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기 귀부에 왜 왕(王)자를 새겼을까?
봉화군에는 우리가 대찰이라고 부를 만한 절은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태백산 사고가 생기면서, 태백산 사고의 수호사찰로 정한 절이 바로 각화사이다. 각화사는 우리나라의 소나무 중 최고로 치는 춘양목이라는 가장 좋은 소나무로 유명한,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에 자리하고 있는 의성 고운사의 말사이다.
각화사는 오래 전 춘양면 서동리 춘양상업고등학교 교정 자리에 남화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서기 665년인 신라 문무왕 5년에 원효대사가 이곳으로 이건하여 남화사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각화사라 명명했다고 한다.
고려 전기의 귀부가 남아있어
각화사에는 고려 전기에 세운 비 받침돌인 귀부가 남아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189호인 각화사 귀부가 소재한다. 이 귀부는 각화사에 놓여 있는 비의 받침돌로, 고려 전기 문신인 좌간의대부 김심언이 세웠던 ‘통진대사비(通眞大師碑)’의 일부로 전하고 있다. 이 귀부는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귀부들과는 사뭇 다른 형태로 조성되었다.
귀부는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비좌는 약간 파손이 되긴 하였으나 거의 본 모습을 갖추고 있다. 등 무늬는 6각형이 전면에 덮여 있고, 그 안마다 ‘왕(王)’자와 ‘불(佛)’자, 만(卍)‘자를 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대체적으로 고려 전기의 정교하고도 웅대한 조각솜씨를 이어받고 있으나, 몸통에 비해 머리가 작은 감이 든다.
비와 이수는 사라졌지만, 소중한 고려 전기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귀부의 길이는 220cm, 폭은 190cm에 높이는 92cm이다. 후에 비몸과 머릿돌을 새로이 만들어 그 위에 세워놓았다.
용머리에 거북, 거 참 괴이하네
귀부의 형태는 신라시대에는 대개 거북이의 머리와 몸으로 제작을 하였으나,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로 넘어오면서 용머리에 거북이의 몸을 가진 형태로 조성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초기의 귀부는 상당히 힘이 있어 보이는 용머리를 귀부에 붙였다. 왜 이렇게 용머리를 조각하였는지는 정확치 않으나. 아마도 강한 국권을 상징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각화사 귀부를 찬찬히 돌아본다. 귀두의 뒤편에는 굵게 금이 가 있으며, 귀부의 앞과 뒷발은 금방이라도 무엇인가를 낚아 챌 곳 같이 날카롭다. 귀두의 귓가에는 금방이라도 펄럭일 듯한 아가미를 새겼다. 몸체에 비해 머리가 작게 조성이 되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매우 힘이 있는 형태이다.
벌써 각화사를 다녀온지가 꽤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밀린 자료정리를 하느라 하루 종일 부산하다. 날이 좋아 가까운 곳으로 답사라도 나가려고 했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밀린 자료정리가 더 시급할 것 같다. 올해도 300장이 넘는 자료CD가 장식장에 나란히 꽂힌다. 각 종류별로 구분을 하여 하나하나 정리를 하다 보니 하루해가 다 지났다.
올해는 답사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지난해는 생태교통으로 인해 한 달간이나 행궁동 일대를 돌아다니느라, 제대로 마음먹고 답사한 번을 못한 듯하다. 지난해 하지 못한 답사를 올 한 해 정말 열심을 내어야 할 판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