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정자. 벼랑 밑 연못에 연꽃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병풍처럼 깎아내린 암벽 위에는 정자가 서 있다. 병암정, 황진이가 노닐던 곳이다. 드라마 황진이의 촬영장이 될만큼 아름다운 정자다.

 

병암정 앞 연못에 핀 연꽃들

 

병암정은 경북 예천군 용문면 성현리에 소재한 정자이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3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병암정은 예천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권원하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병암정이 유명한 것은 드라마 <황진이> 때문이다.

 

 
 드라마 황진이의 촬영지다

 

병암정에 오르면 앞으로 들판이 시원하게 보인다. 정자는 이외로 단출하다. 가운데는 마루를 놓고 양편으로 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전면에 길게 마루를 두었다. 이 정자를 지은 권원하 선생은 이 마루에서, 너른 들판을 내려다 보면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을 것이다.

 


 경북 문화재자료이다

 병암정에 걸린 현판

경관이 뛰어나 드라마 촬영장이 되기도 했던 병암정. 그러나 정작 이 병암정은 나라의 독립을 걱정하는 곳이었다. 권원하 선생이 이 정자를 짓고 멀리 들판을 바라보며 내 나라를 생각하고, 떠가는 구름을 보고 나라를 위해 불철주야 달렸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정자를 찾아다니면서 그 경관만을 본다. 하지만 그 정자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왜 정자를 지었을까? 단순히 시를 짓고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정자는 그 안에 숱한 이야기를 간직한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찾아내기 위해 주변을 다니면서 이야기를 듣는다.    

 


병암정은 단순한 정자가 아닌 나라를 걱정하는 독립운동의 산실이었을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 병암정. 세월이 지나면 그 본래의 뜻이 퇴색해 버린다. 병암정은 독립운동의 숭고한 뜻을 가진 정자에서, 명기 황진이가 거닐던 드라마의 촬영지로 바뀌었다. 하지만 세월은 흐르고 사람들의 사고도 바뀌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라도 병암정이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발길이 이어진다면, 권원하 선생의 뜻도 함께 알려질 것이다. 멀리 들판 위를 떠가는 구름 한 점이 숨을 고른다. 

  1. The 노라 2013.08.15 06:37 신고

    제가 드라마 황진이를 본 적이 없어서 "아~ 기억난다"는 못하지만 병암정 경치가 정말 좋다는 것에 이의가 전혀 없습니다. 아름답네요~~
    그런데 이 좋은 경치에서 권원하 선생께서는 나랏일 걱정하시느라 잠도 못 이루셨을 지 모르겠어요. ㅠㅠ

  2. 참교육 2013.08.15 07:14 신고

    바쁘신 와중에 예천까지 다녀오셨군요.
    더위도 이제 요 며칠간이 고비가 될 것 같습니다.
    토요일날 뵙겠습니다.

  3. 해바라기 2013.08.15 07:26

    병암정 빼어나게 아름답습니다.
    황진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셔요.^^

  4. 예또보 2013.08.15 08:03 신고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 ㅎ
    덕분에 잘보고갑니다

  5. landbank 2013.08.15 08:15 신고

    야 정말 경치가 끝내주는 곳이네요 ㅎㅎ
    잘보고갑니다

  6. 朱雀 2013.08.15 08:24 신고

    드라마 <황진이>에 나온 곳이 병암점이었군요. 근데 단순히 정자가 아니라 나라를 생각하는 곳이었다니...새삼 느끼는 바가 큽니다...^^

  7. 2013.08.15 08:44

    비밀댓글입니다

  8. 포장지기 2013.08.15 09:51 신고

    글 잘보고 갑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란 말이 있죠.. 건강 유의하시며 축제 준비 하세요^^

 

면암 최익현 선생. 조선 말기의 대학자이며, 의병장이기도 하다. 나라를 구하고자 살신성인 한 선생은 한 때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 171에 소재한 모덕사 안에 자리한 고택에서 기거를 했다. ‘중화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고택은, 1990년 4월 선생이 경기도 포천에서 ‘호서 정산’으로 이주하여 거주하였던 집이다.

