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영화역 복원을 위한 고유제 열려

 

날이 많이 풀렸다고는 하나 아직은 한 겨울이다. 119일 오후 3.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에 소재한 재래시장인 거북시장큰 길에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든다. 잠시 후에는 풍물패들이 이곳으로 모여 한바탕 풍물굿판이 벌어졌다. 큰 길을 막아 걸어놓은 현수막에는 거북시장 활성화 및 영화역 복원 기원 고유제란 글씨가 적혀있다.

 

이 고유제는 올해로 3년 째 지내고 있다고 한다. 현 영화동 주민센터 일대는 옛 영화역이라는 역원이 있던 곳이다. 장안문 밖에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정조 20년인 1796829일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영화역은 장안문 밖 동쪽 1리쯤에 있다. 병진년(정조 20) 가을 화성 직로에는 역참이 없고 북문 밖은 인가가 공광하여. 막아 지키는 형세에 흠이 되기 때문에 경기 양재도역을 옮겨 이곳에 창치하고 역에 속한 말과 역호를 이사 시켰다.’고 적고 있다.

 

 

남쪽 역참의 중심인 양재역을 옮겨

 

영화역은 정조의 화성 축성 이후에 한양의 남쪽에 거주하던 남쪽 역참의 중심권으로 삼았으며, 화성에 인구를 모으는 방법으로 양재역을 이곳으로 옮겼다. 당시 양재역의 관사와 관원만이 아니라, 역참에 속한 주민들 모두를 모두 이주시켰다.

 

영화역은 북문인 장안문 밖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역의 건물인 영화관 등을 합해 모두 52칸의 큰 규모였다고 한다. 이 영화역은 물론 역 주변의 마을까지도 19세기 말 역참제도가 시행될 때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영화관은 정조의 능행차시 정조를 가장 먼저 맞아들이는 곳이었다.

 

 

지금도 영화초등학교의 뒷산을 마장산, 또는 역마산이라고 한다. 이 곳에 말을 놓아먹이던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일대는 장용외영의 무사들이 훈련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영화역 복원을 위한 고유제가 열린 것이다.

 

152억 원의 예산으로 2016년까지 복원

 

당시 역이란 당시의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던 말을 빌리거나 말에게 먹이를 주고, 관원에게 숙박 편의를 제공하며, 관물 및 진상품 운송의 임무를 맡던 곳이다.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정조 20년인 1796829일이다.

 

 

영화역은 2016년까지 모두 152억 원의 예산을 들여 복원을 할 계획이다. 이날 고유제에는 초헌관인 차한규 거북시장 상인회장, 아헌관인 박정애 영화동장 등 100여명이 참석을 하였다. 영화역의 복원은 화성과 행궁 복원에 이어 영화역까지 복원을 마친다면, 정조 당시의 화성일대의 구조물들이 대부분 복원이 되는 셈이다. 영화역의 복원에 대한 거북시장 상인들의 마음은 이날 읽은 고유제 축문에 잘 나타나 있다.

 


영화역 복원 기원 고유제 축

 

이제 단군 국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지 4346. 수원화성북문 거북시장 상인회장 차한규는 감히 밝혀 고하옵나이다. 경기도 수원화성을 수호하여 주시는 천지신명이시여, 수원의 역사는 유구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선양하는 고장입니다. 화성의 영화역이 생활현장에서 사라진지 백여 년이 되어 영화관유적복원이 한스러운 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영화관 복원! 오호라 이제 천지신명의 가호로 경기도 도정시책으로 영화역 능행로 복원이 실현하게 되었음을 고유하옵니다. 화성이 세계인이 공유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되살리고, 아름다움을 길이 전하고자 합니다.

 

정조임금의 어록을 회고 하옵건데 현륭원 효행 백리길 길목인 영화역을 지나면서 돌아보건대 백성들의 주거환경이 약간은 이루어졌으니 이윤 주공의 도가 사실함께 모이어 역말을 둠직도 하구나. 사행의 수레가 번갈아 달리니 마정의 접응과 가장 큰 관계가 있고, 우호가 구름처럼 모여드니 가히 살림을 경영할 만한 곳을 접하였네. 드디어 거류하는 신하에게 터를 잡도록 명령을 내려 이에 양재도역을 옮기었네. 입암(할미퉁수바위)을 곁에 두고 터를 쌓으니 이곳은 곤빈의 정숙함이 맞추었고, 준성을 항하여 집을 지으니 완연히 천마의 형상을 대하였네. 성문을 떠나 백무쯤 되는 곳은 조금씩 촌락이 이루어지고 영화관 집 50칸을 지으니 날개처럼 세모난 서까래가 번쩍 들렸구나. 관원이 거접하니 모든 역중의 우두머리로다”(이하 하략)


11월 28일(수) 오후 7시에 모임이 있었다. 수원 영화동 장안문 길 건너편에 ‘거북시장’이 있다. 정조의 화성 축성 당시에 장이 개설이 되었으니, 벌써 200년이 훌쩍 지난 장이다. 하지만 지금은 재래시장이기 보다는, 도심 상권과 같은 형태로 꾸며진 곳이다. 이곳 거리 한 복판 2층에 거북시장상인회 사무실에서 모임이 있었다.

