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산성, 3년간이란 시간을 들여쌓았다는 석축 산성이다. 신라 자비 마립간 13년인 470년에 처음으로 축조를 하였으니, 성을 쌓은 지가 무려 1,540년이 지났다. 그 뒤 소지 마립간 8년에 아찬 실죽이 일선군의 장정 3천명을 동원해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으므로, 삼년산성이라 불렀다고 했다.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 1 일대에 소재한 이 삼년산성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이 삼년산성은 5세기 후반 신라의 석축 산성을 쌓는 기술을 연구하는데 있어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신라 초의 석축산성, 그 대단한 성 쌓기

이 삼년산성은 신라가 서북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소중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성의 총 길이는 1,680m 정도이고,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 등이 남아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토기조각과 유물이 발견이 되어, 이 성이 오래도록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삼국통일을 하기 위한 전쟁시에는 태종 무열왕이 당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접견하였으며, 고려 태조 왕건은 이 성을 공략하다가 크게 패전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삼년산성은 견고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성의 높이는 최고 22m에 달할 정도로 지형을 이용해 높게 쌓았다. 성벽위의 폭은 8~10m에 이르며, 동서남북 4개소에 문지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빗길에서 삼년산성을 걷다

비가 뿌린다. 그치려니 생각했던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를 않는다. 성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성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들어섰다. 사적 제23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삼년산성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순간 그저 입을 벌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보아오던 그런 석축산성이 아니다. 마치 서구의 한 웅장한 고성을 방불케 하는 그런 성이다.




엇갈려 쌓기를 한 삼년산성과 서문의 문을 달아냈던 자리(아래사진 2장)

성이 터진 곳이 서문지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서문의 기둥과 문을 달아내었던 흔적이 있다. 그 오랜 세월 수많은 전화를 겪었을 삼년산성이다. 새롭게 복원을 한 성벽은 그저 놀라울 정도이다. 납작한 돌을 이용해 쌓은 성벽은 한 줄은 가로쌓기를 하였고 한 줄은 세로쌓기를 하여, 서로가 엇물려 튼튼하게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삼년산성은 남쪽과 북쪽은 성을 안과 밖을 모두 쌓아올려 철옹성을 만들어놓았다.

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걸어본다. 비는 계속 뿌려대지만 여기서 돌아설 수는 없다, 수많은 산성을 보아왔지만, 삼년산성과 같은 성은 처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서북치성을 비켜두고 보은사를 지난다. 성안에 쌓은 성벽의 높이가 이렇게 높다니. 당시 이 성을 무슨 목적으로 쌓은 것일까?




삼년산성을 보고 그 위용에 놀라다
 
북동치성 터를 지나 성벽을 따라 걷는다. 여기저기 허물어진 성벽으로 인해 위험하기도 하다. 조금만 건드려도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저만큼 성벽의 무너진 틈으로 돌출이 된 치성이 보인다. 남동치성 쪽으로 돌아가니 허물어진 성벽들이 산비탈에 덮고 있다. 무너진 곳의 성벽을 보니, 일반 성과는 달리 안에도 돌을 엇갈려 쌓기를 하였다.

잠시 멎었던 비가 다시 오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이미 천여m를 걸었는데, 뒤돌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사진을 찍느라 한 시간 남짓 걸어 다시 서문지 쪽으로 향한다. 복원이 된 이곳의 성벽을 바라보니, 그 장엄함이 눈에 보인다. 서문지 가까운 곳에 낸 치성은 둥근 원형에 가깝다. 치성 위로 오르니, 성벽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1시간 여를 조금 더 걸려 삼년산성을 돌아보았다. 비는 어느새 그치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비와 땀으로 젖은 옷이 차갑게 느껴진다. 서문지 안 암벽에는 암각화가 보인다. ‘아미지’라 쓴 이 글은 김생의 글씨라고 한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있는 삼년산성. 그 장엄한 산성의 모습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열망을 읽어낸다.




복원을 한 서문지 부근 성벽. 그 높이도 높지만 성 쌓는 방식이 특이하다. 치 위에 오르면 성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무도 성을 범접 할 수가 없다.

