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어머니 한 분이 아홉 명의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현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라는 곳이다. 순창에서 담양 방면으로 나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청소년 센터가 보인다. 그리고 그 조금 못 미쳐 우측으로 경천이라는 내를 건너 ‘대모암’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300m 정도를 오르면 이 부인이 쌓았다는 성이 있다.

이 산성은 ‘대모산성’ 또는 ‘백산리산성’ 등으로 불리는데, 두 산봉우리를 배 모양으로 감싼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성은 현재 ‘홀어머니 산성‘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이 성을 아홉 명의 아들을 둔 양씨 부인이, 아들들과 함께 쌓았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이 성에는 양씨부인에 대한 애틋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설씨 총각의 구애에 죽음으로 답한 양씨부인

홀어머니 산성은 양씨 부인이 아홉 명의 아들과 함께 쌓았다고 전해지는 성이다. 양씨부인을 흠모하던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설씨총각은, 은근히 양씨부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설씨총각이 양씨부인에게 구애를 했다는 것이다. 아들들과 함께 살고 있던 부인은 딱히 거절을 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을 해 낸 것이.

“총각이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올 때까지, 내가 성을 다 쌓지 못하면 결혼을 허락하겠다.”

고 하였다. 총각은 서울로 떠나고 부인은 아들들과 함께 열심히 성을 쌓았다. 아홉 명의 아들들과 성을 쌓는 부인은, 지아비의 생각을 해서라도 결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성을 쌓고 있던 부인이, 마지막 성 돌을 채 올리기 전에 설씨총각이 먼저 돌아왔다.

 

대모암과 산성 오르는 길

성을 쌓기 위해 돌을 나르던 치마를 뒤집어 쓴 양씨부인은, 성벽 위에서 몸을 날려 자결하여 정절을 지켰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외간남자와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결혼을 앞둔 신부는 이 성 잎을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이 산성 이름이 홀어머니 산성이기 때문에, 홀로될 것을 염려해서 인가보다.

군창으로 사용했던 홀어머니 산성

홀어머니 산성을 찾아보리라 몇 번을 별렀다. 그 앞을 지나치면서도 벌써 몇 번째 길을 돌리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6월 5일 일요일, 약속이 깨어지는 바람에 잠시 답사 길에 나섰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홀어머니 산성을 찾아갈 생각에서이다.



내를 건너면 좌측으로 대모암 이정표가 나온다. 대모암은 원래 절이 있던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작은 산당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토속신앙을 섬기던 장소였다. 그러다가 1935년에 학성스님이 인법당을 신축하고 대모암을 창건하였다.

대모암 대웅전 뒤편으로 난 길을 천천히 오른다. 높지 않은 등성이 위에서는 길이 좌우로 갈라진다. 좌측으로 조금 걷다가 보니 산성이 보인다. 최근에 일부는 복원을 한 듯하다. 원래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산성이라고 한다. 성벽은 그리 높지가 않으며, 동쪽으로 향한 물이 흘러나가는 수구는 직선으로 단을 쌓았다.



이 산성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는 군창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길이는 700m 정도라고 하지만, 현재 찾아볼 수 있는 성의 길이는 100여 m 정도인 것 같다. 남은 부분은 넝쿨이 우거져 들어갈 수가 없다. 성벽은 가파른 언덕 위에 쌓았는데, 성벽의 넓이는 1.3m ~ 4m 정도가 된다.

홀어머니 전설은 언제 시작이 되었을까?

복원을 한 성벽 끝으로는 옛 성벽인 듯한 곳이 아직 남아있다. 성벽 위로 한 바퀴 돌아본다. 아마도 이 성이 과거에는 천혜의 요새였을 것이다. 군창을 두었다고 하면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성에 왜 고려 시대의 홀어머니 전설이 전하는 것일까? 그것이 못내 궁금해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대모암과 대모산성. 아마도 성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던 산당과 연결이 된 전설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산당에 모셨다는 신격이 혹 홀어머니는 아니었을까? 성벽 위에 걸터앉아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본다. 그저 답사를 다니면서, 이런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해지는 날이다.


남원시 산곡동에 소재한 전라북도 기념물 제9호인 교룡산성은, 참으로 슬픔이 많은 산성이다. ‘교룡산성’이라는 산성 명칭은 아마도 이 산성이 물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룡산성에는 모두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5월 12일, 비가 뿌리는 날 찾아간 교룡산성은 이번 답사가 두 번째였다.

