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2010년이 4일 남았다. 올 일 년 동안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길에서 들고 온 자료도 상당하다. 아마 전체적으로 돌아다닌 거리를 따지자면, 서울서 부산거리를 50여 번 정도를 왕복을 했을 정도의 거리를 돌아다닌 것만 같다. 그 많은 여정에서 만나 본 문화재만 해도 상당하다.

글 제목에 ‘얼마나 많은 소득을 올렸나?’라고 하니, 남들은 수입으로 알고 들어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소득이라고 하는 것은 돈이 아닌, 수많은 문화재를 말하는 것이다. 일 년 동안 어림잡아 4~500점 정도는 만나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한 번 답사를 나가면 15~20점 정도의 문화재를 답사한다. 그런 답사가 한 달에 두 세 번씩 일 년 동안 30회 정도를 나가 돌아다녔으니, 어림잡아도 500점 정도는 될 것 같다.

드라마 황진이의 촬영지 예천 병암정

늘어나는 자료CD, 그동안 다닌 족적인데

그동안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자료를 담아 놓은 CD가 2,000장이 넘을 듯하다. 이제는 자료 정리를 더 말끔하게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외장 하드를 사서 지역별과 종류별로 구분을 해 담아 놓아야 할 것만 같다. CD라는 것이 영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이다. 그래야만 안심이 될 것만 같아서이다.

만 2년을 티스토리를 접었다가 다시 시작을 한 것이 올 해 8월이다. 2010년 8월 2일 첫 글을 다음 뷰로 송고를 하고 난 후 270개의 글을 썼다. 첫 글은 ‘금강가의 아름다운 정자 만하루와 연지 ’라는 글을 송고했는데, 지금 보니 추천이 43에, 단 한 개의 댓글이 달렸다. 그 댓글의 주인공이 바로 ‘친구 세라’ 님이다.

공주 공산성 안에 자리한 만하루와 연지

그리고 5개월 동안 270개의 글을 올렸으니, 적은 글은 아니다. 결국은 5개월 동안 250 점이 넘는 문화재를 답사를 했다는 것이니. 올 일 년 500점 정도의 문화재 답사를 했다는 것이 맞을 듯하다. 그 많은 문화재를 만나보면서 기쁨도 있고, 슬픔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현장에서 만나는 문화재를 보면서 눈물도 적잖이 흘린 듯하다.

2010년 한 해, 참 많이도 울었다.

길을 나서 만나는 문화재들은 다양하다. 국보서부터 보물, 사적, 중요민속자료, 등록문화재자료, 유형문화재, 민속자료, 거기다가 비지정문화재까지, 수도 없이 많은 문화재들을 접할 때마다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그 문화재들의 현실을 보면서, 참 많이도 눈물을 흘렸다. 때로는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훼파된 문화재의 몰골이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국보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과 보물 연곡사 동부도비

티스토리에 송고를 하지 않을 때도 답사는 계속되었다. 그렇게 일 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꽃이 피는 봄부터 시작해, 무더위가 기승을 떠는 뙤약볕 아래서 갈증을 느끼기도 했다. 아름다운 단풍에 취해 갈 길의 시간을 못 맞추어, 몇 시간을 걷기도 했다. 앞이 안보이게 눈이 날리는 바람에 길을 잊어 방황을 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답사를 하면서 일어난 일들이다.

사진 한 장한장이 소중한 까락은 바로 그런 고통 속에서 얻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진 안에 소중한 문화재의 정신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선조들의 예혼(藝魂)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일 년 동안 적어 온 글을 열어보면서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하지만 그 아쉬움이 있어, 2011년을 걸어야 할 힘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중요민속자료 함양 일두 정여창 가옥과 천성산 홍룡폭포

답사를 하면서 어쩌다가 만나게 되는 분들. 신묘년에는 그런 분들은 더 많이 만나게 되기를 갈망한다. 그것이 우리 문화재를 지켜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 년간 그래도 어쭙잖은 글을 보느라 말없이 들려주신 모든 분들에게 머리를 숙여 고마움을 전한다. 나를 버티게 한 진정한 힘은 바로 그분들이었기 때문이다.

