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당진시 면천면 성하리 510에 소재한 영탑사. 해발 210m의 차령산맥에서 뻗어나간 상왕산 동쪽 산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고찰이다. 영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로서 사적기가 없어서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말 풍수지리설로 유명한 도선국사가 창건했으며, 고려 충렬왕 때 보조국사 지눌이 중건했다고 한다.

 

영탑사라는 사명은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영탑사에는 부처의 진신을 이르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으며, 유리광전 뒤에는 바위 위에 7층 석탑이 서 있어 이름과 잘 맞아 떨어지는 절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당진군사에는 조선 정조 22년인 1798년 연암당 지윤스님이 유리광전을 보수하면서, 그 뒤 바위에 5층탑을 세운 후 절 이름을 영탑사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운치있는 절 영탑사

 

영탑사를 찾은 것은 9월도 다 지나가고 가을 기운이 돌 때쯤이었다. 절 입구에 있는 늙은 고목 한 그루가 땀을 흘리며 찾아든 나그네에게 그늘을 내준다. 잠시 쉬고 있으려니 눈앞에 영천이라는 샘이 보인다. 하지만 물을 먹을 수 없다는 안내판이 걸려있다. 지금은 먹을 수 있으려는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경내로 향한다. 가람은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으며 이미 꽃을 떨군 연꽃들이 커다란 물그릇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연꽃이 피었을 때 왔으면 더 좋았을 것을. 보물 제409호로 지정된 금동삼존불을 보관하고 있는 영탑사를 한 바퀴 돌아본다. 어느 곳 하나 눈에 거슬림이 없다.

 

 

전설 가득한 절 영탑사

 

대웅전으로 찾아들어가 예를 올린다. 언제나 절을 찾아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다. 땀을 식힐 겸 천천히 108배를 한다. 아직은 날이 더워 잠시 주춤했던 땀이 다시 흐른다. 아랑곳하지 않고 108배를 마친 후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불단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부처님들의 상호가 한 없이 자비롭다.

 

영탑사에 있는 범종과 금동삼존불, 7층석탑은 모두 가야사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대원군이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쓰고자 가야사를 불태웠다고 한다. 그 때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하니, 이곳으로 옮겨온 것은 그리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다. 부친의 묘를 쓰고자 절을 태웠다고 했으니, 그 성정이 올바른 것일까?

 

 

무학스님의 마애불 조성솜씨는?

 

절 뒤편으로는 계단을 오르는 길이 있다. 그 초입에 서 있는 유리광전. 유리광전 안에는 무학스님이 조상했다고 하는 마애불이 좌정을 하고 계시다. 커다란 바위에 조각을 한 것인데 약사여래불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학스님이 조각에는 별로였는가 보다. 지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고려말기의 형태를 지닌 마애불이다.

 

그리고 그 유리광전의 뒤편에는 칠층석탑이 자리한다. 이 석탑 역시 가야사에서 무너져 있던 것을 수습해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탑에는 설이 많이 전한다. 절집 한 곳을 들려 많은 문화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그러한 행복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에 답사를 계속하는 것이나 아닌지.

 

당진을 답사하면서 들린 영탑사. 새롭게 오늘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피가 온 세상에 떨쳤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갑오년 정월 초하루. 힘들기 때문에 고해(苦海)라고 세상을 표현하였다지만, 올해는 고해가 아니기를 바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먹은 서원을 이루는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의 현등사는 운악산(해발 935m) 산등성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고찰이다. 신라 법흥왕 27년인 540년에 인도에서 불법을 전하기 위해 건너온 마라가미 스님을 위해 왕이 지어준 사찰로, 오랫동안 폐사 되었다가 신라 효공왕 2년에 도선국사가 다시 중창하였다.

 

현등사는 창건 이래 많은 중창을 하였다. 신라 말 효공왕 2년인 898년 도선국사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동쪽의 지세가 약해 이를 보강하기 위해 운악산을 돌아보던 중 옛 절터가 있는 것을 보고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두 번째 중창은 고려 회종 6년인 1210년 보조국사 지눌이 운악산 중턱에서 불빛이 비쳐 이곳을 찾아오니 석등과 마륵바위에서 불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현등사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 태종 11년인 1411년 함허득통화상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현등사 경내에는 1619년 봉선사에서 조성한 보물 제1793호인 현등사 동종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3호인 삼층석탑, 183호인 목조아미타좌상, 184호 청동지장보살좌상 등 12점의 문화재가 전해지고 있다.

