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소재하고 있는 내소사. 년 중 아무 때나 찾아가도 아름다운 절집이다. 하지만 난 굳이 내소사를 가려면 가을에 가라고 권하고 싶다.

 

내소사의 가을은 보종각 앞 수령 1,000년이 지난 느티나무 한 그루에서 시작이 된다. 이 나무의 나이를 볼 때, 내소사가 얼마나 오래 된 고찰인가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수령이 천년이라니. 아마도 1982년도에 부안군의 보호수로 지정이 되었으니, 자금은 지정을 받은 후에도 벌써 3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나무의 둘레가 7.5m에 높이가 20m나 되는 거목이다. 가을이 오기 시작하는 내소사의 이 보호수는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황홀해진다. 하물며 단풍으로 물든 나무를 본다면 오죽할까?

 

틀어진 기둥, 쓸데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소사에 가면 또 한 가지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것이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설선당과 요사이다. 이 전각을 바라보노라면, 그 기둥에 눈길이 멈춘다. 그리고 피식 웃음이 나온다. 제대로 된 절집 한 곳을 찾아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 기둥이 참으로 사람을 뿌듯하게 만든다. 올곧지 않고 뒤틀어진 기둥. 그 기둥에는 정말로 부처님의 마음을 보는 듯하다. ‘세상에 쓸데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기둥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멋대로 휘어진 이 기둥에서 우리는 참 답답한 세상에서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음에 감사를 하게 된다.

 

돌담 위에 돌탑들

 

누가 그랬을까? 네모난 막돌로 가지런히 쌓은 돌담 위에 누군가 작은 돌탑들을 쌓아놓았다. 아마도 저 돌들을 하나씩 올리면서 마음속으로 간구를 했을 것이다. 그렇게 가지런한 작은 돌탑들이 돌담 위에 죽 늘어져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지 않은지. 내소사는 그렇게 경내를 돌아보면 어디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듯 보인다.

 

 

그 돌담 안에 무설당(無說堂)’ 이라니. 구태여 설법을 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염화시중의 미소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는 뜻인지? 그저 세상 살아가면서 저렇게 미소 하나만으로도 모든 속내를 알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깊은 마음이 어디 있을까? 내소사가 좋은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절집

 

내소사, 참 희한한 절이다. 왜 내소사는 아무리 많이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 것일까? 아마 전생에 이곳과 깊은 인연이 있었는가도 모르겠다. 하기에 현생이 이렇게 수도 없이 절집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전생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을 것만 같다. 그저 이 곳에서 한 생을 보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애틋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부안 내소사. 봄도 오지 않았는데 무슨 가을타령이냐고 하겠지만, 지난 자료를 뒤적이다가 문득 발견한 내소사의 사진첩. 그 안에 한참이나 잊고 있었던 능가산 내소사가 마음에 들어와 있었음을 왜 몰랐을까? 올 가을은 필히 능가산의 불타는 단풍과, 가을이 주절주절 열려 떨어지는 내소사의 천년 느티나무를 보러 가야겠다.

장수군 천천면 비룡리 38번지에 소재하는 신광사. 42일 토요일 오후, 장수에서 726번 지방도를 타고 천천면 소재지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도로변에 성수산 기슭에 자리한 신광사라는 절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에는 탑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문화재가 절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내판을 따라 좌측으로 접어들면, 신광사로 들어갈 수가 있다.

 

신광사는 신라 흥덕왕 5년인 831년에 무염국사가 창건하였고, 조선조 헌종 14년인 1848년에, 당시 장수현감인 조능하에 의해 중창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때도 운장스님의 노력이 함께 했다고 하지만, 현감에 의해서 사찰이 중창이 된 것은 특별한 일이다. 이 신광사에는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으로 된 맞배지붕의 대웅전아 있다. 이 대웅전은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너새기와를 올린 대웅전이라니

 

너새기와란 몇 가지 뜻이 있다. 우선은 측면에 대는 박공 옆에 직각으로 대는 암키와를 너새기와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지붕을 이을 때 사용하는 얇은 조각의 돌기와를 말하기도 한다. 이 신광사 대웅전에서 말하는 너새기와는 지붕을 얹은 얇은 돌로 된 기와를 말하는 것이다.