 

이제 113년이 된 이 한옥은 당시 선생이 일제에 의해 가택연금 중에 계셨던 곳이기도 하다. 선생은 이 집에서 많은 사람들 모아놓고 강의를 하고,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 이 집에서 선생이 사신 것은 고작 6년 여. 1906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왜헌병의 감시를 피하여 야간을 틈 타 떠나신 곳이다.

 

 

전국에 남아있는 선생의 사우

 

면암 최익현선생만큼 많은 사우와 유적 등에서 모시고 있는 분도 그리 흔치는 않다. 선생은 현재 청양 모덕사를 비롯하여, 경기도 포천의 채산사, 경기도 가평의 삼충단, 전북 군산의 현충단, 전북 진안의 이산묘, 진안 마령면의 영곡사, 전북 순창의 지산사, 전북 정읍의 시산사,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호남의병 창의지인 무성서원 등에 선생의 영정과 비 등이 모셔져 있다.

 

이 외에도 전북 고창의 도동사, 광주 광산의 대산사, 전남 함평의 월악사, 전남 곡성의 오강사, 전남 구례의 봉산사, 전남 보성의 모충사, 전남 무안의 평산사, 전남 화순의 춘산사 등에도 선생의 영정과 위폐 등이 모셔져 있다. 전남 신안군에는 여기저기 선생의 흔적이 보인다.

 

 

경상도와 제주도, 일본, 강원도 등에도 선생의 유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경북 울진의 아산영당에 영정, 경남 하동의 운암영당에 영정이, 제주도에는 선생의 유적비 등이 있으며, 금강산에는 선생의 글씨가, 대마도에는 순국비가 있다.

 

일본의 쌀 한 톨,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아

 

면암 최익현 선생은 이곳 중화당에서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왜경에 나포가 되어 대마도에 구금이 되었는데, 일본 땅을 밟지 않겠다고 버선 발 속에 조국의 흙 한줌을 넣었다고 한다. 또한 물 한 동이를 갖고 배에 올랐는데, 일본 땅으로 끌려가서는 단 한 톨의 쌀도 입에 대지 않고 있다가, 1907년 단식 끝에 순국하셨다.

 

 

면암 선생은 일본 대마도에서 1906년 11월 마지막으로 임금께 글을 올렸다. ‘유소’라는 이 글에 보면 선생의 애국충정이 그대로 배어있다.

 

‘죽음에 이른 신 최익현은 일본 대마도에 왜놈 경비대 안에서 서향 재배하고, 황제폐하께 말씀을 올립니다. 신이 이곳에 온 이래 한술의 쌀도 한모금의 물도 모두 적의 손에서 나온지라, 차마 입과 배(먹는 것)로써 의를 더럽힐 수 없어 그대로 물리쳐 버리고 단식으로 지금 선왕의 의리에 따르고 있습니다.(중략)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나라일이 할 수 없이 이리 되었다고 속단마시고, 큰 뜻을 더욱 굳게 하여 과감하게 용진하여 원수 왜놈들에게 당한 치욕을 되새겨, 실속 없는 형식을 믿지 마시고, 놈들의 무도한 위협을 겁내지 마십시오. 또한 간사한 무리들의 아첨을 듣지 마시고, 힘써 자주체제를 마련하여, 길이 의뢰하는 마음을 버리고, 더욱 와신상담의 뜻을 굳게 하여 실력 양성에 힘써서 영재를 등용하고, 군민을 무양하여 사방의 정세를 보살펴서 일을 꾸미면, 백성들은 진실로 임금을 높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올 것입니다.(하략)‘ - 자료출처 모덕사

 

 

이등박문과 원세개도 만사를 보내와

 

면암 최익현 선생은 1907년 1월 1일에 순국하시니, 제일 먼저 이등박문이 만사로 조문을 했다고 한다.

