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이 아래로 굽이쳐 흐르고 있고, 강 건너편에는 전라북도인 남원시 대강면 방산리가 된다. 뛰어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함허정은, 전남 곡성군 입면 제월리 1016번지에 소재한다.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2월 26일에 들려 본 함허정은 여기저기 보수를 한 흔적이 보인다.

정자 위에 오르니 시원한 섬진강의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2월 말이라고는 하지만, 오랜만에 날이 푸근했다. 바삐 몰아 친 답사 길이 땀이 배어나게 만들었다. 이미 시간이 꽤 되어서 오늘의 마지막 답사장소로 택한 곳이다. 함허정은 조선조 중종 38년인 1543년에 심광형이 지었다고 하니, 벌써 500년 가까이 섬진강 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다.

전남 곡성군 입면 제월리 섬진강 가에 자리하고 있는 함허정. 전남 유형문화재 제160호로 지은지가 500년 가까이 되었다.

섬진강을 가슴으로 느끼다

심광형은 조선 중기에 광양과 곡성 등 여러 곳에서 훈도를 지낸 바 있는 당대의 문사로 이름을 떨쳤다. 이곳에 함허정을 지은 것은, 지역의 유림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서란다. 그래서인가 이 정자를 일명 ‘호연정’이라고도 불렀다는데, 아마도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뜻하는 것인가 보다.

함허정은 심광형의 증손자인 심민각이, 오래된 정자를 옛 터 아래쪽으로 옮겨 다시 지었다. 그리고 5대손인 심세익이 고쳤으며, 현재의 함허정은 1980년에 수리를 했다고 한다. 이번 답사에서도 함허정은 여기저기 손을 본 흔적이 있다. 팔작지붕인 함허정은 정면 네 칸에 측면 두 칸이다. 마루 한 칸을 3면을 트고 두 칸 반에 방을 드렸다. 현재 함허정을 오르는 계단 위에 놓인 일각문 앞으로는, 한단을 높인 높임 쪽마루를 놓았다.




멀리 무등산이 그림처럼 펼쳐 보인다. 그리고 정자 주변에는 고목이 된 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이곳에서 시원한 섬진강의 바람을 맞으며, 논객들과 세상을 논하고 시를 읊었을 것이다. 섬진강 흐르는 물에 마음껏 여유도 부려보았을 정자 함허정. 그곳에 서면 섬진강을 느낄 수가 있다.

수많은 편액들이 심광형의 됨됨이를 알게 해

안으로 들어가 정자를 한 바퀴 돌아본다. 한 단의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의 기둥은 원형기둥으로 세웠는데, 바르게 다듬지를 않았다. 약간 굽은 것도 그대로 기둥을 세워 인위적이지가 않다. 거기다가 섬진강 쪽으로 세운 기둥들은 안쪽의 기둥들보다 더 많이 갈라져 있다. 아마도 비바람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신을 벗고 새로 보수를 한 마루 위에 오른다. 누마루 바닥의 찬 기운이 발바닥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여기저기 사진을 찍다가 위를 올려다보니, 수많은 편액들이 걸려 있다. 이 많은 편액들이, 함허정을 세운 주인의 심성을 일러준다.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했다는 것을 뜻한다.

함허정의 슬픈 모습이 보여

함허정 앞으로 보이는 섬진강은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다. 아름다운 섬진강의 강바닥을 고르고 한편으로는 돌로 축대를 쌓는 공사다. 이곳도 강을 정리하고 있는 것일까? 함허정을 돌아내려오다가 밭일을 하고 있는 분에게 물어보았다.