서문지 안쪽에는 암각서가 보인다. '아미지'라고 쓴 글씨는 김생의 필적이라 한다.

11만 명이나 되는 왜군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남원성을 지키고 있던 군관민은 서로가 하나가 되어 전투에 임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군은 호남을 범하지 못하면 승전하지 못했다는 판단으로, 전주성과 남원성을 공격한 것이다. 우군은 전주성을 공략하고, 좌군 5만 6천은 남원성을 공략하였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전라병마사 이복남 장군이 이끄는 병사 1천과,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군사로 남원성을 지키게 히였다. 1597년 8월 12일, 왜군은 남원에 도착하여 남원성을 에워쌓았다. 그리고 13일부터 16일까지 공격을 감행하였다. 당시 남원성에는 성 안에 6천여 명의 백성들이 살았다. 군관민 등 이들 1만여 명은 중과부족으로 혈전을 벌이다가,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남원성을 지키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은 만여 명의 군관민을 모신 만인의총과(위) 선조 30년인 1597년 8월 12일 1천여명의 아군 병사들이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위용을 떨치면서 행차를 하고 있다.(가운데) 그리고 1597년 8월 16일 처절한 혈투를 벌이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아래)

만인의총, 그 역사의 현장

남원시 향교동에 자리한 만인의총. 사적 제108호로 지정이 되었으나 이전으로 인해 해제가 되었다가, 1981년 사적 제272호로 재지정이 되었다. 정유재란 이후에도 수많은 폐해를 당한 만인의총이다. 정유재란이 끝난 뒤 피난에서 돌아 온 사람들은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1597년 9월에 용성관 동편에 유택을 조성하였다. 그 후 광해 4년인 1612년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곳에는 전라병마사 이복남 등 7충신을 모셨다.

효종 4년인 1653년에는 ‘충렬의사 액’이 하사되었고, 숙종 원년인 1675년에는 남원역 뒤 동충동으로 이건하였다. 그 뒤 고종 8년인 1897년 사우를 철폐하고 단을 설치하여 춘추로 배향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단소를 파괴하고 칠백의총 재산을 압수하는가 하면, 제사를 금지시키고 관련자들을 투옥을 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만인의총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와 충의문, 그리도 성인문과 위폐를 모신 전각(위로부터)

만인의총, 역사의 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분들이 영면을 하고 있는 곳이다. 초가을이라고는 해도 한낮의 따가운 햇볕은 땀을 솟게 만든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힘들고 지쳤지만,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고 계단을 오른다. 계단 위 대문인 충의문을 지나 성인문으로 들어섰다. 전각이 보인다. 충렬사다. 만인의 위폐를 모신 전각 앞에서 묵념을 올린 후 뒤편으로 돌아 계단을 오른다. 만인의총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

목이 메고 눈물이 흐르다.

묘역은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그 한편에 만인의총이란 비가 서 있다. 앞으로 다가간다. 갑자기 목에 메인다. 아주 오래전 우리 선조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던져버렸다. 그리고 이곳에 하나의 봉문만 덩그러니 남겨놓았다. 당시 얼마나 처절한 전투를 벌인 것일까? 변변한 무기도 없는 성내의 백성들은 곡괭이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항전을 했을 것이다.

고작 4천명의 군은 총으로 무장한 왜병을 맞아 살이 찢기고 피가 튀었을 것이다. 그렇게 4일 밤낮을 성을 지키기 위해 혈투를 벌였다. 만인의총 앞에 무릎을 꿇는다. 참 편하게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다. 선조님들의 이런 죽음으로 지켜낸 이 땅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누구랴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겠는가?




