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를 다니면서 가장 마음이 푸근해 지는 것은 고택이나 절집 등에서 만나게 되는 장독대이다. 물론 절집보다야 고택에서 만나는 장독대, 그것도 사람의 온기가 서린 집안에서 만나게 되는 장독대야말로, 따듯한 어머니의 품을 느끼게 된다.

 

집집마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윤기를 내며 가지런한 모습으로 놓여있는 장독대. 지금이야 아파트들을 선호하면서 이런 정취어린 모습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옛 것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우리 어머니들은, 아파트 베란다 한편에도 윤이 나게 잘 닦은 독 두 어 개쯤은 갖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위는 경북 영덕 의병장 신돌석장군 생가지 장독 아래는 경주 김호장군의 생가지 장독


장독대를 보면 집안의 가풍을 알아

 

장독대는 집 뒤편이나, 안채의 옆에 단을 쌓고 그 위에 가지런히 독을 늘어놓는다. 장독대에는 간장을 비롯한 된장과 고추장, 김치나 장아찌 등 우리의 식생활을 윤택하게 할 식품들을 보관하는 곳이다. 하기에 장독대가 갖는 의미는 그 무엇보다 크다고 하겠다. 사람들은 어느 집을 찾아갔을 때 이 장독대가 윤기가 반지르르하게 나면, 그 집안의 주부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장독은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리고 온 가족의 안위가 장독대에서 만들어진다. 아이가 아프면 장독대 앞에 상을 놓고 맑은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자성으로 비손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있다. 또한 자손들이 만 길을 떠나거나 큰일을 앞에 두고 있을 때도, 일이 잘 되게 해달라고 지성으로 비는 일도 이 장독대에서 다 이루어졌다.

 

 

 

 

위는 논산 명재고택 사랑채 앞 장독들, 가운데는 서천 이하복 가옥의 장독대, 아래는 음성 감곡 서정우 가옥의 장독


장독은 단순히 찬거리를 보관하는 곳이 아니다.

 

왜 장독대에서 그런 일들을 한 것일까? 어머니들은 왜 집안에 일이 생기면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놓고 촛불을 켠 후, 지성으로 비손을 한 것일까? 그것은 장독대가 갖고 있는 직능 때문이다. 장독대는 집안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장독대에는 집안 식구가 먹고사는 찬거리의 맛을 내는 것도 이 장독 안에 들어있는 고추장, 된장, 간장과 각종 반찬 등이다.

 

 

 

 

위는 전남 무안 나상렬 가옥의 장독, 가운데는 충북 괴산 청천리 고가의 장독, 아래는 함양 지곡 오담고택의 장독


하지만 이 찬거리들인 장들은 단지 반찬의 맛을 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장들은 바로 ‘축사(逐邪)’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하기에 이 장독대는 집안에서 주부들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신성한 곳 중 한 곳이다. 이러한 장독대는 한국인의 사고 속에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정 깊은 곳이다.

 

이러한 장독대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장독대에 깃들었던 어머니의 마음과 정도 함께 사라져가는 것만 같다. 어머니의 따스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장독대. 그리고 집안의 모든 간구하는 일이 이루어지던 소중한 곳이었던 곳. 이 봄, 어머니의 마음이 가득 담겨있던 아름답고 정이 넘치는 장독대를 찾아, 길을 나서는 것도 새봄을 맞이하고 느끼는 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택답사를 하다가 보면 기이한 것들을 만나게 된다. 가끔은 해학적이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가슴이 따듯해지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통해 과거 우리네 선인들의 숨결을 기억해 낼 수가 있다. 어디를 가거나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 있는가해서이기도 하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우리네의 사대부가와 민초들의 삶이, 그렇게 각박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나름대로 없는 사람들을 위해 베풀 줄 아는 지난날의 사대부가의 심성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이런 것들을 보고 배울 수는 없는 것인지.



