향을 맡을 수가 있습니다. 숙성된 막걸리의 맛이 최고일 때죠. 그런 다음 식초가 됩니다. 지금 매운 맛을 느끼셨다면 그것은 정말 발효가 제대로 되었다는 것이죠. 막걸리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음식입니다"

 

원래 막걸리는 유산균이 많아, 요구르트 100병과 맞먹는 유산균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변비에 걸린 사람은 막걸리보다 좋은 음식은 없다는 것. 연구결과를 보면 막걸리는 비만예방과 염증의 억제, 항암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저는 제가 먹기 위해서 막걸리를 생산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자신이 생산하는 음식을 자신이 먹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틀림없이 불량식품이라고요.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즐겨 마시고, 이웃들과 함께 마시기 위해서 만든 술입니다. 그렇기에 가장 최고의 재료를 사용했죠."

 

그 말에는 이해가 간다. 본인이 직접 만들어 마시는 술을, 안 좋게 생산할 수는 없을 터. 그래서 속푸리 막걸 리가 최고라고 마셔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한다. 옆에서 술을 마시던 분들도 한 말 거든다.

 

좋은 술은 내장이 알아봐

 

"이 술 달지도 않고 정말 좋습니다. 역시 술을 좋아하고 생산하는 분이시라, 술맛이 전혀 다르네요. 탁한 듯하면서 맑고, 연한 듯하면서 깊은 맛이 납니다. 더구나 술병에 보니 회사 전화가 아닌 대표님의 전화번호가 적혀있네요. 그것 하나로도 자신 있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이수원 대표의 막걸리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다. 그만큼 좋은 술을 생산하고 그것을 즐기기 때문인가 보다. 이러다가는 밤을 새워도 이야기가 끝날 것 같지가 않아, 막거리를 좋아하는 주당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물론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꼭 당부하고 싶습니다. 시중에 판매하는 막걸리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좋은 물입니다. 다들 암반수를 사용한다고 하지만, 그 중에는 수돗물을 정제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막걸리를 마실 때 쏘는 맛이 있다면, 그것은 탄산을 주입한 것입니다. 탄산을 주입하면 상하지가 않죠. 그러나 정상적으로 좋은 막걸리를 전통 재로로 만들면, 35도 이상이면 짧은 시간에도 식초가 됩니다. 막걸리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탄산을 섞은 청량음료가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듯, 막걸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수원 대표의 이야기. 술 한 잔을 마셔도 정말 좋은 물로 빚은 좋은 술을 마시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나도 이참에 우리 술인 막걸리로 주종을 바꿔야겠다. 우리의 실생활에서 오래도록 사랑을 받은 막걸리가 아니던가? 이 술 갑자기 맛이 더한 듯하다. 나도 벌써 막걸리의 마니아가 되었는지

여주 장에 가면 꼭 들려야 할 집이 있다. 5일만에 서는 여주 5일장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5일장 에서는 두 번째로 큰 장이다. 여주는 5일과 10일이 장날이다. 5일장은 어떤 것보다도 먹거리가 많다는 것이 즐거움이다. 장을 돌다가 보면 하루 종일 먹어도 먹을 것이 남는다고 한다. 그만큼 5일장은 풍성한 곳이다.  

 

그래도 5일장은 생명력이 있어

 

대목이 되면 5일장은 온통 난리 법석이다. 아마도 제수 준비를 하느라 나온 사람들이다. 5일장은 아무래도 대형 장  보다도 30% 정도 싼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 같다. 여주장은 서울 등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도, 그만큼 많은 물건과 좋은 것을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인 듯하다. 여주장에 나갈 때마다 뵙는 노점상 할머니는 오늘도 자리를 지키고 계시다.

 

매번 장에 나갈 때마다 뵙는 할머니다. 오늘도 빠지지 않고 장에 나오셨다. 이것저것 저렇게 챙겨서 나오시려면 힘도 드셨을 텐데. 사람들은 그래도 평소에 30% 정도의 장꾼들이 나온 5일장을 찾는다. 먼 길을 걸어서 나오셨다는 한 분은 '그래도 5일장이라 이렇게 장이 서지'라고 하신다. 끈질긴 5일장의 생명력이다. 비가 오고 날이 아무리 추워도, 5일장은 거르는 법이 없단다.


 

전 한 장에 1,000원이다.

 

2,000원의 행복, 빈대떡 한 장에 막걸리 한잔

 

5일장을 찾으면 가끔 들르는 집이 있다. 빈대떡도 있고, 돼지껍데기 볶음도 있다. 내가 이 집을 찾는 이유는 2,000원만 가지면 5일장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전이나 메밀전 한 장에 단돈 1000원, 그리고 막걸리 한 잔에 1,000원이다. 2,000원만 가지면 허기도 면할 수 있고, 장 분위기를 혼자 다 느낄 수가 있다. 이렇게 싸게 장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5일장이다.

 

"많이 파셨어요?"

"손님이 없어서 팔지도 못했어."

"그런데 빈대떡 한 장에 1000원 받고, 막걸리 한잔에 1000원 받아도 남는 것이 있나요"

"남기는 하겠지. 그런 것은 계산 안 해보았어."

"그렇게 싸게 파시는 이유가 있으세요?"

