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다. 동문인 창룡문 가까이 있는 동장대와 팔달산 정상부근에 위치한 서장대이다. 동장대의 현판에는 '연무대(鍊武臺)'라고 적혀있다. 연무란 군사들을 조련한다는 뜻이다. 현재 동장대 담장 안에는 연무대 건물과 앞쪽 우측으로 솟을삼문, 그리고 좌측으로는 네 칸의 창고인 듯한 전각이 자리한다.

 

현재 동장대의 모습은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나고 있는 <동장대도>와 다르지 않다. 오랜 시간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성역의궤에 따른 보수 및 복원 때문이다. 2019년 황금돼지해 기해년 123, 쌀쌀한 바람 속에 동장대를 찾았다.

 

완벽한 독립공간 동장대

 

동장대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지형상 높은 곳은 아니다. 하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한데다 높이 솟아 있다. 더구나 앞으로는 평평한 너른 평지가 있어, 군사들이 훈련하기에 적당하다. 장용외영 군사들을 조련하던 지휘소인 동장대는, 정조 19년인 1795715일 공사를 시작하여 825일에 완공하였다.

 

동장대인 연무대가 자리한 곳은 3단으로 쌓은 대를 조성하였다. 한가운데에는 좌우에 와장대를 설치하고 흙을 평평하게 하였으며, 바닥엔 네모난 벽돌을 깔아 놓았다. 장대의 건물은 정면 5, 측면 3칸의 단층 합각기와지붕이다. 건물 앞으로는 터를 넓게 잡아 동서 80, 남북 240보 규모의 조련장을 만들었다.

 

동장대는 독립공간이다. 아마도 화성에 들른 정조는 이곳에서 장용영 군사들이 조련하는 모습을 보면서 늘 마음속으로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다짐을 했을 것이다. 이곳 화성으로 도성을 옮기고 북벌을 위한 커다란 이상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동장대는 그런 이산 정조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독립적인 공간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왕을 보호하기 위한 영롱담

 

동장대에는 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연무대 뒤편 담장이다. 이 담장은 '영롱담'이라고 하는데, 이 담장을 두른 이유는 연무대에서 군사들의 조련 모습을 관망하는 왕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기와를 이용해 조성한 영롱담은 마치 꽃 모양을 닮았다. 구슬이 울리는 듯하다 하여 담장 이름을 영롱담이라고 한다는데, 밑에는 문석대로 기단을 놓았다.

 

뒤편을 막은 담장을 지나 성 쪽으로 나가면 총안 앞에 놓인 작은 '불랑기'를 볼 수 있다. 불랑기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휴대용 화포이다. '불랑기포(佛郞機砲)'는 중국 명나라 시대에 도입한 서양식 박격포로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전해졌다. 불랑기는 <프랑크(Frank)>라는 유럽인의 이름을 뜻하는 것으로 몸체길이는 72cm이며, 총구멍은 9.5cm이다.

 

이 불랑기는 몸체가 큰 1호서부터, 작은 5호까지로 구분된다. 불랑기포는 발사 틀의 구실을 하는 모포에 실탄을 장전하여, 모포에 삽입해 발사하는 자포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육전은 물론 해전에서도 사용하였으며, 불랑기포의 시용법은 당시 귀화한 박연(벨테브레)이 서양식 포술을 지도했다고 한다.

 

 

정조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네

 

성의 담장 안쪽으로는 커다란 철로 만든 함에 돌들이 가득 담겨 있다. 이 돌들은 전쟁이 나면 실제로 사용하기도 했던 '투석(投石)'이다. 지금 생각하면 돌이 무슨 전쟁무기일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하지만, 당시에는 이 투석만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무기는 흔치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는 이 투석이 무기로써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흔히 돌이 날아다닌다고 하며 '비석(飛石)'이라고도 부르는 이 투석에 사용하는 돌은,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에 보면, 타마다 크고 작은 돌멩이 100개씩, 10타마다 큰 돌 200(120kg)이나 150(90kg)짜리 3개씩을 두도록 하였다. 이 돌들을 이용해 수성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다.

 

작은 돌로는 적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였으며, 큰 돌은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향해 굴렸을 것이다. 이렇게 완벽한 수성을 할 수 있는 화성. 1월 말이라고 하지만 찬바람 속에 찾아간 동장대. 바람을 따라 연무대가 떠나갈 듯 웃는 이산 정조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마도 이산 정조의 그 꿈이 아직도 후손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동장대 아래편 솟을대문 안쪽에 보면 수문규칙(守門規飭)’이라는 글을 적은 족자 하나가 눈에 띤다. <1. 장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처벌한다. 1. 밤에 돌아다니거나 군호를 잃은 자는 처벌한다. 1. 직무에 불평하는 자는 처벌한다. 1. 부녀자를 데려 들어오는 자는 처벌한다. 1. 헛된 말을 하여 혹하게 하거나 까닭 없이 군을 놀라게 하는 자는 처벌한다. 계축 6월 초1일 수원유수 채제공>이라 적혀있다.

 

아마도 당시에 이렇게 규칙을 정해놓고 모든 군사들이 이 규칙을 지키도록 했나보다. 정조대왕이 가장 신임하는 장용외영의 병사들이었으니, 그 규칙 또한 어느 곳보다도 엄격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채제공은 수원화성을 축성하는데 있어 일등공신이다. 그가 정한 수문규칙을 보아도 채제공이 얼마나 수원화성의 축성에 열정을 쏟았는가를 알 수 있다.

 

 

화성축성에 사용할 돌 때문에 눈물 흘린 정조

 

채제공은 1793년 화성 건설을 위해 새로 설치된 화성유수부의 초대 유수(留守)로 임명된다.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능으로 옮기고 화성 건설을 하겠다고 하자 수구파 대신들의 반발을 샀다. 멀쩡한 한양 성을 놓아두고 왜 수원에 성을 쌓느냐?는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정조는 젊은 정약용에게 성의 설계를 맡긴 후,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석성(石城)을 쌓기 위해 필요한 돌이었다.

 

화성을 축성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돌을 구해야 하는데, 그렇게 많은 돌을 구할 수 있을까하는 것도 정조에게도 고민이었다.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경모궁에 앉아 아버지에게 간구했다. “단단한 석성을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는 정조의 간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해진 닝보로 인해 한시름 놓게 만들었다.

 

놀랍게도 수원 인근 숙지산과 여기산, 권동, 팔달산에서 성을 쌓을 수 있는 돌맥이 무더기로 발견된 것이다. 숙지산에서 81110덩어리, 여기산에서 62400덩어리, 동에서 32000덩어리, 팔달산에서도 13900덩어리를 채석할 수 있었다. 그 많은 돌을 옮기기 위한 장비도 새롭게 만들어졌다.

 

채제공에 따르면 가장 큰 채석장이 된 숙지산은 숙지(熟知), 즉 깊이 안다는 뜻이다. 돌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더 놀라운 것은 숙지산과 여기산이 속한 곳이 공석면(空石面)이라는 지명을 갖고 있었다. 화성을 쌓느라 돌을 다 캐내 이제 돌이 없는 곳이 되었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공석면이 된 것이다.

 

정조가 화성을 축성할 당시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들. 연무대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다시금 옛 역사를 떠올려본다. 그 많은 돌을 이용해 축성한 수원화성. 연무대 앞에서 말을 달리며 각종 무술을 보여주던 무예24기 시범단의 군호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곳 연무대에서 정조 이산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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