 

신광사를 찾아 문화재 안내판을 찾아보니 대웅전 앞에 서 있다. 대웅전이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설명에 너새기와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너와인줄을 모르고 있다가, 설명을 읽고 다시 보니 정말로 너와로 지붕을 올렸다. 어떻게 절집 대웅전지붕을 돌을 얇게 편을 떠 만든 너와로 올린 것일까?

 

 

특이한 형태의 신광사 대웅전

 

신광사 대웅전의 지붕은 모두 얇은 돌로 만든 너와로 덮었고, 맨 위 부분만 기와를 얹은 형태이다. 건물의 양 끝이 처져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붕의 끝을 위로 약간 올렸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무게를 받치는 있는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처마는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축대를 쌓은 중앙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다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대웅전을 지었다. 대웅전의 기둥 받침인 주추는 자연석 그대로를 이용했으며,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주심포 사이의 벽에는 딴 곳에서 흔히 보이는 비천상이나 보살상이 아닌, 특이한 그림을 그려 넣었다. 창호도 정면 세 칸 중 가운데 칸은 두 짝 미닫이로 빗살문이며, 양쪽 칸은 두 짝 미닫이로 아()자형 문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 협시보살은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과 실천수행의 상징인 보현보살을 모셨다. 대웅전 천정과 마루는 우물마루와 우물천장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천정의 문양은 대단히 화려하게 그려 넣었다.

 

돌담이 아름다운 신광사

 

신광사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시멘트나 흙을 사용하지 않고 쌓은 돌담이다. 경내를 둘러싼 돌담은 높이가 1m 50cm 정도가 된다, 반듯하게 쌓은 돌담이 아름답다. 어떻게 흙조차 사용하지 않고 이렇게 반듯하게 돌담을 쌓았을까? 그렇게 쌓기 위해서는 많은 공을 들였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보다 더 궁금한 것은 대웅전의 너새기와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너새기와를 올렸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중간에 누군가에 의해 너새기와로 대웅전 지붕을 올렸다는 것인데, 거기에 대한 설명이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신광사는 신라시대 처음으로 지어진 후, 고려를 거쳐 조선조 1597년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인조 27년인 1649년에 천혜선사가 중창을 했다고 전한다.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신경준의 가람고, 조선 정조 3년인 1779년에 우리나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절의 존폐, 소재지, 연혁 따위를 적어서 펴낸 책인범우고등에도 신광사의 명칭이 보인다.

 

신광사 대웅전의 지붕이 언제부터 너새기와를 올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마도 우리나라 절중에 이렇게 대웅전 기와를 편돌인 너새기와로 올린 곳은 유일한 곳이 아닌가 생각한다. 신광사는 깨끗하게 정리가 된 경내. 반듯하게 쌓여진 돌담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절이다.

계룡산 구룡사지 탐방기

 

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389번지 외 4필지는 충청남도기념물 제39호 공주구룡사지(公州九龍寺址)로 지정이 되어 있다. 구룡사지가 있는 상신리는 계룡산의 북으로 뻗은 중턱에 절터가 있으며 이 지역을 법당골, 부도골 등으로 부르고 있다. 마을에는 많은 석조물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주변에서 〈구룡사〉 라고 찍힌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구룡사터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의 안쪽 절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는 당간지주가 서 있으며, 주춧돌과 장대석, 부도의 받침돌이 남아 있었는데,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에는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들로 보아 백제 후기나 통일신라시대 전기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계룡산 북쪽의 절 구룡사

 

구룡사지는 계룡산의 사방에 있는 사찰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동에는 동학사, 서에는 갑사, 남에는 신원사, 그리고 북에는 구룡사가 있다. 구룡사를 제외한 나머지 절집들은 난을 당하기는 했지만, 아직 건재하고 구룡사만 사라진 셈이다.

 

구룡사가 있던 공주시 상신리는 계룡산 자락 골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대전 유성에서 공주 공암 쪽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동학사로 가는 길이 있다. 이곳을 박정자 고개라고 부르는데 조금 더 가면 온천리에서 좌측으로 계룡산 쪽으로 난 길이 있다. 먼저 나오는 곳이 하신리 마을이고 그 곳을 지나면 상신리 마을이 나온다. 대전, 공주를 가는 길에서 상신리 까지는 6km 정도가 된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다. 대전에서 방송일을 할 때 취재를 하려고 몇 번 들렸던 상신리마을은 참 운치있는 마을이었다. 마을 안길은 흙길에 돌이 듬성듬성 박혀있고, 마을의 담장은 돌로 쌓아 놓아서 그 위로 담장이가 타고 오르는 것이 퍽이나 시골스럽고 인상적이었던 곳으로 기억이 난다.

