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아름답고 편안한 정자다. 어느 정자라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상하게 이 정자만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강릉시 운정동 경포호 서쪽에 자리잡은 해운정. 보물 제18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흔치 않은 가치를 지닌 정자다. 해운정을 처음 찾았을 때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보물임에도 불구하고 널려진 쓰레기와 수북한 담배꽁초, 그리고 부수어진 건물잔해.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만난 해운정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난 해 9월 해운정을 세 번째로 찾았을 때, 해운정은 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해운정은 언제나 아름답다. 전국에 산재한 수 많은 정자들 중에 열개를 꼽으라고 한다면, 언제나 난 머리에 해운정을 둔다. 그만큼 아름다운 정자이기 때문이다. 해운정에는 언제나 바람이 분다. 그래서 난 이 정자에는 늘 바람이 쉬어간다고 생각을 한다.

 

중종 25년인 1530년에 지어졌으니 벌써 지은 지가 480년이 지났다. 아직도 그 때의 고고함을 그대로 간직한 정자.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한 어촌 심언광이 별당으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해운정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해운정은 오른쪽 두 칸은 마루로 만들었다. 문은 모두 네 짝을 들어올릴 수 있도록 하여 시원하게 개방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왼쪽은 온돌방으로 꾸미고 중간을 장지문으로 막아 구분을 해 놓았다. 여름과 겨울을 모두 이곳에서 지내겠다는 소박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

 

해운정은 대문을 두었다. 대문에는 방을 마련해 기거를 할 수 있도록 했는데, 아마 늘 이곳을 지키고 싶었는가 보다. 그만큼 지은이는 이 해운정에 마음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늘 발길이 머무는 곳, 해운정. 해운정 마루에는 율곡 이이 등의 글이 걸려 있고, 명의 사신 공용경이 쓴 <경호어촌>이란 글과, 부사 오희맹의 <해운소정> 등의 글이 있다. 그만큼 해운정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아름다움에 취했다는 이야기다.

 

해운정의 뒷편에는 가지를 처트린 소나무가 서 있다. 늘 보아도 그 자리에 있는 처진 소나무는 해운정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언제나 보아도 그 소나무 가지에는 바람 한 점이 걸려 있다. 모처럼 들른 해운정 앞에는 작은 연못이 생겨났다. 그리고 철 늦은 연 몇 송이 수줍은 듯 얼굴을 감추고 있다.

 

  

  

 

바람이 쉬어가는 정자 해운정. 그 정겨운 모습에 근처를 지날 때면 꼭 들르고는 한다. 그곳에서는 다리를 편히 놓고 바람과 이야기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기단을 높이 쌓고 처마를 높여 아름다움을 더했지만, 결코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저 숨 죽이고 다소곳 아름다움을 간직한 새색시 같다는 생각이다.

 

  
보물 제183호 강릉 해운정

 

보물 제183호 강릉 해운정. 앞으로 또 많은 시간이 지나도, 아마 바람은 해운정을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다. 그저 마루에 걸터앉아 한 여름을 쉬어도 좋고, 온돌방을 달구어 놓고 담소를 해도 좋다. 언제나 들러보아도 정겨운 곳. 해운정은 그래서 바람의 발길을 붙들고 있는가 보다. 

영월읍을 가로 질러 흐르는 동강. 그곳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어 영월 땅으로 유배를 간 후, 그것마저 부족해 수하들을 시켜 단종을 죽음으로 몬 수양의 슬픈 이야기가 전하는 정자가 있다. 단종이 죽고 난 뒤, 낙화암에서 동강 푸른 물로 몸을 날려 단종을 따른 시녀와 종인들의 슬픈 영혼을 위로하는 사당이 있다.

