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23-11에 소재한 미륵당. 수원시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어있는 미륵당은 그동안 몇 번이고 찾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곳이다. 문화재답사라는 것이 멀리 있는 지역의 문화재는 계획을 세워 찾아가게 되지만 막상 가까이 있는 곳은 바로 보지 못한다. ‘남산 밑에 사는 사람이 남산을 평생 오르지 못한다라는 우리말이 있듯이 말이다.

 

참 답사란 것이 가끔은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무더위가 기승을 떨 때 답사를 하기 위해 길을 나서면 우선 흐르는 땀을 주체하기 어렵다. 더욱 제대로 된 정보를 알지 못하면 바로 코앞에 당집을 두고도 무엇에 홀린 양 돌아다니기도 한다. 예전 파장동 미륵당을 찾아간 날도 바로 앞에 소재한 당집을 애매한 곳에서 찾아다니는 해프닝을 벌였다. 애초 첫 설명이 잘못됐었기 때문이다. 주변 주민에게 미륵당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차가 못 들어가는 곳이고 조금 산길로 걸어간다는 이야기에 애꿎은 곳만 찾아다닌 것이다.

 

굳게 닫힌 문 꼭 이래야 하나?

 

19일 찾아간 파장동 미륵당. 예전이나 지금이나 문이 닫혀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쉼터가 조상되었다. 당집 옆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 서 있고 그 뒤편에 한 칸으로 지어진 당집이 있다. 마을에서는 미륵당이라고 하지만, 정작 당집의 앞에 걸린 현판은 미륵당이 아닌 '법화당(法華堂)'이다.

 

아마도 마을의 주민들이 미륵당이라 부르던 것을 누군가 미륵당을 법화당으로 바꿔 당명을 적은 게판을 달아놓은 것 같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1959년과 그 이듬해에 보수와 증축을 하고 법화당으로 개칭을 했다고 한다.

 

미륵은 보살의 몸으로 도솔천(兜率天)에서 머물다가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를 말한다.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수많은 미륵불을 조성한 것도 후천세계에 좀 더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발생한 것이란 생각이다. 하지만 중생이 기다리는 미륵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한 사례도 적지 않다.

 

후백제의 견훤은 금산사의 미륵불이 바로 자신이며 후백제야말로 미륵의 용화세계라고 주장했다. 태봉의 궁예도 자기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햐여 두 아들을 협시보살로 삼아 직접 불경 20여권을 만들고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행한다며 대중을 현혹하기도 했다. 이러한 미륵사상은 모두 후천세계를 바라는 민초들의 기대가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까치발로 들여다 본 당집 풍경

 

전국을 답사하며 수많은 미륵석불을 만나보았기 때문에 자연 우리고장에 소재한 미륵의 형태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애써 찾아간 미륵당의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안을 들여다 보아야하는데 문엔 조그마한 공간도 없었다. 위를 보니 문의 상단이 살창으로 되어있다. 까치발을 딛고 위로 들여다보니 커다란 거구의 미륵이 보인다. 그런데 화강암으로 조성을 했다고 하는 미륵은 온통 화장을 하고 있다.

 

파장동 미륵당은 원래 조선 중기에 건조된 건물이라고 한다. 마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석불은 '미륵부처'란다. 전체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규모가 상당히 크다. 하반신이 땅 속에 묻혀있다고 하는 이 석불입상은, 높이는 219cm, 흉부가 107cm, 두부의 높이가 114cm나 되는 거대석불이다.

 

화강암 1석으로 조성했다고 하는 이 석불은 소발이며 머리 위에는 넓게 육계가 표현되었다. 그리고 타원형의 보개를 얹었으며 귀는 크고 길게 늘어져 어깨를 덮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신앙의 대상이라고 하는 이 미륵당 석불은, 희게 회칠을 해놓아 원형을 알아볼 수가 없어 안타깝다.

 

이마의 백호와 입술을 붉게 칠하고 눈썹과 눈을 그려 넣었다. 머리도 검게 칠해 원래의 모습을 분간하기 어렵다. 머리에 비해 신체는 작은 편이며 어깨도 좁게 표현하였다. 손은 가슴께에 표현을 한 듯한데 색칠을 해놓아 분간하기 어렵다. 까치발을 딛고도 밑까지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석불의 앞에는 단을 놓고 촛대와 제기 등이 놓여있다.

 

미륵동으로 불리던 마을은 현재는 버스 공영주차장과 음식점, 그리고 공장 등이 들어서 마을의 토착민을 찾기 어렵다. 아마도 이 미륵을 위하고 살던 토착민들이 이미 마을을 모두 떠난 듯하다. 생긴 형태로 보아 고려 시대 조성된 거대석불로 보인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을 주민들이 섬겨왔다던 미륵은 이제는 외롭게 혼자서 굳게 닫힌 당집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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