 

바위 위 덩그마니 앉은 소나무 한 그루

 

상신리는 찾아 들었을 때 처음 만나는 것은 바로 개울 곁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솟아있는 한 그루 소나무 때문이었다. 그 소나무가 어찌나 그리도 생명력이 있고 멋있어 보였는지 모른다. 이번 길에도 그 소나무는 그렇게 한 결 같이 바위 위에 뿌리를 박고 서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그 싱싱하던 푸름을 잃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바위에는 깊게 무엇인가를 적어 놓은 듯한 흔적들도 희미하다. 아마 장수를 위해 이름이라도 적어 놓은 것은 아닐까?

 

바위를 지나면 마을로 들어가는 우측 산자락에는 천하대장군이 좌측 개울가에는 지하대장군이 솟대와 함께 서 있다. 상신리는 산제(山祭)도 함께 지내는데 이 마을은 산제를 정성들여 지내지 않아서 염병이 돌았다고도 하고, 마을의 장승터에서 나무를 자른 사람이 화를 당했다는 이야기들도 전한다. 그래서 정월 열나흩날이 되기 전에 미리 장승이 있는 곳에 금줄을 치면 그날부터 외지인은 상신리로 들어갈 수가 없다.

 

마을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제관을 선출하면 그날부터 금기를 지키게 된다. 우리 풍속에는 제를 지내는 제관들의 금기는 통례적으로 부부가 합방을 금지하고, 비린것과 날것을 먹지 않으며, 매일 냉수에 목욕을 하고, 출타를 금하는 등 까다롭게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

 

상신리의 장승은 양편에 2기씩 서 있는데 눈을 치켜뜨고 이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다. 복판에는 각각 <天下大將軍>과 <地下大將軍>이라고 묵서를 해 놓았다. 장승을 지나면 마을 첫 집이 식당이다. 그 모서리에는 금줄을 매어 놓은 선돌이 보인다.

 

 

옛 절터를 알리는 당간지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차를 돌릴 수 있는 공터가 보이는데 그 앞에 당간지주가 있다. 한편에는 돌담 위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가 그래도 옛 정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돌담은 그대로인데 집들이 많이 변했다. 하기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세월이었으니, 어찌 옛 모습 그대로이길 바랄쏘냐?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마을 공동 우물은 덮개를 덮어 놓았고 그 맑은 물이 흐르던 물길은 메말라버렸다. 마을 안길이 예전에는 흙길에 돌을 박아 놓아 걷는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온통 시멘트로 발라버려 삭막한 기분마저 든다. 어즈버 세월이 이리도 변하게 만들었을까? 마을을 돌고 보니 무엇인가 섭섭한 기분이 든다. 그대로 있기를 바란 내가 잘못이긴 하지만.

 

 

과거에 구룡사가 어느 정도의 절집이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존하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의 규모로 볼 때, 아마 그 정도의 절집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할 뿐이다. 계룡산 북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구룡사지에 남아있는 당간지주. 윗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여러 쪽의 석재를 이용한 기단 위에 서 있다. 기단면에는 장방형으로 구획된 내구에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고 지주 사이에는 원형의 철통을 세웠던 주좌가 남아 있다.

 

오랜 시간 이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과 무언의 대화를 했을 구룡사지 당간지주. 바람도 없는 날인데, 갑자기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결에 날리는 흙먼지가 눈을 맵게 만든다. 세월이 지났으니 모든 것이 변해야하겠지만, 변화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오늘 또 마음의 아름다움을 하나 상신리에 버려두고 길을 떠난다.

이천보 고가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만든다. 추운 날씨 탓인가 문은 모두 비닐로 막았고, 마당은 왠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조선조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진암 이천보가 살았던 집이니, 그 이전부터 집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천보는 숙종 24년인 1698년에 태어나, 영조 37년인 176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 점으로 보아 이천보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면, 이곳은 300년 이상 된 고가일 것이다. 그 오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켜 온 이천보 고가. 가평군 상면 연하리 226번지에 소재하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5호이다.

