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불 답사를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조각을 했을까? 마치 살아있는 그대로 바위벽에 붙인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아름다운 마애불을 보았다면, 누구나 그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남원시 대산면 신계리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423호 신계리마애여래좌상. 도선국사가 하루 밤 만에 조성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마애불이다.

마애불을 찾을 때부터 애를 먹었기 때문인가,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을 만났을 때의 감회는 더욱 깊었는가 보다. 도로변에 신계리 마애불이 3.0km에 있다는 이정표가 있다. 좁고 구불거리는 도로를 따라 마을로 들어가니, 그곳에서 2.2km 를 더 가야 마애불이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리고 그 밑에는 ‘임도’와 ‘오솔길’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산을 헤매다가 발견한 이정표 난감해

임도와 오솔길이라는 말의 뜻을 알 수가 없다. 주변을 한참이나 헤매다가 주민들에게 물으니, 마을 위로 산을 향해 계속 따라 올라가라는 것이다. 마을을 벗어나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보니, 작은 이정표 하나가 보인다. 이곳에서 800m를 올라가면 주차장이 있고, 거기서 다시 0.45km를 가야한다는 것이다.

좁디좁은 도로를 구불거리고 올라가니 정말로 그 안에 차 몇 대가 설 수 있는 곳이 나온다. 여기까지가 임도이고, 거기서부터 오솔길을 따라 가라는 말이다. 그런 표현을 안내판 밑에 임도와 오솔길로 적어 놓았으니, 처음 이곳을 찾는 사람에게는 정말로 알 수 없는 표현이란 생각이다.



마을을 벗어나 임도와 오솔길을 지나 만날 수 있는 신계리 마애불
 
오솔길을 따라가 만난 마애불

오솔길을 따라 한참이나 올라간 듯하다. 물이라도 한 병 사들고 올라올 것을. 전날 저녁을 먹으면서 반주로 먹은 술기운이 있어서인가, 목이 더 타는 듯하다. 답사를 할 때는 가급적이면 음주를 피하는 것도, 이렇게 애를 먹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 넓은 길이 다시 나타난다. 계단을 지나 소나무 숲길을 따라 산 쪽으로 오르다가 보니, 돌로 쌓은 축대가 보인다.

가까이 가서보고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어찌 이 산속에 저런 바위가 있으며, 저렇게 조각을 할 수가 있을까? 아마 사람의 실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면 믿을 수가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조각품 하나가 그 곳에 있었다. 도선국사가 하룻밤 만에 만들었다는 신계리 마애여래좌상. 전설로 남아있지만, 그 전설을 믿고 싶어진다.




역동적인 모습, 생동감이 있는 걸작품

한 마디로 걸작품이다. 어떻게 바위면을 이렇게 깎아내고, 그 안에 돋을새김을 하였을까? 사람이 했다고 하면,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공을 들인 것일까? 신계리 마애여래좌상은 커다란 바위의 한 면을 반듯하게 쪼아내고, 그 안을 둥글게 깎아내면서 여래좌상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구슬로 꿰어 광배주위를 감싸고 있다. 광배 안에는 연꽃잎인 앙화를 조각하였다. 이런 조각기술은 보기가 힘들다. 법의는 왼쪽 어깨에 걸쳐 흘러내렸는데, 비교적 단순하게 표현을 하였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살이 통통한 것이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넓은 어깨와 불룩한 가슴, 그리고 통통한 팔 등이 생동감이 있다. 입체감과 생동감이 살아있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바위 뒷면 역시 칼로 잘라낸 듯하다. 양편을 깊게 잘라내 좁은 길 하나를 만들어 두었다. 아마 축대를 쌓기 전에는 이 바위가 밑에까지 내려가, 그 윗면에 마애불이 조성된 것은 아니었을까?

힘들에 찾아온 마애불 앞에서, 안내판이 부실함을 투덜거리며 올라온 것이 괜히 부끄럽다. 이런 걸작품을 볼 수 있다면, 숨이 턱에 닿은들 어떠하리. 마애불 앞에서 내려다보이는 들녘이 시원하다. 11월 28일, 초겨울 바람 한 점이 이마에 맺힌 땀을 스친다.

부도란 예전 스님들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부도의 꾸밈은 석탑과 같이, 기단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는다. 전체적으로 보면 기단부와 탑신, 그리고 머릿돌로 조형이 된다. 머릿돌은 지붕을 얹고 그 위에 연꽃모양으로 만든 보주를 얹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이런 일반적인 부도와는 다른 아름다운 부도가 눈길을 끈다.

연곡사의 동쪽에 네모난 바닥 돌 위에 세워진 국보 제53호 연곡사 동부도는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통일신라 때인 진평왕 6년인 545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한 연곡사는, 고려 초기까지도 스님들이 선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다. 그래서인가 연곡사에는 이 외에도 보물 제154호인 서부도로 불리는 소요대사부도와 국보 제54호 북부도가 있다.


