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248-1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2층집이 있다. 현재 등록문화재 제19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집은, 한식 민가의 건축기술을 기반으로 한 2층 집이다. 근대에 지어진 농촌지역의 집으로는 드물게 보이는 2층집으로, 당시의 농촌 건축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5월 3일 찾아간 진안군. 마령면 소재지를 지나 전주 방향으로 가다가 만난 강정리 길가에, 진안 전영표 가옥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고택답사를 연재하는 나로서는 이런 안내판이 보이면 그보다 더 반가울 수가 없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집을 찾는데, 영 고택다운 집이 보이지를 않는다. 마을 주민들에게 물러 겨우 집을 찾았다. 담장이 아니라면 그저 지나칠 듯한 집이다.


꽁꽁 닫힌 철문, 담 밖으로만 돌아

전영표 가옥은 일제강점기 지역의 민간인 목수에 의해 지어진 집으로, 당시 지방 목수들의 기능을 살펴 볼 수 있는 집이다. 당시에 이렇게 2층으로 집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은, 상당한 재력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원래는 기와지붕이었을 것이나, 현재는 슬레이트 지붕으로 이어 놓았다.

최근에 담장을 새로 조성한 듯한 이 집은, 전통 돌담에 철 대문을 달아놓아 보기에도 이상하다. 안을 마주하면 중앙 뒤쪽으로 이층으로 올린 안채가 서 있고, 우측에는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의 맞은편에는 헛간채가 서 있는데, 블록 담으로 꾸민 것으로 보아 나중에 다시 지은 듯하다.




이층은 유리창을 넓게 달아내

일제강점기에는 지역에도 2층집을 많이 지었다. 이런 유풍은 대도시나 지방의 작은 도시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 같다. 한식으로 짓기도 하고, 일본식의 건물도 상당수가 건축이 되었다. 이 집은 궁이나 사찰 등을 짓는 대목수가 지은 것이 아니라, 지역에 있는 일반 목수들이 지은 집으로 당시 목수들의 기능을 살펴 볼 수 있는 집이다.

진안 전영표 가옥은 1924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 집을 지은 건축주인 전영표는 집을 크게 지으면 안된다고 하였다고 하지만, 이집은 마을에서는 눈에 EL게 큰 집이다. 집 앞으로 가니 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주민 한 분이, ‘문화재라고 하는데 담장만 새로 해서 멀쩡하지 볼 것이 없다’라고 하신다. 아마 그 분들이야 등록문화재라는 것이 얼마만한 가치를 갖고 있는지 모르는 듯하다.



안채는 정면에서 바라보면 좌측에 부엌을 내고 옆으로 안방을 드렸다. 중앙의 두 칸은 앞에 툇마루를 놓았으며, 우측으로는 반 칸 정도의 누마루를 깔았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담장 밖으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집안을 살펴 볼 수밖에.

이층은 세 칸으로 되었으며 좌측 한 칸은 담벼락을 구성하고, 우측의 두 칸은 커다란 유리창을 달아냈다. 아마도 이렇게 커다란 유리창문을 앞뒤로 달아낸 것은, 주변의 경치를 보기 위함이었는가도 모르겠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안에 있는지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평범한 2층 집은 당시의 유행이었을 듯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전영표 가옥. 당시 지역 목수들의 기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집이라고는 하지만, 특별한 꾸밈은 보이지를 않는다. 다만 그 당시에 2층집들이 많이 지어졌고, 이런 시골의 소도시에서도 이런 집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그 당시에 유행하던 가옥의 형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안으로 들어가 꼼꼼히 살펴볼 수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안채 뒤편에 장독대가 있고, 사랑채의 앞으로는 작은 연못도 보인다. 건축주인 전영표는 당시 이런 집을 지을 정도의 재력가였던 것 같다. 정원에는 각종 꽃나무들이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있다. 기와 대신 올린 슬레이트가 조금은 부담을 주기는 하지만.


전북 진안군 상전면 운산리에 소재한 전북 유형문화재 제10호인 운산리 삼층석탑. 이 탑을 찾아들어갔다가 고생을 어지간히 했다.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어, 엉뚱한 곳으로 길을 잡는 바람에 산등성이까지 눈길을 걸어야만 했다. 문화재를 알리는 이정표는 길을 찾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정말로 소중한 안내자이다.

탑이 서 있는 마을 이름을 내후사동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이 말해주듯이, 운산리 삼층석탑은 옛 절터에 서 있는 탑이다. 그러나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탑의 모습을 보니 옮긴지가 그리 오래지 않은 것 같다. 탑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고, 탑에는 앞면이라고 먹물로 쓴 글씨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왜 이 탑을 옮긴 것일까?

전북 유형문화재 제10호인 진안 운산리 삼층석탑

탑을 지키는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울어 

원래 운산리 삼층석탑은 현재의 자리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이 서있는 땅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이 탑을 진안읍으로 옮겨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나오자 마을에서는 이변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주민들은 밤마다 꿈을 꾸었는데 흰 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나, 울면서 지금의 자리에 안치를 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 두 사람의 꿈도 아니고 마을사람들이 자주 이런 꿈을 꾸게 되자, 마을에서는 이 탑을 현재의 자리에 새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이 탑을 ‘신들린 탑’ 이라고 부른다. 정월 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촛불을 켜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고 한다. 운산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탑으로 추정하는데,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과 같은 양식으로 조성이 되었다.