경내에 세워진 순의탑과 만인의총 옆에 세워진 비, 그리고 팔충신 사적비와 기념관 내부(위로부터)

이렇게 9월의 한낮에 고요하기만한 봉분 한기. 저 안에 만 명이나 되는 나라를 위해 장렬히 죽음을 택한 우리 선조님들이 계시다. 지금 우리는 저분들에게 어떤 후손들일까? 과연 저들에게 부끄럽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다. 오늘 이 자리에 고개를 숙인 또 하나의 모자라는 후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다. 이 아름다운 땅, 단 한 뙤기라도 빼앗기지 말라고.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이나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낙안읍성을 보면 그 형태를 잘 알 수가 있다. 남원읍성은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지역에 소경을 설치하면서 691년에 쌓은 네모난 형태의 평지 읍성이다. 처음으로 남원읍성을 축성한 것이 1,320년 전이었으니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남원읍성은 조선조인 1597년에는 왜군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중국식 읍성을 본 따서 네모반듯한 성으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길이는 2,5km 였으며, 높이 4m 정도로 높게 쌓아올렸다. 사방에는 문을 두었고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성곽 중간 중간에 치를 내었으며, 성안에는 71개소의 우물과 샘이 있었다.


사적 제298호인 남원성의 성곽

옛 영화는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

현재 사적 제29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남원성은 남원시 동충동에 자리한다. 교룡산성을 돌아 내려오면 광한루원으로 가는 큰길가에 성곽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는 그 일부만 남아있는 남원성은 보기에도 매우 견고한 성이었을 것 같다. 1597년 성을 다시 축성 한 후, 그 해 8월에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왜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에 연합군은 남원성에서 왜군에게 크게 패했으며, 이때 싸우다가 전사한 병사와 주민들의 무덤이 바로 만인의총이다. 그 후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 때 많이 허물어져, 현재는 약간의 성터 모습만 남아있다. 남원성은 그렇게 역사의 아픔을 안은 채 이제는 찾는 이 하나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직선으로 축성을 한 남원성. 당시에는 네모난 읍성이었다.

특별한 남원읍성의 구조

남원읍성의 성 모습을 만인의총에 있는 전시관 안에서 대충 둘러보고 와서인가, 성위에 올라 남아있는 성곽을 보니 그 안에 자리했던 성 내의 모습이 그려진다. 읍성 안에는 남북과 동서로 직선대로가 교차하고, 그 사이로 좁은 직선도로가 교차하여 바둑판 모양의 도로로 구성된 시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와 도시가 들어서면서 성곽은 대부분 헐려나갔으나, 시내 중심부의 도로는 지금도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다.

만인의총 전시관에 있는 남원읍성 모형. 네모난 성에 길이 바둑판처럼 반듯하다.

이러한 구성을 하고 있는 현재의 남원 시가지를 보아도, 과거 성내의 길의 구성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일부만 남아있는 성위로 오른다. 평지에 성을 쌓다보니 밖으로는 돌로 축성을 하고, 안으로는 흙으로 그 뒤를 단단히 쌓아 올렸다. 성 위로는 군사들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을 내었는데, 성은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있어 당시 남원읍성이 네모반듯한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간에는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구성한 치가 돌출이 되어있다.




성곽에서 돌출이 된 치(맨위) 치가 돌출이 된 모습(두번째) 치에서 바라다보이는 성벽(3, 4) 치는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치의 구조 등으로 보아 당시 남원성이 그리 쉽게 적의 수중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성에서 적에게 패해 만여 명의 전사자가 났다면, 그 당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가늠이 간다. 지금은 그저 성을 끼고 달리는 차들의 소음만 한가한데, 당시 이 성 위에서는 성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성내의 병사들과 백성들의, 애끓는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오늘따라 더욱 슬퍼 보인다.

전북 기념물 제9호인 교룡산성. 남원시 산곡동 16-1에 소재한 이 산성은 해발 518m의 교룡산의 천연적인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으로 그 둘레는 3,120m이다. 9월 18일 한 낮의 날씨는 아직도 무덥다. 남원으로 들어가 교룡산성을 오르는 길은, 그리 가파르지만 않지만 그래도 꽤나 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다. 성은 보이지를 않는데 숨이 차고 땀은 비오 듯 흐른다.

