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이곳의 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 가운데 정자가 보인다. 이 정자를 몇 년 전인가 한번 들렸던 적이 있다. 그 때는 일각문은 다 무너지고 정자도 낡고 퇴락해, 바라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번 5월 3일 진안군을 답사하면서 다시 찾은 쌍벽루. 무너져 내렸던 일각문은 사라지고, 오르는 길과 정자가 말끔하게 정비가 되어 있다.

도로에서 바라다 보이는 쌍벽루는 말 그대로 바위가 벽인 듯하다. 정자는 바위 위에 올라 앉았으며, 뒤편으로도 바위 절벽이 있다. 밭을 지나 정자로 오르는 길에는 바위가 움푹 파여 있다. 그곳에는 ‘강정대(江亭臺)’라는 글씨를 음각으로 깊이 파 놓았다. 아마도 이 정자가 있는 곳이 강정리이기 때문에 붙인 명칭으로 보인다.



정자 위에 올라보니 쌍벽루가 맞네

정자는 그런대로 풍취가 있다. 우진각지붕으로 지어진 정자는 기둥을 받치기 위한 보조기둥인 활주를 세웠다. 정자의 누마루 밑을 받치는 기둥은 둥글게 조성한 주추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렸다. 사방에는 난간을 둘렀으며, 뒤편으로 정자를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에 오르면 앞으로 펼쳐진 들판이 시원하게 보인다.

쌍벽루는 아래편으로 바위벽을 두고, 뒤편으로도 바위벽을 두고 있다. 뒤편에 있는 이 바위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어, 조금은 괴기한 기분까지 들게 만든다. 아마도 오랜 풍화작용으로 인해 이렇게 색다른 모습으로 보이는가 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정자가 문화재가 아니기 때문인가, 그 어디에도 정자의 내력을 알 수 있는 글 하나가 적혀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정자는 1942년 참봉 전영선이 지었다고 전한다. 예전에 이 정자에 올랐을 때는 주변을 벽돌 담장으로 쌓고, 오르는 길목에 일각문을 두었던 기억이 난다.

두 마리의 용이 나그네를 반기고

정자에 오르니 두 마리의 용이 나그네를 반긴다. 청룡과 황룡의 반김이 유일하게 이 정자에서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정자마다 걸려있는 그 흔한 게판 한 개가 걸리지 않았다. 그런 현판이라도 있었으면, 정자의 내용이라도 알아볼 수가 있었을 텐데.



이제 정자를 지은지가 70년이 지난 쌍벽루. 새롭게 조성을 마친 정자에 올라 하늘을 올려다본다. 맑은 5월의 하늘에는 몇 점 구름이 떠 있다. 쌍벽루 위에 올라 바라다 본 들판에는, 봄철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의 바쁜 모습이 눈에 띤다. 저렇게 바쁜 삶의 모습에서 잠시 쉴 참에 이 정자에 올라 쉬어감직도 하련만. 무심한 한 낮의 바람 한 점만 누마루를 지나 쉬어간다.



섬진강이 아래로 굽이쳐 흐르고 있고, 강 건너편에는 전라북도인 남원시 대강면 방산리가 된다. 뛰어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함허정은, 전남 곡성군 입면 제월리 1016번지에 소재한다.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2월 26일에 들려 본 함허정은 여기저기 보수를 한 흔적이 보인다.

정자 위에 오르니 시원한 섬진강의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2월 말이라고는 하지만, 오랜만에 날이 푸근했다. 바삐 몰아 친 답사 길이 땀이 배어나게 만들었다. 이미 시간이 꽤 되어서 오늘의 마지막 답사장소로 택한 곳이다. 함허정은 조선조 중종 38년인 1543년에 심광형이 지었다고 하니, 벌써 500년 가까이 섬진강 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다.

전남 곡성군 입면 제월리 섬진강 가에 자리하고 있는 함허정. 전남 유형문화재 제160호로 지은지가 500년 가까이 되었다.

섬진강을 가슴으로 느끼다

심광형은 조선 중기에 광양과 곡성 등 여러 곳에서 훈도를 지낸 바 있는 당대의 문사로 이름을 떨쳤다. 이곳에 함허정을 지은 것은, 지역의 유림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서란다. 그래서인가 이 정자를 일명 ‘호연정’이라고도 불렀다는데, 아마도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뜻하는 것인가 보다.