마을 사람들의 애환을 듣는 ‘소리통’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에 자리하고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59호인 이용욱 가옥은 강골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은 집이다. 비교적 넓은 평야에 인접하여 있고, 해안과도 가까운 지역이어서 풍수지리상 터가 좋은 곳이다. 안채, 사랑채, 곳간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는 집이다.

이 집의 대문을 들어서 사랑채로 향하는 우측 담장에 보면 담장에 작은 구멍 하나가 보인다. 그 밖으로는 마을의 공동우물이 있다. 집의 구조를 둘러보면 이 우물을 일부러 이렇게 밖으로 빼내 담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이 작은 구멍을 ‘소리통’이라고 한다. 우물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마을의 온갖 이야기가 다 흘러나온다.

소리통을 통해 그러한 마을의 애경사를 듣고, 적당히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소리통은 마을 주민들과 사대부가의 보이지 않는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한 것이다. 부단하게 떠벌리지 않고도, 마을 사람들의 아픈 곳을 만져줄 수 있는 소리통. 그래서 이 소리통이 이 시대에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배고픈 이들을 먼저 생각한 ‘타인능해’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8호인 운조루. 운조루는 조선 중기에 지은 집으로 영조 52년인 1776년에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지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환락지>라 하는 명당자리라고 한다. 55칸의 목조와가인 운조루는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운조루의 대문을 들어서면 길게 자리를 한 행랑채의 좌측 끝에 ‘가빈터’ 혹은 ‘초빈터’라는 곳이 있다. 이것은 운조루에서 상이 나면 3일장을 지낸 후 이 곳에서 3개월 동안 시신을 안치했다가 출상을 하는 곳이다.

이렇게 조상에 대한 예를 극진히 모신 운조루에는 ‘타인능해’라는 나무로 만든 통과, 역시 나무로 만든 쌀통이 있다. 타인능해는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언제라도 찾아와 통 안에 든 쌀을 가져가라는 것이다. 가진 자들이 더 취하기 위해 기를 쓰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 타인능해에 담긴 마음을 알려주고 싶다.

이 외에도 고택을 답사하면서 만나는 많은 것들. 그 특이한 것들을 돌아보면 더 없이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다.


양평 창대리 고가의 '기와박공'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창대리에 있는 경기도 민속자료 제7호인 창대리 고가는 지은 지가 200년이 되었다. 이 집에는 맞배집의 양편 지붕에서 내린 박공에 기와로 와편을 넣어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어떻게 기와를 잘라 박공을 와편박공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인지. 보기만 해도 옛 선조들의 미적감각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익산 조혜영 가옥의 '꽃담'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인 익산 조혜영 가옥은 함라읍에 소재한다. 이 마을은 담장이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이다. 조혜영 가옥은 1920년을 전후해 건축이 되었다고 한다. 여러 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현재는 안채와 별채, 그리고 모습이 바뀐 문간채만 남아있다. 이 조혜영 가옥에는 꽃담이 있다. 십장생 굴뚝의 문양을 본따 조형을 한 것으로 보이는 이 꽃담으로 인해 더욱 돋보이는 집이다.


남원 덕치리 초가의 '동학날리'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에는 전북민속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된 덕치리 초가가 있다. 이 집은 짚으로 지붕을 한 것이 아니고 억새인 띠풀로 지붕을 이른 집이다. 이 집에서는 보기드문 여러 가지를 만날 수 있어 즐거운 곳이다. 대문에 붙은 광 안에는 동학란 때 선조가 사용을 한 목창이 보관되어 있다. 창에는 흰 글씨로 ‘동학날리’라고 써 놓았다.