천상의 반인반조인 가릉빈가를 새겨

동부도의 기단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그리고 위 받침돌을 차례로 올렸다. 이단으로 꾸며진 아래받침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드는 팔부중상을 새겨 넣었다.

위받침돌은 밑면을 둥글게 하여 두 겹의 연꽃잎과 기둥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둥근 테를 두른 안에 불교의 낙원인 극락에 산다는 전설 속의 새인 ‘가릉빈가’를 새겨 넣은 점이 독특하다. 가릉빈가는 전설속의 극락조로 하반신은 새이고, 상반신은 사람인 점이 특이한 모습이다.



자태가 아름답고 소리가 묘하다는 가릉빈가는 불가의 호법신장의 일종으로 볼 수가 있다. 일찍 고구려 안악고분 등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그림이 보인다. 가릉빈가는 결국 부도 안에 모셔진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호법의 기능과, 부처님을 덕을 찬양하기 위한 기능을 복합적으로 갖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다.


극락조로 불리는 가릉빈가는 반인반조의 몸으로 호법과 찬양의 기능을 갖고 있다.
 
통일신라 최고의 걸작인 동부도

탑신인 몸돌에는 각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에 수호신장인 사천왕상과 향로 등을 새겨 넣었다. 돋을새김을 한 사천왕상은 지금보아도 당장 호령을 하고 뛰쳐나올 듯한 기개를 보인다. 팔각으로 정교하게 마련한 지붕돌은 돌 위에 새겼다고는 볼 수 없게 화려함을 보이고 있다. 서까래와 기와의 골은 물론, 부연과 막새기와까지 표현을 할 정도로 뛰어나다.



머리장식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사방에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봉황을 두고, 연꽃무늬를 아래위로 새겨놓았다. 일설에는 도선국사의 부도라고도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이 부도의 아름다움에 반한 일제는 동부도를 동경대학으로 옮겨가려고 하였다는 소리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안타까운 것은 머리장식에 새긴 네 마리 봉황의 머리가 다 잘려나갔다는 점이다.



사방에 날개를 펼친 봉황의 머리는 모두 잘려나갔다

느낌이 일부러 그렇게 잘라버린 듯 해 씁쓸하다. 한 마리도 아니고 어떻게 네 마리의 머리가 하나도 남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봉황의 모습이 더욱 궁금하다. 아마 머리 위에는 또 다른 장식은 없었는지. 그리고 그 머리를 잘라낸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영원한 미궁으로 남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다방리, 마을 입구를 들어서면서 마을 이름을 보고 한참이나 웃었다. 다방리라니, 참 별 마을이 다 있다는 생각에서다.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다방리, 운주산에 소재한 신라 때의 절인 비암사. 비암사는 공주 마곡사의 말사로 창건연대는 확실치가 않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비암사는, 극락전 앞의 3층 석탑에서 소중한 문화재가 3점이 발견이 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이 3층 석탑에서 나온 문화재는 국보 제106호인 비암사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비상과 보물 제367호인 비암사기축명아미타불삼존비상, 그리고 보물 제368호인 비암사석조비상반가사유상이다. 이 중 보물 제368호는 통일신라로 이어진 반가사유상의 조성과 미륵신앙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곳 충남과 전북일대는 미륵신앙과 관련되는 문화재가 유난히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야기꺼리가 많은 절 비암사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전각을 벌려놓은 비암사. 돌계단을 오르다가 보면 우측으로 수령 840년이 지난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느티나무의 수령이 800년이 지났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높이 15m, 나무의 둘레가 7.5m나 되는 이 나무는, 흉년이 들면 잎이 밑에서부터 피어 위로 올라가고, 풍년이 들 해는 위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온다고 한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의 풍년과 흉년을 알려주는 나무로 유명하다.

수령 840년인 보호수 비암사 느티나무

느티나무 계단을 오르면 바로 앞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충남 유형문화재 제11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3층 석탑은 화강암으로 조성이 되었으며, 고려 때 제작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는 이 석탑은 기단부가 없어진 것을, 1982년에 보완하여 현재의 자리에 세웠다. 이 3층 석탑에서 위에 열거한 문화재 3점이 발견되었다.