"어르신들 때문이지. 요즈음은 장에 나와도 재미가 없다고들 하시거든. 이렇게 빈대떡 한 장에 막걸리 한잔이면 속이 든든하시다는데. 그 어르신들 때문에 이것은 빠트릴 수가 없어. 이게 다 정이지."

 


 양은 대접에 가득 떠 막걸리가 한 잔에 1,000원이다.

 

가족들과 함께 장에서 식당을 하시는 이종진옹(73세). 연세가 적지 않으신 분이 꼭 '어르신들'이라고 하신다. 평소에는 식당을 하시지만, 장날이 되면 식당 앞에 난전을 펴시고, 천 원짜리 빈대떡과 천 원짜리 막걸리를 파신다. 2000원의 행복을 파시는 셈이다. 늘 해오시던 것이라 오늘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혹 한 분이라도 장에 나오셨다면 막걸리 한잔 드시러 오셨는데, 드실 수가 없으면 서운하실까봐 오늘도 난장을 펴셨단다.

 

5일장의 훈훈한 인정이요, 끈질긴 생명력이다. 5일장 안에는 오늘따라 장사치들의 고함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다. '하나라도 팔고 들어가야지'라는 생선가게 아저씨의 외침소리다.

왜? 탱자가 익어가는 가을에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순흥을 가? 이상한 사람이구만’ 그래 난 이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려, 안 가고는 견디질 못한다. 나하고 순흥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순흥은 경북 영주시에 속한다. 순흥에는 유명한 소수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 순흥을 왜 술병을 들고 찾아갈까?

소수서원은 조금 지나면 금성대군 신단이 있다. 그곳을 조금 지나 좌측 마을 길 안으로 들어서면, 내가 가을마다 찾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다. 이 계절, 탱자가 익어가는 계절만 되면 그곳을 찾아가 술 한 잔 따라놓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허허로운 벌판의 땅굴 속에서 죽어간 금성대군 때문이다.


32세에 처형이 된 불귀의 원혼

금성대군은 이름이 유이며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이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단종의 숙부이기도 한 금성대군은, 세종 15년인 1433년에 대군으로 봉해졌다.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복위하자 형 수양과 함께 단종을 도울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수양이 왕위에 오를 야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반대한다.

단종 3년인 1455년 금성대군은 모반을 했다는 협의를 뒤집어쓰고, 현 경기도 연천인 삭녕으로 유배가 된다. 세조 2년인 1456년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를 하자, 이에 연루되어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옮겨졌다. 금성대군은 이곳에 와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관노의 고발로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을 당한다.



위리안치, 그 통한의 형벌이여

조선시대 형벌 중에 유배형에 해당하는 것은 부처와 안치가 있다. 부처란 유배형을 당한 죄인이 부인과 함께 유배지에 머물며 생활을 하는 형벌이다. 안치란 부처형을 받은 죄인이 왕족이나 고관일 경우, 유형을 받은 장소에서 주거와 행동을 제한시키는 형벌제도이다. 아마도 처음 이곳 순흥에 온 금성대군은 단순한 안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치에도 종류가 있다. 고향 등으로 행동을 제한시키는 본향안치. 육지와 떨어진 절해고도에 안치를 시키는 절도안치. 그리고 가장 중형에 속하는 위리안치이다. 위리안치는 형벌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형벌이라고 한다. 큰 죄를 범한 죄인을 허허벌판에 돌우물 같은 웅덩이를 파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형벌이다.




이곳 순흥에 바로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 남아있다. 위리안치는 그야말로 인간을 말려죽이기에 적당한 형벌이다. 장정의 키보다 높은 돌 웅덩이 안은 지름이 2m가 조금 넘을만한 둥근 형태이다. 그 안은 맨바닥이고, 어디 편하게 기댈 수조차 없다. 사방이 모두 돌로 쌓여 있으니, 벽에라도 기댈라치면 배기기 일쑤이다.

거기다가 인근에는 물이 흐르기 때문에 바닥은 축축하다. 어디 한 곳 발을 뻗고 편히 몸을 누일만한 곳이 없다. 지붕은 비를 피하도록 덮었다고 하지만, 비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웅덩이 안으로 물이 차 들어올 것이다. 웅덩이 밖으로 나간다 해도 도망을 갈 수가 없다. 위리안치지 주변이 모두 탱자나무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촘촘히 심어 놓은 탱자나무 울타리를 어떻게 빠져 나갈 것인가? 가시에 온 살이 찢겨도 빠져 나가지를 못한다. 나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입구뿐이다. 그곳은 더욱 나갈 수가 없다. 결국 처형을 당할 때까지, 그 습한 웅덩이에서 발 한 번 제대로 뻗지 못하고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 그것이 위리안치이다.

오늘 이 술 한 잔으로 몸이나 녹이시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순흥을 간다. 술 한 잔 따라놓지 않으면 죄 없이 역사의 제물로 희생이 된 분에게 너무 죄스럽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처음으로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찾아간 곳에서, 역사의 아픔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0월에 이곳을 다시 찾았다. 술 한 병을 사들고. 그 뒤 10월이면 이곳을 간다. 요즘 사극이 인기를 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재미로 보는 사극 뒤편에는 이런 엄청난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저 술 한 잔 따라놓고, 넋두리를 해댄다. 세상을 달라졌다고 해도, 아직 대군의 통한의 아픔을 따라 사는 자들은 그치지를 않았노라고.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순흥으로 길을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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