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인 화성에는 모두 네 곳의 각루가 있다. 동문인 창룡문에서 남문인 팔달문 쪽으로 가다 보면 성벽이 갑자기 아래로 굴곡져 내려가는 곳이 있다. 이곳 등성이에 '동남각루'가 자리한다. 팔달문을 지나 팔달산 정상을 향해서 오르면 좌측으로 난 등성이를 따라가는 용도가 나타나고, 그 끝에 화양루라고 부르는 '서남각루'가 자리한다.

 

그리고 다시 성벽을 따라 걷다가 서장대를 지나 서문인 화서문을 향해 가다가 보면 '서북각루'가 자리하고 있으며, 북문인 장안문을 지나 동쪽으로 가다보면, 북수문인 화홍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이 있다. 이렇게 4곳에 축조돼 있는 각루는 각기 형태가 다른 것이 특징이다.

 

휴식과 감시를 하는 기능인 각루

 

이 네 곳의 각루는 모두 지형적으로 시야가 트인 곳에 자리하고 있다. 각루에선 병사들이 쉴 수도 있고, 주변을 감시한 수도 있다. 비상시에는 각루가 각 방면의 지휘소 역할을 하기도 한다.

 

네 곳에 서 있는 각루 중 서남각루와 동북각루는 각각 '화양루''방화수류정'이라 이름을 붙일 정도로 정자나 누각과 같이 꾸며져 있다. 이렇게 아름답게 쉼터를 꾸며 놓았다는 것도 화성의 자랑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은 모든 축조물 하나하나가 나름대로의 아름다움과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다. 이 네 곳의 각루는 어떤 모습으로 축조가 되어있을까? 지형과 용도에 따라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는 각루에 쉴 수 있는, 옛 장용영의 군사들은 행복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남수문과 팔달문을 지키는 동남각루

 

동남각루는 작은 정자처럼 꾸며져 있다. 돌계단을 올라 누각으로 오를 수 있는 동남각루는 계단 위 입구를 제외한 3면이 판벽으로 막혀있고, 전안이 뚫려있다. 동남각루는 성 안팎으로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한다. 성벽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위에 자리한 동남각루는 그 밑을 흐르는 수원천의 남수문과 팔달문 등을 방어하기 위한 곳이다.

 

화성의 사라진 시설물 중 하나인 남수문과 동남각루의 건너편에는 남공심돈과 남암문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남공심돈과 남암문이 사라졌다. 동남각루의 누각 아래에는 온돌방이 있다. 수직하는 병사들이 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궁이가 있고, 반대편에는 굴뚝이 서 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동남각루를 구천(龜川 =현 수원천)의 위 일자문성의 머리에 있다. 성이 산세 때문에 이곳에 이르러 가파르게 뚝 끊어졌으며 누는 성 위로 쑥 나와서 멀리 평야를 바라보고 있다. 그 규모 또한 54간으로 높이와 너비가 모두 서북각루와 같다. 다만 네간 모두 판자를 깔고 동쪽 처마 아래에 층계를 설치하였다. 서남 한 간은 총판아래에 역시 온돌을 설치하였다고 했다.

 

날이 풀렸다고 하지만 이른 시간의 화성걷기는 쌀쌀하다. 특히 동남각루는 아래로 수원천이 흐르고 있고 산마루에 각루가 서 있어 딴 곳마다 더 춥다. 이런 곳을 지키고 있을 장용외영의 병사들을 생각한 정조의 마음이 동남각루 안에 그대로 보인다. 정조의 애민(愛民)정신이 이 작은 각루에 그대로 배어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추웠다. 한 겨울 칼바람에서 화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잠시나마 따듯한 온돌에서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마련한 작은방. 정조는 이 작은 각루에도 온돌방을 마련했다. 화성의 구조물 가운데 이렇게 온돌방을 마련한 곳이 상당수이다. 그 안에 정조의 따듯한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남쪽 능선 끝에 마련한 서남각루

 

팔달문에서 팔달산 위로 올랐다. 그 능선 위에 마련한 서남암문 앞으로 능선을 따라 용도가 마련되어 있다. 팔달산 전체에 걸쳐 성을 쌓지 않고 그 반을 갈라 축성한 화성은 이 용도를 두고 그 끝에 서남각루를 마련하였다. 능선으로 적이 오르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서남암문에서 170m 거리인 용도 끝에 마련한 서남각루에는 화양루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는 화성을 뜻하고 ''은 남쪽을 뜻하는 이름이다. 서남각루는 정조 20년인 1796416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720일에 완공하였다. 3개월 정도의 공사기간을 가졌다. 화양루의 규모는 6간인데 남북으로 21척에 동서의 길이는 14척이다. 남쪽으로 2간은 누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러쳤으며 삼면에는 판문을 내었다.

 

서남각루는 현재 판문의 흔적이 있으나 문은 달려있지 않다. 북쪽에는 분합을 내고, 분합의 밖으로 네 간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서남각루는 화양루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의 아름다운 누각이다.

