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안성시청(당시 안성군청)에서 남사당풍물놀이에 대한 책을 의뢰받고 안성에서 6개월 정도를 한 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읍내에서 서운면 청룡사까지 수도없이 발걸음을 한 적이 있다. 안성 청룡사는 충북 진천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고찰로 당시는 교통편이 상당히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안성남사당풍물놀아 도보>라는 제목으로 발간한 이 책은 공식적으로 나에게는 가장 먼저 세상에 내놓은 저서로 60P 분량의 소책자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꽤 많은 고생을 했다.

 

당시는 안성남사당에 대한 자료가 전혀 없을 때라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 묻고 기록하기를 수도없이 반복해야 했다. 그때 서운초등학교에서 풍물팀을 지도하고 있던 김기복 선생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남사당풍물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남사당의 여성 꼭두쇠였던 바우덕이는 물론 남사당의 역사를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안성남사당의 꼭두쇠였던 이원보패에 들어가 8살부터 상무동으로 시작한 김기복 선생은 안성남사당이 전부였으며 뼈 속까지 꼭두쇠였다. 선생은 늘 남사당의 복원과 전승에만 관심이 있었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엄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 선생과 인연이 되어 그동안 수도없이 안성을 드나들며 남사당에 대한 기사를 쓰곤 했다,

 

안성남사당의 맥은 조선조 말의 바우덕이로부터 시작하여 김복만-원육덕-이원보-김기복으로 이어지면서 해체와 결성을 반복하면서 끈질기게 맥을 이어왔다. 1997930일 안성남사당풍물놀이가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자 선생은 기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았으며, 2002년 안성시립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을 창단하여 꼭두쇠를 역임하였다. 2015820일 새벽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생은 영원한 안성남사당의 꼭두쇠였다.

 

남사당은 신라 때부터 전해져

 

한산 세모시 곱게 차려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 가세

 

우리네 삶이 암울했던 시절에 나옴직한 소리다. 한산 세모시를 곱게 차려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을 가잔다. 안성 청룡이란 서운면에 있는 고찰 청룡사를 일컫는 말이다. 왜 하필이면 안성 청룡이었을까? 그 곳은 예부터 남사당패들의 근거지였다. 칠사당패라고 불리던 남사당패들이 청룡사 밑에 자리잡고 봄이 되면 길을 떠났다가 가을이 되면 다시 돌아와 그 곳에서 한겨울 동안 기예를 익힌 후 다시 길을 떠나는 일을 반복했다. 이 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안성남사당패는 그 기예가 출중하기도 했지만 남사당의 원류로 알려져 있다.

 

남사당패의 시원(始原)은 신라 때부터 전해진 예인집단(藝人集團)이라고 한다. 하지만 유랑집단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조선조 말기로 보고 있다. 청룡사는 과거 살기가 암울하던 시절 많은 기예인들이 이 곳으로 몰려와 집단으로 취락을 이루면서 남사당패와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된다. 그들이 이 곳에 거주한 것은 안성장이 가까이 있고 정월을 비롯하여 각 절기에 사찰을 찾는 이들을 위해 마당놀이를 통하여 최소한의 생활대책이 되었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꼭두쇠를 정점으로 뭉친 남사당패

 

남사당패의 조직을 보면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뜬쇠·가열·삐리·저승패·등짐꾼 등으로 4050명이 한패를 이룬다. 꼭두쇠는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대내외적인 책임을 지며 꼭두쇠의 능력에 따라 식구가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기획을 맡아본다. 곰뱅이란 남사당패의 은어로 허가란 뜻이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 놀이마당을 열어도 좋다는 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말한다. 곰뱅이쇠가 둘일 경우 하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글()곰뱅이쇠다.

 

다음으로는 뜬쇠가 있다. 뜬쇠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파트장이나 수석의 역할을 한다. 뜬쇠는 14명 내외로 구성이 되며 상공운님(상쇠징수님(수징고장수님(수장고북수님(수북호적수·벅구님(소고상동무님·회덕님(선소리꾼버나쇠·얼른쇠(요술쟁이살판쇠(땅재주꾼어름산이(줄꾼덧뵈기쇠·덜미쇠 등 각 부분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뜬쇠의 밑에는 몇 사람의 기능을 익힌 가열이 있으며, 밑으로 초임자인 삐리를 둔다. 저승패는 나이가 먹어 기능을 상실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꼭두쇠는 패거리에 의해 선출되며 기능을 발휘할 수 없거나 잘못이 있어 신임을 잃으면 바꾸게 된다. 협의를 통한 다수결의 방식을 통해 선출되며 일정한 임기는 없다.

 

 

남사당패의 여성 꼭두쇠 바우덕이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가네

 

안성 남사당패의 꼭두쇠 바우덕이가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안성지역에 전해지는 소리이다. 꼭두쇠 바우덕이(본명은 김암덕(金岩德)이라 전함)는 능력이 있는 꼭두쇠로 그가 이끌던 남사당패를 개다리패라고 불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꼭두쇠였던 그는 남사당패를 최고의 기예 집단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 뒤를 이은 복만이패(꼭두쇠는 안성출신 김복만)1935년 당시 가장 활발하게 한수 이북을 누빈 유랑집단이었다. 복만이패를 이은 원육덕패(여주출신)는 해체된 복만이패 사람들을 규합하였으며 1939년 멀리 북간도까지 들어가서 활동하다 해체되었다. 복만이패가 해체될 때 유일하게 안성을 기점으로 활동하던 이원보패를 마지막으로 유랑집단으로서의 기능이 사실상 상실되었다.

 

 

남사당공연장에서 만난 영원한 재인들

 

주말과 휴일을 맞이하여 안성맞춤랜드 안에 소재한 안성남사당바우덕이 풍물단의 전용공연장에서는 4월부터 11월까지 공연이 열린다. 안성을 갈 때마다 이곳을 들리고는 하는데 시원한 실내에 앉아 공연단들과 함께 대화를 이어가며 추임새도 넣고 박수도 쳐가면서 관람을 하고 있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면서 늘 부럽다는 생각이다. 편하게 구경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비가와도 날이 무더워도 걱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주말 안성을 찾았다. 요즈음 같은 철에 누가 이곳을 찾아올까 하는 생각을 가졌는데 막상 공연장에 모인 사람들은 200여명 가까운 관객들이 모였다.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라도 나온 기분으로 모인 사람들은 얼쑤’ ’좋구나를 연발해가며 즐거워들 한다. 그 중에 앉아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절로 즐거워진다.

 

영원한 우리의 재인 안성남사당패. 그들의 소박한 몸짓이며 기예 한편에는 많은 땀과 노력이 있었다. 그들은 오늘도 판줄을 타고 마당놀이에서 칠무동을 선보인다. 오래도록 전해진 그들만이 놀이판에 함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즐거움이다. 안성남사당, 그들에게 오늘이 있기까지 나도 조그마한 몫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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