 

석탄정. 남들은 석탄정이라고 하면 먼저 옛 노랫말을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석탄정을 본다면 그런 노랫말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입부터 벌릴 것이다. 마을을 들어가는 길 한편에 보이는 거목들이 우거진 숲.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작은 정자 하나. 그것이 바로 석탄정이 운치있게 자리한 모습이다.


석탄정을 찾아가 제일먼저 느낀 것은 쉬고 싶다는 생각이다. 아주 편안하게 두 다리를 뻗고, 그저 세월을 막아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다. 정자 안에 걸린 수많은 편액들. 이 석탄정이 왜 그토록 발을 쉬고 싶었는지, 바로 이해가 간다. 얼마나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들려 편안하게 발을 뻗고 세월의 흐름을 잊은 것일까?




석탄 류운선생이 건립한 정자 


석탄정은 고창군 고창읍 율계리에 자리한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문화재를 만날 수가 있다. 바로 석탄정이 그런 곳 중 하나이다. 주소를 잘못 찾는 바람에 만나게 된 정자. 석탄정을 찾아들어 슬그머니 남모르는 미소를 짓는다. 열심히 답사를 하다가보니, 이렇게 좋은 곳으로 안내를 했는가 보다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소득이기 때문이다.


선조 14년인 1581년에 지은 정자이니, 벌써 43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자이다. 류운 선생은 성격이 고매하고 학식이 높아, 청암찰방이라는 직책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벼슬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이곳에 이 정자를 지었다. 동서로는 상풍루와 영월헌을 세우고, 정자 앞에는 조대를 세웠다고 한다. 주변에는 나무를 심어 풍취를 돋우었다고 하니, 주변에 있는 나무들의 수명이 그러하단 것을 말한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뿌리가 드러나 보일 정도이다. 다 드러난 맨살을 보이고 있는 고목에서, 석탄정의 역사를 알수 있다. 이렇게 멋진 정자를 만나기도 쉽지가 않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자는 가운데 방을 들였다. 그래서 주변을 마음대로 돌아볼 수 있도록 꾸몄다. 정자의 앞으로는 높임마루를 놓고 그 밑에 아궁이를 들였다.


풍취를 자아내게 하는 정자


그 높임마루 하나가 정자의 모습을 바꾼다. 이 높임마루가 아니더라도 방을 둘러쌓고 있는 마루에 앉으면 세상 시름을 잊을 것만 같다. 덤벙 주초위에 원형의 기둥을 놓고, 팔작지붕으로 꾸민 정자는 그렇게 옛 풍취를 자랑이라도 하는 것일까? 사방을 둘러 걸린 편액들이 편안한 다리를 뻗은 나그네를 긴장케한다.





무엇인가 이 석탄정에서는 글 하나라도 짓지 않는다면, 댓돌 밑으로 내려가지 못할 것만 같은 분위기다. 한바퀴 빙 둘러 걸린 수많은 편액들이 이곳을 자랑하고 있다. 석탄 류운선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쌓은 것일까? 이곳을 둘러보면서 스스로를 나무란다. 과연 난 선생과 같은 그런 마음을 간직할 수는 있는 것일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스스럼없이 좋아할 수는 있는 것일까? 


마음을 읽을줄 모르는 새 한 마리가 고목의 가지에 앉아 요란하게 울어댄다. 아마 저 새도 세상을 살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아끼지 못한 나를 탓하는가 보다. 오늘 이 석탄정에 올라 시름 하나를 내려놓고 간다. 그리고 숱한 답사길에 쌓인 피로도 내려놓고 가련다. 그것이 석탄 선생이 기다리는 바가 아닐런지. 석탄정에는 수많은 나그네들의 피로가 놓여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찾는 것이 있다. 같은 곳에 같이 가서 사진을 찍어도, 저마다 나름대로의 마음에 맞는 것을 선택한다. 물론 좋은 것을 찍으려는 마음은 동일하다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내가 유별난 것인지도 모른다. 난 어디를 가나 꼭 열심히 찍는 것이 있다. 바로 담벼락이다. 그리고 집안을 기웃거리며 장독대를 찍다가 가끔 경을 치기도 한다.