 

 

안채는 사라지고 사랑채가 안채로 쓰여

 

이천보 고가에는 안채가 없다. 6·25 동란을 거치면서 안채가 불타 없어졌다는 것이다. 아마 안채가 있었다고 하면 더 멋진 집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축물은 사랑채와 행랑채다. 행랑채 맞은편 건물은 최근에 지은 듯하다. 현재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일각문이 원래 대문의 자리였는지는 모르겠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ㄱ(기억)자형으로 사이를 벌려 자리한다. 사랑채의 정면 담에 일각문을 내어, 현재는 그 일각문이 대문을 대신하고 있다.

 

안채로 사용하는 사랑채는 고종 4년인 186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ㅡ(일)자형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지어졌다. 동향인 사랑채는 잘 쌓은 장대석 기단 위에 높이 45cm 정도의 사다리꼴 주추를 사용했다. 사랑채를 마주하고 좌측에 보이는 목조건물인 누마루 방은 고종 때 사랑채를 중건할 때 붙여지은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좌로부터 마루의 끝과 맞춘 누마루 한 칸과 방, 마루방인 대청과 두 개의 방이 연이어 있다. 누정과 같은 형태로 붙인 누마루는 3면을 창호로 둘렀으며, 여름이면 문을 모두 열어 바람을 맞게 만들었다.

 

일반적인 누정과 같은 누마루는 밖으로 돌출이 되는데 비해, 이천보 고가의 누마루 방은 건물 밖으로 돌출이 되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집 주인의 나아가지 않는 겸손함이 배어있다. 사랑채에는 상고당(常古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항상 옛것을 기억하라는 뜻인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수령 300년의 향나무가 고가의 연륜을 알려주고

 

이천보 고가 누마루방 뒤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된 향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향나무 한 그루로 인해 이천보 고가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고가가 6·25 동란 시에 화를 입었음에도 이 향나무는 온전하게 살아남았다. 그래서인가 이 향나무의 모습이 더욱 신비롭기만 하다

 

수령이 300년이 넘었다는 이 향나무는 가슴높이의 둘레가 84cm에 높이가 15m나 된다. 이 향나무는 이천보의 선조가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이 나무의 수령이 이천보 고가의 연륜을 알려주고 있다. 이천보는 1698에 태어나 1761년까지 생존했다.

 

이 나무를 이천보의 조상이 심은 것이라고 하면, 결국 이천보 고가는 300년이 훨씬 지났으며, 이 향나무의 수령도 300년 이상이어야 한다. 각종 공해에 잘 견디어낸다는 이천보 고가의 향나무. 아마 이 집안의 끈질김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돌담 벽으로 멋을 낸 행랑채

 

행랑채는 안마당에서 바라보면 우측에 방이 두 칸이 있고 부엌이 있다. 부엌 좌측에는 헛간과 곳간이 있다. 이 행랑채 곳간 쪽의 벽은 돌로 만들었다. 집 주위를 두른 담장은, 사랑채에서 볼 때 집안의 전체 분위기를 아늑하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또한 무료하게 맨 벽을 바라보기 보다는, 돌담 벽으로 꾸며 나름대로의 멋을 부렸다.

 

 

6·25 동란 때 불이 나서 안채 등이 소실이 된 이천보 고가. 전체적으로는 집 구조가 어떻게 꾸며졌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사랑채와 행랑채의 위치로 보아, 안채의 경우 행랑채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부가 소실이 되는 바람에 고택으로서의 가치가 높지 않다고 하여 지방 문화재자료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한 때 이 고가의 모습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을 것 같다.

 

 

 

아픔의 세월이 느껴져

 

300년이 더 지난 이 이천보 고가의 사랑채 뒤에 있는 향나무나 행랑채의 담 벽, 이층으로 쌓은 장대석의 기단 등을 보아도 이 집이 얼마나 운치가 있었던 집이었나를 가늠케 한다. 그러나 일각문 앞에 문화재 안내판이 없었다면, 그저 어느 시골의 토호쯤이 살았을 그런 집으로 알았을 것이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던가?

