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온다. 여기저기서 전화로 혹은 이메일로 인사들을 한다. 일 년 동안 잠잠하던 사람들도 연말이 되면 조금은 궁금해지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연말과 새해가 되면, 마음속으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기원하기도 한다. 누구는 건강을, 누구는 금연을, 또 누구는 대박의 꿈도 꾼다. 하지만 세상사 그리 만만치는 않은 듯.

연말과 새해, 요즈음 시쳇말로 ‘가는 해 붙잡지 않고, 오는 해 막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세월이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진시황제도 가는 세월을 막아보려고 동남동녀 오백 인을 배에 태워 불사약을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은 황천길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경북 영주에 있는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모습

(恨)이 배어있는 ‘위리안치지’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무엇을 먼저 해야만 할까? 다음 뷰에 송고를 한 글 중에 ‘위리안치’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우리 형벌 중에 가장 험한 꼴을 당하는 것이 ‘위리안치’라는 형벌이었다고 생각한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은 조금 지나면 금성대군 신단이 있고, 그곳을 조금 지나 좌측 마을 길 안으로 들어서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 있다.

‘위리안치’란 허허로운 벌판의 땅굴 속에 사람을 가두어 두는 형벌을 말한다.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이곳 집 한 채 주변에 없는 벌판에서 형인 수양의 욕심으로 인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위리안치를 당한 곳이다. 단종의 숙부이기도 한 금성대군은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복위하자, 형 수양과 함께 단종을 도울 것을 약속하지만 형의 왕좌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위리안치를 당한 것이다.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처형이 된 순흥으로 유배 당하는 모습

1456년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를 하자, 이에 연루되어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옮겨졌다. 금성대군은 이곳에 와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거사를 일으켜 수양을 몰아내려고 하였으나, 관노의 고발로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을 당한다.

가장 극악한 형벌 중 하나인 위리안치

다시 설명하지만 조선시대 형벌 중에 유배형에 해당하는 것은, <부처>와 <안치>가 있다. 부처란 유배형을 당한 죄인이 부인과 함께 유배지에 머물며 생활을 하는 형벌이다. 안치란 부처형을 받은 죄인이 왕족이나 고관일 경우, 유형을 받은 장소에서 주거와 행동을 제한시키는 형벌제도이다.

안치에도 종류가 있다. 고향 등으로 행동을 제한시키는 <본향안치>. 육지와 떨어진 절해고도에 안치를 시키는 <절도안치>. 그리고 가장 중형에 속하는 <위리안치>이다. 위리안치는 형벌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형벌이라고 한다. 큰 죄를 범한 죄인을 허허벌판에 돌우물 같은 웅덩이를 파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형벌이다.

위리안치를 당하면 허허벌판 돌 웅덩이 안에 갇혀 처형이 되기를 기다린다.

위리안치지는 처형을 당할 때까지 죄인을 가두어 두는 곳이다. 그러나 그 ‘옥(獄)’이라는 곳이 일반적인 옥과는 다르다. 주변에 인적이 없는 벌판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두어 둔다. 안은 발을 뻗을 수조차 없는 곳이다. 누울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웅덩이.

거기다가 인근에는 물이 흐르기 때문에 바닥은 축축하다. 비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웅덩이 안으로 물이 차 들어온다.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곳이다. 아마도 처형을 당하기도 전에 미리 기암을 하지나 않으려는지 모르겠다. 웅덩이 밖으로 나간다 해도 도망을 갈 수가 없다. 위리안치지 주변이 모두 가시가 돋은 탱자나무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위리안치지 주변은 가시가 많은 탱자로 울타리를 쳐놓아 나갈 수가 없다.

마음의 '위리안치’에서 벗어나자

이러한 위리안치는 꽁꽁 갇혀있는 곳이다. 누구도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다. 이런 위리안치지처럼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닫아걸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위리안지치에 갇힌 사람들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아집과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자. 만일 내 마음 어딘가에 꽁꽁 닫힌 곳이 있다면, 과감히 마음의 벽을 허물고 벗어나야만 한다.