 

‘대한 왕께 절 올리며 임을 위해 곡 하올제

흐르는 눈물 바람에 날려 온 하늘에 비가 오네.

고국명산 그 어느 곳에 임의 유택 정하올가?

그 좌향 묻지 마라 백이의 서산에서 노중연의 동해여라‘-이등박문

 

 

7월 14일 장마비속에 찾아간 청양군. 선생이 살다 가신 중화당은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조상의 위폐를 모신 영모재로 구성되어있다. 중화당의 사랑채 앞에서 잠시 집을 바라다본다. 이 집을 한 바퀴 돌면서 집에 대해 곳곳을 소개한다는 것이 새삼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그저 이곳에서 살다가 타국땅에서 순국하신 선생의 뜻에 만분지일이라도 알고 간다면, 그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을.

 

사랑채 툇마루 앞에 걸린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충효전가(忠孝傳家)’, 충과 효를 대대로 물리는 집이라는 소리이다. 아마도 선생의 그 충정을 이 한 마디로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세차게 퍼 붓던 장맛비가 잠시 멈추었다. 중화당 앞 연못가에 조성한 선생의 동상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선생이 사시던 집조차 돌아보기가 죄스럽기 때문이다.

  1. 온누리 온누리49 2013.07.30 01:53 신고

    예약한 글입니다
    30일에는 밖에서 볼 일이 많아 일일이 찾아뵙지 못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막바지에 접어든 7월, 마무리 잘 하시고요
    좋은 날 되시기 바랍니다^^

  2. 해바라기 2013.07.30 06:25

    최익현선생을 기릴수 있는 중화당이군요.
    그분의 숨소리가 간직된듯 합니다.
    좋은날 되세요.^^

  3. *저녁노을* 2013.07.30 06:52 신고

    잘 관리되어야할 것 같은 느낌이...

    건강하세요. 늘 바쁘시군요.ㅎㅎ

  4. 주리니 2013.07.30 06:57

    그런 꼬장꼬장한 결의... 본받아야죠.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5. 스탠드 2013.07.30 07:09 신고

    왜놈의 음식도 마다하고 단식을 하신 최익현 선생님!!
    그저 가슴이 찡합니다
    워크뷰 작성

  6. 예또보 2013.07.30 07:13 신고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네요
    덕분에 잘알고 갑니다

  7. landbank 2013.07.30 07:18 신고

    덕분에 너무 잘배우고 갑니다
    즐거운 화요일 되세요

  8. The 노라 2013.07.30 07:35 신고

    최익현 선생의 유적지가 청양에 있는 줄은 정말 몰랐네요. 그저 구한말 의병장이셨고 대마도에서 항거하시다가 순국하신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청양에도 대단한 곳이 많이 있었군요. 감탄~~

  9. 참교육 2013.07.30 07:37 신고

    애국지사는 여기서도 홀대를 받는 듯합니다.
    육영수생가에 가보니 왕가를 버금할 정도로 꾸며놨더군요. 애구교심이니 민족정기라는 말이 부끄럽습니다.

  10. 펨께 2013.07.30 07:44

    진정한 애국지사였군요.
    이런 분 오래 기억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11. 귀여운걸 2013.07.30 07:48 신고

    최익현 선생의 고택이군요~
    이렇게 훌륭하신 분의 뜻을 어찌 다 알겠어요..
    온누리님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고 공감가네요^^

  12. 라이너스™ 2013.07.30 08:06 신고

    덕분에 구경잘하고갑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13. 행복끼니 2013.07.30 09:07

    중화당이야기~~
    잘보고갑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14. 데미안 2013.07.30 09:09

    최익현 선생님의 기품이 고택에도 서려있는 것 같습니다.ㅎ

  15. 광제 2013.07.30 09:47 신고

    제주도에도 선생의 유적이 있었군요...
    모르고 있어습니다...

