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간이란 절에서 커다란 행사를 할 때 내거는 깃발을 말한다. 대개는 절 앞에 당간을 내 걸게 되며, 이 당간을 거는 지주 대를 ‘당간지주’라고 한다. 당간을 세우는데 필요한 버팀기둥인 당간지주는 돌을 양편에 세우고, 위아래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받쳐주는 빗장을 끼워 당간을 고정시킨다.

전국의 절을 찾아가면 이 당간을 볼 수가 있다. 당간은 대개 나무로 만들어 세우는데, 어느 곳에는 철로 만든 당간이 있는 곳도 있다. 국보 제41호 용두사지 철당간은 당간지주를 세우고, 깃대를 세우는 당간을 철로 만들었다.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에 자리한 용두사지는 고려 광종 13년인 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 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된 절이다.


당간지주 하나에도 불심이 깃들어

남원 만복사지 한편에 동서로 마주하고 있는 이 당간지주는 지주 사이에 세웠던 깃대는 남아있지 않고, 이를 고정시켰던 구멍이 세 군데에 뚫려 있다. 현재 아랫부분과 기단이 땅속에 파묻혀 있어 그 이하의 구조는 알 수 없다. 땅속에 묻힌 것을 감안한다면 이 당간지주의 전체 높이는 5m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간은 커다란 장대석을 거칠게 다듬었으며 별 다른 장식이 없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당간지주의 조성 시기는 고려 전기로 보인다. 당간지주를 살펴보면 거칠게 맞은 돌을 깨낸 흔적이 보인다. 지금처럼 돌을 다루는 공구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망치와 정 만으로 이 당간지주를 다듬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 커다란 석물을 조성했다는 것을 알고 나면, 단순한 이 당간지주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가늠이 간다.



정유재란이 앗아버린 만복사

남원시 왕정동에 자리하고 있는 만복사지. 만복사지는 기린산 아래에 자리한 절로 일설에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기록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 세운 것으로 보인다. 더욱 보물 제32호로 지정이 된 이 당간지주가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을 보아도 만복사가 고려 문종 때 창건이 되었음을 뒷받침 하고 있다.

당시 이 만복사의 사세는 대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만복사지 부근에는 백뜰, 썩은 밥배미, 중상골 등의 지명이 있어 당시의 사찰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 백뜰은 만복사지 앞 제방을 말하는데, 승려들이 빨래를 널어 이곳이 온통 하얗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고 썩은 밥배미는 절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를 처리하는 장소로 승려의 수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복사지에서 세월을 탓하다.

이렇듯 장엄한 사세를 자랑하던 만복사는 정유재란 시 남원성 싸움 때 소실이 되어버렸다. 금오신화의 저자 김시습은 만복사를 배경으로 한 『만복사저포기』를 남겨, 한문소설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도 당시 만복사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잘 정리가 되어있는 만복사지. 여기저기 전각이 서 있던 터가 도드라지게 자리하고 있고, 주춧돌은 아직도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숙종 4년인 1679년에 남원부사 정동설이 복원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방치되었던 만복사. 그 한편에 서 잇는 당간지주를 보면, 아마 이 곳 앞으로 절의 일주문이 있었을 것이다.

옛날 남원8경 중에 <만복사 귀승>이 있다. 시주를 마치고 저녁나절에 만복사로 돌아오는 승려들의 행렬이 실로 장관을 이루었다는 것에서 아름다운 경치로 꼽았다고 한다. 교룡낙조, 축천모설, 금암어화, 만복사 귀승, 선원모종, 광한추월, 원천폭포, 순강귀범을 팔경 중에 네 번째로 만복사 귀승을 꼽을 정도였다.


세월은 그리도 무심한 것인지. 저녁 무렵 찾아간 만복사지 한편에 자리한 당간지주. 옛날 커다란 돌을 쪼아 이 당간지주를 만든 석공은 어떤 마음으로 이 당간지주를 만들었을까? 눈을 감고 당간의 투박한 표면에 손을 대본다. 행여 당시 석공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으려니 하지만, 무심한 초가을 바람만 손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남원시 왕정동에 소재한 만복사지는 사적 제34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만복사는 김시습의 단편소설인 『금오신화』에 실린 「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이기도 하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1046~1083) 때 처음으로 세워졌다.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이층법당과, 오층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만복사를 찾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갈 때마다 사지가 잘 정리가 되어있어, 기분 좋게 돌아보고는 했다.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소실이 될 때까지, 만복사는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 서, 북쪽에 법당을 둔 일탑삼금당 식 배치를 보이고 있었다. 경내에는 네 점의 보물(당간지주, 석불입상, 오층석탑, 불상대좌)과 많은 석재들이 있다.