“저 공사는 무슨 공사예요?”
“모르겠어요. 저렇게 강을 골라 한편에 자전거 길을 만든다고 하네요.”
“섬진강 긴 곳 중에 하필이면 이곳에만 그런 공사를 하나 봐요?”
“작년에 이곳에 물난리가 났는데, 그것 때문인가 보네요.”
“물난리가 나다니요. 장마 때 그랬나요?”
“아뇨. 날짜도 안 잊어버리네요. 작년 8월 16일에 이곳에 물이 범람했어요. 차도까지 물이 넘쳐서 통행이 제한되었으니까요”
“홍수가 매년 그렇게 나요?”
“아닙니다. 작년에만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물이 넘쳤는데, 그러고 나서 공사를 시작했어요. 저렇게 강폭을 좁혀놓으면 더 큰 물난리가 날텐데, 동네에서는 아무도 말 한마디를 안하고 있어요”

저렇게 강바닥을 고르고 축대를 쌓아버리면, 함허정은 무엇을 보게 될까? 물론 자전거 길을 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곳에서 여가를 즐길 수가 있다면 그도 새로운 풍속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굽이치며 흐르던 섬진강을 저렇게 만들어 놓으면, 함허정에서 바라보며 시심을 일깨우던 지난 시간은 모두 사라져 버리지나 않을는지.


아마도 함허정에 올라 섬진강을 노래하던 수많은 시인묵객들은, 저런 모습을 반기지는 않을 것만 같다. 그보다 500년 섬진강을 노래하던 그 소리가, 이제 저 돌로 쌓은 인위적인 축대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함허정의 강노래도 끝났다는 생각이 든다.


전라북도에는 두 개의 ‘제일’이 있다. 그 중 하나는 ‘호남제일루’란 명성을 자랑하는 남원의 ‘광한루’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제일이 있다. 바로 정읍시 태인에 자리한 ‘피향정’이다. 피향정은 ‘호남제일정’이란 별칭으로 불린다. 주변의 경관을 느끼면서 피서를 하고자 지은 피향정은, 호남지방에서는 으뜸가는 정자로 꼽힌다.

몇 년 전인가 이곳을 지나다가 피향정을 들렸다. 그 때는 봄이었는데, 겨울의 경치는 어떠할까? 그것이 궁금하여 정읍시 태안에 있는 피향정을 찾아갔다. 피향정은 보물 제289호이다. 예전에는 피향정의 앞뒤로 상하연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아름답던 경관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정읍시 태인면에 소재하는 보물 제289호인 피향정

통일신라시대에 기인하는 피향정

피향정이 언제 지어졌는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통일신라 헌안왕(재위 857∼861) 때, 최치원이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지만 지은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태산군수로 있던 최치원이 이곳의 연지가를 소일하며 풍월을 읊었다는 것이다. 기록에 전하는 것을 버면, 피향정은 조선 광해군 때 현감 이지굉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현종 때 현감 박숭고가 건물을 넓혔으며, 현재의 피향정의 모습은 조선조 숙종 42년인 1716년에 현감 유근이 넓혔다고 한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부분적으로 보수를 하였으며, 정면 5칸에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다. 이 피향정은 주심포계 건물로 지어졌으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는 새 부리가 삐져나온 것과 같이 꾸몄다.



피향정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집이다.(위) 현판에는 '호남제일정'이라 적혀있다(가운데) 난간은 화려하지 않게 꾸며졌다. 

피향정은 사면이 모두 뚫려 있어 사방을 바라볼 수 있고, 난간은 짧은 기둥을 조각하여 주변을 촘촘히 두르고 있다. 건물 안쪽의 천장은 지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지만, 천장 일부를 가리기 위해 건물 좌우 사이를 우물천장으로 꾸민 점이 눈길을 끈다. 피향정의 동편으로는 ‘피향정(披香亭)’이라 쓴 편액이 걸려있고, 많은 시인묵객들의 글이 남아있다.

누마루 밑의 돌기둥, 정말로 말문이 막혀

아직 마당에는 눈이 쌓여있다. 몇 년 사이에 피향정은 말끔히 정리가 되어있다. 안으로도 흙 담을 두르고, 일각문을 내었다. 일각문을 지나 정자 가까이 다가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이 있다. 바로 누마루 밑에 세운 돌기둥들이다. 이 기둥 돌들은 아래가 약간 넓고 위가 좁은 방추형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일정하지가 않다.