상륜부에서 국보와 보물 등이 발견 된 비암사 3층 석탑

3층 석탑 뒤편으로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79호인 극락보전이 자리하고 있다. 극락보전은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았다. 기둥은 배흘림이 뚜렷한 원형기둥을 사용했는데, 밑 부분을 보면 오랜 세월 보수를 한 흔적이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인 극락보전은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아미타좌상을 주불로 모신 극락보전과 소조아미타좌상

극락보전에 주불로 모신 아미타불은 영원한 수명과 무한한 광명을 보장해 준다는 부처님으로 서방극락의 아름다운 정토세계로 인도한다고 한다. 극락보전에 모셔진 아미타좌상은 소조로 제작이 되었으며,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18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아미타불좌상은 전체 높이가 196cm로 좌상으로는 큰 편이다. 이 아미타불의 특징은 결가부좌를 한 무릎의 높이가 유난히 높다는데 있다.



이어붙인 기둥이 역사를 말하고 있다. 대웅전 현판 양옆에는 멋진 용이 조각되어 있다

이 외에도 비암사에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182호인 영산회괘불탱화가 있다. 이렇게 소중한 문화재와 800년이 넘는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있는 비암사. 가파른 비탈 위에 세워진 산신각으로 올라보니, 사람들이 정성들여 작은 돌을 쌓아올려 놓았다. 절집을 찾아 간절히 기원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간구하는 것일까? 아마 이렇게 오래된 고찰에서 수많은 시간을 빌고 간 사람들의 기운이 정성을 들어주는 것은 아닐까?



산신각에서 내려다보는 비암사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저 멀리 떠가는 한 점 흰 구름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혹 아미타불이 계시다는 극락정토를 가는 것은 아닌지. 그 구름을 따라 길을 나서고 싶다. 복잡하고 늘 머리가 아파야하는 이러한 세상을 왜 '고해'라고 했는지 이해가 간다. 살아가는 나날이 고통속에서 살고 있다는 인간들이다. 작은 고통 하나 없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저 가을 하늘처럼 저렇게 파아란 물살을 헤치고 고해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무엇이던가? 비암사 산신각 앞에서 내려다 본 절집의 지붕들이, 뒤집기만 한다면 고해를 벗어날 수 있는 곳을 찾아갈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비암사를 찾는 것이나 아닌지. 

절은 왜 그토록 산을 올라 지어야할까? 높은 산에 있는 절을 찾아 산으로 오르면서, 늘 의문을 갖는다. 딱히 그 해답을 찾기는 어렵지만, 아마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수도에 전념하고자 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천안시 안서동에 자리한 성불사. 고려 초기에 도선국사에 의해서 세워진 절이라고 한다.

성불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왕위에 올라 도선국사에게 명하여 전국에 사찰을 세우도록 했는데, 그 때 지어진 절이라고 한다. 이 때 도선국사가 이 자리에 와보니 백학 세 마리가 어디선가 날아와, 바위를 쪼아 불상을 제작하고 있다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미처 불상을 완성하지 못한 채 날아가 버렸다고 하여 ‘성불사(成不寺)’라 했다가, 후에 몇 번 중수를 거치면서 ‘성불사(成佛寺)’가 되었다는 것이다.

전설 속의 성불사 마애불상군. 세 마리의 백학이 만들다가 날아가 버려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작은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상군

산비탈에 절을 조성한 성불사. 차로 오르면 그리 어려운 길은 아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대웅전을 찾아 오르다가 보면, 돌을 이용해 축대를 쌓은 것이 마치 계단처럼 보인다. 높게 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전각을 마련하였다. 산비탈을 이용해 터를 잡은 성불사는 여느 절집들처럼 웅장하지가 않다. 그저 작은 전각들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대웅전을 바라보니 삼존불을 모셨는데, 중간에 부처님이 보이지를 않는다. 법당 안에서는 신도들이 무슨 큰 잔치라도 있는지, 기물을 닦느라 부산하다. 들어가 볼 수도 없어 밖에서 보니, 대웅전 뒷면이 유리벽으로 되어있다. 뒤로 돌아가 본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인 대웅전 뒤에는 편편한 바위가 있다.



산 비탈에 축대를 쌓고 전각을 마련한 성불사(위) 대웅전(가운데) 가운데 석가모니불의 자리가 비어있다(아래)

그런데 그 바위에는 무엇인가가 가득 새겨져 있다. 완성되지 못한 채 있는 마애불상군. 아마 도선국사가 이곳을 찾았을 때, 세 마리의 백학이 바위를 쪼아 만들던 그 마애불상인가 보다. 바위 양편을 갈라 대웅전 뒤편에는 불입상을 도드라지게 새겼고, 그 옆으로는 삼존불과 16나한상을 새겨 넣었다.

전설로 전해지는 내용 그대로인 마애불상군

세 마리의 백학이 절벽을 쪼아 불상을 제작했다는 성불사. 대웅전 뒤편으로 돌아가 보니 정밀로 놀랍다. 그냥 전해지던 전설이 아니었을까? 대웅전 뒤편 바위면에는 겨우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불입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그러나 그 형태가 불입상인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아마 부리로 쪼아 이 불상을 만들다가 그냥 놓아둔 채 날아가 버린 듯하다.



