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 답사는 힘이 든다. 발목을 넘는 눈길을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여기저기 멍이 들기 때문이다. 용인에서 민속촌으로 가는 길, 기흥구 지곡동 615번지에 소재한 사은정. 지난 해 겨울 눈이 쌓였던 사은정의 모습. 당시 사은정의 앞에는 여기저기 고라니가 눈을 끌며 지나간 자국만 남아있었다. 눈이 쌓인 곳을 새롭게 밟고 지나가는 기분도 꽤 좋다. 발밑에서 빠삭거리며 밟히는 눈의 감촉도 한 겨울에 느끼는 재미다.

 

사진을 찍으려고 이리저리 다니다가 미끄러졌는데, 하필 그 밑에 날선 돌이 박혀있다니. 눈물이 난 것만 같은 통증이다.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할 일은 다했으니, 참 '문화재가 밥 먹여주냐'는 질문이 딱 맞는 듯하다.

 


 

경(耕) 신(薪) 조(釣) 채(菜)의 즐거움을 위한 정자

 

사은정은 네 가지 즐거움을 뜻한다. 즉 밭을 갈고, 나무를 하고, 낚시질을 하며, 나물을 캔다는 뜻이다. 이 네 가지 즐거움이야말로 노년의 인생을 더욱 윤택하게 할 수가 있다. 사은정은 이 네 가지 즐거움을 함께 즐기기 위해서 세워진 정자이다. 그리고 네 분의 선조들을 위하여, 후손들이 몇 번을 중수하면서 그 뜻을 기린 정자이기도 하다.

 

처음 사은정이 지어진 것은 1500년대 초일 것으로 보인다. 이 정자를 처음 지은 이유는, 조선조 중종 때의 명현이자, 성리학의 대가인 동방사현 중 일인인 정암 조광조(1482 ~ 1519), 중종 때의 유학자인 방은 조광보, 회곡 조광좌,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기묘사화 때 연루되어 화를 당한 임애 이자(1480 ~ 1533) 등이, 도의로 친우를 맺고 노년의 생활을 즐기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정조 20년인 1796년에 정암과 음애. 회곡 선생의 후손들이 중건을 하면서, 서재를 짓고 방을 드렸으며 단청도 다시 하였다고 하였다. 아마도 처음에 사은정을 건립하였을 때는 단순한 정자만 있었던 것 같다. 그 뒤 고종 13년인 1876년에 정자가 퇴락하여 후손들이 중창하였으며, 1925년과 1988년에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사은정의 현판. 사은정은 1,500년대 초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은정 대청 안편에 걸린 중수기

 

설경(雪景)이 아름다운 사은정

 

용인 정신병원에서 신갈 오거리 길을 비켜서, 민속촌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면 지곡동이 된다. 이 길로 가다가 민속촌이 나타나기 전 우측에 주유소가 있고, 그 옆길로 들어가면 사은정이 있다. 사은정은 민속촌의 옆 야산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다. 뒤로는 소나무와 바위들이 흰 눈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전국의 정자들은 사계절 언제 찾아가든지, 나름대로의 정취가 있다. 사은정 역시 겨울 경치도 아름답다.

 

사은정의 앞으로는 지곡리의 들이 펼쳐진다. 주변에는 낮은 야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 아늑하다. 뒤 야산에서 나무를 하고, 들판으로 나가 나물을 캤을 것이다. 그리고 앞의 너른 곳에 밭을 갈아 먹거리를 장만하고, 멀지 않은 내로 나가 낚시를 하면서 하루해를 즐겼을 것이다. 사은정은 그런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어 네 분의 선조들이 마련한 정자이다.

 

눈에 덮힌 사은정. 눈이 채 녹지 않은 소나무와 기암들이 함께 해 더욱 아름답다

 
계자각 난간을 두른 우측 한편에 한 칸의 방을 드렸다. 이 방은 후손들이 중건을 하면서 새롭게 드렸다.

방을 뒤로 놓고, 앞으로 툇간을 내어 마루를 놓았다.

 

계자각 난간을 두른 사은정

 

겨울에 보는 사은정은 아름답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사은정은 중앙에 계단을 놓았다. 중앙의 계단은 장대석으로 하였으며, 계단 양 옆이 돌출이 되게 하여 멋을 냈다. 마름모꼴의 잘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전면과 측면은 계자각 난간을 둘렀다. 우측으로는 한 칸 방을 드려 겨울철에도 묵을 수 있게 하였으며, 방과 대청을 나란히 놓고, 좌우에 개방된 툇간을 놓았다. 툇간은 본 건물보다 돌출이 되게 구성해 여유를 보인다.

 

정자 대청 위 벽에는 중수기와 중건기가 걸려있다. 정자를 한 바퀴 돌아본다. 대청의 뒤로 낸 판자문이 투박하다. 그렇게 투박하게 낸 판자문이 오히려 우직한 충정을 엿보게 한다. 방 뒤에 높게 솟은 굴뚝이,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높은 하늘을 따라 오르는 듯 하다. 뒷산을 올려다본다. 아직 눈이 다 녹지 않은 소나무와, 여기저기 솟은 바위들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만 같다. 이곳에서 서로 의지를 하고 노년을 보냈을 선조들이, 오히려 부럽기만 하다. 지금 우리네들이야 어찌 이런 여유를 느낄 수가 있을까?

 

툇간을 놓고 계자각 난간을 둘러 멋을 냈다.

대청의 뒤편에 낸 판자문. 뒤켠으로 돌아 본 판자문이 투박하다. 오히려 우직함이 있어 좋다.

 

돌에 부딪쳐 얼얼한 엉덩이를 부비며, 눈길을 밟다가 연신 뒤를 돌아본다. 언제 다시 이렇게 아름다운 설경을 볼 수가 있을까? 쌓인 눈이 고맙기만 하다. 봄이 되면 주변에 많은 봄나물들이 돋아 나오려나? 괜한 걱정까지 해가며, 사은정을 멀리한다. (지난 해 겨울 눈이 엄청 쌓인 사은정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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