 

2km를 걷는 길 겨울경치도 아름다워

 

날이 차다. 입구에서 현등사까지의 거리는 2km 남짓. 하지만 주변 경관을 들러보고 가노라면 언제 다 왔는지 일주문이 보인다. 운악산 현등사라고 현판을 단 일주문을 지나면 계단을 오르는 초입에 불이문이 서 있다. 불이문 한 옆 커다란 바위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원을 담은 작은 돌들이 빼곡히 쌓여있다.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바쁜 일이라고는 없지 않은가? 그저 오늘은 세상 시름 이곳에 다 버리고 훌훌 털고 가야겠다는 생각이다. 조금은 안쓰럽게도 보이지만, 그래도 온갖 세월의 풍상을 다 이겨낸 지진탑이 보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앞에 머리를 숙인다. 그 탑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오래 전 그 탑을 조성한 장인에게 죄스런 마음 때문이다.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음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이 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굴을 당한 것을 2006년 삼성문화재단으로부터 되돌려 받아, 다시 제 자리에 모셨다고 하니 탑이 더 빛을 발하는 듯하다.

 

응진전 앞에서 걸음을 멈추다

 

절이라는 곳이 명소 아닌 곳이 어디 있겠는가? 곳곳의 전각마다 부처가 아니 계신 곳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에게 가장 눈에 띤 것은 바로 커다란 소나무 밑에 한 칸으로 조성을 한 응진전이었다. 그 모습이 왜 그리 눈물겨웠을까? 아마도 그 안에 들어가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고 있는 저 보살도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고찰들을 찾아다니다가 보니, 이제는 그 분위기만 보아도 대충은 그 절의 세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웅장하고 사람이 많다고 해서 좋은 절일까? 아니면 일 년의 수입이 많다고 해서 좋은 절일까? 물론 요즈음같은 물질만능시대에 그런 것으로 절의 가치를 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절에서 고승들이 득도를 했을까? 왜 역사에 남을만한 고승들은 모두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을까? 인간의 오욕이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 부처의 참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현등사 경내를 돌아보면서 온갖 질문을 하고 그 해답을 얻으려고 애를 써본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미 내 마음과 몸이 속세의 찌들어있는데. 그저 바람 한 점이 불어 내 몸에 묻은 속세의 먼지를 훌훌 털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눈은 녹았지만 찬바람은 그대로인 한 겨울의 현등사. 그곳에서 난 잠시 동안이나마 속세를 떠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본다.

매월당 김시습(1435(세종 17년)~1493(성종 24))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김시습의 한문 단편소설인 <만복사저포기>의 무대가 되었던 만복사는, 현 전북 남원시에 소재하는 사적 제349호이다. 한문 단편소설인 <금오신화>는 「만복사저포기」를 비롯하여 「이생규장전」「취유부벽정기」「남염부주지」「용궁부연록」 등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책이다.

이 중에서 「만복사저포기」는 남원에 사는 가난한 노총각인 양생이 왜구의 침입 때 정절을 지키다가 죽은 처녀의 환신(幻身-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사람)과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처녀가 떠난 뒤에도 양생은 그 사랑을 잊지 못해 장가를 가지 않고, 산속에서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 조금은 슬픈 사랑의 이야기다


흔적만 남긴 만복사지. 도선국사가 창건한 남원 최대의 가람

남원 만복사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에 창건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오층과 이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으며, 그 안에 길이 35(10m)척의 동으로 조성한 불상이 있다"라고 했다.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한 만복사 당시에는 대웅전, 약사전, 장륙전, 영산전, 보응전, 천불전, 나한전 등 많은 전각이 있었고 수백 명의 승려가 생활하는 큰 절이었던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만복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함께 불타 버렸다고 한다. 만복사지 발굴조사 때 많은 건물의 흔적을 찾아내었다. 또한 청자와 백자, 많은 와편 등이 출토되어 고려시대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사지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만복사지에는 5층석탑(보물 제30호)·불상좌대(보물 제31호)·당간지주(보물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43호) 등이 절터내에 남아 있다. 만복사지는 고구려식의 절 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절중에 하나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만복사지에서 만난 문화재들

김시습은 왜 이 만복사를 단편소설의 무대로 삼았을까? 만복사지를 찾아간 것은 그 해답이 있지 않을까해서이다. 낮은 경계로 주변을 둘러 친 만복사지. 입구를 들어서면 우측 길 밑으로 보물 제32호 당간지주가 서 있다. 투박한 모습으로 조성이 된 이 당간지주는 고려 초기에 조성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너른 사지 복판에 보물 제31호 석좌가 보인다. 이 석좌는 불상을 올려놓았던 받침돌로, 만복사를 지으면서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석좌의 아랫부분은 각 측면에 꽃장식을 담은 코끼리 눈 모양을 새겼으며, 그 위에 연꽃을 조각하였다. 높이 1.4m 정도인 돌에 여러가지 문양을 조각했는데 육각형으로 만들어졌다.