함허정은 심광형의 증손자인 심민각이, 오래된 정자를 옛 터 아래쪽으로 옮겨 다시 지었다. 그리고 5대손인 심세익이 고쳤으며, 현재의 함허정은 1980년에 수리를 했다고 한다. 이번 답사에서도 함허정은 여기저기 손을 본 흔적이 있다. 팔작지붕인 함허정은 정면 네 칸에 측면 두 칸이다. 마루 한 칸을 3면을 트고 두 칸 반에 방을 드렸다. 현재 함허정을 오르는 계단 위에 놓인 일각문 앞으로는, 한단을 높인 높임 쪽마루를 놓았다.




멀리 무등산이 그림처럼 펼쳐 보인다. 그리고 정자 주변에는 고목이 된 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이곳에서 시원한 섬진강의 바람을 맞으며, 논객들과 세상을 논하고 시를 읊었을 것이다. 섬진강 흐르는 물에 마음껏 여유도 부려보았을 정자 함허정. 그곳에 서면 섬진강을 느낄 수가 있다.

수많은 편액들이 심광형의 됨됨이를 알게 해

안으로 들어가 정자를 한 바퀴 돌아본다. 한 단의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의 기둥은 원형기둥으로 세웠는데, 바르게 다듬지를 않았다. 약간 굽은 것도 그대로 기둥을 세워 인위적이지가 않다. 거기다가 섬진강 쪽으로 세운 기둥들은 안쪽의 기둥들보다 더 많이 갈라져 있다. 아마도 비바람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신을 벗고 새로 보수를 한 마루 위에 오른다. 누마루 바닥의 찬 기운이 발바닥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여기저기 사진을 찍다가 위를 올려다보니, 수많은 편액들이 걸려 있다. 이 많은 편액들이, 함허정을 세운 주인의 심성을 일러준다.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했다는 것을 뜻한다.

함허정의 슬픈 모습이 보여

함허정 앞으로 보이는 섬진강은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다. 아름다운 섬진강의 강바닥을 고르고 한편으로는 돌로 축대를 쌓는 공사다. 이곳도 강을 정리하고 있는 것일까? 함허정을 돌아내려오다가 밭일을 하고 있는 분에게 물어보았다.



“저 공사는 무슨 공사예요?”
“모르겠어요. 저렇게 강을 골라 한편에 자전거 길을 만든다고 하네요.”
“섬진강 긴 곳 중에 하필이면 이곳에만 그런 공사를 하나 봐요?”
“작년에 이곳에 물난리가 났는데, 그것 때문인가 보네요.”
“물난리가 나다니요. 장마 때 그랬나요?”
“아뇨. 날짜도 안 잊어버리네요. 작년 8월 16일에 이곳에 물이 범람했어요. 차도까지 물이 넘쳐서 통행이 제한되었으니까요”
“홍수가 매년 그렇게 나요?”
“아닙니다. 작년에만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물이 넘쳤는데, 그러고 나서 공사를 시작했어요. 저렇게 강폭을 좁혀놓으면 더 큰 물난리가 날텐데, 동네에서는 아무도 말 한마디를 안하고 있어요”

저렇게 강바닥을 고르고 축대를 쌓아버리면, 함허정은 무엇을 보게 될까? 물론 자전거 길을 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곳에서 여가를 즐길 수가 있다면 그도 새로운 풍속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굽이치며 흐르던 섬진강을 저렇게 만들어 놓으면, 함허정에서 바라보며 시심을 일깨우던 지난 시간은 모두 사라져 버리지나 않을는지.


아마도 함허정에 올라 섬진강을 노래하던 수많은 시인묵객들은, 저런 모습을 반기지는 않을 것만 같다. 그보다 500년 섬진강을 노래하던 그 소리가, 이제 저 돌로 쌓은 인위적인 축대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함허정의 강노래도 끝났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의 선인들은 무엇인가를 남기고 가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나보다. 물론 민초들이야 먹고살기도 바빴으니,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민초들의 삶이라는 것이, 그저 양반네들에게 매일 뜯기고 찢기다가 일생을 마쳤을 테니까. 그러나 양반네들은 자신이 살아생전에 어떤 삶을 영위했는가에 대해, 그 흔적을 곧잘 남겼다는 생각이다.