피향정의 멋은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돌기둥들이다. 여러 개의 돌을 쌓아 만든 기둥도 있다(위) 정자를 오르는 계단은 장대석을 여려 겹 포개놓아 만들었다(가운데) 정자 안에는 많은 시인묵객들의 글이 걸려있다(아래) 

몇 개의 기둥은 여러 개의 돌을 포개 기둥을 삼았다. 밑으로 줄지어 선 돌기둥들은 위에 잇는 기둥과 일직선이 되게 조성을 하였다. 이렇게 돌기둥을 사용해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형태는, 피향정이 아니면 보기가 힘들다. 정자 위로 오르는 계단은 장대석을 한 층부터 여러 층을 포개 놓으면서 자연적인 층계가 되게 하였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

피향정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자 중 하나이다.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이 정자는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남원 광한루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는 피향정. 누군가 ‘호남제일정’이란 명칭을 붙였을까? 그런 안목이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겨울철이라 조금은 황량하게 보이겠지만, 정자를 한 바퀴 돌아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명성이 헛되이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호남제일정이라는 것에 절로 수긍이 간다. 이 겨울이 지나면 또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을 반길 것인지. 정자를 뒤로하면서 몇 번이고 그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애를 태운다.


자락정(自樂亭), 스스로 즐거움을 느끼는 정자라는 뜻인가? 자락정 앞을 흐르는 노평천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로 감흥이 일어날 것만 같다. 장수군 장계면 삼봉리 앞 도로를 지나는데, 자락정의 안내판이 보인다. 정자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논개의 생가지를 찾아가는 갈이고, 날은 이미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지만 길을 돌렸다.

이정표가 가르치는 곳으로 들어갔으나, 정자가 보이지를 않는다. 한참이나 지나 올라간 듯하여 돌아내려오는 길에 저만큼 정자가 하나 보인다. 옆에는 큰 나무 두어 그루가 서 있는 것이 영락없는 옛 정자의 운치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9호인 자락정은 그렇게 노평천의 기암 위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전북 문화재자료 제129호인 장수 장계의 자락정

530년 세월을 지낸 고정(古亭)

자락정이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조선 성종 10년인 1479년이었으니, 벌써 530년이나 지났다. 당시 박수기(1429~1510)가 처 조부인 김영호가 살던 장수로 내려와, 지은 것으로 전한다. 박수기는 충청도 유성사람으로 결혼을 계기로 장수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다.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심신을 수양하여 보냈다고 전한다.

처음에 세운 정자는 부서지고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고종 20년인 1883년 박수기의 후손들이 김영호의 후손들과 함께 힘을 합쳐 유허비를 세웠다. 현재의 정자는 옛 정자가 있던 터에, 1924년에 세운 것이다. 스스로 즐긴다는 뜻의 자락정은 노평천을 바라보며, 자연과 함께 벗 삼아 살아가고자 했던 박수기의 심성이 그대로 배어있는 정자이다.



자연을 그대로 닮았다는 자락정. 스스로 즐거움을 찾는다는 자락정은 노평천가에 자리한다. 통나무로 만든 계단과 자연 암석을 그대로 이용햔 주춧돌
 
겨울철에 만난 자락정은 또 다른 감흥이

뒤편으로는 커다란 나무가 자리를 하고 있다. 앞으로는 노평천이 흐르고, 정자의 주변에는 기암이 정자를 받치고 있다. 지금이야 주변으로 도로가 나고 조금은 정신이 사납기도 하지만, 처음 이곳에 정자를 지었을 때를 생각하면 나름 절경이었을 것이다. 이곳에 정자를 지은 박수기의 마음은 자연 그대로를 닮았을 것만 같다.

12월 29일 겨울, 정자 뒤편의 나무들은 앙상하니 가지만 남았다. 하지만 주변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쌓여 있어, 조금은 허전한 마음을 가시게 한다. 넓은 암석 위에 세운 자락정은 주춧돌이 없다. 투박한 나무 그대로를 이용하여, 정자 밑의 기둥을 삼아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정자로 오르는 세단의 나무계단은, 통나무를 찍어 홈을 파 만들었다. 모든 것이 자연 그대로이다.


정자 안에 걸린 편액들과 후손들이 세운 유허비

퇴색되어가는 자락정의 즐거움

통나무 계단을 밟고 자락정 위로 오른다. 초겨울의 시원한 바람이 사방이 트인 자락정 안으로 몰려든다. 여기저기 줄지어 붙은 편액들이 가득하다. 그저 자연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을까? 단청도 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나무가 오랜 세월 속에 거무티티한 자연색을 보이고 있다. 그것이 오히려 더 기쁨이었을까? 난간도 간단하다. 그저 멋이라고는 부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주인의 심성을 그대로 보이는 정자이다.