 

용도 끝에 자리한 각루는 준 지휘소이자, 군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서남각루가 서 있는 곳은 능선의 끝이자, 용도의 끝이 된다. 이곳에서 양편으로 돌출된 성벽은 양편 모두가 치의 역할을 하고 있어, 용도동치와 용도서치와 함께 적을 공격하기에 용이하게 축성이 되었다. 오죽하면 유네스코에서 18세기 동, 서양을 통 털어 가장 완벽한 군사시설이라고 화성을 극찬하였겠는가?

 

서남각루는 한편은 바닥이 돌로 되어있고, 한편은 장초석을 놓고 기둥을 올려 마루를 놓았다. 언제나 이곳에서 군사들이 주변감시를 하면서 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팔달산 남쪽 능선에 올라 성안을 공격하겠다고 죽자 사자 능선으로 오른 적군들. 그들은 능선에 버티고 있는 용도로 인해, 또 한 번의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누마루 밑에 온돌방을 마련한 서북각루

 

서북각루는 서장대에서 화서문으로 내려가다가 만날 수 있다. 2004824일 화성답사 중 만난 서북각루. 한 여름 더위를 피해 사람들이 누각 위에서 쉬고 있다. 화상을 돌면서 늘 만나게 되는 서북각루는, 위층은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하고 아래층에는 온돌방을 놓았다.

 

동남쪽으로 한 칸은 청판 아래를 벽돌로 담을 둘러치고 온돌방을 들였다. 이는 수직하는 군사가 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서북각루도 판문을 설치하였다고 기록에 나타나 있으나, 현재 판문은 보이지 않는다. 문에는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전안을 뚫어 놓았었다고 한다.

 

서북각루를 찾아가면 언제나 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가을이 되면 서북각루 성 밖에 펼쳐진 억새군락지의 모습은 절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 서북각루에 올라 쉬어가는 것은 각루가 예전에도 군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쉬기도 하고 주변을 살피기도 했던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에 올라 주변경치를 둘러보는 것을 좋아하는가 보다.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을 맡아한 각루는 네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 형태가 다르다. 서북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하나로 숙지산이 마주보이는 자리에서 화서문 일대의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만들었다.

 

 

보물 제1909호로 지정된 동북각루

 

동북각루의 별칭은 '방화수류정'이다. 이 말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라는 말이다. 그럴 정도로 동북각루는 아름다운 정자다. 독특한 건축미가 돋보이는 방화수류정은 201133일에 보물 제1909호로 지정이 되었다.

 

17941019일 완공을 한 방화수류정은 그 아래 용연과 더불어 화성의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화성의 백미'라고 칭찬하는 방화수류정. 한 겨울에 만나는 방화수류정은 여름과 달리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 보이는 방화수류정은, 주변감시를 하고 군사들이 쉬기도 하는 기능을 함께 갖고 있다.

 

방화수류정은 전시를 위해 화성에 축조한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함께 갖고 있는 건물로 석재와 목재, 전돌을 사용해 축조하였다. 방화수류정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 운담풍경오천(雲淡風經午天), 방화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다.

 

방화수류정은 평면은 자형을 기본으로 하고, 북측과 동측은 형으로 돌출되게 조영하여 사방을 관망하는데 있어 어느 한 곳도 빠트리지 않도록 축조한 건축물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 정조대왕이 축성한 수원 화성의 시설물 중 한 곳인 방화수류정은 조선 헌종 14년인 1848년에 중수하였고,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수원화성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들라고 하면 당연히 방화수류정이다. 수원에서 8년 동안 살면서 가장 많이 가본 곳이기도 하다. 이 방화수류정은 화성의 네 곳에 있는 각루(角樓) 중 하나로 동북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은 179494일 터 닦기를 시작으로 그 해 1019일에 완성을 하였으니, 200년이 지난 역사를 갖고 있다.

 

방화수류정은 정자의 모양도 특이하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인 조화다. 성벽이 높게 오르기 시작하는 산중턱에 지어진 방화수류정은, 그 서 있는 장소마저 눈에 잘 띄는 곳이다. 정자는 이단의 기단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을 벽돌로 쌓아올렸다. 일단의 벽돌을 쌓은 후 장대석 계단을 놓고, 그 위에 정자의 기둥을 세웠다. 그런 다음 다시 벽돌을 높여 정자를 지었다. 이곳에 모든 기운이 모여든다고 하는 말이 빈말은 아닌 듯하다.

 

좌측에는 문을 달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는데, 그 문 또한 아름답다. 그 문 안으로 들어간 병사들이 적을 향해 화살을 쏠 수 있도록 하였다. 적과 교전을 하는 성곽의 건물이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정자. 그리고 정자로의 기능만이 아니라 본연의 성곽 기능을 갖고 있는 정자가 바로 방화수류정이다.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은 정자만이 아니다. 정자 밑에 있는 쪽문을 돌아서면 벽면이 십자모양의 문양을 넣었다. 이런 조선시대 건축에서 많이 나타나는 문양이기도 하다. 이런 문양 하나가 방화수류정을 지으면서 얼마나 자연경관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가를 생각한 것이라고 본다. 이런 벽면이 사방을 둘렀다면 그 또한 지금과 같이 아름답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 벽만 그렇게 처리한 것이 더욱 돋보이는 미가 아닐까? 아마 방화수류정을 축조한 공인이 그런 것 하나까지 모두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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