그런 자신의 생애를 가장 잘 표현한 것들 중에는, 많은 정자가 있다. 정자란 쉽게 무너지지도 않거니와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곳이다가 보니, 자연 정자에 자신의 살아 온 흔적을 남기기를 즐겼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의 정자는 영남지방에 상당히 많은 편이다. 아무래도 조선조 전 시대를 영남지방의 반가들이 득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육신의 한분인 어계 조려선생을 기억하다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는 생육신의 한분인, 어계 조려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조려 선생은 단종이 숙부에 의해 사약을 받고 영월 땅에서 죽임을 당하자, 영월까지 가 그 시신을 수습하고 낙향을 하였다. 그 위폐를 동학사에 모셔놓고 백이산 아래에 은거를 하였다고 전한다.

원북리 앞을 지나는 지방도 옆에는, 정자가 한 채 서 있다. ‘채미정(菜薇亭)’ 말 그대로이다. 백이산 아래에 은거한 조려선생은 풀과 고사리로 연명을 하면서 살았다고 전한다. ‘채미'란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 무왕을 섬기는 것을 수치로 알고, 수양산으로 숨어들어 풀과 고사리만 먹다가 아사를 한데서 유래한다.



조려선생은 백이, 숙제와 같은 뜻을 품고 이곳에서 은거를 하면서, 좋은 의복과 좋은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가 바로 채미정이다. 채미정은 정자로서의 아름다움보다, 그 안에 숨은 뜻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무너져 내렸던 채미정

한 10여년이나 되었을까? 이곳으로 답사를 나갔다가 우연히 채미정을 들렸다. 인근에 있는 방어산 마애불을 답사하러 갔다가 들린 곳이다. 당시에는 잡풀이 우거지고, 정자는 쇠락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번에 지나는 길에 들린 채미정은, 말끔히 손질이 되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정자 앞에 수백 년 묵은 은행나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 쓸어져가는 대문은 없애버리고, 대신 한편에 일각문을 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10여대나 차가 설만한 주차공간도 만들었다. 정자도 말끔히 정리를 하고, 주변도 정리를 하였다. 채미정은 1735년에 처음으로 지었으니, 300년 가까이 되었다. 근처에는 생육신을 향사한 사액서원인 서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 뜻이 더 아름다운 채미정

일각문을 들어서면 앞으로는 연못이 있다. 정자에 걸린 현판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순흥 안용호 선생이 지은 채미정 중건기문이다. 그 기문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함안읍성 서쪽 삼십리 지경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은 산이 백이산인데, 그 산 서편에 있는 동리가 원목이다. 동천복지답게 명려하고 맑은 물이 흐르고 기름진 옥야는 가히 밭 갈고 은거할만한 곳으로...(중략) 선생은 단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래학관에 계시다가 을해년 왕위찬탈의 화를 만나 재생들과 하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충의와 절개를 지켰던 생육신의 한분이시다.(하략)

이러한 선생의 충절을 되새기고 잊지 않기 위해 건립한 것이 바로 채미정이다. 역사 속에 남아있는 정자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채미정이 지니고 있는 조려선생의 충절이 아름다운 것이다.


채미정은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이다. 중앙에는 방을 드렸는데 판벽으로 처리를 하였다. 창호 위에는 작은 밀창을 사방으로 두었다. 정면으로는 원형의 기둥을 두고, 측면으로는 사각기둥을 배열하였다. 누마루를 방의 주변에 깔아, 사방으로 편안하게 밖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아마도 이곳에서 있기가 답답하면, 위편에 있는 청풍대에 올라 바람을 쏘였을 것이다.

청풍대(淸風臺)와 문풍루(聞風樓)에는 소식조차 돈절한데

채미정 우측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있다. 그 위를 청풍대라고 이름지었다. 그리고 뒤편에는 작은 정자 하나가 더 있다. 문풍루. 바람의 소리를 듣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그 바람결에 영월 땅에서 오는 좋은 소식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을까? 충절을 지키느라 풀과 고사리로 연명을 한 조려선생이, 날마다 이곳에 올라 애타게 바람결에 오는 소식을 기다렸을 것이다.