산성 입구에서부터 길이 미끄럽다. 돌계단을 따라 좌우로 길게 뻗어있는 산성은 그 높이가 5~8m 정도로 단단한 석축 쌓기를 하였다. 이곳은 해발 518m인 험준한 교룡산을 에워 쌓고 있는 산성이다. 산은 그리 높지가 않지만 밀덕봉과 복덕봉 등의 봉우리를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일부만 남아있는 성곽으로 추정하다

교룡산성은 백제시대에 처음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빗방울이 뿌리는 가운데 천천히 교룡산성을 오르기 시작한다. 산성 입구에는 양편으로 성이 쌓여있고 가운데 계곡부분에는 끊어져 있다. 아마도 예전에는 저곳에 수문을 두었을 것이다. 99개나 되는 우물이 있었다고 하면, 그만큼 수원이 풍부하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성의 입구 좌우로는 산성이 남아있는데, 그 길이는 고작 200m 정도일 뿐이다. 원래 교룡산성의 전체길이는 3.1km 정도가 되는 제법 큰 성이었다. 아직도 군데군데 성곽이 남아있다고 한다. 성문으로 다가가니 반월형으로 조성한 성문이 나타난다. 안쪽으로 보니 문을 달아냈던 툴이 보인다. 그런데 한편 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외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외문을 달아냈던 흔적이나, 성문의 규모로 보아 아마도 암문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지개 모양의 성문은 모두 장대석을 이용해 아치형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한 장의 장대석을 서로 맞물려 틀을 만들었다. 성문 안으로는 비석군이 서 있다.

옹성은 후에 쌓은 듯

성문 앞에는 옹성을 쌓아놓았다. 옹성이 있다는 것은 이 문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옹성은 임진왜란 당시 쌓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대장 처영이 성을 고쳐 쌓았다고 하는데, 그 때 이 옹성을 축성했으리란 생각이다. 남원은 임진왜란 때나 정유재란 때 일본군과 심하게 격전을 벌인 곳이다.

일본군이 남원성을 지나 한양으로 올라가려면 아무래도 이곳 교룡산성의 아군과 교전을 하여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남아있는 이 문이 가장 먼저 공격을 해야 할 곳이다. 하기에 비탈이 진 성이지만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 옹성을 쌓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작은 문이지만 견고함을 갖추고 있다.



교룡산성의 슬픈 역사

비에 젖은 돌계단을 따라 위로 오르니, 선국사가 보인다. 아마도 승병들은 이 절을 거점으로 활동을 했을 것이다. 선국사는 3.1 독립만세를 주도한 33인 중 한 명인 백용성 조사가 처음으로 출가를 한 곳이기도 하다. 그 곳을 지나 좀 더 오르니 대밭이 양편으로 늘어서 있다. 그 대밭 사이에 석비 하나가 보인다.

‘군기 터’라고 쓰여 있다. 선국사 뒤편에 이런 군기터가 있었다는 것이 승병들이 선국사를 거점으로 삼고 활동을 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교룡산성은 백제를 거쳐 조선조에 들어서 두 번의 일본과의 교전, 그리고 나중에는 동학군의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도 이 산성을 방어선으로 진을 치고 주둔하였다. 결국 교룡산성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산성이었다는 생각이다.




동학군의 지도자 김개남의 피에 젖은 역사

김개남(1853년 ~ 1894년)은 조선 말기의 전라북도 태인의 대접주이다. 전라북도에서는 전봉준 다음가는 동학의 실력자였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남원을 기반으로 삼고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일대에서 활동을 하였다. 녹두장군 전봉준과는 달리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전라북도의 실력자로 스스로 ‘개남국왕’이라 사칭했다는 설도 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군의 봉기 때, 김개남은 처음부터 김낙삼과 김문행 등 1,300여 명의 농민군과 이끌고, 백산에 모인 뒤 남원을 점거하여 전라도를 통할하였다. 같은 해 4월 에는 고부 백산에서 농민전쟁의 본부격인 호남창의소를 설치하였다. 전봉준을 동도대장으로 추대한 김개남은, 전봉준을 능가할 만큼 위세를 떨치며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해 갔다.

동학혁명군의 토벌 책임자인 홍계훈과 협상을 벌인 김개남은, 동학도를 박해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고 전주성을 관군에게 내주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간섭하게 되자, 다시 5 ~ 6만 명이나 되는 대병력을 이끌고 남원에서 전주까지 진격하였다.


