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군 청안면 소재지에서 592번 도로를 이용해 부흥, 청천면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느티나무들이 서 있는 문당리 오리목 마을 입구가 나온다. 이 느티나무 밑에는 돌무더기가 수북이 쌓여 있는데, 막돌을 쌓아올린 이것이 바로 문당리 성황단이다. 안내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막돌로 쌓은 돌 제단

 

여름에 나뭇잎이 무성할 때는 돌무더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뭇잎이 무성하기 전의 성황단은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 놓고 있다. 성황단은 앞쪽 길가에 서 있는 느티나무를 기점으로 해서, 뒤 산 능선을 향해 쌓아 올렸다. 철책을 돌아 돌무지 위로 올라가니, 길가 쪽에 폭 3m, 길이 5m 정도로 편편하게 돌을 놓아뒀다. 이곳이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그리고 뒤편에는 제물을 차릴 수 있도록 단을 만들고 그 뒤로는 돌을 수북이 쌓아 능선을 향하게 하였다. 능선을 향해 놓은 돌무더기는, 산의 정기를 받아 마을이 잘 되고, 주민들 중에서 큰 인물이 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제단은 마을을 둘러싼 능선 하단의 경사지에 막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아래 제단의 높이는 2.5m 정도가 된다. 제단의 위로 올라가니 넓이가 꽤 되어, 10여명은 족히 올라설 만하다. 뒤편으로 10여m 정도 길게 만들어 주산과 연결을 해놓았다. 좌, 우에는 높이 1.5m 정도에 지름 3m 정도의 원추형 돌탑이 서있다. 마을에서는 이것이 남녀를 상징하는 탑이라고 한다.

 

 

 

성황단의 다양한 형태

 

성황단은 일반적으로'서낭'이라고 부른다. 서낭은 오랜 옛날부터 마을제의 신위로 모셔지면서, 우리민족의 토착신앙 대상이 되어왔다. 서낭의 형태는 대개 돌무더기를 쌓은 누석총(累石塚)이나, 고목을 지정해 만든 서낭목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가하면 장승과 솟대를 세워놓고 서낭제를 지내는 곳도 있다. 일부 마을에서는 성황당이라는 당집을 짓고, 그 안에 위폐를 모시거나 화분을 그려 모시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성황은 보편적인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위함을 받는 성황신 외에도, 지역의 방백이 직접 성황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에는 성 안 높은 곳에 성황사를 짓고, 그 안에 위폐를 모신다. 성황사의 집제는 고을의 방백이 주관을 한다. 또한 길거리에 지나는 길손들의 안위를 위한 서낭도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 성황은, 우리민족의 마을신앙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문당리 성황단은 독특한 제단으로 가치가 높아

 

문당리 성황단은 앞에 열거한 일반적인 성황제의 신표와는 다르다. 우선은 누석총을 양편에 쌓아 남녀를 상징하는 것도 그렇지만, 돌을 쌓아올려 제단을 조성하였다는 점도 특이하다. 그리고 그 뒤쪽을 높이 층이 나게 쌓아, 음식을 차리는 진설대를 만든 것도 그렇다. 또한 그 뒤편을 길게 늘어놓아, 산의 능선과 연결을 시도한 것도 이 마을 성황단의 특징이다.

 

 

현재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문당리 성황단은, 조선 중기에 마을이 형성 된 후 오랜 시간 마을의 수호신으로 지역주민들과 함께 지내왔다. 전국적으로 많은 마을제의 신표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즈음에, 문당리 성황단의 가치는 더욱 높다고 할 것이다.

딴 나무를 타고 오르며 생육하는 줄사철나무

<노박덩굴과>에 속하는 상록관목인 줄사철나무는 옆으로 기면서 자란다. 줄기에서 뿌리가 내리는 이 나무는 초록색의 어린 가지는 약간 모가 져 있다. 잎은 길이가 2~5㎝, 너비가 1~2㎝로 마주나는데, 약간 두터우며 가장자리에 고르지 않은 톱니들이 있다. 꽃은 5 ~ 6월에 피고, 양성이며 취산화서에 15개 내외의 꽃이 달린다.