    많이 덥지요? 요즘 몸은 건강하신지요..
    시원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16. 모르세 2013.07.30 09:54 신고

    오랜만에 최익현 선생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된것 같네요.우리는 역사를 너무 쉽게 잊고 살죠.

  17. 행복한요리사 2013.07.30 09:59

    일본의 쌀 한톨,물한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중화당 잘 돌아보고 갑니다.^^

  18. 신기한별 2013.07.30 10:21 신고

    우리나라에서는 애국지사들 이리 홀대받다니..

  19. Daumview 2013.08.02 19:07 신고

    안녕하세요. Daum view입니다.
    축하합니다. 2013년 8월 1주 view어워드 '이 주의 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리며, view 활동을 응원하겠습니다. ^^
    고맙습니다.

    ☞ view 어워드 바로가기 : http://v.daum.net/award/weekly?week=2013081
    ☞ 어워드 수상 실시간 알림을 설정하세요 : http://daumview.tistory.com/258

우선 편안하게 옛 집 이야기를 끌어가려고 한다. 우리가 흔히 고택, 가옥, 생가, 생가지라는 용어를 써서 소개를 하는 집들은 조금씩의 차이를 지니고 있다. 그동안 옛집 기행을 하면서 돌아본 바로는, 고택은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지 않거나 집을 지은 일족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 살 경우에 붙은 명칭이고, 가옥은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 명칭을 붙인다.

가옥의 경우 처음 그 집을 축조한 사람이 아닌, 현재 소유권을 갖고 살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붙여 ‘○○○가옥’이란 명칭으로 사용한다. 생가는 그야말로 그 집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던 집을 말하는 것이고, 생가지란 그 집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는데 집의 형태가 당시의 집이 아닐 때 붙이는 명칭으로 보인다. 그동안 전국의 가옥을 돌아다니면서 보니 이런 형태로 명칭이 붙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명칭을 어떻게 붙였는가는 정확히 가늠은 되지 않는다. 다만 오래도록 다니면서 본 결과 대개는 이런 형태로 명칭을 붙인 것 같다.


독립만세의 고장 천안

충남 천안은 독립만세의 고장이다.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는 유관순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 외에도 구국전선에서 열정을 받쳤던 이동녕 선생이 목천에서 태어났다. 목천과 병천은 서로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또 한 분의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유석 조병옥은 병천면 봉두리에서 태어났으니, 이곳은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유석 조병옥(1894, 5, 21 천안 병천 ~ 1960, 2, 15 미국) 박사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또한 정치가로 일생을 살았다. 부통령 출마와 대통령 출마를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선거유세 중 병으로 인해 미국으로 급히 이송이 되어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 중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병옥은 일제 강점기에는 도미유학과 독립운동에 종사하였고, 1948년 정부수립 후에는 UN대표단, 내무부와 외무부장관 등을 거치기도 했다.



집안에 있는우물과(위) - 자형으로 꾸민 안채(가운데), 그리고 헛간채(아래)

조촐한 초가집, 그러나 쓰임새 있게 꾸며

유석 조병옥의 생가는 천안시 병천면 봉두리 261-6 도로변에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유관순의 생가가 있어, 두 곳을 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이날따라 국지성 호우로 인해 길을 걷기도 힘든데, 다행히 답사를 하는 시간에는 비가 멈추어주었다.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는 조병옥의 생가는, 조병옥 박사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조병옥 박사가 이 집에 살던 때는 초가였으나 와가로 변형되었던 것을, 문중의 고증을 받아 원형 그대로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원형을 복원하였기 때문에 ‘생가’라는 명칭을 붙인 것 같다. 집은 - 자형의 초가로 지어졌다. 대지 550평에 안채가 15평, 헛간채가 7평 정도의 크기로 자리를 잡고 있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측으로 우물이 보인다.