 

 

실록에는 이천보가 병으로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실은 장헌세자의 평양 원유사건에 책임을 느껴 음독자살했다고도 전한다. 강직한 이천보의 성격상 그런 책임을 쉽게 넘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마 이 집이 퇴락해 버린 것도, 그런 주인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있었음은 아닌지. 긴 세월 사랑채 뒤에서 온갖 역사의 소용돌이를 다 지켜 본 향나무는 알고 있으려나?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 산139번지에는, 주변이 송림으로 쌓인 곳에 옛 고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가야시대의 토기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옛날부터 묘역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효자리에 있는 고분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42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조선 태종 때 사온서 직장을 지낸 하현의 무덤이다.

수곡면에 있는 효자리 고분군은 수곡초등학교로 향하는 도로 옆에 형성된 요산마을의 서남쪽에 있다. 해발 70m 전후의 낮고 평평한 구릉에 있는 이 고분은, 계단을 조성해 놓아 오르기에 편하다. 6월 10일 오후, 진주에 들릴 때마다 찾아가고 싶었던 곳이다. 진주 수곡은 진양 하씨들의 유적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조상들의 유적을 돌아보다.

개인적으로는 조상의 고묘이다. 하기에 기대를 걸고 계단을 올랐다. 오르는 계단 주변에는 잡풀이 무성해, 자손으로서 낯이 뜨겁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풀이라도 베어내 정리를 하고 싶은 생각이다. 저만큼 고분이 보이는데 여기저기 계단 주변에 석재들이 널려있다. 어디에 쓰였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곳에는 예전부터 많은 고분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런 곳에 쓰였던 석재들이 아닐까?

이곳에 있는 분묘는 조선조 태종 때 사온서직장을 지낸 하현과 부인 포산 곽씨의 묘이다. 하현(河現)의 묘는 화강암을 이용하여 높이 15cm, 길이 210cm의 지대석을 쌓고, 둘레돌인 갑석을 갖춘 팔각형의 호석을 마련하였다. 그 위에 흙으로 봉토를 완성한 형태를 하고 있다. 묘의 앞에는 비석과 상석, 좌우에는 높이가 170cm 정도의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사온서’란 고려시대에 궁중에서 쓰는 술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고려 문종 때 설치된 ‘양온서’를 충렬왕 34년인 1308년에 사온서로 고쳤으며, 직장이란 정7품의 벼슬을 말한다. 공민왕 5년인 1356년에 그 명칭을 다시 양온서로 고치는 등, 여러 번 이름이 바뀌면서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조선조 초기에 마련한 유례가 드문 분묘

이 고묘는 팔각형으로 조성을 하였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특히 갑석의 모서리마다 반전된 귀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형태는 마치 석탑의 옥개석과 같은 형태이다. 외형이 이러한 형태의 분묘는 유례가 드물 뿐 아니라, 축조연대가 조선조 초기가 확실하기 때문에 이시기 묘제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먼저 머리를 조아려 조상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 난 뒤, 주변을 찬찬히 살펴본다. 고묘 주변의 마을은 진양 하씨들의 세거촌이다. 이곳에는 이 고묘 외에도 몇 기의 고묘가 더 있다고 한다. 주변을 돌담으로 둘러치고 앞으로는 트여있는 고묘 주위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그저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아도 명당이란 생각이다.

비석 앞에 놓인 두 개의 상석 측면에는 탱주와 같은 중앙 기둥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앞쪽의 상석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모든 것들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고묘에서 볼 수 있는 형태와는 많은 차이가 난다. 왜 조상님들은 이렇게 팔각으로 된 고묘를 이곳에 조성했던 것일까? 당시의 묘라고 해도 이런 형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다시 찾아와 조상님께 대한 예를 올려야겠다.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는 많은 문화재가 전하고 있는 곳이다. 500년 세월을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눈앞으로 펼쳐지는 들판을 내다보고 있는 선조. 이곳을 찾아오다가 보니 마을에 양조장 하나가 있었는데, 사온서 직장을 지내셨다는 것을 알았다면 막걸리라도 한 병 사들고 올라올 것을 그랬다고 뒤늦은 후회를 한다.

오래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답사길. 다음에는 꼭 술 한 병 사들고 찾아와, 조상님에 대한 예의를 갖추겠다고 다짐을 한다. 내려오는 길에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는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후손으로서의 예가 부끄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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