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1.8개의 글. 참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11일부터 1130일까지 거의 날마다 2개씩의 글을 썼다는 것이다. 남들처럼 자료를 보거나 TV, 혹은 영화를 보면서 쓴 글이 아니기에 더욱 더 징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화재나 기타 사람들 간의 인터뷰, 혹은 현장에서 취재한 글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문화재 답사라는 것은 절대로 집안에서는 쓸 수 없는 글이다. 현장을 나가 문화재를 보고 느껴야만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비에 흠뻑 젖어도 보고, 눈에 미끄러지기도 했다. 그렇게 11달 만에 쓴 글이 자그마치 654개나 된다. 남들은 이런 나를 보고 미쳤다고 한다. 남들이 아니라 내가 생각해도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으니 말이다.

 

비가 억수로 쏟아져도 답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9월 한 달 5kg이 빠졌다.

 

9월 한 달 동안 수원은 생태교통 수원2013’이 열렸다. 생태교통 수원2013은 수원시와 ICLEI(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 유엔 HABITAT(유엔 인간주거계획) 등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글로벌 프로젝트로, 미래 생태교통도시 재현을 통해 기후변화와 연료의 고갈 등에 대한 대응을 위한 새로운 교통부문의 대안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한 달 동안의 차 없는 거리를 몸으로 체험하면서 사람들은 앞으로 미래에 화석연료가 고갈되고 난 후, 우리의 자손들이 어떻게 이 난관을 풀어갈 것인가를 사전에 알아보는 국제적인 프로젝트였다. 9월 한 달 동안 행궁동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 살았다. 9월은 연일 살인더위였다.

 

 생태교통 한 달동안 5kg이 줄었다. 80개의 기사를 썼다

 


한 낮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거리에서 한 달간, 하루에도 몇 군데씩을 현장 취재를 하고 다녔다. 한 달간 쓴 기사만 해도 80개가 넘는다. 그동안 살이 무려 5kg이나 빠졌으니, 흘린 땀만 해도 어지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일 년간의 활동을 뒤돌아보다

 

201311일부터 1130일까지. 다양한 종류의 글을 썼지만, 역시 나는 문화재 전문 블로거이다. 문화재를 답사하러 나가기 전날이면 괜히 마음이 설렜다. 흡사 소풍날을 앞둔 아이처럼. 그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11개월 동안 답사를 한 날짜를 계산해보니 58일 정도가 된다. 58일 동안 답사로 소요된 경비만도 천여만 원. 누가 도와주는 것도 아닌데 괜히 길거리에 돈을 뿌렸다고 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발 목까지 눈이 쌓여도 그 핑계로 답사를 멈춘 적은 없다

 


지만 문화재 답사는 나에게는 내 일생을 걸고 하는 나만의 생활이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것을 꼼꼼히 기록해 자료로 만들어 둔다. 언젠가는 그것들을 이용해 좋은 연작 자료집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내 바람이기 때문이다.

 

일 년에 천만 원을 벌어도 시원치 않다고 한다. 그런데 실상 천여만 원을 투자해서 나에게 돌아 온 수입이란 고작 300여만 원이다. 밑져도 한참 밑지는 장사를 한 셈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투자한 금액보다 수백 배의 가치가 있는 자료들이 방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내가 작성한 글의 90%는 모두 현장에서 취재를 한 기사이다


 

앞으로도 내 바람 따라 걷는 길은 영원할 것

 

눈이 온다고 해서 답사를 멈춘 적이 없다. 오히려 눈이 내리고 비가 오는 날은, 또 다른 정취를 풍기는 문화재를 찾아 길을 나선다. 늘 나는 스스로를 바람 같은 남자라고 표현을 한다. 그렇게 바람 부는 대로 길을 나서 문화재들을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문화재는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일 년 동안 엄청 밑지는 장사를 했지만, 그보다 몇배 깂진 지료를 얻었다


 

우리나라처럼 문화재 관리가 허술한 나라도 없을 것만 같다. 사찰이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들은 그나마 관리가 잘 되는 편이지만, 산속이나 들판 등에 자리를 한 문화재들은 언제 누구에게서 훼파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 위에 서 있는 것도 결국 나 하나만이라도 그 문화재를 눈 부릅뜨고 지키겠다는 마음에서이다.