날이 아침부터 꾸무럭하다. 바람도 선선한 것이 엉덩이가 들썩거려 못 견디겠다. 팔이 아프다는 핑계로 한 사흘 가만히 있었더니, 병이 도졌는가보다. 얼른 카메라를 둘러메고 한옥마을로 향했다, 초입서부터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역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오늘(2010, 9, 9) 전주 한옥마을에서 내가 만난 담벼락들이다. 담벼락을 만나는 전주 한옥마을의 길, 가을철에 어슬렁거리며 걷기 딱 좋은 길이다.


담벼락이 늘어선 길을 어슬렁거리다.

담벼락이 늘어선 길을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노라면, 마음이 텅 비어버리는 것만 같다. 주욱~ 늘어선 담벼락이 마치 시간을 초월해버린 것만 같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변하는 담벼락을 만나면서 이것은 누구네 집, 저것은 누구네 집을 꼽아본다. 손가락이 열개인데 그 손가락을 몇번이고 접었다 폈다를 반복해도, 담장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이길이 좋다.



  
난 늘 이 담장을 좋아하면서 살았다. 그것은 이 담장 하나가 그리도 포근하게 어린 나를 감싸고 있던 기억 때문이다. 어릴 적 말썽을 피우다가 정말 눈물이 날만큼 혼이나고, 방에서 강제로 추방을 당했던 기억이 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었는데, 속옷 바람으로 밖으로 나왔으니 얼마나 추울 것인가? 아마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추웠던 것만 같다.

그렇다고 우리 가족이 어린이를 학대하는 사람들로 오해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 당시에는 누구나 그런 경험이 다 있을 테니까. 그때 담벼락 위에 삐죽 얼굴을 내민 기왓장이 눈을 막아주고, 담장은 한 겨울의 거센 바람을 막아주었다. 그 담장 밑이 왜 그리도 포근하든지.

황토와 기와의 만남, 그 자체가 예술이네




황토와 기와, 그리고 돌이 만나면 찰떡궁합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그것이 담장이 아니었어도 이렇게 궁합이 들어맞았을까? 천천히 걷는 한옥마을 길에는 이런 찰떡궁합이 늘어서 있다. 그래서 연인들이 전주 한옥마을 길을 걸으면, 잘 헤어지지 않는다는 믿지 못할 소문도 있다고 한다. 이런 소문이 헛소문이라도 좋고, 지금 내가 지어낸 소문이라도 좋다. 그저 좋다면 좋은 것이겠지 하는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니까.


돌담 또한 운치가 있다. 돌을 그대로 척척 쌓아올리고 그 위를 기와를 얹어놓았다. 참 담벼락이란 것이 묘하기는 하다. 어떻게 만들어 놓던지, 그 모습이 그곳과 어울리기 때문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담벼락이 거기에 있어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 사람이 언제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듯 말이다.



사람들도 그렇다.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에 따라 격이 있다고도 한다. 누구는 부자고, 누구는 가난하다. 누구는 잘났고, 누구는 못났다. 누구는 똑똑하고, 누구는 멍청하다. 누구는 착하고, 누구는 나쁘다. 이렇게 누구는 타령을 하다가 보면 석 삼일을 밤낮으로 해보아도 다 못할 것만 같다.

그런데 담벼락은 그런 것이 없다. 그저 담벼락일 뿐이다. 그 담벼락이 돈을 많이 들여서 조성을 했건, 아니면 그저 집에 있는 진흙덩이 조금에 이웃집에 있는 버린 기와 몇 장을 얻어다가 했건 그냥 담벼락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사람보다도 훨씬 좋단 생각이다.