자리를 뜨려고 하니 마루바닥에 무엇인가 한 무더기가 쏟아져 있다. 부서진 난간이 그대로 방치가 되어있는 것이다. 주인을 잃은 자락정은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는 것일까? 이렇게 부수어진 모습으로 객을 맞이하다니. 갑자기 정자로 몰려오는 바람이 춥게만 느껴진다. 보수라도 좀 해놓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부수어진 채 방치되고 있는 난간

주인이 자연 속으로 돌아가니, 자락정도 자연으로 돌아가려나? 두 번 째의 아픔을 당하고 있는 자락정의 모습이 눈물겹다.


12월 11일 답사 첫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남원을 출발하여 인월을 거쳐 실상사가 있는 산내면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실상사로 가다가 보면 일성콘도 입구 못 미쳐, 냇가 옆에 정자가 서 있다. ‘퇴수정(退修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525에 소재한 퇴수정의 앞으로는 만수천의 맑은 물이 흐른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5호인 퇴수정은 조선 후기에 벼슬을 지낸 박치기가 1870년에 세운 정자이다. 박치기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서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벼슬에서 물러나 수양을 하기 위한 정자라는 뜻으로, ‘퇴수정’이라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정자는 단청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단아한 모습 그대로 앞으로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고 있다.


1870년 박치기가 심신 단련을 위헤 세웠다는 퇴수정.
 
사각형 주추를 놓은 정자

퇴수정은 만난 처음부터 마음에 든 정자이기도 하다. 정자를 찾아 내려가는 길에는 ‘개인소유의 땅이니 출입을 금지한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그러니 어찌하랴, 길을 돌아 냇가로 내려가는 수밖에. 앞으로는 암석을 타고 넘으며 맑은 물이 흐르고, 주변에는 몇 그루의 노송이 가지를 내리고 있다.

12월 초겨울에도 이렇게 운치가 있는 곳이라면, 한 여름 이곳을 찾았다면 아마 감탄이 절로 나왔을 것만 같다. 장대석 기단을 쌓고 한편으로 정자로 오르는 계단도, 장대석 돌로 놓은 것도 특이하다. 정자 가까이 가서보니 주춧돌이 모두 사각형이다. 이런 것 하나에도 많은 공을 들여서 지은 정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장대석 돌로 계단을 놓고, 네모난 주추를 사용했다.

돌계단을 밟고 정자에 오르니, 측면과 뒤편으로는 커다란 암벽이 둘러있고, 만수천을 흐르는 물은 소리가 맑기만 하다. 정자는 누마루를 깔고 중앙 뒤편으로 판자로 두른 방을 한 칸 마련하였다. 원래 문이 없었는지 사방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절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슴 가득 시원함을 느끼게 해준다. 정자 앞을 가로지른 노송의 가지는 금방이라도 냇물로 들어설 것만 같다.


정자 앞을 흐르는 만수천과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수많은 편액이 정자의 운치를 더해

정자에는 여기저기 벽면마다 수많은 편액이 걸려있다. 아마 어느 정자를 가보아도 이렇게 많은 편액이 걸린 곳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만큼 퇴수정은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아마 이 12월의 초겨울. 글이라도 좀 쓸 줄을 알았다면, 나라도 한 두 어자 적고 가지 않았을까?

정자 안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찬바람이 옷깃 안으로 파고들지만, 그 바람이 대수랴. 이렇게 아름다운 운치를 더하는 정자에 서서, 흐르는 물을 바라다본다. 저 맑은 물에 세상에 찌든 마음을 훌훌 털어내어 씻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청정한 마음을 갖고 돌아갈 것인가? 그렇게 할 수 없음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누마루를 깔고 뒤편에 판자방을 들였다. 수많은 편액들이 벽에 걸려있다.