대웅전 뒤편에 있는 바위에 조각이 되어있는 마애불상군 

그 옆의 우측 절단면에는 삼존불을 비롯한 16 나한상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을 중심으로 16나한상이 이렇게 새겨진 것은 매우 드문 예이다. 현재 충남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마애불상군은 전설 그대로이다. 채 완성을 하지 못한 마애불상군. 그리고 돌출이 되어있는 불입상의 형태 등이 그렇다.

삼존불은 연화대에 좌정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와 좌우에 협시보살 입상이 새겨 넣었다. 남아있는 흔적을 보면 연화대와 좌정을 한 석가모니불은 그 윤곽이 뚜렷하다. 그리고 좌우에 협시보살과 16나한상은 아직은 완성을 하지 못한 채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바위 면을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어 자세한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16나한상은 각각 그 자세가 다르게 표현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미완성인 불입상(위)과 그 옆 바위면에 마련한 삼존불과 16나한상(가운데, 아래)

수도를 하는 모습, 서로 마주보고 있는 듯한 모습 등. 다양한 형태로 구성을 한 16나한상은 바위 면을 파내고 부조를 하였는데, 마치 감실에 있는 듯한 형태로 꾸며놓았다. 자연스럽게 조성한 삼존불과 16나한상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마애불상군의 형태이다. 이 마애불상군은 14세기 불화에서 보여주는 도상이 남아있고, 도식화가 덜 된 점 등을 보아 14~15세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옛 전설 속에 전하는 그대로 남아있는 성불사 마애불상군. 그래서 산을 오르면서도 힘이 들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소중한 문화재를 만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성불사 대웅전 앞에서 내려다보이는 천안시가지. 비가 오는데도 찾아올라간 성불사에서, 옛 스님들이 산 위에 절을 지은 까닭을 조금은 알 듯도 하다.

비를 맞으면 찾아 올라간 성불사에서 내려다 본 천안시가지.

사적 제349호인 남원시 왕정동에 소재한 고려 전기의 문종 때 지어진 절인 만복사. 『동국여지승람』 권지39, 남원도호부「불우조(佛宇條)」에는, 만복사는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였다. 창건 당시 만복사에는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 35척(약 10m)의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창건 당시 만복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버렸다. 이 만복사에는 당간지주를 비롯해 오층석탑과 석불입상 등 보물이 경내에 있다. 잘 정돈된 사지 중앙 쪽에는 보물 제31호 만복사 석좌가 자리한다. 돌로 만든 이 좌대는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인이다.


만복사 사지 내에 있는 보물 제31호 석좌와 만복사지 전경

하나의 돌로 조각한 거대한 작품
 
이 석좌는 하나의 돌로 상·중·하대를 조각하였는데 육각형으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하대는 각 측면에 고려시대의 석조물에서 흔히 나타나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장식했다. 윗면에는 연꽃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중대는 낮고 짧은 기둥을 본떠 새겼다. 상대는 중대보다 더욱 넓어졌으며, 좌대의 윗면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이 구망은 불상을 웠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진 구멍이 뚫려 있다.

옆면에 연꽃이 새겨졌던 부분은, 주변 전체가 파손이 되어 아름다운 석좌의 미를 반감시키고 있다. 이 석좌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에서 벗어난 6각형으로 조성을 한 것이 특징이다. 안상의 안에는 꽃을 장식했으며, 이러한 조각의 형태로 보아 이 석좌는 11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투박한 돌에서 느끼는 따스한 온기

이 돌로만든 좌대 위에는 어떤 부처님을 올렸을까? 만복사지에는 두 곳의 전각에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5층과 2층으로 된 전각 안에 부처님을 모셨다면, 그 좌대도 어마어마한 크기였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현재 보물 제3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좌는, 2층의 전각 안에 모셨던 부처님의 좌대가 아니었을까 추정을 해본다.

더욱 5층으로 지어진 전각 안에 봉안된 불상은 그 높이가 10m 정도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석좌보다도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석좌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 아름다움이 눈이 부시다. 고려시대의 석조물들이 조금은 투박하고 간결하게 처리를 하는 것에 비해, 이 석좌는 다양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아마 통일신라의 유풍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부처를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킨 상면에 낸 구멍

상부는 많이 파손이 되었는데, 그 남은 일부를 살펴보면 꽃을 조각한 듯하다. 그 조각수법이 뛰어나 중앙의 장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품일 것 같다. 전체적으로는 많이 손상이 되었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뛰어난 조각술이 보인다. 석좌 곁에는 네모난 돌이 보이는데, 그 상면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이 또한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닐런지. 남원 만복사지에서 만난 문화재. 그 중에서 이 석좌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찬 돌이지만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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