 

2014, 2015, 혹은 그 이후.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다. 다리에 힘이 붙어 있는 한은, 내 문화재 답사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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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시 기안동 산2-2 등 40필지에 조성이 된, 경기도 기념물 제93호 ‘수원고읍성 (水原古邑城)’은 최초로 조성한 시기가 고려시대로 알려져 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흙을 다져 쌓은 이 고읍성은 토성으로 조성을 하였다.

 

고려 때 수원에 읍성으로 쌓았으며, 조선 정조 13년인 1789년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읍성을 쌓을 때까지 사용되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당시도 이곳이 수원부의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토성으로 쌓은 수원고읍성

 

수원 고읍성은 본래 낮은 산의 능선을 이용하여 계곡 아래의 평지까지 에워 싼 형태였으나, 성터의 대부분이 무너지고 남아 있는 부분은 길이가 540m 안팎이다. 아래는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다져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성벽은, 윗부분의 넓이는 2∼2.5m이고 높이는 4∼5m, 경사면은 7~8m 정도이다. 이 토성에는 동문터와 서문터로 추정되는 부분도 있다.

 

수원고읍성의 옛 기록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1,320m쯤 되며, 성안에는 2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성벽을 자연지형에 따라 복원하여 보면, 융릉의 뒤편까지 토성이 뻗어있기 때문에 4km쯤 되어 큰 차이가 난다. 결국 이 성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조선시대까지 읍성의 기능을 갖고 있다가, 수원 화성으로 읍치를 옮길 때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화성이 축성될 때까지 읍성의 기능을 가져

 

이 수원고읍성은 아래에 활석을 깔고 그 위에 판축을 하거나 적갈색 통양을 두텁게 쌓아서 조성하였다. 현재 토성의 성벽은 도로로 인하여 잘려있으며, 이곳을 마을사람들은 ‘고서문(古西門)’ 또는 ‘고자문(古字門)’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이 서문 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의 동북쪽 꼭대기에도 동문 터가 남아있다.

 

11월 10일(토) 오후에 찾아간 수원고읍성. 주변은 정리가 안되어 있어서, 안내판이 없었다면 읍성인지 아니면 그저 토축이 쌓인 것인지조차 구별이 되질 않는다. 읍성 내에는 관아와 객사, 군영, 운금루 등의 건물지만 일부 발굴이 되었으며, 다른 건물들은 이미 심하게 훼손이 되어 자리조차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주변 정리부터 해야

 

성내에는 고려시재와 조선조의 기와와 자기류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고 하는데, 고려시대부터 수 백년 동안 수원의 읍성으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에, 많은 전각과 군사들이 기거를 하였던 것 때문인 듯하다.

 

경사면을 밟고 올라가는데 쌓인 낙엽으로 인해 길이 미끄럽다. 그저 길가에 서 있는 안내판 하나로 이곳이 수원고읍성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외에 이곳이 수원고읍성이라는 것을 선뜻 알아보기가 힘들다. 다만 석축 위로 길처럼 조성되어 있는 것이 바로 옛 읍성의 성벽의 위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 무슨 큰 역할을 하였겠느냐고 한다. 하지만 토성은 그 나름대로 지키는 방법이 있었다. 고려 때 쌓은 성이라면 당시의 전쟁을 할 때의 주 무기는 칼과 창, 활 등이다. 만일 적이 이 경사진 면을 기어오른다고 하면, 겨울에는 물을 뿌려 경사면을 얼리고, 여름에는 물을 부어 미끄럽고 발이 빠지도록 한다.