 

모임은 수원에서 활동을 하고 있거나, 연고지가 있는 전문가들이 가칭 ‘수원문화연구원’을 설립하고자 모인 것이다. 모두 7명이 참가를 했는데 각각 분야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수원의 문화를 활성화시키고 전국 최고의 문화예술도시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하자고 만든 모임이다. 하지만 속내는 술 먹고 놀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임은 생두루치기 집에서

 

그런데 어째 모인 면면을 보니 모두 한 잔 하는 분들이다. 몇몇은 두주불사이니, 글쎄다 이 모임이 과연 제대로 굴러갈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렇다 치고 간단하게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를 한 후, 자연스럽게 술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273-7번지에 소재한 돼지고기와 묵은지가 환상의 콤비를 이루는 ‘돈순네 생두루치기’로 자릴 옮겼다.

 

영화동 거북시장 돈순네 생두루치기 집은 가끔 모임을 갖는 집이다. 밑반찬은 별로 내지 않지만, 굳이 밑반찬이 필요하지 않다. 묵은지에 돼지고기를 큼직하게 썰어 넣은 후, 거기다가 가래떡까지 그득하게 올려주면, 그 맛이 정말 일품이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는 딴 것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들과 만남이 행복한 집

 

사실 이 집을 찾아가는 것은 가격이 그리 비싼 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3~4인이 먹을 수 있는 돼지고기와 묵은지를 가득 넣은 두루치기 전골이 중(中)이 20,000원이기 때문이다. 가끔 이 집에서 모임을 가지면, 큼지막한 전도 서비스를 받을 수가 있어서 더욱 좋다. 묵은지 음식을 많이 먹어보았지만, 이 집처럼 진한 맛을 내는 집이 별로 없었던 듯하다.

 

두루치기 전골은 입맛에 따라 주문을 할 수가 있다. 얼큰한 맛과 시원한 맛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모임에 주로 먹는 두루치기 전골은 항상 얼큰한 맛이다. 뜨듯한 국물과 함께 먹는 전골은 언제나 하루의 피로를 가시게 해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좋은 사람들과 한 자리에 앉아 먹는 음식 맛은 남다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객담 한 마디 하고 가자

 

사실 이 날 모인 모임은 좀 남다른 모임이었다. 수원에서는 각 방면에 내노라 한다는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어 일 좀 하자고 했는데, 7명 중에 다섯 명이 박사님들이시다. 참 박사가 많기는 많은 모양이다.

 

그것도 그냥 박사가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그 분야의 최초, 또는 최고 권위자들이 모인 모임이었으니 말이다. 한 두 사람만 소개를 해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쌀 중 흑미를 개발한 김재철 박사님이 모임에 수장이시다. 그런가 하면 최초로 무예 24기 중 마상무예로 논문을 써 박사가 된 최형국 박사도 있다.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모인 사람들이다. 술이 한 순배 들어가자 마치 오래된 지기들처럼 마음에 편해졌다. 그리고 그 중 누구 하나라도 자신이 최고라고 주장을 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좌중은 형님과 아우로 호칭이 바뀌었고, 술이 잔에서 비어지기가 무섭게 또 따라진다. 세상사는 맛이 다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좋은 사람과 좋은 술,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그곳이 바로 ‘선계(仙界)’라고 하는가 보다.

 

연락처 / (031) 254 - 8665

제2회 느림보타운 거북시장 음식한마당‘. 거북시장은 수원에서도 그 역사가 가장 오랜 전통시장 중 한 곳이다. 예전 거북시장 인근에는 영화역과 객사가 있었다. 이곳은 장영외영 군사들이 묵는 곳이었고, 더구나 정조의 능행차 때도 이곳 영화역 앞을 지났다. 또한 한양으로 올라가는 많은 사람들이 장안문을 벗어나 이곳을 거쳐야만 했던 곳이다.

 

이 시장 일대는 영화역에 있는 말들을 키우는 마방이었다고 한다. 18세기 우리나라의 상권의 형성은 개성과 수원, 안성을 잇는 ‘의주로(義州路)’가 바로 삼남대로 중 한곳이었다. 개성상인인 ‘송상’, 수원의 ‘깍정이’, 그리고 안성의 유기상인 ‘마춤이’ 등이 그것이다. 수원의 상거래 중심지는 당연히 거대한 마방이 있는 영화역(현재의 영화동사무소 인근)이었을 것으로 본다.