이 외에도 고택에서 만나보는 여러 가지 즐거움은 무수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집은 그냥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다. 그 안에는 사람들의 심성과, 우리의 온갖 역사가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옛집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언젠가는 집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집안에 있는 이런 이야기를 엮은 책 한권을 내고 깊다. 우리 후손들이 우리 문화에 대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굴뚝 이야기, 알고 보면 흥미롭다. 옛 고택 답사를 하면서 옛 집에서 보는 것들이 비단 굴뚝만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굴뚝도 굴뚝이지만 옛 집에는, 집집마다 나름대로의 볼거리들이 많이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은 굴뚝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굴뚝이 그냥 연기를 빼는 용도로만 사용이 되었을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다. 굴뚝을 보면 나름대로의 형태에서 그 지역적 특색이나, 집 주인의 성품, 심지어는 그 집안의 가세를 짐작할 수도 있다. 왜 굴뚝에서도 그런 특색이 있다고 보이는 것일까? 물론 추론일 수도 있겠지만, 그 나름대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는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담장굴뚝이다. 아래는 속초 김근수 가옥의 담장 안에 연도를 뺀 굴뚝이다, 아마도 심한 바람을 이겨낼 수 있도록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지역에 따른 굴뚝의 형태

굴뚝은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고 앞서 설명을 한 적이 있다. 그러한 굴뚝은 강원도 동해안 등 3 ~ 4월 심한 바람이 부는 곳에서는 굴뚝을 별도로 조형을 하는 것이 아니고, 대개는 담장 안에 연도를 이어 굴뚝을 만든다. 굴뚝도 상당히 견고하게 쌓는 편이다. 아마도 그러한 것들은 바람으로 인해 굴뚝이 넘어가지 않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위는 경기 양평의 이항로 생가의 굴뚝이다. 가운데는 전북 고창의 인촌생가의 낮은 굴뚝이며, 아래는 익산 가람 이병기 생가의 굴뚝이다. 내룍이라 그런지 굴뚝이 낮게 조성이 되었다.


서해안 인접 지역 역시 상당히 견고한 굴뚝을 조성한다. 이곳도 바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와는 달리 내륙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굴뚝들이 나타난다. 지역으로 보면 경상도 지방의 굴뚝이 화려하고 크다. 이렇게 화려하게 굴뚝을 조성하는 것은, 이 지역의 고택들이 상당히 넓고, 큰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굴뚝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집 자체가 크기 때문이다.

경기도 지역과 충청남도 지역의 굴뚝들은 대개가 낮다. 집이 넓다고 해서 굴뚝을 높게 만들지를 않는다. 이런 것은 그 지역의 특징이다. 이렇게 낮은 굴뚝을 조성한 것은, 일기가 비교적 순탄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위는 서천의 이하복 가옥의 굴뚝이다. 아래는 부여 민칠식 가옥의 굴뚝이다. 큰 집에 비해 낮은 굴뚝을 조형했다. 


가세에 따른 굴뚝의 형태

집안의 가세를 보려면 광을 보라고 했다. 오래도록 권력을 잡았던 집인데도 불구하고, 곳간채가 작은 집이 있는가 하면, 안채나 사랑채는 그리 크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곳간채가 상당히 큰 집들이 있다. 이런 경우 그 집의 굴뚝을 보면 상당히 높게 축조가 되었다. 바로 부의 상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만 같다.



위는 강원도 강릉 지역이 대표적인 선교장의 굴뚝이다. 가운데는 경남 거창의 정온 생가의 굴뚝이며, 아래는 함양 오담고택의 굴뚝이다. 굴뚝이 높게 조형되었다.


또 오랜 세월동안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 든 집들을 보아도 굴뚝이 높이 솟아있다. 그만큼 많은 불을 땠다는 것이다. 많은 양을 불을 때려면 아무래도 낮은 굴뚝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굴뚝의 형태는 단순히 불을 때고 그 연기를 뿜어대기 위한 용도만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동안 200여 채 이상의 고택을 답사하면서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면, 굴뚝 하나에도 그 집안의 내력이 함께 자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위는 서산 김기현 가옥의 굴뚝이며 아래 좌측은 전주 학인당의 굴뚝이고, 우측은 충북 괴산 청천리 고가의 굴뚝이다. 굴뚝이 높고 화려하게 조성이 되었다.