 

낮은 토성이긴 하지만, 이 토성은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감당을 해왔을 것으로 보인다. 길지 않은 구간을 돌아보았지만, 주변이 엉망이다. 기념물이라고 해도 역시 문화재이다. 문화재 주변이 온통 정신이 사납다. 문화재 안내판이 무색할 정도로 방치되어 있는 수원고읍성. 담당부서에서는 주변부터 정리를 해주기를 바란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참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비가 오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래저래 후줄근하게 되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정 반대다. 비만 오면 짐을 싸서 길을 나선다. 버릇치고는 참 희한한 버릇이다.

 

좋은 날은 방에 들어앉아 자료 정리를 하다가, 비만 오면 미친 듯 석조문화재를 찾아 길을 나서는 이유. 이런 나를 보고 비만 오면 살짝 이상해지느냐고 농담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기야 그럴 수도 있겠다. 좋은 날 두고, 하필이면 비가 오는 날 돌아다니니 말이다. 

 

비가 오는 날 모악산 용각부도를 보라

 

모악산에는 천년고찰 대원사가 있다. 대원사는 진묵스님이 술을 보고 '곡차'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절이다. 모악산 중턱에 있는 대원사는 금산사의 말사다. 금산사는 모악산 북쪽 김제에 있는데 비해, 대원사는 모악산의 남쪽 완주군 구이면에 자리하고 있다. 대원사는 매년 4월 둘째 주 토요일에, 수만 명이 모여드는 <진달래 화전축제>로 더 유명해진 절이다. 이 대원사 향적당 뒤편 산에는 부도 몇 기가 자리하고 있다.

 

 

평상시의 용각부도

 

그 중에 유난히 눈길을 끄는 부도가 한 기 있다. 용이 부도를 감고 올라가는 모습이 예사 부도 같지가 않다. 고려 때의 부도로 추정하는 이 용각부도는 정확한 조성 시기는 모르지만, 문양 등으로 보아 고려 때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용은 이 부도를 감고 있다. 머리를 아래로 하고 있는 이 용은, 금방이라도 부도를 벗어나 승천을 할 것만 같다.

 

비가 오는 날 승천하는 부도의 용

 

그런데 이 부도의 용 문양이 날이 좋은 날은 확실치가 않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용이 발로 여의주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러나 비가 오는 날 이 부도를 보면 전혀 다르다. 비늘 하나하나가 모두 들어나 보인다. 그리고 용은 금방 승천을 할 듯한 기세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비가 오는 날이 되면, 미친 듯 석조문화재를 찾아 달려 나가게 된다. 그 생생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비가오는 날 용각부도

 

이 용각부도 역시 마찬가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섬세하게 조각을 한 용의 모습이 확연히 들어나 보인다.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용의 모습. 힘차게 비상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듯 하다. 용의 문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때 고승의 부도로 보이는 이 용각부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용각부도의 문양이 드러나 듯,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석조문화재를 찾아 길을 나선다.

 

국보 진전사지탑도 비가 오면 부처님이 일어나신다

 

비가 오는 날 답사를 나서는 까닭은 맑은 날 선명하게 볼 수 없던 탑이나 마애불 등의 조각이 선명하게 들어나기 때문이다. 남들은 이런 나를 미쳤다고 한다. 아무리 선명한 조각을 볼 수 있다고 비가 오는데 길을 나서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라도 더 섬세한 모습을 담아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비도 어쩌지를 못한다.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는 신라시대의 절이었던 진전사지가 있다. 이곳에는 국보 제122호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높은 2단의 기단 위에 삼층으로 조성을 한 통일신라 8세기 후반의 작품이다.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그 조각 하나하나가 뛰어난 작품이다. 통일신라의 탑 중에서도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1층 탑신에는 여래좌상이 각 면에 한구씩 조각이 되어있다.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기단부 하단에는 연화좌 위에 광배를 갖춘 비천상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기단부 상단에는 팔부중상이 역동적으로 표현이 되어있다. 높이가 5m인 이 탑은 볼 때마다 감탄을 하게 만든다. 그저 평범한 돌을 이용한 조성한 신라시대의 탑. 그 조각 하나하나가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만나면 돌을 박차고 뛰어 나올 것만 같다.