 


꽃받침 조각, 꽃잎 및 수술은 4개씩 이고, 열매는 4각상 편구형이다. 성숙하면 벌어져서 황적색 각종 피에 싸인 종자가 나타난다. 관상용으로 많이 키우며,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자라고, 일본 오끼나와 및 중국에 분포한다.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 있는 마이산의 줄사철나무 군락지는, 천연기념물 제380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진안읍 가림리에서 만난 줄사철나무

진안군 마령면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진안읍 쪽으로 길을 들어섰다. 도로변 옆에 문화재 안내판 하나가 서 있다. 지나치려다가 무엇인가 궁금하여 차를 세우고 다가가 보았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95호로 지정이 된 줄사철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 줄사철나무는 마이산 줄사철나무와 동종으로 가림리 은천마을 앞 길 건너 도로변에서, 다른 나무에 줄기를 뻗어 자라고 있다.




가림리 줄사철나무는 모두 세 그루가 자라고 있다. 팽나무와 느티나무를 타고 오르며 자라고 있는 이 나무들은 높이가 모두 5m 내외이다. 9월 7일 찾아간 가림리 줄사철나무. 원래는 네그루가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그중 거북바위 등을 타고 오르던 나무는 고사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은 숲이 우거져 있으며, 이 숲을 ‘은천마을숲’이라고 부르고 있다.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붙여진 이름

이 마을은 예전에는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어 흐르기 때문에 ‘은(隱)’자를 써서 ‘은천(隱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의 숲은 예전 은천이 흐르던 자리에 조성되어 있다. 이 은천마을 숲은 느티나무 21주, 팽나무 12주, 은행나무 8주, 줄사철나무 3주, 개서어나무 2주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중에서 3주의 줄사철나무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95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나무 주변에는 철책을 둘러 보호를 하고 있다. 나무는 길가에 한 주가 있고, 아래쪽 숲속에 두 그루가 서 있다. 나무들은 모두 딴 나무줄기에 기생하여 위로 오르고 있으며, 독특한 형태로 생육을 하고 있다.

줄사철나무는 겨울에 진가를 보여

은천마을 줄사철나무의 진가는 겨울철에 볼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줄사철나무가 타고 오르는 나무들이 팽나무와 느티나무이기 때문에, 가을이 되면 모두 잎이 떨어져 버린다. 그리고 나면 줄사철나무의 푸른 잎이 그대로 남아있어, 제 모습을 확연히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무의 줄기를 따라 오르며 많은 가지를 뻗는 줄사철나무. 우연히 길을 가다가 만난 문화재 안내판 하나가 이런 귀한 자료를 만나게 해준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면 진안을 답사하면서 큰길가에 문화재 안내판이 제대로 서 있지를 않아, 문화재를 찾을 때마다 곤욕을 치렀다는 것이다. 언제나 문화재를 찾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는지. 이번에도 반 이상을 길에서 허비를 하고 말았다.

아리랑에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난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십리는 커녕 오리도 못가서 마음이 아픈 정자가 있다. 남원시 사매면 월평리에 소재한 전북 문화재자료 재56호인 ‘오리정(五里亭)’이 바로 그런 곳이다. 오리정은 전주에서 남원으로 내려가는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다.

오리정은 목조 2층 건물로 1953년에 지어진 정자이다. 이 오리정은 광한루에서 처음 만난 이도령과 춘향이가 사랑을 나누다가, 이곳에서 이별을 하던 장소라고 한다. 춘향전 속에는 서로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이 이도령이 부친을 따라 한양으로 가게 되자, 이곳까지 쫒아 온 춘향이가 애끓는 이별을 서러워하면서 이도령을 떠나보냈다는 것이다.