10월 14일 남원에서 전주로 진격해 새로 부임하는 남원부사 이용헌을 처단하고, 자신이 그곳의 책임자가 되어 새로운 제도를 실시하는 등 남원에서 강력한 실력자가 되었다. 아마도 이때에 스스로 ‘개남국왕’이라 칭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김개남은 전주 수비군 5천명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한 다음 야산에 은신하였다. 12월 27일 매부인 서영기의 집에 숨어 있다가 태인에서 체포된 김개남. 전라감사 이도재는 그를 전주에 압송한 뒤 남원부사 이용헌의 원수를 갚는다며, 서울로 이송하지 않고 가두었다가 1895년 1월 8일 전주 감영에서 처형하였다.

처형을 당한 김개남의 수급은 한성부로 이송, 1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3일간 효수된 뒤 다시 전주로 보내졌다. 농민군을 모아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하였던 김개남.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처형을 당하고 난 후, 서소문 밖에 목만 매달린 채 피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교룡산성의 역사는 그렇게 피의 역사로 끝이 나고, 슬픈 역사를 알리 없는 5월의 비만 추적거리며 내리고 있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일대에는 사적 제471호인 위봉산성이 있다. 위봉산성은 조선 후기 변란을 대비하여, 주민들을 대피 시켜 보호할 목적으로 축성한 산성이다. 험준한 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숙종 원년인 1675년에 시작하여, 숙종 8년인 1682년에 걸쳐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위봉산성을 처음 찾아갔을 때는 벌써 7 ~ 8년 전 이었나보다. 당시에는 지방문화재였던 이 산성이, 2006년 4월 6일자로 사적으로 변했다.

위봉산성은 성벽 둘레가 약 8,539m에 성벽 높이는 1.8 ~2.6m 정도이며, 높은 곳은 5 ~ 8m에 이른다. 성 안의 관련 시설물로는 성문 4개소와 암문지 6개소, 장대 2개소와 포루지 13개소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추정 건물지 15개소에 수구지 1개소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사적 제471호 위봉산성

비가 오는 날 위봉산성을 향하다

2월 27일, 토요일에 온다던 비가, 일요일 아침 일찍 눈을 떠보니 후줄근하게 내린다. 카메라가방을 몇 번이고 들러 매었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가까운 곳은 몇 번이고 다녀온 터라, 갈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야 길을 나섰다. 위봉산성에서 조금 더 지나면 있는 위봉사라도 다녀올 마음에서다.

위봉사를 가기 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위봉산성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산에는 비구름이 가득 끼었다. 정작 고개 정상에 있는 위봉산성 서문지 일대는, 그래도 짙은 구름은 끼지는 않았다. 우산을 들고 차에서 내려 산성을 한 바퀴 돌아본다. 저 멀리 산봉우리에는 가득 비구름이 끼어있다.



위봉산성은 일부 성벽을 제외하고는 성문, 포루, 여장, 총안, 암문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위봉산성을 축성한 것은 다른 산성과는 달리, 군사적 목적뿐만이 아니라 유사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축성한 성이라고 한다. 전주 경기전에 모셔진 이성계의 영정을 모셔 둘 행궁을 성 내부에 두는 등, 조선 후기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실제로 1894년 동학혁명 때 전주부성이 동학군에 의해 함락이 되자, 이곳으로 경기전에 모셔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옮긴 적이 있다.



7개 군의 군민이 동원되어 쌓은 위봉산성

위봉산성을 다 돌아보지는 못했다. 올 봄에 날이 풀리면 시간을 내어 한 바퀴 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서문일원은 성문의 성벽과 옹성, 그리고 성벽의 일부만이 남아있다. 도로를 내느라 끊어진 산성은 산 위로 길게 쌓아올렸다. 길 건너편 성곽을 둘러본다. 급한 경사면을 이용해 축성을 한 위봉산성은, 경사면이 바로 성벽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산성을 축성할 때는 인근 7개 군민이 모여서 쌓았다고 한다. 8년이나 걸쳐서 쌓은 성은 산에 있는 돌을 그대로 이용한 듯하다. 이 일대의 민가 축대에서도 성벽을 쌓은 돌과 같은 석재들로 쌓은 축대가 보인다. 골짜기에 축대를 쌓고 그 안쪽으로는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내었다.




여장을 쌓은 돌도 다듬은 돌이 아니고, 성벽을 쌓기에 적당한 돌을 이용했다. 위에는 큰 돌을 올려 무게를 주었는데, 이 돌은 전투시에는 공격용 무기로 사용도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총안으로 밖을 내다본다. 저 밑 계곡에서 밀려오는 적을 공격하기에는 적당할 듯하다.