가는 해와 오는 새해. 우리 마음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둔 위리안치는 없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자. 소통과 화합을 말로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위리안치지에서 툴툴 털고 나오는 자유를 만끽하자. 스스로의 마음을 위리안치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행복일 수 없으니 말이다.

전북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산 2-1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된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 높지 않은 둔덕의 윗부분 노송 숲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이 정자는, 조선조 세조 2년인 1456년 신숙주의 아우인 신말주가 지은 정자이다. 정자 이름을 ‘귀래정’이라고 불렀는데 이 정자 명칭은 바로 신말주의 호이기도 하다.

신말주는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벼슬에서 물러나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이곳은 신말주의 부인인 설씨의 고향이기도 하다. 신말주는 이곳으로 내려와 뜻이 통하는 노인 열 명과 ‘십노계’를 결성하고, 이 귀래정에 올라 자연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다.


정자 주변에는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어

서거정, 강희맹 등의 귀래정기와 시문 등이 즐비하게 걸려있는 귀래정. 현재의 간물은 1974년에 고쳐지은 것이라고 한다. 귀래정을 오르는 길에는 신말주의 후손들이 살았단 유지가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설씨부인의 ‘권선문’과 신경준의 ‘고지도’ 등을 보관하고 있는 ‘유장각’ 등을 만날 수가 있다.

이 신말주의 세거지는 다시 한 번 거론하기로 한다. 노송이 높게 자란 언덕길을 오르면, 사방이 훤히 트인 곳에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현재의 건물은 1974년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세거지를 지나쳐 숲길을 천천히 걸어 오르다 보니, 각종 새들이 여기저기서 푸득이며 날아간다. 아마도 저 새들도 이 노송 숲길이 꽤나 좋은가 보다. 정자는 그저 바람을 맞으며 앉아 글 한 수 읊조리기 좋게 지어졌다. 정자 곁에는 고목이 되어버린 고사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옛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귀래정’ 아마도 신말주는 세조가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처가인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아픔의 역사로 뒤돌아 가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정자 마루에 걸터앉아 흐르는 띰을 닦아낸다. 노송 숲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6월 18일의 후텁지근한 날씨에 절어버린 나그네를 반긴다.



주추만 보고도 반해버린 정자

정자를 찬찬히 둘러본다. 정자의 중앙에는 한 칸 방을 뒤편으로 몰아 들였다. 누마루를 깐 사방은 난간 하나 장식하지 않은 단출한 정자이다. 기둥은 원형기둥을 이용했는데, 주추를 보니 꽤나 아람답다. 주추를 보면서 혼자 빙긋 웃어본다. 주추 하나에도 사람이 반할 수가 있는 모양이다.

밑은 넓고 배가 튀어나오게 둥글게 만들고, 위는 조금 역시 둥글지만 배가 튀어나오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그 주추 가운데를 파 목재를 고정시켰다. 이런 주추를 만난 것도 처음이지만, 그 주추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렇게 주추 하나를 조형한 것도 귀래정 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그저 화려하지 않은 정자 귀래정. 그 누마루에 걸터앉아 일어나고 싶지가 않다. 처음 정자가 지어진지 벌써 550년 세월이 흘렀다. 아직도 신말주 선생은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일까? 천천히 정자를 내려와 세거지로 향한다. 세거지 곁 마을 집에서 백구 한 마리가 짖어대며 낯선 나그네를 경계한다.


예전의 선인들은 무엇인가를 남기고 가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나보다. 물론 민초들이야 먹고살기도 바빴으니,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민초들의 삶이라는 것이, 그저 양반네들에게 매일 뜯기고 찢기다가 일생을 마쳤을 테니까. 그러나 양반네들은 자신이 살아생전에 어떤 삶을 영위했는가에 대해, 그 흔적을 곧잘 남겼다는 생각이다.