 

그 사당 앞에 자리 잡은 정자가 동강 푸른물을 굽어보고 있는 금강정이다. 금강정은 세종 10년인 1428년 김복항이 처음으로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금강정을 찾은 날은 벌써 꽤 오래되었다. 사람들은 그 주변에서 운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이 금강정의 슬픈 이야기는 모르고 있는 듯하다.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해가 세조 3년인 1457년이었으니, 시녀와 종인들이 이곳에 와 동강 푸른물에 몸을 날렸을 때는, 이미 금강정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아마 시녀와 종인들은 단종이 머물던 동헌을 떠나, 이곳으로 와 이 금강정에서 마음을 추스르지 않았을까? 동강을 굽어보고 있는 금강정은 대답이 없다.  

 

금강정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자삼이 영월 군수로 있을 때, 금강정이란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정면 네 칸의 팔작 정자

 

금강정은 이자삼이 영월 군수로 있을 때, 정자를 고쳐짓고 금강정이라 이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송시열이 숙종 10년인 1684년에 쓴 금강정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금강정은 처음으로 이 자리에 짓고 나서 벌써 600년 가까이 된 셈이다.

 

금강정은 30cm 정도의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둥근 기둥을 이용하여 정자를 지었다.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의 정자는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정자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머름형태의 평난간을 둘러놓았다. 화려하지 않은 금강정의 처마를 올려다보면 조금은 색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처마 밑 장식을 용이나 닭 등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금강정은 잉어를 조각한 듯하다. 아마 밑을 흐르는 동강 맑은 물을 상징이라도 하는 것인가 보다.

 

금강정은 30cm 정도의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둥근 기둥을 이용하여 정자를 지었다.

잉어를 조각해 놓은 듯하다.

 

아름다운 금강정, 세월은 슬픔도 잊어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금강정. 그동안 수차례 보수를 하였겠지만, 그 아름다운 모습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정자 뒤편에 있는 시녀와 종인들의 넋을 위하는 민충사와 함께 동강을 굽어보고 있어, 역사를 알고 나니 슬픔을 간직한 듯 보인다.

 

금강정 앞으로는 동강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조망대를 설치하였다.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니 멀리 흘러 남한강으로 이름을 바꿔 흐르는 동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모시던 임금이 사약을 받는 모습을 본 시녀와 종인들도 이렇게 동강 맑은 물을 내려다보았을까? 그 때 그들의 마음을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금강정에서 바라본 동강. 단종이 죽은 후 이곳에서 동강으로 뛰어 든 시녀와 종인들이 마음을 느껴보다.

 

 

금강정은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의 정자는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난간에는 여기저기 낙서를 해 놓은 것이 보인다. 젊은 사람들이 찾아와 서로의 사랑을 약속하면서 굳은 맹서라도 한 것일까? 역사의 슬픈 흔적은 그 낙서로 인해 다 지워지는 듯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을 다 잊는 사람들. 그래서 사람들은 세월이 약이라고 하는가 보다. 여기저기 쓰인 낙서를 보다가 쓴 웃음을 짓고 만다.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낙서.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보고도 화가 나지도 않는다. 그저 그러려니 할 뿐.

 

오늘도 금강정 앞으로 흐르는 동강은 그렇게 말이 없다. 600년 전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자에 올라 동강을 굽어보며 잠시 고개를 숙인다. 이 찬 물로 뛰어들었을 시녀와 종인들이 넋이라도 위로를 할 생각으로.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슬픔을 안은 역사는 그리 계속되는 것인지. 

 

조망대 난간에 쓰인 낙서

젊은이들이 사랑을 확인한 것일까?
 

 

「하늘이 열리고 우주가 재편될 아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명으로 빗물 한 가족이 대지로 내려와,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이 빗물 한 가족은 한반도 등마루인 이곳 삼수령(三水嶺)으로 내려오면서, 아빠는 낙동강으로, 엄마는 한강으로, 아들은 오십천강으로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한반도 그 어느 곳에 내려도 행복했으리라. 이곳에서 헤어져 바다에 가서나 만날 수밖에 없는 빗물가족의 기구한 운명을 이곳 삼수령만이 전해주고 있다.」 이곳에 떨어진 빗줄기는 그렇게 흘러 세 곳의 물길로 합류가 된다.