옹성이 있는 서문지를 돌아보다

서문지를 돌아본다. 아치형으로 문을 만들고, 그 위는 서문의 위에 섰던 누각이 있었던 곳이라 위가 뚫려있다. 서문 밖으로는 옹성을 쌓았다. 대개 옹성은 낮은 편으로 쌓지를 않는다. 적이 공격을 하기가 어렵도록, 높은 곳을 골라 출입을 할 수 있도록 조성한다. 위봉산성 서문지의 옹성이 터진 곳도, 가파르게 성벽이 산을 타고 올라가는 쪽에 내놓았다.



만일 적이 성문을 깨기 위해 옹성 안으로 들어온다면, 사방에서 공격을 받게 되어있다. 옹성은 성을 보호하고 적을 섬멸하는데 있어서는, 꼭 필요한 구조였을 것 같다. 이 산성을 돌아보는데 빗줄기가 더욱 강해진다. 괜한 걱정을 한다. 예전에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성벽 위에서 파수를 보던 병사들은 어떻게 비를 피했을까? 비가 오는 날 오른 위봉산성에서, 지나간 옛 시간을 돌아본다.


(알림)이 글은 2011년 2월에 발행했던 글입니다. 지난 글을 재발행을 하는 것은 문화재를 늘 소개하고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가끔 이렇게 재발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점 양해를 바랍니다  

 

봄이 되면 길을 떠나고 싶다. 가족이 함께라도 좋고, 연인사이라도 좋다. 아니면 혼자 간단한 걸망 하나를 둘러매고 떠나는 길도 바람직하다. 어디로 떠나는 것이 좋을까? 이 봄에는 옛 함성이 들리는 성곽순례를 추천하고 싶다.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가족들이 함께 문화재를 찾아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만큼 우리생활이 여가를 즐길 줄 아는 생활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문화재답사를 하던 중 성곽답사를 하다가 보면, 운동을 하는 인근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도 건강을 위해서 산성주변을 산책하기도 하고, 걸음을 빨리해 운동을 하기도 한다.

충청수영성(2004, 2, 14 답사) 

 

건강에 도움을 주는 산성, 이래서 좋다

산성은 대개 산에 위치한다. 요즈음은 산성 입구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상당히 많다. 그런 곳은 사람들이 즐겨 찾고는 한다. 하지만 산성이라는 곳이 얼마만큼은 걸어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만큼 사람들에게 운동량을 요구하게 된다. 자연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산성이다.

산성을 오르는 길은 대개 숲이 우거져있다. 또한 산성 주변은 마을이 있기보다는 공기가 좋은 곳에 위치한다.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산성을 한 바퀴 돌다가보면,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는다. 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 때문이란 생각이다. 사람들이 흔히 찾아가는 곳이 아닌 산성중에서, 이 봄에 가족들과 함께 가볼만한 곳, 어디가 좋을까?

물론 이 열 곳 말고도 수많은 산성이 있다. 하지만 아직은 돌아본 산성이 다가 아니기에, 그 중에서 산책과 주변을 돌아보기에 적당한 곳을 정리해 본다. 이렇게 가족들과 함께 산성을 걷다가 보면, 아이들에게는 공부가 되고 건강에도 도움을 주니 좋은 여행이란 생각이다. 거기다가 가족들의 유대감까지 생겨난다면, 일석삼조란 생각이다.

문화재답사가가 추천하는 가볼만한 성곽 열 곳

 

남원 교룡산성교룡산성(2010, 9, 18 답사)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16-2에 소재하는 교룡산성. 해발 518m인 험준한 교룡산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둘레가 3.1km에 달하는 이 산성은 아직 완전히 복원이 되지는 않았다. 산성 바로 입구까지 차가 들어 갈 수가 있지만, 밑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산성 동쪽에 계곡이 있어 그곳에 반월로 된 출입구를 두었다.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장되는 교룡산성은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이 있어 좋은 곳이다.

교룡산성이 자리한 남원은 볼거리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인근에는 광한루와 남원성 등이 자리하고 있고, 교룡산성을 오르다가 보면 동학과 관련된 유적지도 보인다. 성 안에는 선국사 등 고찰이 있어, 그 길을 오르다가 보면 숲에서 풍기는 냄새가 좋다. 운이 좋은 사람은 봄기운에 코를 간질이는 산더덕의 향기를 따라, 자연산 더덕을 채취할 수 있기도 한 곳이다.


