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새해를 맞이하기 전 해우소를 찾아간다”
‘뒷간’과 ‘해우소(解憂所)’에 깃든 우리네 철학
절에서는 뒷간을 두고 ‘해우소(解憂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말은 다솔사(茶率寺)에서 절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짜기에 오두막 한 채를 지어놓고, 그것을 ‘해우정(解憂亭)’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 것이란다. 다솔사는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와룡산) 동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신라 지증왕 4년(503년) 연기조사가 개창하면서 영악사라 했으며, 선덕여왕 5년(636년) 자장이 사우 2동을 짓고 다솔사(陀率寺)로 불렀다. 그 후 의상이 문무왕 16년(676년)에 영봉사(靈鳳寺)로 사명을 고쳤으며 고려 공민왕 때는 나옹이 중건하고, 조선조에 들어와 사세를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던 것을 숙종 때에 큰 중건불사가 행해졌다.
이러한 다솔사에서는 뒷간을 멀리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냄새가 나는 것을 방지하자는 뜻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남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자 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해우정이란 굳이 그 뜻을 풀어보자면 뒤를 보는 일, 곧 배 안에 가득 찬 불필요한 것을 배설해 근심을 푸는 일이라 해우정이라고 한 것이었다. 그 후 다른 절에서도 이 명칭을 받아들여 해우소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충남의 동학사 뒷간에도 ‘해우실(解憂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뒷간에 이르는 다리 난간에 해우교(解憂橋)가 있다.
우리는 흔히 뒷간이라는 말을 써왔다. 뒷간은 대개 집 뒤편에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기도 했을 것이다. 뒷간이라는 말이 좀 비속하단 느낌이 들어서인지 같은 동의어로는 변소, 측간(廁間), 측실(廁室), 정방(淨房), 서각(西閣), 혼헌(渾軒) 등으로도 불렀으며, 제주도에서는 통시라고도 부른다. 그 외에도 뒷물을 하는 곳이라 하여 북수간이라고도 불렀다.
통시라는 말은 흔히 우스개말로 대변을 볼 때는 떨어지는 소리가 ‘통’ 하고 나며, 소변을 볼 때는 ‘시’ 소리가 난다고 하여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정방은 몸속을 깨끗이 한다는 것이고, 서각이나 혼헌은 궁중에서 화장실을 지칭하는 말이다. 뒷간은 대개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지었다. 그래서 우리는 처갓집과 뒷간은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는 말을 쓰기도 한다. 이는 뒷간이 가까우면 냄새가 나기 때문이고 사돈집이 가까우면 항상 말썽의 소지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수원은 선진 해우소의 도시
수원에는 화장실 문회공원 안에 ‘해우재’가 자리한다. 생전을 화장실에 대한 집념 하나로 살아오다, 자신이 30여 년간 살던 집을 헐어버리고 그곳에 화장실과 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 집 이름도 ‘근심을 풀어버린다’는 뜻인 절의 ‘해우소’에서 딴 ‘해우재’라고 지었다. 전 수원시장 고 심재덕의 집이었던 해우재는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186-3에 소재한다.
해우재 옆에 자리한 해우재문화센터에는 세계화장실협회가 자리하고 있으며 수원시는 전 세계에 화장실문화를 알리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지난 7월 20일에는 수원시와 WTA(세계화장실협회가 터키 얄로바시에 ‘수원화장실’ 건립 기념 준공식을 가졌다. 수원화장실 건립은 수원시와 WTA가 공동 추진하는 ‘화장실 건립 지원 사업’의 하나다. 화장실은 터키 얄로바시 페리 터미널 인근 해수욕장에 있다.
얄로바시 수원화장실은 50㎡ 넓이에 남·여 화장실, 장애인용 화장실, 수유실을 갖췄다. 남자 화장실에는 대변기 3개, 세면대 2개가 있고, 여자 화장실에는 대변기 3개와 세면대 3개가 있다. 건축비 5100만 원이 투입된 이 화장실은 수원시와 터키 얄로바시가 국제자매결연도시이기 때문에 지어준 것이다. 페리 터미널 인근 해수욕장은 하루 평균 500여 명이 찾는 얄로바시의 대표 관광지이지만, 공중화장실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시설 노후화로 폐쇄돼 관광객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수원시는 그렇게 낙후된 화장실을 이용하고 있는 나라에 화장실을 새로 신축하는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화장실보다는 ‘뒷간’이 더 우리정서에 맞아
요즈음에는 흔히 화장실이라고 표기를 하는데 이는 어쩐지 우리 정서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사실 화장실이란 18~ 19세기 영국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다. 화장실을 영어로 표기를 하면 W.C.라고도 한다. 이는 Watet Colset의 약자로 수세식 변소라는 뜻이다. 북한에서는 위생실이라고 부르는데 화장실보다는 변을 보기 위한 장소의 명칭으로는 좀 나은 듯도 하다.