좌측 끝에 툇마루를 달아내고(위) 정면으로는 반 칸 정도의 한데공간을 마련했다(가운데)
그리고 툇마루가 달린 방에는 한데부엌을 놓았다(아래)


-자 형으로 꾸민 안채는 모두 네 칸으로 구성을 하였고, 동편으로 반 칸의 툇마루를 놓았다. 이곳을 사랑방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집을 보면 우측으로부터 한 칸의 부엌과 두 칸의 방, 그리고 툇마루가 달린 한 칸의 사랑으로 꾸며져 있다. 맨 끝에 툇마루가 달린 방에는 한데 부엌을 놓았으며, 정면에는 반 칸 정도의 빈 공간을 개방형으로 만들어 이동이 편리하게 하였다. 측면은 이러한 개방된 곳 때문에 칸 반 정도로 보인다.

헛간채는 모두 세 칸으로 광 한 칸을 두고 가운데는 헛간으로 꾸몄다. 그리고 끝에 한 칸은 마구간으로 사용을 하였으며, 처마를 길게 달아내 비에 젖지 않도록 한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특별한 것은 없는 초가집이다. 그러나 15평이라는 적은 공간을 아주 짜임새 있게 꾸며 놓았다.



헛간채는 처마를 길게 빼어 눈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위) 여물통과 안채와 헛간채(아래)

지금은 앞으로 도로가 나 있지만, 어린 시절 조병옥은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뛰놀았을 것이다. 비가 오는 날 찾아간 조병옥의 생가. 말끔히 정리가 되어 있는 이 집에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한 한 세대를 풍미한 인물이 태어나고 자란 것을 생각이니, 괜히 마음이 경건해진다. ‘사람은 죽어서 그 이름을 남긴다.’라는 옛말처럼, 이 작은 초가집에서 그 이름을 남긴 역사의 인물이 살다가 갔다. 그래서 옛집의 순례는 의미가 있는가보다.


방안과 뒤뜰. 간소하게 꾸며진 이 집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유석 조병옥 선생은 독립운동과,
나라의 민주주의의 꽃을피우기 위해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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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killerich 2010.09.03 08:16

    좋은 공부하고 갑니다^ㅡ^..

  3. 티런 2010.09.03 08:32 신고

    조병옥선생님에 대해 더 많은걸 알게해주셨네요.~
    온누리님 감사합니다^^

  4. 모과 2010.09.03 08:42

    한하운 생가와 비교가 되네요.
    비교적 잘살던 집 같아요.
    문화재 두 곳을 포스팅하고 선생ㄴ미 글을 읽으니 보인느 것이 틀립니다.
    저도 자주 다녀야겠어요.^^

  5. 우리집예쁜이 2010.09.03 08:44 신고

    온누리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런 내용을 어떻게 다 아시는지..

  6. 엔죠™ 2010.09.03 08:46 신고

    잘 보존되어서 다행입니다.
    또한 상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7. 예또보 2010.09.03 09:01 신고

    아 나름대로 여긴 보존상태가 좋은가봐요 ㅋ
    잘보고 갑니다

  8. 2010.09.03 09:14

    비밀댓글입니다

  9. 소춘풍 2010.09.03 09:42

    멋지게 오늘도 ^^ 좋은 정보 잘보고 갑니다.
    유석 조병욱 생가를 다녀오신 )b
    잘 보존이 되어있어서 다행이에요~ ^^

  10. 무릉도원 2010.09.03 10:13

    작고 조촐해보이지만 아주 관리가 잘 되고 있군요....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배워 갑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11. 스무디아 2010.09.03 10:20 신고

    집이 단정해 보입니다.
    초가집인데도 기품이 느껴지네요~

  12. 루비™ 2010.09.03 11:39 신고

    조병옥 박사의 생가이군요.
    면모를 상세히 잘 살펴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말도 멋지게 보내세요~

  13. hello-mimi 2010.09.03 11:49 신고

    집이 참 단아해보이네여..
    아직도 이런곳들 답사하시는 열정이 존경스러워여..
    잘보구 갑니다.. 주말 편안하게 잘보내세여..^^

  14. 세미예 2010.09.03 12:07 신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좋은 곳 많이 다니시네요.
    부럽습니다. 조병옥 박사님 생가에 가셨군요.
    한번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15. 하늘엔별 2010.09.03 13:07 신고