산성 앞으로 가니 성 안에서 무슨 공사를 하는지, 성벽이 터진 곳으로 차들이 드나든다. 차를 왕래하게 하느라, 물길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공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물길을 막아 찻길을 내 놓은 것이 아쉽다. 교룡산성은 언제 축성이 되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성을 쌓은 방식이나 입지의 형태로 보아 백제 때의 성으로 보인다.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남아있어

현재는 산성의 동문인 홍예문과,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옹성이 남아있다. 그리고 동문의 양 편으로 길게 복원을 한 성곽이 보인다. 군데군데 아직 성벽이 남아있다는 교룡산성. 신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쌓았다는 이 산성은, 우리나라 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남원은 『춘향전』의 무대인 광한루원과, 매월당 김시습의 단편소설인『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인 만복사지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만큼 역사 속에서 정치, 군사, 문화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교룡산성 안에는 우물 99개와 계곡이 있어, 산성 주변의 주민들이 유사시에 대피나 전투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좋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아직도 성 안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군기터 등 당시의 흔적이 보인다.




주변 성곽 중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해

남원에는 주변지역을 합해 20여 개의 산성이 있던 곳이다. 그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그 중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 바로 교룡산성이다. 고려 말에는 이성계가 퇴각하는 왜구를 맞아 싸웠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는 승병장 처영이 성을 수축하였다고 한다. 성안에는 무기고를 비롯해 별장청, 장대, 염고, 산창 등의 시설이 있었다. 전쟁에 대비해 정유재란 시에는 남원도호부 관내인 운봉, 장수, 임실, 구례, 곡성, 담양, 옥과 등의 양곡을 거두어 교룡산성에 보관하였는데, 각 지역의 곡식을 저장하는 곡성창, 구례창 등의 곡식창고가 있었다.



홍예문 안에 줄지어 선 비(위) 홍예문 안에서 밖을 보면 옹성이 드러 쌓고 있다(가운데) 홍예문 위에서 본 옹성 

홍예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다. 홍예문 아래편에는 문틀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움푹 파인 돌에는 물이 고여 있어, 흔적 없이 사라진 당시의 영화를 아쉬워한다. 높이 4.5m의 성벽은 단단하게 축성이 되었으며, 축성 당시에는 치첩 1,016개소에 달했다고 하니, 교룡산성의 축성이 대단했음을 알 수가 있다.

홍예문 안쪽으로는 줄지어선 공덕비 등이 보인다. 홍예문의 위로 올라서니 비탈길에 조성한 옹성이 단단해 보인다. 성문을 공격하려면 그 옹성 위에서 쏟아지는 불과 기름, 돌 등을 피하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을 것 같다. 동문 옆으로는 산 정상부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빠져나가고 있다. 아마 저곳에 수문이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교룡산성 안에는 물이 풍부했다는 것을 일 수 있다.



백제 때 축성한 교룡산성. 성곽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을 밟으며 걸어본다. 발아래 밟히는 풀들이 소리를 낸다. 백제 때에 처음으로 축성을 하여,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전쟁의 회오리를 거쳤을까? 아마 그 옛날 우리의 선조들도 이렇게 성곽을 밟으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느라 밤잠을 설치지는 않았을까? 성 안에 자리한 초옥에서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하다. 그렇게 9월 중순 땀을 흘리며 찾아간 교룡산성은,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은 대개 산 위에 자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기쉽다. 그러나 성의 종류를 보면, 산의 정상부를 에워싸고 자리를 잡은 산성과, 수원 화성과 같이 평지와 산을 이용해 쌓은 성곽이 있다. 또 한 가지는 홍주성과 같이 평지에 성을 마련한 경우도 있다. 명칭을 보아 ‘○○산성’이란 명칭이면 산을 이용해 성을 쌓은 것이고, ‘○○성’이면 평지에 쌓은 성으로 볼 수가 있다.

사적 제231호 홍주성은,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 소재한다. 지금은 성벽의 일부가 사라지고, 성곽과 조금 떨어진 곳에 동문이었던 조양문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이곳까지 성이 연결이 되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8월 29일이 국치 100년이 되는 날이다. 왜 하필 많은 성 가운데 홍주성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홍주성이 국치를 막기 위해 피를 흘린 항일의 성이기 때문이다.