그런 자신의 생애를 가장 잘 표현한 것들 중에는, 많은 정자가 있다. 정자란 쉽게 무너지지도 않거니와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곳이다가 보니, 자연 정자에 자신의 살아 온 흔적을 남기기를 즐겼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의 정자는 영남지방에 상당히 많은 편이다. 아무래도 조선조 전 시대를 영남지방의 반가들이 득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육신의 한분인 어계 조려선생을 기억하다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는 생육신의 한분인, 어계 조려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조려 선생은 단종이 숙부에 의해 사약을 받고 영월 땅에서 죽임을 당하자, 영월까지 가 그 시신을 수습하고 낙향을 하였다. 그 위폐를 동학사에 모셔놓고 백이산 아래에 은거를 하였다고 전한다.

원북리 앞을 지나는 지방도 옆에는, 정자가 한 채 서 있다. ‘채미정(菜薇亭)’ 말 그대로이다. 백이산 아래에 은거한 조려선생은 풀과 고사리로 연명을 하면서 살았다고 전한다. ‘채미'란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 무왕을 섬기는 것을 수치로 알고, 수양산으로 숨어들어 풀과 고사리만 먹다가 아사를 한데서 유래한다.



조려선생은 백이, 숙제와 같은 뜻을 품고 이곳에서 은거를 하면서, 좋은 의복과 좋은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가 바로 채미정이다. 채미정은 정자로서의 아름다움보다, 그 안에 숨은 뜻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무너져 내렸던 채미정

한 10여년이나 되었을까? 이곳으로 답사를 나갔다가 우연히 채미정을 들렸다. 인근에 있는 방어산 마애불을 답사하러 갔다가 들린 곳이다. 당시에는 잡풀이 우거지고, 정자는 쇠락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번에 지나는 길에 들린 채미정은, 말끔히 손질이 되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정자 앞에 수백 년 묵은 은행나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 쓸어져가는 대문은 없애버리고, 대신 한편에 일각문을 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10여대나 차가 설만한 주차공간도 만들었다. 정자도 말끔히 정리를 하고, 주변도 정리를 하였다. 채미정은 1735년에 처음으로 지었으니, 300년 가까이 되었다. 근처에는 생육신을 향사한 사액서원인 서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 뜻이 더 아름다운 채미정

일각문을 들어서면 앞으로는 연못이 있다. 정자에 걸린 현판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순흥 안용호 선생이 지은 채미정 중건기문이다. 그 기문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함안읍성 서쪽 삼십리 지경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은 산이 백이산인데, 그 산 서편에 있는 동리가 원목이다. 동천복지답게 명려하고 맑은 물이 흐르고 기름진 옥야는 가히 밭 갈고 은거할만한 곳으로...(중략) 선생은 단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래학관에 계시다가 을해년 왕위찬탈의 화를 만나 재생들과 하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충의와 절개를 지켰던 생육신의 한분이시다.(하략)

이러한 선생의 충절을 되새기고 잊지 않기 위해 건립한 것이 바로 채미정이다. 역사 속에 남아있는 정자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채미정이 지니고 있는 조려선생의 충절이 아름다운 것이다.


채미정은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이다. 중앙에는 방을 드렸는데 판벽으로 처리를 하였다. 창호 위에는 작은 밀창을 사방으로 두었다. 정면으로는 원형의 기둥을 두고, 측면으로는 사각기둥을 배열하였다. 누마루를 방의 주변에 깔아, 사방으로 편안하게 밖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아마도 이곳에서 있기가 답답하면, 위편에 있는 청풍대에 올라 바람을 쏘였을 것이다.

청풍대(淸風臺)와 문풍루(聞風樓)에는 소식조차 돈절한데

채미정 우측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있다. 그 위를 청풍대라고 이름지었다. 그리고 뒤편에는 작은 정자 하나가 더 있다. 문풍루. 바람의 소리를 듣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그 바람결에 영월 땅에서 오는 좋은 소식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을까? 충절을 지키느라 풀과 고사리로 연명을 한 조려선생이, 날마다 이곳에 올라 애타게 바람결에 오는 소식을 기다렸을 것이다.