단양 적성단양 적성(2008, 8, 24 답사)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에 소재한 사적 제265호인 적성. 성곽 안에는 국보 제198호인 신라적성비가 있다. 적성은 ‘하늘아래 길게 누운 성’이라는 표현들을 한다. 중앙고속도로 상행선 단양 휴게소에서 바라보면 산허리를 감고 쌓은 적성이 보인다, 신라 진흥왕 때 축성된 적성은 길이가 932m에 달한다.

적성은 단성면을 통해 들어가기 보다는, 단양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대고 산성으로 오르는 것이 편하다. 단양휴게소에서 적성을 오를 수 있는 문이 나 있다. 적성은 오르는 길은 숲이 없어 햇볕에 노출이 되기도 하지만, 성 위를 오르면 세상이 발아래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 위에 올라 성벽을 타고 한 바퀴 돌아보면, 산성을 왜 쌓았는가를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하늘에 내가 닿고 그 아래 세상이 있어, 난 적성을 즐겨 오른다.’


무주 적상산성무주 적상산성(2009, 11, 14 답사)


사적 제146호 무주 적상산성은 적상면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 때에 축성한 것으로 추정하는 적상산성은 북창리, 포내리, 괴목리, 사천리 등 4개 리에 걸쳐있는 적상산 위의 분지를 에워싸고 있다. 절벽을 이용해서 돌로 축성한 대표적인 산성이다. 사실 적상산성은 봄보다 가을이 더 아름답다는 곳이기도 하다. 산에 있는 자연적인 돌을 이용해 성을 쌓은 적산산성은, 과거여행을 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곳이다.

적산산성 안에는 안국사가 자리하고 있고, 새롭게 복원을 한 사고가 있다. 사고 안에는 당시의 모습과 사고의 내력 등에 대한 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아이들과 함께 찾아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가 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장소로는 적함한 곳이다. 더욱 앞으로는 양수발전소 상부댐과 전망대 등이 있어서 좋다.


문경 고모산성문경 고모산성(2009, 3, 22 답사)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고모산에 자리한 포곡식 산성인 고모산성. 고모산성은 5세기경 신라가 북진을 하면서 축조한 최초이자 최대의 산성이다. 고모산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접전지역에 속해 있어, 늘 격전을 치렀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견훤과 왕건의 전투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을 거쳐 의병들의 주둔지 등으로 이용이 되었다.

고모산성은 역사적으로 전투를 가장 빈번하게 치룬 산성이기도 하다. 아마도 고모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인 위치 때문일 것이다. 고모산성의 주변에는 조선시대의 관성인 석현성과 명승 제31호인 문경토끼비리 옛길이 있다. 또한 신라고분군, 성황당, 주막거리등 다양한 문화유적이 산재하고 있어, 가족들과 함께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보은 삼년산성보은 삼년산성(2010, 10, 3 답사)

3년에 걸쳐 성을 쌓았다고 해서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한다.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 1-1에 소재한 사적 제235호이다. 입구 가까이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고, 산성을 오르는 길이 그리 멀지가 않다, 하지만 이 삼년산성은 둘레가 1,800m나 된다. 지금은 성안 길이 이어져, 산성을 한 바퀴 이어서 돌아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왕 13년인 470년에 처음으로 쌓았다고 전한다. 벌써 1,500년이 지난 고성이다. 아직도 복원을 계속하고 있으나, 중간에 보면 옛 성곽의 속 모습까지 볼 수가 있다. 삼년산성은 한 바퀴 돌아보는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 주말에 가족들이 함께 걷기에는 가장 적당한 거리일 듯하다. 천 년 전 과거로 회귀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성이다.


여주 파사성여주 파사성(2009, 10, 18 답사)


사적 제251호인 파사성.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파사산 정상에 쌓은 산성이다. 남한강의 물줄기를 따라 펼쳐진 평야와 구릉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성벽은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새로이 개축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복원이 되지는 않았지만, 남한강을 볼 수 있는 곳은 복원이 되어서, 주말이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 막국수 촌에 차를 대고, 천천히 걸어 오르면 15분 정도가 소요된다. 파사성 위에 오르면 저 멀리 구불거리며 흐르고 있는 남한강의 모습이, 옛 이야기라도 들려줄 듯하다. 주변에는 마애불 등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 함께 답사를 해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성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온 후 시원한 막국수 한 그릇은, 성을 돈 후의 허기짐과 갈증을 풀어주기에 적당하다.

