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은 명창의 마을이다. 일찍 우리 판소리사에 한 획을 그은 가왕(歌王) 송흥록 선생이 이 마을 출신이며, 여류 국창이라는 박초월 선생이 바로 이웃집에서 태어나셨다. 이 마을에는 현재 명창의 생가라는 두 채의 집이 10여 m도 안 되는 거리에 남아 있다.

운봉을 찾아 간 것은 바로 이 명창들의 삶을 보기 위해서이다. 도대체 이곳에서 어떻게 일세를 풍미하는 명창들이 태어난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노력을 하였기에, 우리 판소리사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인물들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일까?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을 찾아가 본다.



이웃하고 있는 두 분의 명창 생가

지금은 밖으로 초가대문을 내어놓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나온다. 소리를 하는 동상이 서 잇다. 한 사람의 소리꾼과 한 사람의 고수의 형태이다. 이 뒤편으로 가왕 송흥록의 생가가 있다. 송흥록의 집은 정면 세 칸에 측면은 한 칸 반의 초가집이다. 한 칸은 부엌이고 가운데 한 칸은 사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그리고 맨 끝에 있는 방이 바로 안방이 된다. 박초월의 집은 그 앞에 좌측에 자리하고 있으며, 송흥록의 집과는 역으로 꾸며졌다.

부엌은 방보다 앞으로 돌출이 되어있고, 뒤편에도 문을 내었다. 가운에 방은 앞으로 툇마루를 놓고, 끝 방은 한편에 아궁이를 들였다. 경국 방의 넓이는 정면과 측면 모두 한 칸인 셈이다. 이 비좁은 집에서 가왕 송흥록이 태어난 것이다. 송흥록은 조선조 정조 초기인 1780년경에, 명창 권삼득의 고수인 송첨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왕 송흥록의 생가. 세칸으로 된 초가에서 태어났다.

귀곡성의 대가 가왕 송흥록

12세에 백운산 월광선사에게 공부를 했다는 송흥록명창. 중고제의 시조인 김성옥과는 처남 매부 사이이다. 김성옥이 여산 동굴로 들어가 동굴독공을 하다가 만들어진 진양조를, 송흥록에게 전해주고 찬 굴에서 얻은 관절염의 일종인 학슬풍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송흥록은 그 소리를 판소리에 접목을 시켜 소리를 윤택하게 만들었다. 조선말기 우리 판소리에 소리의 극치라는 계면조와 진양조가 송흥록에게서 완성이 된 것이다.

박초월은 이곳에서 태어나 12세 때에 김정문에게 흥부가를 익히고, 송만갑에게서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를 익혔다. 김정문은 남원 출신의 명창이며, 일제 강점기에 전국을 다니면서 소리로 청중을 울리고 웃긴 명창이다. 송만갑은 송흥록, 그의 동생 송광록과 광록의 아들 우룡, 우룡의 아들인 송만갑으로 이어지는 소리꾼의 집안이다.



명창 박초월의 생가. 송흥록명창 생가 앞에 있다.

결국 박초월은 송흥록과 같은 소리의 맥을 이어왔다고 볼 수 있다. 박초월은 (사) 한국국악협회 초대이사장을 역임했으며, 한국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였다. 1967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수궁가의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시대를 거슬려 두 명의 명창이 태어난 이곳. 사람들은 그 내력을 잘 모르고, 이런 집에서 어떻게 살았을까를 걱정을 한다.

사는 집이 중요한 것일까? 그 좁은 초가 삼 칸 집에서 일세를 풍미하는 두 명의 명창들이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우리 판소리사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운봉을 떠나면서 뒤로 들리는 소리가 발길을 붙들고 있다. 언제 또 이곳을 찾을 수 있으려나. 이동백 명창이 세상을 떠날 즈음에 한 야산에 올라 북을 치면서 했다는 말이 생각이 난다.



‘이제 소리를 알만하니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다‘ 라는 말이. 그렇게 전국을 20년이 넘는 세월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문화제를 알만하니 기운이 달린다는 마음이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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