집안에서 음식을 조리하고 난방을 하기 위한 조형물인 굴뚝. 아마도 지금까지 보아온 고택의 몇 배를 더 답사를 하고나면, 나름대로 ‘굴뚝의 미학’ 정도 한 권쯤은 쓸 수 있지는 않으려는지. 그래서 고택답사의 발길은 늘 바빠진다.(연재 끝)

처음에 굴뚝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제일 먼저 궁궐의 화려한 굴뚝에 대한 글을 썼다. 그리고 사대부가의 기와집의 굴뚝에 대한 글을 적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사대부가도 있지만, 주로 민초들이 살던 초가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궁궐의 굴뚝과 사대부가인 기와집의 굴뚝도 특징이 있지만, 초가의 굴뚝은 또 나름대로 특징이 있다.

초가는 지붕을 얹은 짚이 불에 잘 붙는다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비교적 굴뚝을 높게 올리거나, 멀리 떨어져 세운다. 대개의 경우는 높이 올리는 편인데, 이는 낮은 굴뚝을 통해 불똥이 날아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48호 정원태 가옥의 사랑채 굴둑. 전형적인 초가의 굴뚝이다. 제천시 금성면 소재. 이 집은 사람이 살고 있다. 


초가의 굴뚝은 높거나 멀거나

문화재 답사를 다니면서 한 가지 답답한 일을 겪는다. 그것은 바로 복원이라는 허울아래 망가지고 있는 우리의 문화재들이다. 전문적인 보수 기술자들이 복원을 한다고 믿고 있는데, 정작 돌아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다. 괜히 겉멋을 부리려고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마음이 아프다.

초가의 굴뚝인 그 구조상 굴뚝이 지붕보다 높아야 한다. 아니면 연도를 길게 빼어 집과 멀리 떨어트려 놓는다. 이러한 이유는 불을 붙기 쉬운 지붕 때문이다. 사대부가에서는 장작을 주로 때지만, 민초들은 삭정이나 검불 등을 주로 땐다. 그러다가 보니 불똥이 굴뚝을 통해 날아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짚으로 이은 초가는 불똥만 튀어도 불이 붙을 수가 있다.

(사진은 용인 한국민속촌에 있는 초가집 굴뚝이다. 하나는 지붕보다 높게 올라가고, 돌로 쌓은 굴뚝은 집에서 떨어져 있다)

그런 화재를 염려해서 굴뚝을 높게 올리는 것이다. 굴뚝이 높으면 그만큼 불똥이 튈 확률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높게 할 수가 없을 때는 굴뚝을 연도를 길게 빼서 멀리 놓는다. 이 또한 불똥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어이없는 요즘 초가의 굴뚝, 아예 굴뚝이 없기도

초가의 굴뚝이 더 높은 이유는 민초들의 아픔이기도 하다. 잘 마른 장작하나 제대로 땔 수가 없는 지난 시절, 그나마 나무 삭정이나 검불이라도 많이 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땔감들은 굴뚝을 통해 곧잘 시뻘겋게 불똥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서 화재가 발생하기 때문에, 굴뚝을 높이거나 멀리 설치를 해야만 한다.


위는 사적 제230호인 천안의 유관순 생가지의 굴뚝이다. 전형적인 민초들의 굴뚝 모습이다. 아래는 충북 문화재자료 제38호인 청원 낭성 관정리민가의 굴뚝이다. 연도에서 솟은 연소통이 짧다. 이 집이 있던 곳은 바람이 많지 않았다고 하지만, 초가의 연소통치고는 너무 짧은 감이 있다.


이런 초가 굴뚝의 특성은 복원이라는 허울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질이 되어버렸다. 굴뚝의 연도를 뺀 후 길게 연소통을 올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굴뚝 연도 끝에 작은 통 하나를 박아놓는 것으로 그쳤다. 만일 그런 곳에 검불이나 삭정이들을 아궁이에 집어넣고 불을 지핀다고 하면, 그야말로 불조심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그런데 여기저기 옛 집들을 돌다가보니, 더 가관인 집도 있다. 아궁이는 있는데 아예 굴뚝이 없다. 세상에 굴뚝이 없는 집도 있을까? 그렇다면 연소는 어떻게 할까? 그저 대충 집만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엔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굴뚝은 집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구조물이다. 그런 굴뚝이 없이 집을 지어놓고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일까?



