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문시장 홍보관 앞에 자리한 여류사회사업가 백선행 흉상


수원남문시장 홍보관 앞 입구 한편에 여성의 흉상이 있다. 이 크지 않은 흉상에는 ‘백선행’이라는 주인공의 이름과 함께 길지 않은 인물의 내력을 적어놓았다. 백선행은 1848년(헌종 14) 수원에서 부친 백지용(白持鏞)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나 193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성 사회사업가로 활동을 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 작은 흉상으로 만날 수 있는 백선행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우리는 그리 조명된 바가 없다. 수원에서 출생한 수원사람이지만 백선행의 주 활동무대가 평양이었기 때문이다. 백선행은 혼자의 힘으로 많은 노력을 하여 당시 70만원(현 시세 300억원)이라는 엄청난 부를 축적한 전설적인 여인이다.

백선행이 이렇게 많은 재산을 이용해 사회사업가로 이름을 떨친 것은 그녀가 살아 온 삶 때문이다. 백선행은 어려서 평양 중성으로 이주해 7세에 부친을 여의고 편모 김씨 슬하에서 자랐다. 효행이 남다른 백선행은 14세 때 안재욱(安裁煜)과 가정을 이루었지만 남편 안재욱은 술과 여자로 결혼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시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홀어머니가 어렵게 살고 있는 친정으로 돌아온 백선행은 채무자에게 빗 독촉을 받는 친정어머니의 모습을 본 후 온갖 궂은 삯일을 도맡아 하면서 청상과부로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녀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은 돈이 모일 때마다 평양 근교인 강동군 만달면 승호리 일대의 광대한 황무지를 사들인 것이다.

시멘트회사에 부지 넘겨 평양갑부가 된 백선행

벡선행이 이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은 것은 딸이 남의 집 삯일을 하는 등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워 재혼을 하겠다고 딸은 속인 후 남의 집에 가서 식모살이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백선행은 그런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와 자신이 남의 집 일등 모든 일을 하는데 일주일 만에 200여벌의 빨래를 해대는 등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땅을 사들여 소작을 주고 소작료를 받으면 다시 땅을 사는 등 오직 땅만을 사들인 백선행은 1900년대에 일본인 시멘트생산업자 오노다[小野田]에게 자신의 땅을 팔아넘기면서 굴지의 평양 갑부가 되었다. 백선행의 땅인 만달산 일대가 시멘트 원료인 석회 석산이었기 때문이다. 

땅을 팔아 막대한 치부를 하게 된 백선행은 자선사업에 희사할 뜻을 굳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대 백선행에게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면 도와줘라. 그렇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 그런 선덕은 다시 너에게 돌아온다”라는 유언 때문이다. 1908년 첫 공익사업으로 대동군 용산면 객산리 솔뫼다리를 돌다리로 새로 부설하여 ‘백선교(白善橋)’라 이름을 붙였다.


수원출신 백선행은 평양에서 교육사업에 많은 투자를 했다

수원출신 백선행은 평양에서 교육사업에 많은 투자를 했다


여성 최초로 사회장을 지낸 백선행

백선행은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오면 선뜻 기금을 내어놓고는 했다. 백선행의 사회사업은 주로 교육에 더 많은 기금을 내어놓았다. 1919년 3·1운동에 충격을 받은 백선행은 1924년 모든 재산을 사회사업에 바치기로 공식발표한 뒤 당시 30만 원의 거금을 출연하여 평양 일대의 각급학교를 지원. 육영사업을 하였다. 당시 평양시민들을 위한 문화시설로 대공회당을 신축하였으며 대동강 옆에 자리한 이 웅대한 석조건물은 ‘백선행기념관’이라 하여 평양의 명소가 되었다.

많은 교육사업에 기금을 낸 백선행은 곳곳에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숭현여학교와 광성보통학교에도 기념비가 세워졌다. 86세로 세상을 떠난 백선행은 여성으로는 최초로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수원남문홍보관 앞에 서 있는 여류사회사업가 백선행의 흉상. 지나던 사람들이 잠시 흉상 아래 안내문을 들여다보다 길을 떠난다.

가끔 이곳을 지나다보면 흉상 위에 빈 음료캔이 올려 있기도 하고 빈 담배 곽이 놓여 있기도 한다. 수원사람들도 잘 모르는 백선행. 그리고 수원에서 태어났지만 평양에서 살다가 그곳에 많은 사회사업을 한 백선행이기 때문인가? 그녀의 고향인 수원에서조차 크게 거론되지 못하고 있다. 남문시장 홍보관 앞에 서 있는 흉상으로 인해 자신이 수원사람임을 알리고 있는 여류사회사업가 백선행. 이제는 수원사람으로 그의 자리를 찾아주어야 할 때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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