    소박하면서 간소하게 꾸며져 있군요.
    그냥 느낌이 좋습니다. ^^

  16. 상당히 깨끗한 것이 조병옥 박사님의 생가가 복원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나 봅니다.
    초가집이라 그런지 얼마전 소개해 주신 이동녕선생님의 생가지와 비교해보면 참 소박해 보이네요.^^

  17. mami5 2010.09.03 21:40 신고

    조병옥 박사님 생가가 아주 깨끗이 잘 보존 된 것 같으네요..^^
    온누리님 덕분에 잘 보고갑니다..^^

  18. 비바리 2010.09.03 22:16 신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홍길동..성님이십니다그려/..
    생가 ,가옥,생가지의 정리를 잘 해주시어
    이해가 쉽겠어요`~~~

  19. 온누리 온누리49 2010.09.04 07:41 신고

    우리나라 전체에 있는 수많은 옛집을 찾아다니면서 보면
    정말 저렇게 망가트리지 말고
    차라리 나같은 사람 살면서 보존하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때가 많습니다
    집은 비워두면 망가지는 법인데...
    모두들 고맙습니다^^

  20. 정연숙 2013.04.29 10:19

    천안에 대해 여러가지 글을 올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유관순열사외 조병옥 박사가 태어난 곳은 (봉두리 )가 아니고 용두리 입니다.
    유관순열사의 집은 소농의 평범한 집안이지만 조병옥박사의 집은 만석군의 부농의 집안입니다. 제가 선생님 글을 읽는 도중에 발견하여 말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1. 정의 2013.09.22 10:28

    조병욱은 독립운동가는 아니다.
    이승만과 비슷
    일제때 경찰을 그대로 해방 대한민국의 경찰로 만드는 것을 주도한 사람입니다.
    제주도 43사건에서의 주도자 이기도합니다.
    제말이 거짓인지는 유튜브에서 검색 제주 43 사건으로 동영상을 보세요

천안시 목천읍 동리 79-2에는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가 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던, 석오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8월 29일은 국치 100년이 되는 날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동녕 선생의 존재는 남다르다. 이곳 천안은 이동녕 선생 외에도 유관순 열사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동녕 선생은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 현재 이 집은 충남 기념물 제7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원래는 9칸 반의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생가지 조성을 하면서 바꾼 것으로 보인다.


말끔하게 조성 된 이동녕 선생 생가지

이동녕 선생은 이병옥의 장남으로 1869년에 태어났다. 1904년 1차 한일협약이 체결이 되자,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상설 등과 북간도로 망명하여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1907년에 귀국하여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10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이강영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국무위원 주석의 일을 함께 보았다. 1928년에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여 이사장이 되고,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 당수로 활약하였다. 1940년 중국 사천성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였으며, 그곳에 안장하였다가 1948년에 효창공원으로 이장하였다.



생가지 앞마당에는 선생의 앉아계신 모습이 있다. 생가지의 대문채와 안채(아래)

국지성 호우가 미친 듯 쏟아지고 난 뒤,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를 방문했다. 그렇게 쏟아지는 비는 요즈음 들어서도 처음인 듯하다. 마치 국치일의 아픔을 씻어내기라도 한 것일까? 그래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또 다른 국치를 만들고 있는 윗분들 때문에 마음이 울적해 찾은 곳이다.

깨끗이 정리된 생가지 ‘옥의 티’가 즐비해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생가지 주변은 정리가 잘 되어있다. 그 집 앞에 선생이 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엷은 미소를 띠우고 계시다. 물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조성된 선생의 모습이다. 집을 배경으로 한 선생의 모습이, 찾는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려는 듯하다.


원래 집의 모습은 ㄱ 자형의 안채에 사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집의 구조를 대충은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더욱 9칸 반이었다고 하면 그 집이 어떤 형태로 지어졌었는가는, 지역마다 갖고 있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대충 알 수가 있다.