그 외 네 곳

충청 수영성 사적 제501호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사진은 위에)

안성 죽주산성 경기도기념물 제69호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2008, 12, 2 답사)

제천 덕주산성 충북기념물 제35호 제천시 한수면(2009, 2, 28 답사)

하남 이성산성 사적 제422호 하남시 춘궁동 산36 일원(2011, 1, 3 답사)

 


옛 고분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인 것 같다.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에 소재한 사적 제239호 거창 둔마리 벽화고분은 고려시대의 무덤이다. 금귀봉이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산등성이에 무덤 한 기가 자리를 하고 있는데, 이 무덤 안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무덤을 원래의 모습대로 폐쇄를 해놓아 안을 볼 수는 없다. 다만 그 앞에 그려져 있는 자료를 통해 무덤 속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고려시대의 고분은 산등성이에 자리를 하고 있는데, 무덤 한 기만이 자리를 할 수 있는 좁은 터에 자리하고 있다. 양 옆으로는 급한 경사로 계곡으로 이어진다, 풍수지리적으로 이런 지형에 자리를 잡고 있는 묘가 명당이라는 것이다. 이 고분은 땅을 파서 판석으로 벽을 두르고, 그 안에 돌방을 마련한 횡혈식석실묘이다.



고려시대의 고분 둔마리 묘

둔마리묘는 마을을 지나 산등성이로 올라가야 한다.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에서 10여분 정도를 계곡을 끼고 걸어가면 비탈진 등성이에 묘가 몇 기 보인다. 주변에 있는 묘들은 모두 민묘라고 한다. 네모나게 판석으로 석실을 두른 묘는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해 놓았다. 인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문화재의 보존을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석실 묘 한 기를 사적으로 지정할 정도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둔마리 고분을 찾았을 때는 답사를 온 사람들이 묘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석실은 네모난 판석으로 주변을 두르고, 그 위에 흙을 덮은 형태이다. 흙 속으로 손가락을 조금 밀어 넣어보니, 흙으로 덮은 봉분 안에도 판석으로 덮여 있다. 주변과 덮개를 모두 판석으로 처리를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무덤 안에는 채색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무덤 안에 그려진 채색의 벽화는 묘 앞에 서 있는 안내판을 참조할 수 있을 뿐이다. 전체적안 그림을 묘 앞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묘는 이중의 무덤으로 된 돌방무덤으로 서쪽 돌방에는 한 개의 나무관이 있었지만, 동쪽 돌방은 비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서쪽 돌방에는 이미 사용을 했고, 동쪽의 돌방은 배후자를 모시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양쪽 돌방의 석실 벽은 모두 회칠을 하고 그 위에 흑,녹, 갈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동쪽 돌방의 동쪽 벽에는 6명의 선녀가 그려져 있고, 서쪽 돌방의 서쪽 벽에는 여자 2명과 남자 1명의 그려져 있다고 한다. 벽화는 악기를 연주하는 그림으로 불교사상을 중심으로 도교적 요소가 가미 된 그림이라는 것이다.





안내판에 보이는 그림으로 생각을 해보다.

무덤 앞에 세운 안내판에 그려진 벽화그림.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는 그림을 찬찬히 훑어본다. 이 둔마리 고분은 고려시대의 종교관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이다. 그림은 긴 장죽 같은 것을 입에 물고 오른손으로 붙들고 있다. 왼손은 머리 위로 치켜 올려 그릇 같은 것을 받치고 있는데, 그 안에는 과일 같은 것이 들어있다.

벽화를 사진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 정확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지만, 이 그림의 형태로 보면 비천인을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 고분이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한다면, 악기를 연주하고 한 손에 공양물을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형태라면 단순히 남녀의 그림이 아니라 비천인을 그린 것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발밑에 그려진 뭉실한 것이 구름과 같은 형태로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선녀들의 그림이 있었다는 것도 이 그림이 비천인일 가능성을 더욱 확신하게 한다.


그저 안을 볼 수 없다는 갓이 못내 아쉽다. 그러나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서 폐쇄를 시켜놓았다는 것에는 찬성이다. 고분 뒤로 돌아가 앞을 내다본다. 훤히 보이는 건너편 산자락이 아름답다. 영원히 머무는 유택이라 했던가? 그 안에서 천인들의 음악을 듣고 저 건너 피안의 세계를 그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둔마리 고분 앞에 서 있는 석인이 오늘따라 정겨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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