채미정, 이름보다 뜻이 더 아름다운 정자.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지만, 조려선생은 이 채미정으로 인해 천만세에 그 이름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청풍대에 올라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무심히 고개 한번 돌리지 않는 사람들. 그렇게 채미의 큰 뜻은 퇴색되어 가는 것인지.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에 가면 단종임금이 지나갔다는 마을이 있다. 여주군 북내면에 있는 상구리와 상교리, 그리고 주암과 서원리 등이다. 1457년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봉이 되어, 의금부 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 50여명의 호송을 받으며 유배 길에 올랐다.

1457년 6월 22일, 단종은 한양을 출발하여 일주일만인 6월 28일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다. 어린 단종은 상왕이 되었다가 다시 노산군이 되어 한양을 출발해 뱃길로 한강을 거슬려 이포나루에 도착을 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어린 단종은 어디로 길을 택해 영월로 향했을까?

눈물어린 길을 따라가 보다

여주군 상구리 블루헤런 골프장 안에 있는 단종이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

파사산성이 보이는 강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 단종 일행은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위안골을 지나 무촌리 -옥촌리-장풍리를 거쳐 현재 골프장인 블루헤런 안에 있는 어수정에 도달했을 것이다. 어수정은 단종임금이 이곳에서 마른 목을 축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당시에야 길인들 제대로 있었을까? 겨우 사람 하나 지날만한 숲길을 헤치고 일행은 더딘 걸음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 일행은 혜목산을 넘어 고달사지에 도착한다. 고달사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던 절로 ,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된 절이다. 고려 시대에는 동봉원. 희양원과 함께 삼원의 하나로 역대 왕들이 비호를 하던 사찰이다.


어수정에서 물을 마신 단종은 안개가 자욱한 이 산을 넘어 고달사지에 도착한다.

고달사는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당시는 고달사가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단종 일행이 지나갈 때 바라보지 않았을까? 그 중에는 억울한 단종의 유배길에 눈물을 훔치는 백성들도 있엇을 것이다.

고달사에서 논둑 길을 따라 걷다가보면 좁은 산길이 나온다. 산길이라야 그저 낮은 마을 뒤 언덕이다. 이 길을 따라 걷던 일행은 서낭나무에 도착을 한다. 서낭나무는 지금은 옆으로 쓸어져 모진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아마 당시 이곳을 지나던 단종일행의 아픔을, 아직도 다 전하지 못했음을 아쉬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좁은 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하늘이 트인 곳이 나오고, 그 낮은 고개 위에는 서낭나무가 서 있다.

서낭나무 앞에서 잠시 숨을 들이쉰다. 서낭나무에서 20여m 앞에는 예전 서낭할머니가 살던 집이 있다. 이 곳에서 논길을 따라 걷던 일행은 서원리로 향했을 것이다. 서원리는 원이 있었던 곳으로 현 서원1리를 '원골'이라 부른다. 이곳은 공무를 보러 여행 길에 나선 관리들이 묵어가던 곳이다. 지금도 서원리에는 예전 원이 있던 집터가 있고, 마을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집채만한 주추들이 있었다고 한다.
 
서원리 원골에서 하루를 묵은 단종일행은 북내면 석우리 선돌 앞을 지나 내룡리, 북내면 외룡리를 지나갔을 것으로 추측한다. 마을이름이 내룔이나 외룡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왕과 관련된 지명이고, 단종이 지나갔기 때문에 '용'이란 명칭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고목이 되어버린 서낭나무와 그 앞 들판인 점말 고래들. 그리고 원골로 넘어가는 길

고달사지부터 길을 시작해 논길을 걸어 숲으로 접어든다. 한 여름 뙤약볕에도 숲길은 시원하다. 발밑에서는 비가 온후 자라난 풀들이 밟히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런 마음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나이 어린 폐왕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먼 길을 떠나 유배길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 두렵고 또 두려웠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을까? 단 한 시간여를 걸어본 길도 힘이든대, 700리 길을 걸어 영월 청령포로 향한 어린 단종. 지금 이 길을 따라 걸으면서 그 아픔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먼 세월이 가로막고 있다. 여름 무더위를 식히는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때도 이렇게 바람이 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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