 

 

양대 강의 발원지 태백

 

강원도 태백의 해발 935m인 삼수령 마루에 적혀있는 글이다. 삼수령의 고개이름은 큰 피재로 알려져 있다. 이 길은 태백시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낙동강, 한강, 오십천의 3대강이 발원하고, 민족의 척추인 태백산을 상징하는 삼수령이기도 하다. 태백에서 분출되는 낙동강은 남으로 흘러 영남 곡창의 질펀한 풍요를 점지하고, 공업입국의 공도들을 자리하게 했다.

 

한강 역시 동북서로 물길을 만들면서 한만족의 수도를 일깨우고, 부국의 기틀인 경인지역을 일으켜 세웠다. 오십천도 동으로 흘러 동해안 시대를 창출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삼수령 고개에서 슈퍼를 운영하고 있는 남자 분은 이곳에 비가내리거나 눈이 내려 녹아 물이 흐르면, 남으로는 낙동강으로 스며들고, 동북으로는 한강으로 스며들며, 동으로는 오십천으로 흘러 동해로 빠진다고 이야기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강의 발원이란 끊임없이 물이 나오는 곳을 그 발원지로 삼기 때문에 삼수령에 떨어지는 비가 발원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 떨어지는 비가 3대 강과 천으로 스며들어 그 물과 합류를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삼수정에 오르다.

 

삼수령 분기점에는 탑이 서 있다. 해발과 이곳이 오십천과 한강, 낙동강의 시원지가 되는 곳이기 때문에 삼수령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이 삼수령은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길이다.

 

 

삼수령 탑이 서있는 곁에는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정자가 서 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정자는 누각으로 지어졌는데, 삼수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자에 오르니 밑으로는 깊은 골이 보이고, 저 멀리 백두대간의 봉우리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깊은 숨을 쉬어본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가 상쾌하다.

 

누구라 이곳에 올라 글 하나 적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 이 정자가 오래 전에 지어졌다고 한다면,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올라 글 몇 수 남겼을 만한 그러한 정취다. 나라도 글을 잘 쓴다면 짧은 글 한토막이라도 남기고 싶다. 하지만 그런 시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참으로 역부족한 인사이니 어찌하랴. 능력이 없음을 탓할 수밖에.

 

 

삼수령은 차로 오를 수 있는 길이다. 태백시내에서 이곳을 지나면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로 갈 수가 있고, 이곳을 넘어 태백으로 들어가면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를 만날 수가 있다. 삼수정 위에서 주변 경치를 돌아본다. 걸어서 이곳을 올랐다면 그대로 선계가 아닐까?

 

지금 이렇게 차로 오른 삼수령이 조금은 서운한 것은, 그런 옛 정취를 느낄 수 없어서인가 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나는 삼수령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오늘도 하늘에서 내려선 가족들은 또 이렇게 세 곳으로 헤어져 물길을 만들려나?

동해시 북평동사무소는 동해에서 삼척으로 내려가는 7번국도 우편에 있다. 이 북평동사무소 맞은편으로 길이 있는데, 이 안으로 들어가면 동해와 만나는 막다른 곳을 <갯목>이라고 한다. 갯목이란 갯벌이 시작되는 목(입구)이라는 뜻인지, 혹은 포구가 열리는 목이라는 뜻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곳 갯목을 향해 가다가 보면 좌측에 동해 한가운데 커다란 공룡처럼 웅크리고 있는 시멘트공장이 있다. 공장과 길 가운데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바다를 매립하여 세운 듯하다. 시멘트 공장 중간쯤에 우측으로 만경대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150m를 올라가라는 표시를 따라 나무로 흙을 받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그 등성이에 정자가 하나 보인다.