궁 안에 있는 화장실은 서각(西閣), 혼헌(渾軒)이라고 불렀다. 경복궁 안에는 무려 28곳이나 되는 혼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금이나 왕비가 지내는 곳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임금이나 왕비는 화장실을 가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이동식 좌변기인 매회(煤灰)틀이라는 것을 이용했다. 이 나무로 만든 변기인 매회 틀은 삼면은 막히고 한쪽면만 트여 있어 그 위에 앉아서 일을 보는데, 매회 틀 속에는 사기나 청동으로 만든 그릇이 있어서 서랍처럼 밀어 넣거나 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 그릇 안에는 재(灰)를 듬뿍 담아 놓았다. 재(매회)위에 용변을 보면 소리도 나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무가 끝나면 복이나인이 밑을 씻겨주고, 변을 본 그릇은 깨끗이 씻은 다시 끼워 넣도록 되어있다. 과거 우리네 시골집들을 보면 불을 떼고 난 재를 퍼서 화장실에 두었다가 변을 본 후 한 삽씩 퍼서 변을 본 위에 뿌리고는 했는데, 그것은 냄새도 가시지만 그 재와 변이 섞여 유기질 비료가 된다고 하니 선조들의 자연을 이용한 지혜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해가 끝날 무렵이면 나는 선암사를 찾아간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解憂所)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정호승 시인의 <선암사>라는 시다. 왜 선암사에 가서 해우소로 가 쭈그리고 앉아 실컷 울라고 했을까? 그 이유야 어떠하든지 선암사 뒷간은 특이하게도 안에 문이 없고 낮은 칸막이뿐이다. 얼마전인가? 기전문화재연구원에서 조선 초 왕실 원찰이었다가 16세기 허물어진 경기 양주의 거찰 회암사터에서 국내 발굴사상 최대 규모의 해우소 터가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됐다고 한다.지난 1997년부터 절터를 발굴해온 기전문화재 연구원은 8차 발굴 조사를 벌인 결과 절터 서쪽의 부속 건물터 부근에서 깊이 4미터, 폭 14미터, 폭 2.8미터 이상의 대형 화장실 구덩이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이것은 현존하는 해우소 중 가장 크다는 선암사 뒷간과 비슷한 크기다. 선암사 뒷간은 길이 10미터에 폭이 3.5미터 정도의 크기이니 두 곳이 거의 같은 크기인 것으로 밝혀졌다.
발굴된 공동 화장실은 언덕에 구덩이를 판 뒤 남쪽을 틔워 인분 더미를 꺼내는 돌문을 지었고, 구덩이 내부 사면은 돌벽으로 바닥은 박석을 깐 얼개가 특징이다. 구덩이 둘레에서는 12개의 기둥자리가 발견됐고 구덩이 내부는 발굴 당시 무너진 기와더미로 덮여 있었다고 전한다.
세상은 변한다. 그저 변하는 세월에 따라 순응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먹고 배설을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화장실이라는 정체불명의 명칭보다는 우리네 조상들이 흔쾌히 사용해오며 친근감이 있는 뒷간으로 바꾸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연말이 되면 매년 절을 찾아가 하우소를 한 번씩 돌아보곤 한다. 올해는 가까운 경기도에 소재한 절을 찾아가 해우소에 앉아, 일 년 동안 묵었던 인생의 찌꺼기를 모두 버려야겠다.
(주)이 글은 2006년 삭제시켜 버린 제 디음블로그 '누리의 취재노트'와 소운의 불화이야기에 올렸던 글인데 정리를 새로 했습니다.
검색을 하다보니 이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사진까지 출처를 밝히지 않고 퍼다가 자신이 쓴 것처럼 까질러 놓은 인간들이 있어 저작권 위반으로 고소를 제기하려고 생각증입니다. 출처도 밝히지 않는 그런 비양심적인 블로거들은 영원히 추방시켜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들이 출처도 밝히지 않고 자신이 쓴 것처럼 사용한 원판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2005년 7월 25일 선운사 1차 답사 때 촬영한 원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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