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이론가이면서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1812∼1884). 오위장을 지낸 신재효는 순조 12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질로 독공으로 소리명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위장을 지낸 뒤에 향리로 돌아온 신재효는 마흔 네 살부터 소리꾼마다 제각각 부르고 있는 판소리를 정리하고 후계자를 키우는데 몰두하였다. 춘향가, 박타령, 토끼타령, 가루지기타령, 적벽가, 심청가의 여섯 마당을 오늘날 명창들이 부르는 바와 같이 정리하여 완성시켰다.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집은, 신재효가 고종 21년까지 살던 집이라고 전한다. 사랑채만 남아있는 이 집은 철종 1년인 1850년에 지은 것으로 짐작하며, 광무 3년인 1899년에 그의 아들이 고쳐지었다고 한다. 신재효의 집은 모양성 밖에 자리하고 있으며, 중요 민속자료 지정 전까지 고창 경찰서의 부속 건물로 쓰였다.


원래의 집은 주변의 물을 끌어들여 마루 밑을 통해 연못으로 들어가게 한 운치가 있는 집이었으나, 지금 건물은 많이 개조되고 변형된 것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6칸 집 곳곳에 남아있는 운치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에 一 자형 평면 초가로 지어진 이 집은 현재는 부엌 쪽에 초가 일각문을 두고 있다. 앞쪽에는 판소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어, 담장 일부를 터놓았다. 왼쪽으로 부터 한 칸 부엌과 두 칸의 방, 그리고 대청 한 칸과 통 두 칸의 방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통 두 칸의 방에는 판소리를 하는 모습을 한 사람모양을 만들어 관람객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조금 비켜 선 돌로 쌓은 우물이 보인다. 부엌은 까치구멍을 넓게 놓아 시원하게 보인다. 부엌과 방 사이에는 쌍여닫이 출입문을 만들었으며, 대청 양쪽 방으로 연결하는 문을 달지 않았다. 대청은 마루방으로 놓았으나, 밖에서 보면 대청이란 것을 쉽게 알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집은 단출하면서도 소박하다.

부엌을 뺀 다섯 칸의 앞쪽으로는 툇마루를 놓아 동선을 도왔다. 여기저기 많은 부수적인 장치를 하지 않은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뒤쪽에는 옹기 두 개를 올려놓은 낮은 굴뚝이 눈길을 끈다. 현재의 연못은 집 앞에서 배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이 차게 되어있다. 하지만 삭막하게 마른 연못은 왠지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물이라도 좀 채워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광대가의 산실 신재효 생가

거려천지 우리 행락 광대 행세 좋을시고
그러하나 광대 행세 어렵고 또 어렵다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치레요

둘째는 사설치레 그다음 득음이요
그다음 너름새라

너름새라 하는 것이 구성지고 맵시 있고

경각에 천태만상 위선위귀 천변만화

좌중의 풍류호걸 구경하는 노소남녀

울게 하고 웃게 하는 이 귀성 이 맵시가 어찌 아니 어려우며


득음이라 하는 것은 오음을 분별하고

육률을 변화하야 오장에서 나는 소리

농락하여 자아낼 제 그도 또한 어렵구나(하략) / 판소리 단가 광대가 중





조선 고종 때 동리 신재효는 이집에서 광대가를 지었다. 광대가는 단가로 광대의 이론을 사설로 쓴 것인데, 광대노릇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또 광대가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는 인물치례, 사설, 목소리, 너름새를 그 조건으로 들고 있다. 오래 전에 ‘중고제’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이 집을 처음 찾은 후 벌써 몇 번째인지. 몇 번 보수를 한 것을 빼고는 처음 본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관람객들을 돕기 위해 판소리를 하고 있는 인형들을 전시했다는 것을 빼고는.



일생을 판소리를 정리하기 위해서 노력을 한 동리 신재효. 고창에 많은 명창이 배출이 된 것도 신재효 선생의 그 깊은 뜻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집안을 돌아보면서 아무런 의미도 모르고 기웃거리는 사람들에게, 안내판이라도 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집을 돌아 나오는데 뒤편에서 판소리 한 대목이 들리는 듯하다. 광대가 한판이라도 좀 들을 수 있도록 시설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동헌은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보는 곳이다. ‘전주부’라고 하면, 지금의 전주시청을 말하는 것이고, 동헌인 풍락헌은 현재 전주시장의 집무실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전주부 안에는 ‘내아’라고 하는 살림집인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내아는 동헌에서 서쪽에 자리를 한다고 하여 ‘서헌’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전주부영에는 형방청(현재의 법원이나 검찰청과 같은 곳), 장방청(현재의 감옥), 군기고, 장청, 작청(6방의 청사로 지금의 각 실과에 해당), 사령청, 통인청, 관노청, 관청(지금의 식당) 등의 수많은 관아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전북도청에 해당하는 전라감영과 전주부영의 관아 건물 가운데 남아있는 것은 유일하게 이 동헌뿐이다.