 

 

 

땅 주인의 별명으로 지어진 이름 거북시장

 

정조대왕은 당시 화성인근에 6개소의 장시를 개설하도록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 중 한곳이 바로 거북시장이다. 거북시장은 수원상권의 발원지였으며, 정조의 강한 국권을 만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당시 영화역이 500여 평 규모에 말을 키웠다는 것을 보면, 이곳이 상당히 번화한 장시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거북시장에는 200여개의 점포들이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거북시장은 수원의 재래시장 중에서도 그 넓이로 친다면 1~2위 안에 들어갈 정도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 곳에 집단으로 형성되기보다는, 여러 길과 골목 등으로 형성되어 있다. 거북시장 상인회 차한규(남, 59세) 회장은

 

“이곳의 시장 이름이 예전에는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거북시장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30~40년 정도인데, 이곳 일대의 땅이 모두 한 사람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별명이 ‘거북이’였는데, 시장 이름을 그 별명으로 부르게 된 것이죠” 라고 한다.

 

 

 

밤늦은 음식문화제 현장을 돌아보다.

 

원래 제2회 거북시장 음식문화제는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열렸다. 지역의 상인들이 시장 중심의 도로 양편에 부스를 설치하고, 중앙에는 테이블과 의자를 놓아, 축제에 참가하는 이들에게 음식을 팔았다. 하필이면 행사 날과 e-수원뉴스 시민가자들의 전주, 충무를 돌아보는 워크숍 일정이 같아, 할 수 없이 막판에 시장을 찾을 수밖에.

 

전주와 충무를 거쳐 수원에 도착한 시간이 14일 오후 6시 30분경. 시민기자들과 헤어져 거북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중심가에 도로는 사람들로 들어차 있고,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로 인해 그야말로 거북시장 일대가 온통 시끌벅적하다. 거기다가 시간이 배가 고파오는 때라, 음식냄새로 인해 시장 끼가 더 돈다.

 

행사장을 한 바퀴 돌아본 후 자리에 앉았다. 이런 좋은 곳에 와서 그냥 돌아간다는 것은, 그도 실례라는 생각에서이다. 축제는 함께 즐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누적된 피로와 속이 허한데, 술을 한 잔 마시면 탈이라도 날 것 같아 따끈한 국물이 있는 홍합탕과 안주를 시켜놓고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켜 본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작은 행복을 느끼는가 보다. 가끔 이렇게 지인들과 한 자리에 앉아 술을 한 잔씩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소중하단 생각이다.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아는 분들이 들려 인사를 하고는 한다.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그렇게 거북시장의 음식한마당은 밤이 깊어가는 데도 열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3일 동안 장사를 했다는 상인회의 한 분은

 

“정말 피곤합니다. 새벽부터 준비를 해서 밤 10시가 넘도록 서서 손님들을 맞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그것을 3일씩이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노동입니까?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좋기는 하지만, 내 년 부터는 이틀 정도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기도.

 

파장동에서 왔다는 어느 여성은

 

“이렇게 시장 길에 앉아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즐겁죠. 물론 준비를 하는 집행부나 음식을 파시는 분들은 힘이 드시겠지만, 이렇게 다양한 음식을 싼 가격으로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아요. 이런 행사가 여기저기 많이 좀 열렸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한다.

 

수원 영화동에 조성 된 느림보타운 거북시장 음식한마당. 그 축제에서 점점 깊어가는 10월의 밤을 즐긴다. 그래서 축제는 계속되어야 하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가 보다.

“우리 장안거북시장은 정조대왕의 화성 축성 시, 처음으로 시장을 개장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벌써 200년이 지난 유서 깊은 역사를 갖고 있는 시장이죠. 당시 지금의 거북시장은 모두 영화역에 있던 마방(말을 키우고 관리하던 옛 장소) 이었다고 합니다.”

 

거북시장 상인회 차한규(남, 59세) 회장의 설명이다. 9월 12일 오후에 찾아간 거북시장. 수원에 장시를 열고 있는 22곳의 재래시장 중에서, 넓이로 따지자면 1~2위 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현재 거북시장에는 200여개의 점포가 사방으로 뻗은 길에서 손님들을 맞고 있다.