사적 만복사지. 우측에 석인상이 서 있다.

새로 선보인 석인상 일기

이번 답사 때 찾아간 만복사지(2010, 9, 18). 그런데 입구 쪽을 보니 지난번에 보지 못했던 석조물 1기가 서 있다. 만복사지 석인상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 석인상은 만복사지 당간지주의 남쪽 4m 정도 떨어진 도로변에, 2기가 나란히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 도로를 운행하는 차량들로 인해, 훼손의 우려가 있는 1기를 옮겼다는 것이다.

이 석인상은 처음 본 것이다. 두 번이나 이곳을 답사를 했으면서도 보지를 못했다. 아마 4점의 보물을 중점적으로 찾아보는 바람에 놓친 것 같다. 그런데 이 석인상을 보는 순간, 참으로 자신이 참담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가 이런 형태의 석인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흡사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조각한 목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보지 못한 형태의 석인상

이 석인상은 그 모습이 괴이하기까지 하다. 부정형의 사각형 장초석의 3면에 조각을 하였는데, 사람 모양을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얼굴은 노여움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으며, 팔은 몸에 붙인 채로 구부려 무엇인가를 꽉 잡고 있는 형태다. 팔에는 두터운 팔과 근육을 표현 한 듯한 선이 나 있다. 주변을 돌면서 보아도 정확한 모습은 아니다. 자연석인 돌을 이용을 하느라 그랬는지, 팔과 기타 신체의 부분이 제대로 갖추지를 못하고 있다.

얼굴은 눈을 돌출시킨 것이 민속 석조물에서 보이는 석장승의 형태를 닮았다. 눈썹은 두텁게 처리하고 눈은 불거졌으며, 볼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코는 뭉툭하다. 석장승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인상은 상반신이 반나로 서 있다. 허리부분에 옷을 묶어 매듭을 내었으며, 옷 주름은 굵은 물결무늬로 선명하다.


팔의 조각한 형태는 괴이하다. 한 팔은 뒤로 돌아갔다.

하반신은 특별한 조각이 없으며, 늘어트린 옷 주름으로 가렸다. 전체 길이는 550cm이며, 머리부터 다리까지의 길이는 370cm 정도이다, 나머지 부분은 뾰족하게 깎았으며 땅 속에 묻혀있다. 도대체 이 석인상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석인상을 찬찬히 훑어보지만 금방 그 용도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뒷면에 있는 구멍이 용도를 알리는 열쇠?

이렇게 괴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만복사지 석인상의 용도는 과연 무엇일까? 뒤로 돌아가 보니 뒷면에 둥근 구멍이 아래위로 나 있다. 위쪽의 구멍은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122cm, 그리고 그 밑에 구멍은 318m 정도 내려온 곳에 있다. 땅 위로 솟아있는 석인상의 높이가 370cm 정도이니, 아래 구멍은 땅에서 52cm 정도 위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위에 있는 구멍은 248cm 정도 위에 있다.

이 구멍의 용도는 무엇일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지만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혹 이 뒤편에 있는 구멍이 당간지주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당간이나 석인상의 높이가 있어 그 정확한 구멍의 차이는 알 수가 없지만, 어림잡아 구멍의 높이가 비슷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석인상은 당간의 용도로 쓰였을까? 아니면 당간의 바깥에 세워 더 많은 당을 걸게 했던 것은 아닐까?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아, 그 이상의 내력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섭게 눈을 부라리고 두 주먹을 꽉 쥔 것으로 보아, 절의 입구에 서서 액을 막아내는 사천왕은 혹 아니었을까? 아니면 절의 신성한 장소의 양편에 세워, 뒤에 난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그곳의 출입을 제한하던 문지기는 아니었을까? 긴 시간을 생각해보지만, 그 정확한 용도를 알지 못한 체 만복사지를 뒤로한다. 저 석인상의 용도를 알 수 있는 날까지, 꽤나 속을 썩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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