석좌를 지나 전각 쪽에는 5층석탑 1기가 서 있다. 보물 제30호인 이 오층석탑은 고려 초에 세운 것으로, 높은 기단부 위에 5층의 몸체와 지붕을 얹었다. 현재 남아 있는 탑의 높이는 5.75m이다. 1968년 탑을 수리하던 중 1층 몸체에서 사리 보관함을 발견하였다.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으로 단순한 구조이지만, 2층부터 지붕과 몸체 사이에 넓은 돌판을 끼워 넣은 점은 특이하다. 전각 안에는 보물 제43호인 석불입상이 있다.

이 석불입상 역시 만복사를 처음 창건할 당시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2m의 석불입상은 민머리에, 정수리에는 상투모양의 육계가 솟아 있다. 살이 오른 타원형의 얼굴은 눈, 코, 입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함께 풍만한 인상이다.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의 광배로 구분이 되어 있다. 이 석불입상의 뒤에는 선각을 한 부처상이 조각이 되어 있어 특이하다.

만복사지에 가면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수백 명의 승려가 살고 있었다는 만복사. 지금은 그저 옛 영화를 알아볼 수 있는 몇 기의 보물들이 서 있을 뿐이다. 김시습은 도대체 만복사란 절을 왜 무대로 했을까? 김시습은 어려서는 신동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는 불교 철학의 사유를 공유하려 했던 사람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만복사를 무대로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금오신화에 보이는 「남염부주지」는 미신과 불교를 배척하는 경주 박생(朴生)이 꿈속에 염라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염라대왕과에 토론을 하고 돌아온 후 염라국 왕이 되어 세상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이렇듯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이생과 저승을 넘나들며 사랑을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도교와 유교, 불교에 통달한 것으로 알려진 김시습. 어쩌면 이 만복사를 무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만의 고차원적인 사랑을 일깨우고자 했음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혹자는 그런 세상 사람들과 동떨어진 이야기 때문에 광인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만복사지를 떠나면서 돌아본 옛 절터. 어디선가 양생과 처녀의 애절한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남원시 도통동 392-1에 소재하고 있는 천년고찰 선원사.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도선국사가 남원의 지세를 실펴 보니, 객산인 교룡산이 주산인 백공산보다 강해, 지세가 약한 주산의 힘을 돋아주어야 남원이 번창할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였다는 것.

백공산의 모체는 천황봉 밑 만행산의 줄기이므로, 만행산의 힘을 빌어 교룡산의 힘을 누르고자 선원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선원사는 한 때는 가람의 크기가 만복사에 버금가는 큰 사찰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다. 그 후 조선 영조 30년인 1754년에 부사 김세평이 현재 양로당의 전신인 노계소 신도계와 협의하여 복구하였다고 한다.

도심 속에 자리한 선원사. 좌측이 약사전, 우측이 대웅전이다. 전각 앞게 각각 두 개씩의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다.

보물이 있는 도심 속의 절 선원사


선원사는 도심 한 복판에 자리한다. 예전에는 남원팔경 중 ‘선원모종’이라고 하여, 해질녘 울리는 선원사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것을 한 경치로 삼을 정도였다. 선원사에는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과 동종, 약사전 등의 유형문화재와, 문화재자료인 대웅전 등이 소재하고 있다.

도심 속에 있는 고찰답게 선원사에는 심심찮게 관광객들과 외국인들도 찾아든다. 도심 속에 이러한 고찰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색다르게 느껴지는가 보다. 그들은 선원사에 들려 무엇을 가장 먼저 살펴볼까? 그것은 바로 약사전과 대웅전 앞에 서 있는 문화재의 안내판이다. 안내판이란 그 절에 어떠한 소중한 문화재가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문화재의 보존과 홍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이다.



약사전과 약사전 앞에 세워진 문화재 안내판.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보물 철조여래좌상과(가운데) 유형문화재 약사전의 안내판이다.

지워진 안내판, 사람들이 들여다보면 낯 뜨거워

남원은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여기저기 산재한 문화재의 양으로 따지면, 볼거리가 다양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남원에서 문화재를 찾아보기란 정말로 힘들다. 어딜 가나 길거리에 서 있는 안내판에는 만인의총과 광한루원 밖에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물론 이 두 곳의 사적과 명승은 남원을 대표할만한 문화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문화재는 큰길서부터 유도를 하는 안내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어느 곳을 가든지 큰 길에 서 있는 문화재 안내판을 보고 문화재를 찾아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상한 것이 문화재도 없고, 역사도 입증되지 않은 사찰은 버젓이 공식적인 안내판에 소개가 되어있고, 정작 역사가 입증되어 있는 사찰은 그 어디에도 안내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웅전과 유형문화재인 동종 안내판과 문화재자료 대웅전 안내판. 그러나 정작 유형문화재인 동종은 약사전 안에 있었다.