수많은 환란을 겪은 전주동헌

전주 동헌의 명칭은 풍락헌, 또는 음순당이라고 불렀다. 이는 전라도 관찰사가 집무를 맡아보던 전라감영의 선화청과 상응하는 관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전주부의 임무를 관찰사가 겸임을 했기 때문이다. 전주부의 실무는 중앙에서 파견한 판관이 맡아했다. 이럴 정도로 전주부의 임무가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전주부는 조선조 초에 청사를 마련한 것으로 『완산지』에 기록하고 있다. 건물이 오래되어 낡고 퇴락해 무너진 것을, 판관 서노수가 개건을 했다. 그 후 고종 27년인 1890년에는 화재로 소실이 되기도 했다. 다음 해 판관 민치준이 중창을 한 것을, 1934년에 일제가 강제로 철거하여 매각을 결정했다.

이로 인해 자칫 사라지게 될 전주 동헌을 전주 유림인 유창근 선생이 구입하여,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로 옮겨 전주 유씨의 제각으로 사용을 했다. 영원히 그 흔적조차 없어질 뻔한 전주동헌은 이렇게 그 명맥을 보존하게 되었으며, 2007년 전주시의 노력으로 유인수 선생이 제각의 건물을 전주시에 쾌척을 하게 되었다.

파란만장한 환란을 겪은 전주동헌은 전주시의 개청 60년인 2009년에 전주로 다시 돌아왔으며, 이는 전주를 떠난 지 75년 만이다. 당초 정면 7칸이던 전주 동헌은 한 칸이 줄어든 6칸의 제각을 지었으나, 철저한 고증작업을 거쳐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다. 현재 새롭게 조성이 된 전주동헌은, 전주시 완산구 교동 28번지 전주향교 옆에 자리하고 있다. 부속 건물로는 동헌인 풍락헌을 비롯하여, 내삼문, 안채, 중간채, 사랑채로 꾸며져 있다.




당당한 전주 동헌 풍락헌

아직 일반인에게 공개를 하지 않은 풍락헌이다. 마침 KBS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촬영 때문에 잠시 열려있는 풍락헌을 돌아보았다. 풍락헌은 여느 동헌보다도 그 규모가 당당하다.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지어진 건물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지었다. 주추는 원형의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돌을 사용했으며, 그리 높지 않게 두었다.

기둥은 보수를 한 자욱이 여기저기 보인다. 풍락헌을 바라보면서 좌측 3칸은 방을 드렸는데, 맨 끝의 방은 누정과 같이 툇마루에서 돌출을 시켜 꾸몄다. 누마루를 깐 대청은 모두 4칸으로 창호는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뒤편의 문도 창호로 내어 멋을 더했다. 방의 뒤편에는 깊게 아궁이를 내었으며, 굴뚝은 건물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당당하게 복원이 된 풍락헌. 아마 이렇게 당당한 건물이 전주 유씨들의 제각으로나마 남아있었다는 것에 대해 다행이라 여겨진다. 일제에 의해 강제철거가 되어 매각이 될 뻔한 전주 동헌. 다시는 이런 아픔을 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마터면 소중한 우리의 역사의 현장이 영영 우리 곁을 떠날 뻔했다.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826에 소재한 신헌 고택. 현재 충북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신헌(1810∼1884)은 조선조 후기의 무신이면서 외교가였다. 이 집은 신헌이 살던 집으로 과거에는 사랑채와 행랑채 등이 있었으나, 그 집을 허물어 길상사를 짓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신헌의 자는 국빈, 호는 위당이며 평산인이다. 순조 28년인 182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에 임명 된 후, 고종 때에 이르기까지 중요 무반직을 두루 거쳤다. 고종 3년인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충융사로 강화의 염창을 수비하고, 난이 끝나자 좌참찬 겸 훈련대장이 되어 수뢰포를 만들기도 했다.

천사의 나팔이 집안 곳곳에 놓여있는 진천 신헌고택

병자수호조약과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한 신헌

고종 12년인 1875년 운양호 사건이 일어나자 이듬해 전권대관이 되어 병자수호조약을, 고종 19년인 1882년에는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같은 해에 판삼군부사가 되었다. 이 집은 1850년경 신헌이 전통 한옥 형태로 지은 건물이다. 세울 당시에는 사랑채와 행랑채, 안채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광채, 중문채 만이 남아 있다. 신헌고택을 찾아갔다.

마침 문이 걸려있지 않아 집을 둘러보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현재 대문으로 사용을 하고 있는 문은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다. 문은 중앙에 문을 두고 양 옆으로는 방과 헛간이 있다. 방 밖으로는 굴뚝이 서 있어, 이 방에서 안채의 일을 돌보는 여인들이 기거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대문은 중문이었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없어지고, 중문이 대문이 되었다. 중문은 바람벽을 두어 안채를 보호하였다.