사적 제231호 홍주성과 홍주성 전투그림. 칼과 죽창을 든 의병들이
신식무기인 총을 가진 일본군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다.

을사보호 조약을 반대한 의병들의 항거

국치의 시작이기도 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한 의병들이 전국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일본군과 싸움을 벌였다. 홍주성에는 의병장인 민종식과 이세영, 안병찬 등이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에 있던 일본군들을 섬멸하고 3일간 항쟁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한 곳이다.

의병장 민종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정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5월 홍산에 의병을 집결시킨 뒤, 충청남도 서부지역인 서천과 보령, 청양 등 충남의 요지를 점령한 후, 서부의 중심지인 홍주까지 점령했다. 홍주성을 점령한 의병들이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를 차지하게 되자, 일본군은 이해 5월 31일 홍주성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의병 83명이 죽고, 145명이 포로가 되었다.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홍주성. 네모난 돌을 짜맞추어 견고하게 쌓았다.
성벽에 달라붙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돌출이 된 치가 보인다(가운데와 아래)

의병장 이세영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홍산에서 민종식을 도와 참모장으로 홍주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을 받고 크게 패한 뒤 붙잡혀, 종신유형을 받고 황주로 유배되었다. 의병장 안병찬은 민종식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홍주성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그 뒤 변호사가 된 안병찬은 1909년 안중근의사 공판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경술국치 이후 1919년 3.1만세운동 발발 후 만주로 망명했다.

비록 의병들이 성공을 하지 못했다고 해도, 홍주성에 머물면서 신식화기를 가진 일본군과 3일간이나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곳이다. 홍주성이 언제 축성이 되었는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조선 초기 문종 원년인 1451년에 성을 고쳐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홍주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문터인 듯하다. 성벽이 트여있는 안으로 들어가니 와편이 보인다. 전각이 이곳에 있었음을 뜻한다. 

조선 초기 성 쌓기 방법을 충실히 따른 성곽

홍주성은 문종 때 성 주위가 4,856척에 높이가 11척이라고 적고 있다. 일부가 사라진 홍주성은 홍성군에서 예전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중이라고 한다. 성을 따라 천천히 걸어본다. 네모난 돌들을 가지런히 맞춘 성벽에는 담장이가 타고 오른다. 성의 연륜을 짐작케 하는 광경이다. 성은 지형을 이용해 쌓았으며, 지리적으로 비워져 허전한 곳에는 치를 내어 보강을 하였다. 잠시 걸어가니 성벽이 트인 곳이 나온다. 아마 성문이 있던 자리인 듯하다.

터진 곳으로 들어가니 한편에 와편이 쌓여있다. 이곳에 누각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홍주성에는 모두 세 곳의 문이 있었다. 동문인 조양문과 북문과 서문이 있었는데, 위치로 보아 이곳이 서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안에는 몇 기의 비들이 보이는데, 그 중 하나의 비는 충남 지정 문화재자료 제166호인 ‘홍주성 수성비’이다.


홍주성을 보수한 것에 대한 기록을 한 수성비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작고 볼품없는 비 하나. 이 비는 순조 24년인 1824년 황폐된 홍주성을 보수하면서 세운비로, 내용을 보면 순조 23년 이곳에 부임한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가 상을 수리하기로 하고, 그 해 8월에 시작하여 11월에 마쳤다고 기록을 했다. 완성된 성의 길이는 7리이고, 공사시간은 100일이라는 것이다.

한양을 지키는 길목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는 홍주성. 오늘 이 성을 다시 기억하는 것은 잃어버려서는 안 될 우리의 아픈 역사를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아픈 기억이라고 해도 그것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지운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그 아픔을 거울삼아, 다시는 가슴 찢기는 또 다른 형태의‘국치’를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성벽 위에 난 길과 담장이로 인해 아름다운 성벽. 이 아름다움은 수많은 선조들의 피로 지켜진 것이다.
다시는 이렇게 피로 지켜지는 역사는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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