담벼락 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다가 발견한 두 곳의 담벼락. 하나는 돌담 위에 수세미가 열려 나뭇가지로 기어오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고, 하나는 언제나 거기 붙어 있었다는 듯 그렇게 담벼락에 붙어있는 도판담장이다. 이렇게 볼 것이 많은 길을 걸으면서, 왜 우리는 이런 것에 인색하게 굴까? 그것은 바로 소통을 할 수 있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늘 전주 한옥마을을 어슬렁거리며 글 소재 하나는 괜찮은 것으로 얻었다.


요즈음 사람들은 길을 걷기를 좋아한다. 길은 어디나 있다. 하지만 길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건강을 위한 길도 있지만, 역사와 문화적인 뜻을 가진 길도 있다. 그런가 하면 경치가 아름다운 곳도 있고, 때로는 걷기조차 마음이 편치 않은 길도 있을 수가 있다.

그 많은 길 중에서 그래도 가장 마음에 드는 길은 역시 경치도 좋고, 역사와 문화적으로 가치가 있는 길이라면 더욱 좋다. 난 길을 걸을 때마다 생각을 한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건강과 문화를 함께 누릴 수 있는 길을 두고, 악다구니 같이 답답한 도심으로 몰려드는지 모르겠다고.


꼬부랑 소나무와 고깔바위들이 널린 길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 9-1에 소재한 견훤왕궁지는, 전주 동남쪽에 위치한 해발 306m의 승암산 동편에 있는 동고산성에 위치해 있다. 이 왕궁터에서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아름다운 길을 만날 수가 있다.

꼬부랑 소나무길. 아마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곳이다. 높이 10m 정도의 소나무들이 하나같이 꼬부라졌다. 흡사 춤을 추듯 제멋대로 휘어진 소나무들은 200여 평 정도에 멋스럽게 자리를 하고 있다. 왜 이곳의 소나무들만 이렇게 휘어진 것일까? 나야 나무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니, 왜 이런 나무들이 집단으로 서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50여m 떨어진 곳이 후백제 견훤의 왕궁지가 있고 보면, 무슨 사연이라도 있을 것만 같다.


요술할매가 요술이라도 부린 것일까? 소나무들이 모두 휘어져 있다.

꼬부랑 소나무 길을 지나 서쪽으로 조금 길을 걸으면 나무계단이 나온다. 이 산 꼭대기에 무슨 나무계단이냐고 투덜거려보지만, 위로 올라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조금 앞으로 보이는 바위들과,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주 시가지 때문이다.

마치 중이 고깔을 쓰고 있는 것 같다는 승암산. 높지 않은 산이지만, 승암산에는 역사와 슬픔이 함께 한다. 동고사를 비롯해 동고산성과 세계 유일한 동정부부 순교자가 묻혔다는 치명자천주교성지 등이 있다. 그래서 이산의 명칭은 승암산이지만 중바위산, 치명자산이라고도 한다. 치명자성지로 인해 치명자산이라고 한다지만, 그보다는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고, 그 이름 또한 이유가 있어 붙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바위 꽃이 아름다운 중바위

정상에 오르면 마치 고깔을 엎어놓은 듯한 바위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산마루에 칼끝처럼 뾰족한 바위들이 등성이를 따라 솟아나 있다. 바위에는 꽃이 핀 것처럼 화려한 문양이 돋아나 있다. ‘석화(石花)’라고 한다는 바위 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하나하나가 꽃처럼 아름답다.


중바위에 피어난 석화가 아름다운 문양을 자랑한다.

중바위의 앞으로는 전주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한 눈에 전주 시가지와 전주천, 한옥마을 등이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땀을 흘리면서 이곳까지 걸었지만, 그 시간이 오히려 즐거운 것은 이런 경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주에 있는 아름다운 길 중 가장 걷고 싶은 길이다.