 

비가 오면 난 짐을 싼다. 그리로 문화재를 찾아 떠난다. 오늘 비가 오려나? 하늘에 가득 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이제 비에 젖지 않게 갈무리를 잘한 짐을 싸 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비가 오는 날 꼭 보아야 할 마애불이 있어서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55번지에 소재한 사적 제346호 ‘무장현 관아와 읍성’. 몇 번이고 찾아가고 싶었던 길을 번번이 뒤돌아서야 했던 곳이다. 고창군 답사를 서너 번을 했지만, 이상하게 이곳까지 갈 수가 없었다. 답사 중 날이 저물어서이다. 지난 9월 4일 마음을 먹고 찾아간 무장읍성.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무장읍성은 한창 공사중이었다.

무장읍성은 1991년 2월 21일에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의 남문인 진무루에서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있는 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 1,4km 정도이며 넓이는 43,847평이다.


토성과 석성으로 쌓은 무장읍성

조선 태종 17년인 1417년에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여 명을 동원하여 흙과 돌을 섞어 축조하였다고 하는 무장읍성. 성내에는 객사, 동헌, 진무루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건물 주변에는 여러 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 여기저기 복원과 보수 공사를 하느라 파헤쳐진 무장읍성. 진무루를 지나 객사를 거쳐 뒤편에 있는 동헌건물인 취백당으로 향한다.

만 4개월 동안 2만 여명을 동원하여 축성을 하였다는 무장읍성의 동헌. 동헌은 관아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로, 당시 무장현감이 집무를 보던 곳이다. 조선 명종 20년인 1565년에 세웠으며 한때 무장초등학교 교실로 사용하기도 하여 변형이 된 것을, 1989년 원형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무장동헌은 멀리서 보아도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팔작 지붕으로 지은 동헌 건물은 겹처마로 구성해, 전체적으로는 장중한 느낌을 주는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동헌은 현재 전라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동헌 취백당

무장읍성의 동헌건물은 객사 뒤편에 자리한다. 동헌 뒤편으로는 토성으로 쌓은 성이 있으며, 동한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름드리나무들이 줄 지어 서 있어, 무장읍성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동헌을 찾았을 때는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정면 6칸인 동헌 건물의 중앙에는 <취백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무리 동헌 건물이라고는 하지만, 넘치는 취흥을 이기지 못해 붙인 이름인가 보다. 대청 안에는 많은 시판들이 걸려있는데, 그 중에는 최집의 취백당기를 비롯해 김하연의 찰미루기, 정곤의 아관정기, 우여무의 동헌시, 이덕형의 동헌시, 정홍명의 동헌시, 기준의 동백정시가 보인다.

이런 시판으로 보아 동헌을 동백정이라고도 불렀는가보다. 무장은 무송과 장사를 합한 고을이라 하여 동헌 이름을 ‘송사(松沙)’라 하였는데, 영조 때 최집이 부임을 해와 ‘취백(翠白)’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장중한 느낌을 주는 취백당

단 한 동의 건물이 사람에게 주는 느낌이 이리 장중할 수가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아마도 뒤편에 있는 토성이나, 주변에 늘어선 아름드리나무들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날렵하게 솟아오른 처마 끝이 살아있는 듯하다. 아래는 넓고 위가 좁게 마련한 주초위에는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그러고 보니 두리기둥의 길이가 길어 건물 전체가 장중한 느낌을 주는 듯하다. 대청은 세 칸으로 마련하였으며 뒤편에는 판문을 달아냈다. 건물을 바라보며 좌측은 두 칸의 방을 한 칸 뒤로 밀어서 드렸으며, 우측은 마루 끝까지 방을 드렸다. 우측방은 따듯하게, 좌측 방은 시원하게 계절을 보낼 수 있을 듯하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뒤편전체를 복도마루로 마련한 것도 취백당의 특징이다. 아무래도 뒤편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단 한 동의 건물이면서도 장중함을 느끼게 하는 취백당. 그 이름 속에는 솔처럼 푸른 기상을 지니고, 힌 모래처럼 그렇게 민초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고고함을 지키라는 뜻이 있는 듯하다. 취백당은 450년 세월을 그렇게 자리를 지켜오면서, 늘 푸른하늘을 동경했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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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라는 기능이 있다. 장황하게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간단하게 보내는 방법이다. 생전 열어보지도 않던 것을 열었더니 쪽지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개의 쪽지 중 하나는 맛있는 고기 집을 알려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전화번호를 알고 싶다는 것이다.