더구나 보물 등 문화재가 소재하고 있는 선원사 등은 어디에도 길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선원사 약사전과 대웅전 앞에 서 있는 네 개의 문화재 안내판은 사람들이 들여다보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글자가 다 지워져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안내판이 이 정도인데도 새로 제작 중이라는 말만 한다는 것이다.

각 지자체마다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하나라도 더 많이 알리고, 그것을 이용해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다.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 등에 관심을 갖고 자녀들과 답사를 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남원의 문화재는 모두 꽁꽁 숨어 있다. 제대로 된 유도를 하는 안내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지워져 알아볼 수조차 없는 안내판 때문이다.



문화예술도시라는 남원. 과연 이 모습을 보고도 그런 자랑을 할 수 있으려는지. 낯 뜨거운 이러한 안내판. 하루 빨리 시정이 되기를 바란다.

도선(道詵)국사는 전라남도 영암 풀신이다.신라말기의 고승으로 827년에 태어나 898년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풍수설의 대가였다. 도선은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절을 창건하였으며, 그 절마다 모두 풍수에 기인하여 창건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남원지역의 많은 절들은 대다수가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남원의 풍수를 보아 적당한 곳에 절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런 도선국사의 일화는 수도 없이 많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도선은 틀림없이 신라 효공왕 2년인 898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고려 때 지은 절에 도선국사가 창건을 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생몰연대조차 정확하게 따져보지 않은 이런 류의 안내로 인해 가끔은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용담사

남원에서 운봉을 향해 가다가 보면 남원을 벗어나는 곳이 주천면이다. 이곳 도로 좌측에 보면 용담사라는 절의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에는 보물 제42호 용담사지 석불입상이 있다고 적혀있다. 용담사에 소재하고 있는 석불입상에 관해서는 두 번째 글을 쓰고 있다. 문화재란 볼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더 안목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용담사가 언제적에 지어진 절인가는 확실하지가 않다. 용담사 경내에 있는 안내판의 설명을 보면 ‘용담사지 석불입상’이라 쓰여 있다. 이것은 예전의 절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지금의 용담사는 이름만 전하는 용담사 터에 세워진 절이라는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용담사는 백제 성왕 때 창건된 절이라는 설과, 통일신라 말 선각국사 도선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정작 석불입상 앞에 적힌 또 하나의 안내판에는 전혀 황당한 긇이 적혀있다. 용담사에 관한 내력을 적은 글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증없이 적어 놓은 글이 문화를 잘못 알려

<천년의 향기 - 용담사는 고려시대 사찰로써 천년전 절이 세워지기 전에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고있어, 밤이되면 여우로 둔갑하여 사람을 잡아먹고 농작물을 해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려도 어찌할 수 없었으나 마침 도선국사께서 큰 원력을 새워 이곳에 미륵물을 모시고 기도 중에 해탈주를 독송하니 이무기가 순간 업보의 허물을 멋고 용이되어 사라졌다. 해서 용담사라는 전설이 있다>

라고 적고 있다. 이 설명 하나가 결국 절의 내력을 다 망쳐놓은 결과가 되었다. 신라 때 고승인 도선국사가 고려 때에 젏을 지었다는 황당한 설명에는 그저 아연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구를 적은 안내판을 석불입상 앞에 버젓히 세워놓아 문화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용담사는 고려 떄가 아닌 신라말에 지은 절이며,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여 도선국사가 조성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납득이 가질 않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거대석불로 보이는 용담사 석불입상

보물 제42호인 용담사지 석불입상은 광배와 입상이 '일석(一石)'으로 꾸며졌다. 대개 석불의 경우에는 불상과 광배가 따로 제작이 된다. 하지만 용담사의 석불입상은 커다란 바위를 이용해 입상과 광배를 조각하였다. 석불입상은 훼손이 심해 정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고려시대의 거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높이가 6m에 달하는 이 석불입상은 체구가 당당하다. 

용담사 석불입상은 이 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고려 시대 미륵의 형태이다. 머리위에 육계의 윤곽은 비교적 뚜렷하고, 귀는 긴 편이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법의는 거칠게 표현을 하였으며, 두 손 등은 정확한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다. 많은 훼손이 되어 있어서 그 형태만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석불의 안면 밑으로는 양 편 어깨부근에 구멍이 하나씩 나 있는데, 이 구멍의 용도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무슨 장식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석불입상을 받치고 있는 받침대는 자연석 위를 둥글게 조성하였다. 이곳에도 양편에 구멍이 나 있다. 아마도 이 석불입상을 보호하기 위해 전각을 지었던 흔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화재 하나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안내판 하나를 잘못 기재함으로써, 문화재의 소중함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잘못된 안내판은 하루 빨리 철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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