채미정, 이름보다 뜻이 더 아름다운 정자.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지만, 조려선생은 이 채미정으로 인해 천만세에 그 이름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청풍대에 올라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무심히 고개 한번 돌리지 않는 사람들. 그렇게 채미의 큰 뜻은 퇴색되어 가는 것인지.


전라북도에는 두 개의 ‘제일’이 있다. 그 중 하나는 ‘호남제일루’란 명성을 자랑하는 남원의 ‘광한루’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제일이 있다. 바로 정읍시 태인에 자리한 ‘피향정’이다. 피향정은 ‘호남제일정’이란 별칭으로 불린다. 주변의 경관을 느끼면서 피서를 하고자 지은 피향정은, 호남지방에서는 으뜸가는 정자로 꼽힌다.

몇 년 전인가 이곳을 지나다가 피향정을 들렸다. 그 때는 봄이었는데, 겨울의 경치는 어떠할까? 그것이 궁금하여 정읍시 태안에 있는 피향정을 찾아갔다. 피향정은 보물 제289호이다. 예전에는 피향정의 앞뒤로 상하연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아름답던 경관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정읍시 태인면에 소재하는 보물 제289호인 피향정

통일신라시대에 기인하는 피향정

피향정이 언제 지어졌는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통일신라 헌안왕(재위 857∼861) 때, 최치원이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지만 지은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태산군수로 있던 최치원이 이곳의 연지가를 소일하며 풍월을 읊었다는 것이다. 기록에 전하는 것을 버면, 피향정은 조선 광해군 때 현감 이지굉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현종 때 현감 박숭고가 건물을 넓혔으며, 현재의 피향정의 모습은 조선조 숙종 42년인 1716년에 현감 유근이 넓혔다고 한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부분적으로 보수를 하였으며, 정면 5칸에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다. 이 피향정은 주심포계 건물로 지어졌으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는 새 부리가 삐져나온 것과 같이 꾸몄다.



피향정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집이다.(위) 현판에는 '호남제일정'이라 적혀있다(가운데) 난간은 화려하지 않게 꾸며졌다. 

피향정은 사면이 모두 뚫려 있어 사방을 바라볼 수 있고, 난간은 짧은 기둥을 조각하여 주변을 촘촘히 두르고 있다. 건물 안쪽의 천장은 지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지만, 천장 일부를 가리기 위해 건물 좌우 사이를 우물천장으로 꾸민 점이 눈길을 끈다. 피향정의 동편으로는 ‘피향정(披香亭)’이라 쓴 편액이 걸려있고, 많은 시인묵객들의 글이 남아있다.

누마루 밑의 돌기둥, 정말로 말문이 막혀

아직 마당에는 눈이 쌓여있다. 몇 년 사이에 피향정은 말끔히 정리가 되어있다. 안으로도 흙 담을 두르고, 일각문을 내었다. 일각문을 지나 정자 가까이 다가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이 있다. 바로 누마루 밑에 세운 돌기둥들이다. 이 기둥 돌들은 아래가 약간 넓고 위가 좁은 방추형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일정하지가 않다.



피향정의 멋은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돌기둥들이다. 여러 개의 돌을 쌓아 만든 기둥도 있다(위) 정자를 오르는 계단은 장대석을 여려 겹 포개놓아 만들었다(가운데) 정자 안에는 많은 시인묵객들의 글이 걸려있다(아래) 

몇 개의 기둥은 여러 개의 돌을 포개 기둥을 삼았다. 밑으로 줄지어 선 돌기둥들은 위에 잇는 기둥과 일직선이 되게 조성을 하였다. 이렇게 돌기둥을 사용해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형태는, 피향정이 아니면 보기가 힘들다. 정자 위로 오르는 계단은 장대석을 한 층부터 여러 층을 포개 놓으면서 자연적인 층계가 되게 하였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

피향정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자 중 하나이다.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이 정자는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남원 광한루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는 피향정. 누군가 ‘호남제일정’이란 명칭을 붙였을까? 그런 안목이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겨울철이라 조금은 황량하게 보이겠지만, 정자를 한 바퀴 돌아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명성이 헛되이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호남제일정이라는 것에 절로 수긍이 간다. 이 겨울이 지나면 또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을 반길 것인지. 정자를 뒤로하면서 몇 번이고 그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애를 태운다.