안채만 남아도 단아한 집

안채는 2층 기단 위에 세운 ㄱ자형 평면집이다. 오른쪽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고, 왼쪽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한 집에 이렇게 지붕을 들인 것은 흔치가 않다. 안채는 꺾이는 부분에 마루를 놓고 양편으로 방과 부엌을 달아냈다.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신헌고택을 들어가니, ‘천사의 나팔’이라고 하는 꽃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다. 집안 정원 가득 꽃이 심겨져 있어, 현재 이 집에서 거주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꽃을 좋아하는가를 알 수 있다. 천사의 나팔이라는 이 꽃은 해가 지기시작하면 짙은 향을 풍긴다. 이 정도 꽃이면 집안 전체가 꽃향기로 가득할 것만 같다.


사랑과 안채를 통하던 일각문과(위) 안채의 한편. 천사의 나팔이 꽃을 피우고 있다.

안채에서 예전 밖으로 나가는 문은 중문 말고도, 중문채 끝에 일각문이 있어 그곳으로 통행을 했다. 현재 일각문 밖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남아있는 집의 전체적인 구조로 보아, 처음 이 집을 지었을 당시의 모습이 그려진다. 길상사를 짓기 위해 사랑채와 행랑채 등을 부수었다는 주민들의 이야기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안채의 앞에 길게 마련한 광채는 부속 건물이다. 이곳은 곡식이나 여러 생활용품을 보관해 두던 곳으로, 곳간, 헛간, 광 등을 마련했다. 담 밖에서 보는 광채는 10여 칸이나 되는 -자형으로 꾸며졌다. 이러한 광채의 크기로 보아도, 이집을 지었을 때는 정말 운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채는 열칸 정도로 지어 곡식 등을 보관하였다.

밖으로 나와 안채의 뒤편을 바라다본다. 뒤편에는 낮은 굴뚝들이 연이어 나 있다. 뒤편의 길가로 난 담장이 높게 되어있고, 그 밑으로 차이를 두어 안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이 뒤편이 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저 안채만 남았어도 단아한 형태로 지어진 신헌고택. 이 집의 밤은 온통 꽃향기로 뒤덮일 것이다.

언젠가 늦은 시간 막걸리 한통 사들고 다시 이 집을 찾아, 휘영청 밝은 달밤에 천사의 나팔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에 취해보고 싶다.

안채의 뒤편으로는 낮은 굴뚝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어릴 적 유관순 열사를 보고 ‘유관순 누나’라고 호칭을 했다. 아마 당시 여자아이들이 줄넘기를 하면서 불러대던 유관순 열사의 노랫말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꽃다운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에도 만세운동을 주도해,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한 열사의 죽음이 모든 국민 전체가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 그 죽음이 마음이 아파, 고무줄놀이를 하는 소녀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놀고는 했다.


사적 제 230호 생가지를 돌아보다.

열사의 생가지는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338-1에 소재한다. 이곳은 현재 사적 제23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생가가 아닌 생가지라는 것은, 유관순 열사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임을 의미한다. 집은 그 당시의 것으로 복원을 했지만, 당시의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지성 호우가 어지간히 퍼붓는 날 찾아간 유관순 열사의 생가지. 집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초가 담장 밖에 서 있고, 사립문 안으로는 ㄱ 자형의 안채와 맞은편에 헛간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광과 부엌, 안방이 있고 꺾인 부분에 대청과 건넌방이 있다. 집이라야 모두 5칸 남짓하다. 맞은편에는 2칸의 헛간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집에서 어린 한 소녀가 나라를 위해 홀연히 떨치고 일어나, 아우내 장터에서 목청을 높여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 목숨을 잃은 곳이다. 비는 아직 그치지를 않았지만 차마 우산을 쓰기도 죄스럽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점점 죄스럽기만 해, 고개를 떨어트리고 만다.


안채 광의 문짝은 떨어져 나간채로 방치가 되고 있다.

열사의 집은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에 서야

천안은 독립을 상징하는 고장이다. 그리고 그 상징의 한 가운데에 유관순이라는,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나라를 위해 숨져간 충혼이 있다. 1902년 12월 16일 이곳에서 태어난 열사는,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1919년 3월 1일 기미만세운동에 참여를 했다.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으로 내려 온 열사는 유림들과 학교, 교회 등을 찾아다니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는 3천여 명이 참가한 호서지방 최대의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날 가족들은 일경의 총칼에 무참히 살해가 되었고, 열사는 일경에 체포가 되어 경성복심법원 최종판결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끊임없이 만세시위를 하다가 갖은 고문에 못 이겨, 1920년 9월 28일 순국하였다.