도로변에 선 오리정은 늘 한산해

오리정은 전주에서 남원으로 가는 17번 도로를 따라 가다가 보면 우측 길가에 서 있다. 좌측으로는 오리정 휴게소가 있고, 도로변에 2층으로 된 정자가 보인다. 정자 옆에는 수련이 피어잇는 연못이 있고, 주변에는 사람들이 쉴만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가끔은 지나는 사람들이 찾아 들어오지만, 늘 한산한 모습이다.

춘향가 중에서 오리정 이별대목을 보면 이곳에서 춘향이와 이도령이 얼마나 마음아픈 이별을 했는지가 잘 나타나고 있다. 생전에 명창 김소희 선생님께서 즐겨 부르시던 대목이다.




(아니리/ 말로 하는 대목) 방자 충충 들어오더니 "아 도련님 어쩌자고 이러시오 내 행차는 벌써 오리정(五里亭)을 지나시고 사또께서 도련님 찾느라고 동헌이 발칵 뒤집혔소. 어서 갑시다." 도련님이 하릴없이 방자 따라 가신 후 춘향이 허망하야 "향단아 술상 하나 차리어라. 도련님 가시는디 오리정에 나가 술이나 한 잔 드려보자."
(진양조/ 제일 늦은 소리) 술상 차려 향단 들려 앞세우고 오리정 농림 숲을 울며불며 나가는디, 치맛자락 끌어다 눈물 흔적을 시치면서 농림 숲을 당도허여 술상 내려 옆에다 놓고, 잔디 땅 너른 곳에 두 다리를 쭈욱~ 뻗치고 정강이를 문지르며 "아이고 어쩔거나. 이팔청춘 젊은 년이 서방 이별이 웬일이며, 독수공방 어이 살꼬. 내가 이리 사지를 말고 도련님 말 굽이에 목을 매여서 죽고지고!"
(자진모리 / 빠른소리) 내행차 나오난디 쌍교를 거루거니 독교를 어루거니, 쌍교 독교 나온다. 마두병방 좌우나졸 쌍교를 옹위하야 부운같이 나오난디, 그 뒤를 바라보니 그 때여 이 도령 비룡같은 노새등 뚜렷이 올라 앉어 제상 만난 사람 모냥으로 훌쩍훌쩍 울고 나오난디, 농림 숲을 당도허니 춘향의 울음소리가 귀에 언뜻 들리거날 "이 얘, 방자야. 이울음이 분명 춘향의 울음이로구나. 잠깐 가보고 오너라." 방자 충충 다녀오더니, "어따, 울음을 우는디. 울음을 우는디, 울음을 우는디..." "아 이놈아. 누가 그렇게 운단 말이냐?" "누가 그렇게 울겄소? 춘향이가 나와 우는디 사람의 자식은 못 보겠습디다."
(중모리/ 조금 늦은 소리) 도련님이 이 말을 듣더니 말 아래 급히 나려 우루루루루루.... 뛰어가더니 춘향의 목을 부여안고 "아이고 춘향아. 네가 처연히 집에 앉아 잘 가라고 말허여도 나의 간장이 녹을 텐디 삼도 네 거리 떡 버러진데서 네가 이울음이 웬일이냐!" 춘향이 기가 막혀 "도련님 참으로 가시오 그려. 나를 아조 죽여 이 자리에 묻고 가면, 영영 이별이 되지마는 살려두고 못 가리다. 향단아! 술상 이리 가져오너라."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몇 년째 없어

이런 슬픈 이별의 장소인 오리정이다. 춘향전에서 나오는 오리정 대목을 생각하면서 지은 정자 오리정. 이곳은 춘향이가 한양으로 떠나가는 이몽룡을 따라 쫒아오다가 신발이 벗어진 곳이라고 한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면 이곳에서 두 다리를 뻗치고 울음을 울었을까? 도로변에 나 있는 오리정은 차를 타고 가면서도 늘 볼 수가 있는 정자이다.