무더위로 인해 흐른 땀을 산봉우리에 부는 바람에 식히며 다시 길을 걷는다. 동고사 방향으로 길을 내려가면, 가파르기는 해도 운치가 있다. 흡사 예전 꿈속에서나 보던 숲속의 요정이 다니던 길과 같은 곳을 지나야 한다. 조금은 미끄럽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즐겁다. 산이 높지가 않아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히 돌아올 수 있는 승암산길. 산이 있어 산에 오른다고 하지만, 난 길이 있어 길을 걷는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주 시가지와 견훤왕궁지로 가는 길.

아침부터 산을 오르려고 벼르고 있는데, 하늘이 영 반갑지가 않다. 잔뜩 검은 구름이 낀 것이 금방이라도 소나기 한 줄기가 내릴 것만 같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서성이는데, 할머니 한 분이 농약통을 지시고 길을 나서신다.

"안녕하세요"
"예"
"밭에 약 치시러 가세요. 비가 올 것 같은데요"
"비가 올까요?"
"예, 금방 쏟아질 것 같아요"
"어제 잠시 해가 들었을 때 칠 것을 그랬네"


팔순 할머니는 아직도 농사일을 하신다.

할머니가 길을 접고 집을 향해 걸어가시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내심 잘 되었다고 안심을 한다. 돌아가시는 할머니는 하늘이 원망스러우신가 보다. 연신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그러실 것이다. 힘들에 나서신 길인데 비가와서 일을 할 수가 없다면, 온 몸이 쑤시는 것이 더욱 힘드실  것 같다.

잠시 쏟아지던 비가 멈추었다. 우산을 손에 든 할머니가 다시 길로 나오셨다. 여주군 북내면의 정말 시골스러운 마을에 사시는 할머니는, 영감님을 여의신지가 벌써 몇 년째시다. 지금은 혼자 사시면서 밭일을 하고 이런 저런 일로 소일을 하신다. 매일 아침 그 시간이면 집을 나서시고, 같은 시간에 밭에서 돌아오신다. 밭이 먼 곳은 아니지만, 할머니께서 다니시기에는 결코 가까운 거리는 어니다.


할머니는 이 길을 따라 밭으로 가셨다. 

할머니의 길에는 물이 차 있고

뒤를 보이고 가시는 할머니를 몇 장 찍었다. 여주에 올 때마다 뵙는 분이기에 낯설지가 않다. 산 모퉁이를 돌아 할머니께서 사라지셨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할머니의 밭은 어떤 밭일까? 아우에게 할머니의 밭을 묻고 난 뒤, 뒤를 따라 나섰다. 길은 젖어 있고, 바지가랑이가 젖어든다. 그래도 궁금하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좌우로 길이 나온다. 어디인지 알았으니 우측 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밭 가까이 가니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길이 끊겼다. 매일 다니시는 길이지만 연세가 드신 분이기에 건너기가 만만치가 않았을 텐데. 할머니가 보이지를 않는다. 여기저기 찾아 보았지만,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신 것일까?

할머니는 이 길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걸으셨다. 할머니의 길을 따라 걸어본다. 발밑에 밟히는 감촉이 좋다. 가끔은 돌뿌리가 채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저 멀리 할머니가 계시다. 아까 뒷짐을 지고 들고 나가셨던 우산은 아직도 손에 꼭 쥐고 계시다.   

할머니가 밭으로 나가는 길에 도랑이 생겼다
할머니의 밭. 얼마나 정성을 들였을까?

돌아오실 때는 마중이라도 해야겠다

하루 종일 밭에서 일을 하시는 할머니는 이제 돌아오실 시간이 가까이 되었다. 시간이 되니 걱정이 앞선다. 돌아오실 때는 개울에 물이 더 불어 있을텐데. 어떻게 건너실 수가 있을까? 할머니에게서, 우리의 어머니가 보인다. 아마 우리 어머니도 저렇게 살아오셨을 것이다. 


돌아오실 때 연락이라도 해 주시면 좋을텐데. 그렇게 보아도 말을 놓지 않는 할머니는 아마 남에게 부담이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실 분 같다. 아직은 낯이 익지 않았으니. 집으로 돌아가시는 길을 눈여겨 보면서, 괜한 비탓만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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