 

동해를 굽어보고 있는 정자, 그러나 지금은 절경이 사라져

 

만경대(萬景臺). 동해시청에 전화를 걸어 설명을 들었으나 찾기가 쉽지가 않다. 북평동사무소에 들어가 정자 있는 곳을 물으니, 점심시간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친절히 길을 알려준다. 설명대로 어렵지 않게 찾아온 만경대. 그 위에 오르니 동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러나 그 동해를 바라보기에는 지금은 쉽지가 않다. 커다란 공룡과 같은 시멘트공장이 시야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일 잘 아는 선조님들이 이곳이 이리 변할지는 모르셨나보다.

 

구미산 성산봉에 자리한 만경대는 조선조 광해군 5년인 1613년에 삼척에 사는 신당(新堂) 김공훈이 창건한 정자다. 동해에 있는 정자들이 100여년이 안된 것들이 대부분인데 비해 이 만경대는 40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만경대는 동은 망망대해요, 북으로는 송림에 백사장이 10리에 걸쳐있고, 서편으로는 두타산(頭陀山)의 절경이 펼쳐지며, 절벽 아래로는 전천강이 동해로 흐르니 가히 관동 제일경이라 하는 죽서루와 쌍벽을 이루어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하였다. 그동안 만경대는 고종 9년인 1872년과 1924년 갑자에 걸쳐 두 차례 중건을 하였다.

 

만경대 안에는 수많은 글들이 걸려있는데 그 중에 1872년 중수 때 한성부윤 이남식이 쓴 <海上名區>라는 현판은 가히 만경대가 얼마나 절경에 자리하고 있었는가를 알려준다. 절경에 자리 잡은 많은 정자들이 만경대라는 이름을 걸었으나 동해의 만경대 역시 그에 뒤지지 않는 절경이었으리라.

 

 

 

또 한곳의 절경 호해정

 

아쉬운 발걸음으로 만경대를 뒤로하고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집 몇 채 되지 않는 해안가 마을이 보인다. 갯목이라 부르는 이 동네는 시멘트공장의 끄트머리와 나란히 있다. 아마 저 시멘트공장만 아니었으면 이 또한 절경이리라. 호해정(湖海亭),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이한 최덕규 선생 등 39인이 계를 조직해 1947년 4월에 구미산 갯목 할매바위 옆에 18평의 호해정을 세웠다. 그동안 호해정은 1977년 5월과 1990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중수를 하였다.

 

갯목 끝자락에 자리한 호해정은 60년 동안 마을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할매바위와 나란히 서 있다. 할매바위는 동해를 바라보고 노송 몇 그루와 벗 삼아 있는데 그 풍광이 아름답다. 아마 저 시멘트공장과 1979년 동해항의 개항이 없었더라면 그 얼마나 운치를 더했을 것인가? 할매바위인 마고암(麻姑岩)에는 그 전설을 다해 최윤상이 쓴 글이 있다.

 

 

 

아래로는 바다를 진압하며

위로는 하늘을 머리에 이고

광활한 천지에 높이 우뚝 앉아 있어

편안한 자취가 마치 마고와 같으니

선녀가 천년 뒤에 홀연히 나타나

돌이 되었구나.

 

갯목으로 가는 길에 만난 만경대와 호해정. 두 곳의 정자는 그렇게 다른 모습을 하면서 나그네를 맞이하지만, 그 안에 걸린 수많은 게판들은 제각각 자신이 최고라고 뽐내고 있었다. 그 자랑을 벗 삼아 나그네의 여정은 계속되고...

자연을 그대로 이용해 집을 짓는다는 것은, 요즈음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건축방법이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 우리 선조들은 자연을 범하지 않고 건물을 지음으로써,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는 방법을 택했다.

 

언젠가 어느 지인한테서 이런 말을 들었다. “환경, 환경하고 말들만 하고 입으로만 떠들 줄 알았지 과연 그런 사람들 정말 환경을 얼마나 생각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어느 나라에서는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차를 이용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하더라. 차에서 배출되는 유독가스를 줄이려고 불편을 감수하는 그 정도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이 정말 환경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었다.