갈 길이 멀어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 이럴 때는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저 이곳에 몇 시간이고 서서 흐르는 물에 마음을 적시고 싶다. ‘그래 오늘은 돌아가자. 하지만 내년 꽃피는 시절에는 반드시 이곳을 찾아오리라’ 마음을 먹는다. 가는 발길을 붙잡는 여울진 곳으로 흘러드는 물소리가, 유난히 높게만 들린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청아한 젓대의 소리같이.


앞으로는 남원 시내를 가로지르는 요천이 흐르고, 뒤로는 금암봉이 솟아 있다. ‘금수정(錦水亭)’은 그렇게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요천을 바라보면서 금암봉을 오르는 중턱에 자리한 정자 금수정. 말 그대로 물 맑고 산세가 수려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지붕이다.

남원 광한루원에서 요천을 가로지르는 승사교를 건너면, 금암봉을 오르는 나무 계단이 끝나는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금수정이 있다. 금수정은 1936년에 이현순, 조광엽, 서봉선 등이 주축이 되어, 시를 읊고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세월이야 그렇게 물 흐르듯 70여 년이 훌쩍 지나버렸지만, 새롭게 단청을 한 정자는 갓 조성을 한 것처럼 보인다.



남원 요천 가에 서 있는 금수정과 정자 안에 걸린 퍈액

비안정은 사라지고 금수정이 자리 잡아

금암봉이란 이름은 요천의 물가에 커다란 반석에 붙인 이름이다. 족히 백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인데, 주변 경관이 빼어나 많은 사람들이 천렵을 즐기는 곳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용성 팔경 중에는 ‘금암어화(金岩漁火)’라고 하여, 밤에 고기를 잡는 불빛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것을 알려주고 있다.

비안정은 요천가 금암봉 아래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현재의 금수정 인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금암봉의 부근에는 비안정, 혹은 비오정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이름이 정자 명칭에서 비롯한 것이란 생각이다. 옛 시구에는 이 비안정에 대한 글이 보인다.


금암봉을 오르는 나무계단과 정자 앞으로 흐르는 요천

사방 십리에는 저녁 안개 피어나고
소나무 대밭 속에 작은 정자 하나.
필마로 찾아오니 날은 이미 저물고
외로운 여정 속에 새벽에야 닿는구나.
오작교 가로질러 광한루에 당도하니
교룡산을 둘러싼 옛 산성이 보이네.
이곳에서 그대와 노년을 마칠까
늙어 요천가에 낚시나 드리우세.

광해군 1년에 공조참판을 지낸 현곡 조위한의 시이다. 조위한은 글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주생면 제천리에 도산정을 건립하였다. 이렇듯 요천가에 서 있었던 비안정은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기에 빠짐이 없었나 보다.



아름다운 조각과 단청

금수정은 민족정신이 깃든 정자

금수정이란 현판의 글씨는 1935년에 조정훈이 썼다. 조정훈은 남원 광한루의 ‘호남제일루’의 현판을 쓰기도 했다. 금수정을 지을 때는 일제의 우리문화 말살정책이 한창 펼쳐졌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리고 금암봉 정상에는 남원의 신사가 세워졌는데,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 이곳에 정자를 새웠다고도 전한다. 즉 이곳에 금수정을 짓고 신사참배를 하러 간다고 오르다가, 이곳에서 멈추었다는 것이다.

정자는 주심포계로 배흘림기둥을 놓았다. 연등 천정에 우물마루를 깔고, 난간을 밖으로 내어돌렸다. 당시의 정자치고는 상당히 화려하게 지은 건축물이다. 아마 신사보다 더 잘 짖겠다는 마음이 정자에 배어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정자에 올라 내려다보는 요천과 교룡산성, 그리고 광한루원은 예전과 다름이 없다.


금수정 현판과 벼랑 위에 선 금수정

가파른 절벽에 앞으로 기둥을 내어 정자를 내어지었다. 이 정자에 올라 시 한수 읊으며, 나라 잃은 슬픔을 가신 것은 아니었을까? 요천 물가에 한 다리를 들고 서있는 새 한 마리가, 무엇인가를 잡았나보다. 큰 날개를 퍼덕이며 멀리 날아간다. 그 새 등에 마음을 실어 따라갈 수만 있다면. 아마 그런 마음들이 금수정을 이곳에 지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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