현재 이동녕 선생의 생가는 앞으로 대문채인 광채가 - 자로 있고, 뒤편에 ㄇ 자형의 안채가 놓여있어 튼 ㅁ 자형으로 공간구성을 하였다. 현재 안채는 중앙에 세 칸 대청이 있고, 대청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부엌과 안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끝에 다락방인 듯한 반 칸 정도의 방을 드려 모두 4칸으로 구성을 하였다. 대청 좌측으로 보이는 곳도 네 칸으로 구성을 했으며, 대청에 달아낸 부분에는 사랑방을 드렸고, 부엌과 방, 그리고 개방된 마루방을 놓았다.


안방문은 도대체 저런 기발한 생각을 어떻게 한 것일까? 그리고 한편에 붙은 마루방은 또 무엇일까

이 집을 돌아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생가지에 새롭게 집을 짓는다고 해도 가급적이면 예전집의 형태로 복원을 했어야만 했다.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다고 하면, 앞쪽으로는 사랑채가 있고, 그 뒤편에 ㄱ 자형의 안채가, 그리고 한편에는 광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현된 집은 도대체 그 비슷한 형태조차 갖추고 있지가 않다.

생가지의 집에는 무슨 옥의 티가 있을까? 우선 안채의 좌측 끝에 있는 개방마루방이다. 이런 구조를 어떻게 생각해 낸 것일까? 개방마루방을 꾸미려면 마루를 높여 정자와 같이 앞뒤로 개방을 했어야만 했다. 이런 식의 마루방은 전국을 돌면서 한옥을 보았지만, 내 안목이 좁아 그런지 본 적이 없다. 만일 이것이 광을 들인 것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판자문을 달아야만 한다. 

뒷벽에 난 창문을 보면 이것은 방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광일 경우 뒷벽도 막아야하고, 상단에는 까치구멍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사랑방과 안방의 문이다. 대개 안방의 문은 네 짝 짜리 미닫이문을 달아야 한다. 그런데 커다란 문 한 개와 작은 문 한 개를 만들어, 위로 올려 붙들어 매게 만들었다.



뒤편에 있는 우물을 들여다보고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정도였나?
역사적 인물의 흔적이 있는 고장에서, 이렇게 흉내만 내고 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뒤편으로 돌아갔더니 우물이 보인다. 맑은 물이 차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다가갔더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우물 안에는 자갈만이 가득하다. 사람들이 찾아와 들여다보고는 하는 우물인데, 지하수라도 끌어다가 채웠으면 좋았을 것을. 역사의 한 인물이 살다가 간 흔적이 있는 집을, 이렇게 터무니없이 만들어 놓다니. 일제에 의해 수도 없이 조작이 된 우리의 역사다. 그런데 이것은 또 다른 조작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울화가 치민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 그리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몸 받쳐 온 선생의 생가지에, 이런 집이라니.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선생의 곁에 가서 앉았다. 쏟아지는 폭우에 젖은 선생에게 정말 죄스런 마음이 들어서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또 다른 슬픔을 이곳에서 보고 가네요.” 선생의 손을 잡아본다.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에서 왈칵 눈물이 솟는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집을 돌아보고 난 뒤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에
비에 젖은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선생님의 곁에 앉아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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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소춘풍 2010.08.30 07:07 신고

    복원이 아닌, 새로 개조를 해버렸네요;
    저런 식이면, 안되는거 아니에요??

  3. 광제 2010.08.30 07:37 신고

    제눈에는 잘 안보이지만...
    역시 온누리님의 예리한 눈에는 가차없이 드러나는군요..
    듣고보니..에러투성이네요..

