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년 지났다고 하는 곳집의 상여를 보다

 

오산시 원동 721-1 마등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미등산 역말 굿당. 굿당이란 무속인들이 찾아와 굿 행위를 하는 집을 말한다. 예전에는 대개 해가 떨어지고 난 후 집에서 굿을 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전문적은 굿당에서 굿을 하게 된다. 집에서 하는 경우 주위에서 안면방해 등으로 난리를 치기 때문이다.

 

25일 비가 내린다. 태풍이 올라온다고 하는데, 그래서인가 추적거리는 비가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마등산 자락에 소재한 역말 굿당은, 역말 저수지를 끼고 산 밑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굿당에는 여기저기서 굿을 하느라 두드리는 악기소리가 골을 쩡쩡 울린다. 굿당 좌측 위편에 자리하고 있는 곳집(상여막)으로 향했다.

 

곳집 앞에는 이 곳집에 대한 설명이 붙어있다. 곳집은 담장을 쌓을 때 시용하는 긴 콘크리트로 조성했으며 앞쪽에 작은 문이 하나 나 있다. 이곳 마등산은 백제 제8대 왕인 고이왕(재위 234286) 때 군사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이곳을 역말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 때부터 이곳에 역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이왕은 재임기간 중 관리들의 뇌물 수수를 금지하는 범장지법을 제정했다. 관리들이 이를 위반하면 3배를 배상하게 함과 동시에, 종신토록 금고케 함으로써 관리들의 규율을 강화하였다. 고이왕은 국가의 경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토의 남쪽 평야 지대에 논을 개간하도록 해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장려하기도 했다.

 

수백 년이 지났다고 하는 상여

 

곳집이란 물건을 쌓아 두거나 잘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집을 말한다. 곳집은 대개 마을과 조금 떨어진 곳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란 곳집에는 마을에서 사용하는 상여를 보관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곳집에 상여를 보관할 때는, 상여를 모두 해체하여 쌓아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말 굿당 곳집에도 상여를 해체하여 쌓아놓았다.

 

정면 한 칸 측면 두 칸 정도인 이 곳집에 보관 중인 상여는 수백 년이 지났다고 전한다. 이곳에 사는 토착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에는 예전부터 대만신이 한 사람 살고 있어 이 곳집을 관리했다고 한다. 그 만신이 세상을 뜬 후에 아무도 관리하지 않고 있는 이 곳집을, 현재는 마등산 역말 굿당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이 상여 과연 수백 년이 지났을까?

 

상여라는 용어는 19세기 중엽 간행된 이재의 <사례편람>에 처음 나온다. 마을마다 마련하는 상여는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조성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상여막에 보관한다. 상여의 모양은 가마와 비슷하나 가마보다는 길고 몸채 좌우에 밀채가 있어 그 양쪽에 채막대를 가로로 대고, 앞채막대 좌우로 2줄씩 끈을 달아 뒤채막대에 붙잡아맨 다음 중간에 일정한 간격을 두어 사람들이 그 사이에 들어가 어깨로 메도록 되어 있다.

 

몸채는 단청으로 채색하고 네 귀에는 포장을 쳐 햇볕을 가리며 뚜껑은 연꽃이나 봉황새로 장식했다. 꽃상여는 채색 꽃을 달아서 장식하며 산역이 끝나면 장식들은 태워버린다. 하지만 일부 지방에서는 이 상여 전체를 태워버리기도 한다.

 

원동 역말 곳집에 보관중인 상여를 보기위해 문을 열었다. 상여막 안에 있던 새끼고양이 두 마리가 놀라 달아난다. 컴컴한 상여막 안에 해체되어 있는 상여를 살펴본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채색은 다 바래버렸다. 상여의 지붕은 보이지 않는데 해체된 상여 양편에 커다란 나무함 두 개가 놓여있다.

 

 

 

그 나무함에는 무엇이 들어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마음대로 상여를 다 들어내고 나무함을 열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굿당 운영자에게 물어도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해체된 상여를 살펴보니 나무가 오래 묵은 것 같다. 과연 이 상여가 마을에서 이야기하듯 수백 년이 지난 것일까?

 

이 상여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또 이 상여에 얽힌 이야기는 없는 것인지 궁금하다. 전하는 이야기대로라면 이 상여는 소중한 민속자료이기 때문이다. 틈을 내어 이곳 주변을 수소문 해, 이 상여에 대해 좀 더 정확한 이야기를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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