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답사 30년 이제는 방송사에서도 청탁이

 

문화재답사 30. 말이 30년이지 그동안 숱한 고생을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인 것을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시작한 일이다. 날이 추운 겨울에도 쉬어본 적이 없다. 억수장마가 쏟아지는 날에도 난 길 위를 걷고 있었다.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우리 문화재를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길거리에 뿌린 경비만 해도 엄청나다. 고생을 해서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면 바로 짐 하나 챙겨들고 길을 나섰다. 전국을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른다. 하루에 먼 거리를 걷기도 부지기수였다. 길도 없는 산길에서 길을 잃어 헤매기도 했고, 비가 오는 날 상여막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쌓인 자료들이 방안 가득하다. 그 자료들을 보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 도대체 왜 내기 이 짓을 해야 할까라는 자문을 한다. 하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할까? 라는 대답 때문에 30년을 길에 서 있었다. 그 수많은 문화재가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지, 혹 누구에게 훼파는 되지 않았는지 그것이 늘 궁금하기 때문이다.

 

 

 

 

방송사에서 걸려온 전화

 

하주성 기자님이세요?”

, 그렇습니다.”

저는 KBS TV 여유만만의 작가인데요. 혹 남양주 화길옹주님이 사시던 궁집에 대한 자료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화길옹주 고택은 왜요?”

저희 프로그램에 공주에 관한 이야기가 주제인데요. 화길옹주님 고택을 촬영할 수가 없어서요.”

 

궁집은 화길옹주가 살던 집이다. 조선조 제21대 영조의 막내딸이자, 정조대왕의 막내고모인 화길옹주가 살던 집은 남양주시 평내동 426-1에 소재하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3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가 능성위 구민화에게 시집을 가자 영조가 옹주를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이 궁집을 돌아보면 영조가 막내딸 화길옹주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것을 알 것 같다. 하긴 영조에게 아들은 유일하게 사도세자 한 명 뿐이었다. 이 궁집은 나라에서 재목과 목수 등을 보내어 집을 지었다고 해서 궁집이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 공주는 50칸 이상의 집을 지으면 안된다고 했다. 이 집은 그러한 법도에 따라 칸수를 꽉 채운 집이다.

 

 

 

 

보수공사로 인해 관람이 금지된 궁집

 

날이 덥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흐른다. 안내판을 보고 땀을 흘리며 찾아간 궁집 입구는 철문이 굳게 잠겨 있다. 작은 쪽지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인터넷에 다 나와 있으니 인터넷을 보라는 것이다. 신문사에서 왔다고 해도 마찬가지 대답이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훼손을 하는 바람에 아예 개방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몇 번을 더 이야기를 하고서야 열어주는 철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궁집은 집 자체의 치목이나 석재 등이 뛰어나다. 영조가 막내딸을 위해 지어준 집이고, 화길옹주가 출가하여 세상을 뜰 때까지(1765~1772) 이곳에 거쳐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마도 이 집은 1765년경에 지어졌을 것이다.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집임을 알 수 있다.

 

 

 

 

치목과 석재 등을 직접 내려 보낸 영조

 

궁집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양반집의 형태이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이 된 이 집은 안채를 자 형으로 꾸몄다. 안채는 부엌이 4, 3칸에 앞퇴를 한 칸 더 놓았다. 정침 좌우의 날개는 방과 곳간을 드렸고, 남행랑에는 곳간과 중문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광이 있고, 그 앞에 안마당을 가로 질러 우측 날개채에 부엌과 건넌방이 있다.

 

정면으로는 가운데 안방을 두고 양편에는 대청과 부엌을 두었다. 안방 앞에서 대청까지는 툇마루를 놓아 동선을 이어주고 있다. 좌측 날개채에는 아랫방과 광이 있고, 사랑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안채의 서남쪽에 자리를 하고 있으며, 자 형으로 방 두 칸 이외에는 모두 누마루를 깔았다.

 

서남쪽 끝에는 돌출을 시켜 누정인 누마루 한 칸이 있다. 날아갈 듯한 처마를 가진 이 누정은 장초석으로 주추를 놓고 그 위에 누마루를 깐 형태이다. 기단 역시 잘 다듬은 장대석을 이용해 집의 품위를 높인 듯하다. 사랑채의 북쪽에는 기단을 높이 쌓았는데 그 위에 우물을 있다. 이 우물은 안채 큰 부엌의 뒷문 쪽이기도 하다.

 

 

 

 

격조 높은 화길옹주의 궁집

 

화길옹주가 살았다는 이 궁집은 한 마디로 그 어느 집보다 격조가 있는 집이다. 양반가의 큰 집을 수도 없이 보아왔지만 그리 크지 않은 집 구조를 갖고 이렇게 쓰임새 있게 지은 집 구조는 그리 흔치가 않다. 그 중에서도 사랑채 뒤편 장대석을 이용해 3단으로 쌓은 축대 위에 마련한 우물과 배수시설은 가히 일품이다.

 

우물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석재로 물이 빠지는 배수시설을 만들고, 그 흐르는 물을 땅 속으로 흐르게 하여 배수구가 사랑채 뒤편으로 빠지게 하였다. 낮은 야산을 등지고 있는 궁집의 건조함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 스스로가 임수(臨水)’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곳에서 한 세상을 살다간 화길옹주. 방송에서 자막으로 소개가 된 문화재전문기자라는 명칭. 30년 동안 오로지 우리 문화재의 온전한 보존을 위해 땀을 흘리다보니 이젠 방송사에서조차 도움을 청해온다. 적어도 30년은 한 자리에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옛 스승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덥거나 춥거나 눈이 오거니 비기 내리거나 스승님의 말씀 한 마디가 지금껏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