옛 선인들은 정자에 자신의 아호나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했는가 보다. 정자를 답사하다가 보면, 자신의 아호를 따서 ‘○○정’ 등의 이름을 붙인 곳이 상당하다. 경남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에 소재한, 경남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무진정’도 그러한 정자 중 한 곳이다.

무진은 원래 조삼 선생의 호이다. 무진정은 조삼선생이 후진양성과 남은여생을 보내시기 위하여, 함안면 괴산리 지금의 자리에 직접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를 자신의 호를 따라 ‘무진정(無盡亭)’이라 이름을 하였다. 무진정은 뒤로는 노송들이 자리를 하고 있고, 앞으로는 대밭이 자리하고 있어 한 겨울에도 푸른색을 잃지 않는 정자이기도 하다.


계절이 따로 없는 정자

무진 조삼선생은 조선조 성종 4년인 1473년에 태어나, 성종 20년인 1489년 진사시에 합격을 하였다. 그 후 중종 2년인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 창원, 대구, 성주, 상주 등 경상도 일대에서 부사와 목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 등을 지냈다.

이러한 조삼선생이 노후에 후학들을 가르치고, 찾아오는 동료들과 강론을 하고자 지은 정자무진정. 무진정을 찾아갔을 때는 앞으로 조성한 연못의 바닥을 고르기 위해, 몇 대의 중장비들이 연못 안에 들어가 굉음을 내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연못 가운데는 적은 섬을 만들어 ‘영송루’라는 정자를 세우고, 그곳으로 교각을 세워 무진정으로 오를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연못에 걸린 다리를 지나, 잠시 ‘영송루(迎送樓)’를 돌아본다. 말 그대로라면 이곳에서 사람을 맞이하고 보냈다는 뜻이다. 또한 달밤에 휘영청 떠오르는 달을 맞이하고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한 영송루를 지나 커다란 고목을 끼고, 돌아 오르는 다리를 마저 건넌다.

‘정말 절경이다’ 감탄이 절로 나와

무진정을 오르는 계단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버티고 있다. 예전에야 상당한 운치가 있었을 것이다. 오르는 계단 주위로는, 푸른 대가 아직은 찬바람을 맞아 잎이 부딪쳐 바스락거린다. 작은 일각문 하나가 손을 맞이한다. ‘동정문(動靜門)’이라 편액이 걸려있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는 문이란다.




마치 선 문답을 하듯 한참이나 속으로 그 뜻을 되뇌어 본다. 무슨 뜻으로 이런 일각문을 달아놓았을까?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무진정은 건물로 팔작지붕이다. 앞에서 보니 정자 가운데에 방을 드렸는데, 온돌방이 아닌 마루방이다. 주변에는 모두 누마루를 깔고, 정면을 뺀 삼면에는 창호를 달아냈다.

무진정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 창호들이다. 삼면의 창호를 모두 열어 위로 올려 달아놓게 되어있다. 어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고 비라도 뿌리는 날이면, 문을 모두 닫아 앞으로 보이는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날이 좋으면 모든 창호를 위로 열어. 바람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선생의 심성을 그대로 닮은 정자

정자의 기둥 위에도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다. 축대를 쌓은 돌도 장대석이 아닌 자연적인 돌을 이용하였다. 일반적인 정자들이 보이는 양반가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을 갖추고 있다. 신발을 벗고 누마루로 올라본다. 조금은 찬바람이 볼을 간질인다.

그러고 보니 정자 가운데 있는 방의 문도 좌우 문을 위로 달아 놓게 되어있다. 참으로 대단한 운치를 지닌 정자라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생전 선생의 마음이 모든 사람들을 편하게 하지를 않았을까? 그저 모든 일에 답답함이 없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돌아오는 길에 화두 하나를 들고 온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과연 무엇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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