    한주도 멋진게 시작하시구요~~~
    오늘도 비가 많이 오네요~~

  4. 펨께 2010.08.30 07:46

    이런 모습 외국과 무척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몇십년을 두고 복원하고 원형을 보관하려고 애써는데
    저런식으로 개조하다니..ㅊㅊ

  5. 예또보 2010.08.30 08:05 신고

    정말 겉모습만 만들어 놓았네요
    ㅉ 많은부분들이 개선되어야 겠어요

  6. 티런 2010.08.30 08:40 신고

    온누리님 마지막사진에 맘이 짠해지네요...
    편안한 한주 시작하세요~~

  7. 옥이(김진옥) 2010.08.30 08:41 신고

    마지막 말씀과 사진이....
    한번더 생각하게 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8. 털보작가 2010.08.30 08:41 신고

    이동녕 선생이 마당에서 비를 맞는 모습이 좀 쓸쓸해보이네요.
    집안이 불편해서 나오셧나.............

  9. 바람꽃과 솔나리 2010.08.30 08:52 신고

    온누리님 말씀 듣고 보니 이해가 갑니다.
    해박하심에 새삼 놀랍니다.
    온누리님 뵈니 아주 반갑습니다^^

  10. 모과 2010.08.30 09:11

    토요일에 가본 한용운 생가와 비교가 됩니다.
    의자에 앉아 계신 두선생님의 모습이 다정해 보여요.^^

  11. 이그림 2010.08.30 09:19 신고

    안타까운 점이 있군요
    실제로 우물이라면 관리인이 있어야 되겠지요
    먼가 아쉽군요.

  12. 무릉도원 2010.08.30 09:29 신고

    정말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문화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 온누리님의 예리함에 다시 한 번 놀라고 갑니다..
    새로운 한 주도 늘 행복하세요...*^*

  13. 왕비 2010.08.30 09:32

    텅빈 우물은 이제 채워지길 바랍니다..
    비에 맞은 선생님 손도 잡아주시공 잘 하셧어요~
    이번주도 좋은 한주 보내세요^^

  14. 비바리 2010.08.30 09:32 신고

    복원이 저는 마음에 영 안들어요
    다른곳도 마찬가지...

    심지어..경주의 불국사도..토함산의 석굴암도 예전 사진과
    비교해 보면 많이 다름에 놀랐던 적이 있거든요...

    그나저나..반딱구두가 눈에 띄네요.
    두분이서 많은 이야기 나누셨는지요.

  15. 김천령 2010.08.30 10:17 신고

    이곳에도 역시 문제가 있군요.
    하여튼...
    마지막 사진 짱입니다.

  16. 머니뭐니 2010.08.30 11:15 신고

    복원해 놓고 기념물로 지정 해 놨으면 관리를 해야지 관리도 안되네요.
    복원도 보여주기식에 어처구니 없는 복원이구...에혀
    이런 글 읽으면 참 답답해집니다. 윗 대가리는 독도를 드시라고 숟가락까지 놔주질 않나...

  17. 초코그린 2010.08.30 12:00

    이동녕선생 생가근처에는 유관순 누나 생가도 있죠? 기억이 가물하네요....^^;
    저도 천안에 자주가는데, 다음번에는 이동녕선생 손 한번 잡아드리고 오겠습니다.

  18. 주근깨토깽이 2010.08.30 16:28

    와 마지막 말씀과 사진이 짠하네요~^^ 온누리님의 따뜻한 그 성품이 느껴지네요~!!^ㅇ^

  19. pennpenn 2010.08.30 16:34 신고

    정말 엉터리들이 이를 복원했군요~
    온누리님의 자문을 받아야 할 것을~

  20. 그냥 흘러 지나갈수도 있는 부분에 대해서 조목조목 설명해 주셔서 뭐가 문제가 될만한 부분인지 잘 배웠습니다.
    잘 모르는 제가 보기에도 충분히 이상하게 보일만 한 부분들이 있군요.

    마지막 사진의 모습에서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사람과 이야기 하는 듯 보입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21. 야옹서가 2010.08.30 22:12 신고

    기와만 올린다고 해서 전통한옥이 되는 건 아닐 텐데 안타깝네요. 저 우물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생가의 보존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된 복원도 중요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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