위는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의 초가집 굴뚝이다. 바람이 강한 곳이기 때문에 담장에 연도를 집어 넣었다. 가운데는 중요민속문화재 제39호인 고창 신재효 생가의 굴뚝이다. 낮지만 연도를 길게 빼어 집에서 떨어트려 놓았다. 그리고 아래는 삼척시 도계의 신리 너와집 굴뚝이다.


사는 집과 살지 않는 집의 차이

이런 오류는 사람이 살고있는 집과, 사람이 살고있지 않은 집이 극명하게 대비가 된다. 사람이 살고 있으면 제대로 된 굴뚝이 보인다. 문제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집들이다. 거의 제 몫을 못하는 보여주기 위한 굴뚝을 만들어 놓고 있다.

초가집에도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에 가면 굴뚝이 담장에 올라앉아 있다. 그것도 항아리로 마련하였다. 바람이 센 지역에서는 이런 굴뚝이 보이기도 한다. 담장 안에 연도를 집어넣고, 그 위에 항아리를 올려놓은 것이다. 바람에 무너지거나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위는 수원 파장동에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23호인 광주이씨 월곡댁의 굴뚝을 세우는 연도이다. 연도만 마련하고 연소통은 마련하지 않았다. 아마도 아궁이는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가운에와 아래는 남원 운봉에 있는 가왕 송흥록의 생가지에 세워진 집이다. 측면을 보고, 뒷면을 보아도 굴뚝이 아예 보이지를 않는다.


굴뚝 하나에도 철학이 있는 우리네의 집들. 그 굴뚝을 돌아보면, 나름대로의 멋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선조들의 미학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늘 쓰고 싶었던 글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굴뚝’에 대한 글이다. 남들이 들으면 ‘문화재 답사가 맞아? 무슨 굴뚝을’이라고 핀잔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굴뚝은 단순히 연기를 내는 곳이 아니다. 물론 그 용도야 연기를 내보내 불이 잘 들게 하기 위한 용도지만 말이다.

굴뚝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참 그 종류가 어지간히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궁이나 반가의 집, 또한 민초들의 집을 다닐 때마다 난 굴뚝을 눈여겨보는 버릇이 생겼다. 굴뚝 하나에도 조형의 미가 있는 우리의 집들.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가 않는다. 그 첫 번째로 경복궁의 굴뚝을 둘러본다.


왜 하필이면 굴뚝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그런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하나뿐이다. ‘굴뚝이 없는 집은 존재할 수 없다. 필요 없는 것 같지만, 굴뚝은 그 어느 것보다도 필요한 구조물이다. 그러면서도 굴뚝은 나름의 철학을 지니고 있다’

두 개의 보물을 지닌 경복궁의 굴뚝

사적 제117호인 경복궁은 현재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정궁(正宮)에 해당하는 것으로 북쪽에 자리하고 있어 ‘북궐’로도 불린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경복궁을 건립하는 일이었다. 태조 3년인 1394년 12월 4일 시작된 이 공사는, 이듬해 9월 중요한 전각이 대부분 완공되었다.

경복궁에는 두 개의 유명한 굴뚝이 있다. 바로 자경전 뒷담에 붙어있는 <보물 제810호인 십장생 굴뚝>과 <보물 제811호인 교태전 뒤 인공동산인 아미산의 굴뚝>이 그것이다. 이 두 개의 굴뚝만 갖고도, 경복궁의 굴뚝이 얼마나 딴 곳에 비해 아름답게 꾸며졌는지를 알 수가 있다.


십장생 굴뚝의 안담과 바깥담(아래)

목조건물을 본 단 자경전 십장생 굴뚝

자경전은 현재 그 전각 자체만으로도 보물 제80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교태전 뒤쪽 자미당 터에 조대비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자경전 뒷담에 조형한 십장생 굴뚝은 궁궐의 굴뚝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것으로 꼽힌다.