내용을 읽어보니 문화재청 영상팀이라는 곳에서 나를 촬영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 모습과 문화재 글을 쓰는 것 등을. 그래서 전화번호를 남겼다, 다음 날 목소리가 예쁜 작가 분이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참 여러 가지를 물어본다.

나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리고 보니 벌써 문화재 답사를 한답시고 전국을 내 집 안반처럼 돌아다닌 지가 20년이 훌쩍 넘었다. 남들 같으면 지겨워서 하라고 해도 안 할 그런 세월이다. 그런대도 아직 난 여기 길 위에 서 있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리 길 위로 내 몰고 있는 것일까?

‘잘 되면 내 탓이고, 잘 못되면 조상 탓’이란 말이 있듯, 이런 역마살도 다 조상 탓이려나. 요즈음은 점점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며칠 씩 걷고(길), 오르고(산) 하면서도 다음 날 새벽 같이 다시 길을 나서고는 했는데, 이젠 그렇게 다닐 수가 없다. 현저하게 체력이 고갈되어 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사람들은 이런 나에게 격려를 보낸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아직 ‘청춘’이라고 고함을 치는 나이기에, 이런 쪽지나 댓글이 나에게 힘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얼른 길을 나서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생각해보면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다. 아마도 ‘운명’이란 말을 쓰는 것이 적합할 것 같다. 문화재 답사를 해야 하는 일이.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백점인 나라로 만들고 싶어

‘빵점’. 내가 늘 우리 국민의 수준을 물으면 주는 문화재에 대한 점수이다. 물론 전 국민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아래 점수를 주고도 싶다. 사람들은 비를 맞으면, 눈에 빠지면, 더위에 지치며, 왜 그 짓을 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 짓’이란 단어를 쓸 만큼 내가 한심해 보였기 때문인가 보다.

난 다시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 짓 한 번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고. 아직 한 번도 같이 해보겠다고 대답을 한 사람은 없다. 아니 딱 한 분 계셨다. 단 하루 만에 소리 없이 사라지셨지만. 그만큼 이 일이 힘들었나 보다. 하기야 돈 버리고, 시간 뺐기고, 힘든 일인데, 누기 이런 일을 좋아할까?

이 무더위에도,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물 폭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도, 난 길에 서 있는 것일까? 그것은 모든 국민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100점’짜리를 만들고 싶어서이다. 혼자 다니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모든 국민이 우리 문화재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게 된다면, 아마 그 때는 나도 길거리로 나가는 일을 접을 수 있을 것이다.

문화재 정말 말로만 소중하다고 하실 건가요?

문화재의 중요성에 대해 아무리 강조를 해도 부족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치욕적이지만 외국에 강탈당한 문화재 하나가 돌아오면 생난리를 친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린다. 이런 것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수준이다.

‘이제는 솔직히 쉬고 싶다. 하지만 내가 쉬는 동안, 누군가 우리 문화재를 발로 걷어차고 갈지도 모르다’라는 생각이다. 며칠 전 들린 통도사에서 부모에게 투정을 버리던 한 아이가 당간을 발로 차듯. 그 옆에 부모들은 나 몰라라 하고 있고. 그래서 ‘오늘도 안녕’한가를 돌아보고 싶은 것이다.

아무튼 20년간 줄기차게 돌아다녔더니, 이런 날도 있다. 하게 될지는 몰라도 자주 연락이 오는 것을 보면 하긴 하나보다. 또 글거리 하나 늘어 좋겠다고 하실 벗님들. 나 이러고 산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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