정자는 목조 2층이다. 정자에 오르면 찻길 반대편으로는 펼쳐진 논이 있다. 이층으로 오르려는데 계단이 없다. 그냥 이층만 꾸며 놓은 것일까? 이층을 오르던 계단을 놓았던 자리는 있는데, 정작 계단이 없다. 이층 바닥에 난 계단을 놓았던 곳에는 칠이 되어있지 않아, 이곳에 계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계단이 사라진 것일까?




춘향이와 이도령이 이별을 서러워하며 피눈물을 흘리던 이곳. 오리정은 그렇게 길가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아픈 이별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정작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없어져, 진한 그리움을 느끼기에는 부족한 듯하다.

비가 오는 날 답사란 반갑지가 않다. 우선은 장비가 빗물에 젖을까봐 신경이 쓰이기도 하지만. 바짓가랑이를 척척하게 감겨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루를 그냥 포기하고 일요일 일찍 길을 나섰지만, 지난 토요일 내린 비로 인해 걸음을 온전히 걸을 수가 없다. 무작정 걸어야 하는 문화재 답사란 늘 곤욕을 치르게 마련이다.

왜 문화재는 꼭 그렇게 산이나 골짜기에 있나? 누군가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하지만 숨은 듯 그렇게 자리를 잡은 것은, 스스로 내세우지 않기 위함이다. 석불이건 마애불이건 아니면 석탑이 되었든지, 장인 스스로가 남에게 자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그렇게 숨을 죽이고, 하나의 대단한 작품을 완성을 하는 그런 겸손함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요즈음처럼 내놓고 자랑 같지 않은 자랑을 하지 않아서 좋다. 그것이 우리 선조들의 마음이려니 한다.


부처님, 몸은 어디에 두시고

원주에서 횡성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으로 소초면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있다. 소초면 소재지를 지나 횡성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소초면 교항리가 나온다. 이곳에는 길가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그 밑에 보면 자연 암석 위에 불두(佛頭)가 한기 모셔져 있다. 바위 위에 올려 진 석조 불두.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4호이다.

바위에는 이끼가 가득 끼어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높이 1.05m 정도나 되는 커다란 불두가 올려져 있다. 이 석조 불두는 원래 이곳의 자연 암석위에 올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바위에는 선각으로 옷 주름등이 그려져 있었다고 하지만, 그 돌이 매몰되어 알 수가 없다. 왜 이렇게 자연 암석 위에 불두만 조각을 하여 올려놓은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천안시 삼태리마애불 등과 같이, 자연 바위 위로 머리 부분만 솟아나게 제작한 불상과 같은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형태로 만들어진 불상은 고려 시대의 형태로, 이 지역에서 보이는 거대석불과 같은 종류로 볼 수 있다.

이끼가 낀 자연 암석, 그리고 고목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 그 그늘아래 놓인 석조불두. 그저 예사롭지가 않다. 사각형의 넓적한 얼굴에 눈은 수평으로 굳게 그려져 있다. 코는 폭이 넓고 두터워 전체적인 얼굴의 형태에서 과하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입은 두툼하게 표현을 해 과묵한 형상이다. 머리 위는 평평하게 다듬은 것으로 보아서, 그 위에는 평평한 사각형의 판석을 올려놓았을 것이다.




고려시대 석조불의 형태를 지녀

옆으로 돌아 귀를 보니, 두텁게 표현을 해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뒷면은 조각을 하지 않고 쪼아낸 그대로 놓아두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토속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석조불두는, 고려 시대 이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거대석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머리 위에 평평한 돌을 얹어두는 형태도 고려시대 석불의 특징이다.

지금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석조불두만 자연암석 위에 올려 진 교항리 석조불두. 그러나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느티나무 곁으로 돌아가 불두를 본다. 그 모습이 아주 오래 전 어느 날 꿈속에서 본 것만 같은 느낌이다. “몸조차 무거워 버리셨습니까? 우리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석조불두의 귀에 대고 떠들어보지만, 굳게 다문 입이 열릴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세상사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어느 장인이, 천 년 전 이미 이 시대를 보고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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