열사의 동생이 살면서 사적지를 관리하던 집. 지금은 비어있다(위) 아래는 매봉교회

우리는 열사를 몇 번이나 더 죽이려는가?

생가지를 돌아보는데 괜히 마음이 씁쓸해진다. 그래도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임에도, 관리가 썩 잘되는 것 같지가 않다. 물론 기념관이야 마련이 되어 있지만, 그래도 의미가 더 깊은 생가지임에도 달랑 초가 집 하나만이다.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래 숨져간 열사에게는 참으로 박한 대접을 하는 것 같은 생각이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안채 끄트머리에 광문은 어디로 떨어져 나갔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성의 없이 마련해 놓은 장독대가 눈에 거슬린다. 물론 그 당시 열사의 집 환경이 커다란 장독대를 가졌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저 장식용으로 몇 개 진열한 독들이 고작이다. 뒤편에는 그 어느 곳에나 잘 만드는 배수로도 없다.


뒤편에는 독 몇개를 형식적으로 놓은 장독대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배수로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아래)

열사는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3등 공로건국훈장을 추서 받았다. 그러나 모 언론사의 사주는 일제의 징병, 학병을 독려하는 수편의 글을 쓰고도 2등 건국훈장을 받았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니 참담한 마음이다. 사적으로 지정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보다는, 그곳을 잘 보존해 민족의 긍지를 심어주는데 더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열사의 생가지를 돌아보면서, 그저 목이 메어오기만 한다.

승광재. 조선의 황손인 이석씨가 사는 곳이다. 한옥마을 최명희 문학관 인근에 있는 승광재는 2004년 8월 경에 지어진 집이다. 이곳은 조선황실의 마지막 황손이라는 이석씨가 거주를 하고 있으며, 전통예절을 가르치는 설예원과 함께 있다. 현재 전라북도 도지사인 김완주 지사가 전주시장으로 재직시 이 승광재를 지어 이석씨를 머물게 했다는 것이다.

승광재는 한옥마을의 한편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긴 흙담 사이로 난 골목 안에 일각문이 보이고, 그 문 위에는 ‘승광재’라는 현판을 걸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으로는 설예원이 있고, 우측으로는 ㄷ 자로 꾸며진 승광재가 자리한다. 승광재는 ㄱ 자 집 두 채를 연결해 ㄷ 자로 꾸민 집이다. 승광재에는 황실 사람들의 사진과 황실에 관련된 내용들이 진열이 되어있다.




지난 해 명성황후 생가에서 만나보다.

내가 황손 이석 씨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10월 8일 명성황후 생가에서이다. 명성황후의 추모제를 마치고 그 자리에 참석한 마지막 황손인 이석씨(본명 이해석)를 생가 마루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올해로 벌써 70세인 이석 씨는 한 때 가수로도 활동을 했으며, 터전을 잡지 못해 이것저것 해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고종 황제의 손이고 아버지는 의친왕이다. 하기에 명성황후는 이석 씨의 할머니가 된다.


지난 해 명성황후 생가에서 만나 황손 이석씨. 그리고 현재 한옥마을의 승광재

황손 이석 씨는 1941년 음력 8월 3일 사동궁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사동궁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결국 궁에서 나오게 되고, 대한제국이 막을 내리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1979년까지는 그나마 전 박정희 대통령의 안배로 서울 궁정동 청와대 옆, 칠궁에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5공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곳에서도 쫓겨나 1년이면 12번도 더 이사를 다녔단다.

중앙시장과 동대문시장에서 국수장사, 자장면 장사 등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는 황손 이석 씨였다. 한 낮에 찾아 든 승광재에는 문이 닫힌 채 나그네들만 왁자하니 집안을 돌아보고, 예절을 배우러 온 아이들인지 소리를 치면서 뛰어다닌다.

요즈음 한창 인기리에 방영이 되고 있는 사극을 보면서, 만일 일본과의 그런 개탄스런 과거가 없었다고 한다면 어찌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나 있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 이 승광재가 조금은 남다른 집일 것만 같다. 오래된 고옥도 아니다. 그렇다고 혼자서 조용하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도 아니다. 그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시끄럽게 만든다. 그 한편에 숨을 죽이듯 엎드려 있는 승광재를 보면서, 세월의 무심함이 다시 한 번 느껴진다.



승광재와 설예원(아래)

오늘 황손의 집은 낯이 설다. 언제나 그렇듯 이곳도 결코 편안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래도 이나마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고맙다는 황손의 말을 되새겨본다. 글쎄다, 우리는 지금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오늘 한옥마을 한 끄트머리에서 만난 황손의 집에서, 가슴 한편이 싸한 느낌이다.


위는 영조의 가계도, 아래는 고종황제의 가계도(전단지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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