십장생 굴뚝은 담의 한 면을 앞으로 한 단 돌출을 시켜 전벽돌로 굴뚝을 만들었다. 굴뚝의 전면 중앙에는 십장생 무늬를 조형전으로 만들어 배치하였으며,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벽면을 구성하였다. 벽면의 십장생 도판에는 해, 산, 물, 구름, 소나무, 사슴, 거북, 바위, 학, 불로초, 포도, 새, 국화, 대나무, 연꽃 등이다.


이 가운데 해와 거북 등은 장수를 뜻하고, 알이 많이 달린 포도는 자손의 번성을, 박쥐는 부귀를, 나티 불가사리는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기운을 뜻한다. 담장의 윗부분에 마련한 굴뚝의 덮개는 목조 건물의 지붕을 모방하였으며, 꼭대기는 집 모양을 본떠 만든 ‘연가(煙家)’를 10개 올려놓았다.

경복궁 아미산 동산의 굴뚝

보물 제811호인 아미산 동산의 굴뚝은, 굴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독립적인 조형물이다. 아미산은 교태전 뒤에 조성한 인공동산이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실이 있는 중궁전이다. 이 인공동산에 서 있는 굴뚝은 교태전의 온돌방과 연도를 연결이 되어있다. 이 굴뚝은 처음 경복궁을 지을 때 조성한 것이 아니라, 고종 2년인 1865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조성한 것이다.

교태전 후원 인공동산인 아미산의 굴뚝 

현재 4개가 남아있는 아미산의 굴뚝은 육각형으로 굴뚝의 기둥을 마련하였다. 굴뚝 벽에는 덩굴, 학, 박쥐, 소나무, 매화, 봉황, 국화, 불로초, 바위, 사슴 등을 벽돌로 구워 만든 도판으로 장식을 하였으며,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하나의 후원을 아름답게 꾸미는 조형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는 아미산 동산 굴뚝은 십장생과 사군자, 장수와 길상을 상징하는 무늬 및 악귀를 쫓는다는 상서로운 짐승들을 함께 표현하였다.

아미산 동산의 굴뚝은 우리나라 궁에서 만나는 굴뚝 중 가장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창경궁이나 창덕궁의 굴뚝들이 흙과 백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면, 경복궁의 굴뚝은 채색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그 외에 경복궁에서 만나는 굴뚝들

경복궁의 연희장소인 경회루 옆에는 수정전이 있다. 현재 수정전이 있는 자리는 세종 때 한글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이 있던 장소이다. 이 수정궁 벽에는 연가를 세 개씩 올린 담에 붙은 굴뚝이 있다. 이러한 담에 붙은 굴뚝은 경복궁 어디서나 만날 수가 있다. 이러한 굴뚝의 특징은 모두 전벽돌을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교태전에서 조금 비켜난 곳에 난 일각문인 선장문 앞에도 아미산 동산의 굴뚝과 외형이 비슷한 사각형의 굴뚝들이 서 있다. 이곳에는 각종 십장생의 문양은 보이지 않고, 평범하게 조성을 하였으나 우직한 것이 장부를 상징하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교태전 주변의 굴뚝들은 문 옆이나, 혹은 벽과 벽이 마주하는 곳에도 굴뚝이 자리한다.


왜 이렇게 아름다운 굴뚝을 조형한 것일까? 그것은 굴뚝을 단순히 연기를 배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완전한 독립된 조형물로 인정을 한 것으로 생각이 든다. 하기에 경복궁 안에는 숨은 굴뚝 찾기를 해도 좋을만한 많은 굴뚝들이 각양각색으로 숨어있다. 아이들과 함께 그것을 찾아내는 재미역시 쏠쏠할 것이란 생각이다.

단순한 굴뚝 하나에도 미학을 담아낸 선조들의 놀라운 예술세계. 지금 우리가 가장 눈여겨보며 기억을 해야 할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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