 

 

“처음에 이 시장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거북시장이란 명칭을 사용 한 것은 40~50년 정도입니다. 당시 이곳이 거의 한 사람의 땅이었는데, 그 분의 별명이 거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북시장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죠”

 

수원에서 가장 번화한 상권을 자랑하던 곳

 

18세기 우리나라의 싱권의 형성은 개성과 수원, 안성을 잇는 ‘의주로(義州路)’가 바로 삼남대로였다. 개성상인인 ‘송상’, 수원의 ‘깍정이’, 그리고 안성의 유기상인 ‘마춤이’ 등이 그것이다. 수원의 상거래 중심지는 당연히 거대한 마방이 있는 영화역(현재의 영화동사무소 인근)이었을 것으로 본다.

 

정조대왕은 당시 화성인근에 6개소의 장시를 개설하도록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 중 한곳이 바로 거북시장이다. 거북시장은 수원상권의 발원지였으며, 정조의 강한 국권을 만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당시 영화역이 500여평 규모에 말을 쳤다는 것을 보면, 이곳이 상당히 번화한 장시였음을 알 수 있다.

 

 

예전 우리나라에는 ‘역원(驛院)’이 있었다. 역은 공무를 보는 관원들이 말을 바꾸어 타는 곳이고, 원은 공무를 보는 관리들이 묵는 곳이다. 영화역은 당연히 말을 관리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영화역에서는 얼마나 많은 말을 관리를 했을까? 장안문 앞에 있는 영화역에서는 단연히 정조의 능행차에 필요한 말들 수백 마리를 관리를 했을 것이다. 현재 거북시장 인근이 모두 마방이었다는 것을 보아도 그 규모를 알 수가 있다.

 

52칸이나 되는 영화역과 역마산, 마장산

 

장안문 밖에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정조 20년인 1796년 8월 29일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영화역은 장안문 밖 동쪽 1리쯤에 있다. 병진년(정조 20) 가을 화성 직로에는 역참이 없고 북문 밖은 인가가 공광하여. 막아 지키는 형세에 흠이 되기 때문에 경기 양재도역을 옮겨 이곳에 창치하고 역에 속한 말과 역호를 이사 시켰다.’고 적고 있다.

 

당시 영화역은 찰방역이었는데 이를 군제에 포함시키고, 북성(화성의 북쪽)의 척후장을 겸직하게 하였다. 한데서도 엿볼 수 있는 일이다. 정조 20년인 1796년 8월 1일에 정조는 수원부 유수 조심태에게 지시를 한다. 북문 밖에 역관을 설치하고자 하나 재력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화성성역의궤>에 보이는 영화역의 규모는 정당 및 삼문이 있는데 모두 남향이며, 내아는 모두 52칸이라고 했다. 지금도 영화초등학교의 뒷산을 마장산, 또는 역마산이라고 한다. 이 곳에 말을 놓아먹이던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변화를 시도하는 거북시장

 

장안문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은 ‘새 수막거리’였다. 여정에 지친 행인들이 국밥 한 그릇에 텁텁한 막걸리 한 잔으로 피로를 풀 수 있는 곳이다. 장안문을 벗어나 이 거리에 들어서면, 웃음 띤 주모의 얼굴이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를 지나쳤을 것이고, 그런 행인을 상대로 한 장시도 상당했을 것이다.

 

“저희 거북시장이 1980~90년대 까지는 그래도 상당히 번화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희 시장은 특성이 없는 재래시장으로 변하고 말았죠. 저희들도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관광버스가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거리 정비를 할 생각입니다. 전신주 지중화사업, 간판정리 등의 예산도 확보되었습니다. 현재 용역을 마치고 11월이면 공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거북시장 차한규 상인회장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거북시장의 옛 영화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새 수막거리’라는 이름은 날마다 술집이 새로 생겨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더구나 정조 당시에는 장안문 밖에 장용외영의 훈련장이 있었다고 하니, 그 때의 번화한 거리는 새삼 가늠할 수가 있다.

 

수막거리 형성이 거북시장을 살리는 길

 

차한규 회장과 인터뷰를 마치고 시장 길을 돌아본다. 현재 거북시장은 여기저기 온통 먹거리 집들만이 즐비하다. 재래시장의 특성상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특화된 것이 있어야 하는데 비해, 거북시장은 그런 것이 눈에 띠질 않는다. 꼭 이곳을 찾지 않아도 어디서나 쉽게 찾아불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옛 수막거리를 돌아본다. 과거 분내 풍기고, 웃음을 팔던 주모들이 있던 곳. 치미자락을 위로 끌어 잡고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뭇 남정네들의 마음을 녹이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지금은 그런 특화된 거리가 필요할 때이다. 장안문을 나서 현 수성중학교까지 길에 뻗어 있었다던 새 수막거리. 그 거리가 새삼 그리운 까닭이기도 하다.

 

영화역을 복원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거북시장 상인회. 아마도 그 꿈이 머지않아 이루어지고, 분내 나는 여인네들의 웃음소리가 수막거리를 감도는 날을 고대해 본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