 

 

바위가 그대로 기단이 되다

 

예전에는 자동차가 없었으니 매연 같은 것은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처럼 기반공사를 한다고 마구 파헤치지도 않았다. 암벽을 깨내고 그것을 이용해 축대를 쌓거나, 자연석을 옮겨 정원석을 만드는 과시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집을 지을 때는 지반이 단단한 바위 위라면 오히려 고마워했고, 흙이 단단하지 않으면 <지경다지기>라고 하는 작업방법을 통해서 땅을 단단하게 다져나갔다.

 

지경다지기란 커다란 돌이나 굵은 나무를 이용해 줄을 여러 가닥 묶어 그 줄을 잡아채 하늘 높이 올랐다가 떨어지면서 땅을 다져나가는 방법이다. 물론 거기에는 서로 호흡을 맞추기 위해 한사람이 북을 치면서 선창을 하면, 줄을 잡은 사람들이 뒷소리를 받아가며 일을 하는 멋까지 곁들인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자연과 친화적인 삶을 영위했던 것이 바로 우리네 선조들의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그러니 입으로 환경을 떠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환경을 지키고, 자연과 하나로 동화되면서 살아오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자연친화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 바로 보물 제213호인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오십천 가 벼랑 위에 세워진 관동 제일루라는 죽서루이다.

   

'이 건물은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1266년(고려 원종 7년)에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같이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삼척부의 수령인 김효손이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지은 다락형식의 집을 일컫는 말이며, '죽서'란 이름은 누의 동쪽으로 죽장사라는 절과 이름난 기생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한다.' 이상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죽서루에 대한 설명 첫 부분이다 

 

 

자연암석을 그대로 기반으로 사용한 죽서루는 관동제일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다

 

자연을 최대한 이용한 뛰어난 건축기법

 

죽서루는 절벽 위 암반을 기초석으로 이용해 건물을 지었다. 누 아래의 17개의 기둥 중에서 아홉 개는 자연적인 바위를 그대로 이용을 했다. 하기에 그 기둥의 길이가 다 다르다. 나머지 여덟 개의 기둥은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처름 죽서루를 보는 사람들은 왜 기둥이 그렇게 길이가 다른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선조들의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친환경적인 건물을 지었다는 놀라운 점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죽서루는 자연주의 전통 건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관동제일루>라 하여도 이의를 달수가 없다.

 

규모는 앞면 7, 옆면 2칸이지만 원래 앞면이 5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운데 5칸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 칸이고, 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이는 양편에 기둥은 그 배열이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죽서루에는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학자들의 글이 걸려 있다. 그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3(1662)에 부사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숙종 37(1711)에 부사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1837)에 이규헌이 쓴 것이다. 이 밖에도 숙종, 정조, 율곡 이이선생 등 많은 분들의 시가 누각 안에 걸려 있다.

 

죽서루 아래로 흐르는 오십천

 

죽서루, 그 보존상태도 관동 제일

 

고성부터 강원도 7번 국도 남쪽인 삼척까지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서 찾아 본 많은 정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보존상태를 자랑하는 것도 역시 죽서루였다. 죽서루는 누각 주변 선사암각화와 신라 30대 문무왕이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다가 어느 날 오십천으로 뛰어들어 죽서루 벼랑을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고 하는 용문바위 등을 포함해 담장을 둘러놓았다.

 

 

용이 지나갔다고 전하는 바위의 구멍

 

죽서루 경내는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어 보는 이들의 기분도 좋아진다. 여기저기 심어놓은 대가 바람에 나부끼며 잎이 부딪쳐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죽서루 밑을 흐르는 오십천, 그리고 암석 위에 자연스럽게 키 재기를 하고 있는 누각의 기둥, 이 모두가 관동제일루 죽서루의 멋을 더하고 있었다. 지금은 양양 하조대나 강릉 경포대보다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하지만 이것은 죽서루가 바닷가가 아닌 내륙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서루는 관동제일이라고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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