평범한 삼층석탑, 찾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천연기념물인 진안 천황사 전나무를 찾아가다가 보니 ‘운산리 삼층석탑’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전나무를 답사하고 난 뒤 돌아 나오는 길에, 운산리 삼층석탑을 찾아들어갔다.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다가 보니 양 갈래 길이 나온다. 어디로 가야할까? 안내판 하나가 없다. 이럴 때는 대개 직진을 하면 문화재를 만날 수가 있기 때문에, 직진을 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을 지나 길이 좁아진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을 물을 집 한 채도 없는 눈길을 아무리 가도 탑이 나오지를 않는다. 그렇게 계속 간 것이 결국엔 임도를 따라 산등성이까지 올라가고 말았다. 답사 시간은 자꾸만 지나간다. 겨울 해는 짧기만 한데, 마음이 조금해진다. 기던 길을 급히 돌아 나오다가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이 마을이 아니고, 들어오기 전 마을이라는 것이다.


처마는 약간 위로 올려졌다. 받침돌에는 기둥을 상징하는 우주와 탱주가 양각되었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다시 길을 돌아 나와 내후사동으로 들어갔다. 마을입구에 서 있다는 삼층석탑은 마을을 몇 바퀴를 돌아도 보이지가 않는다. 도대체 안내를 하는 표시 하나만 길이 바뀌는 곳에 세워주었어도, 이런 고생은 면할 수 있을 텐데. 다시 마을주민에게 물어볼 수밖에. 바로 앞에 탑을 두고 찾아다닌 것이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갔더니 탑이 보인다. 그러나 길에서는 안쪽에 숨겨진 듯한 탑을 찾기란 수월하지가 않다.

운산리 삼층석탑은 이층의 가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올렸다. 위층 기단의 몸돌에는 탱주와 우주가 양각되어 있고, 일층 몸돌의 한 면에는 문이 새겨져 있다. 나머지는 모두 평면이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으로,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다. 탑의 머리부에는 꼭대기에 동그란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가 남아있다.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가 왜소해 보이고, 일층의 몸돌에 비해 이층이 급격히 줄어들어 균형미는 떨어진다.


1층 몸돌에는 문짝이 새겨져 있고, 받침돌 하단에는 안상이 음각되었다.

아래받침돌에는 안상을 새겨 넣었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 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변형된 모습이 고려 초기에 조성된 탑으로 보인다. 탑 하나를 찾기 위해서 두 시간이나 소비를 했다. 하지만 이 탑 하나가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니 어찌하랴. 그나마 찾았으니 다행이랄 수밖에. 흙이 아직도 묻어있는 운산리 석탑이 주는 기쁨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전나무가 천연기념물 지정을 받은 것은 2008년 6월 16일이다. 전나무는 ‘젓나무’라고도 부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늘푸른큰키나무를 말한다. 전나무는 흔히 펄프원료나 건축자재, 가구용을 많이 사용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전신주로 이용하기 위해 많이 심었다.

전나무의 높이는 20~40m, 지름은 일반적으로 1.5m 가량이 된다. 고산지대에서 잘 자라는 전나무는 나무껍질이 잿빛이 도는 암갈색으로 거칠다. 전나무도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비늘조각 모양의 표피를 갖고 있으며, 작은 가지는 회갈색이고 얕은 홈이 있다. 이러한 전나무 중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 온 것이, 바로 천연기념물 제495호로 지정이 된 전북 진안의 천황사 전나무이다.



겨울철에 만나본 전나무의 멋

천연기념물 중에서 나무들을 답사할 때는 계절에 맞추어야만 제대로 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느티나무, 이팝나무 등은 봄철과 여름철에, 은행나무는 여름과 가을에 답사를 한다. 그러나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과의 나무들은, 어느 때 찾아가도 좋은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진안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나무 천연기념물을 있다는 소리를 전해 듣고, 며칠을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

최초의 전나무 천연기념물이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자그마치 수령이 800년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그 위용이 어떠한지가 궁금하여 조바심이 난다. 무엇을 보아야겠다고 작정을 하면, 하루라도 빨리 가서 보지 않으면 병이라도 날 듯하다. 일요일 오후에 길을 잡아 진안으로 향했다. 남원을 출발하여 1시간 30분, 천황사 전나무가 있다는 진안군 정천면 갈용리로 접어들었다.


전나무 최초로 천연기념물 지정을 받은 진안 천황사 전나무

천황사를 옆으로 두고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길이 미끄럽다. 더구나 추위에 여기저기 얼음이 언 곳도 있다. 조심스럽게 길을 올라 전나무가 있는 곳까지 닿았다. 밑에서 바라보는 전나무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저렇게 거목으로 자란 전나무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거목으로 자란 전나무의 아름다움

이 전나무는 천황사 남쪽 산 중턱에 자리한 ‘남암’이라는 암자의 번성을 기원하여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문화재청의 안내판에는 수령이 400년으로 되어 있고, 그 옆 석재로 된 안내판에는 800년으로 되어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정확한 것일까? 나중에 내려오다가 마을의 어르신께 물으니 800년이 지났다고 말씀을 하신다. 아마 그냥 보기에도 그 정도 수령은 되었을 것만 같다.

물론 문화재청에서 적은 것은 과학적인 측정방법에 의해 조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또한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전나무의 확실한 수령은 추정이 불가능한 것이 아닐는지.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것을 뜻하나 보다. 그러나 이 전나무가 천황사에 속한 암자인 남암의 번성을 기원하기 위하여 심었다고 하면, 의외로 해답은 간단하다. 천황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5년에 무염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그렇다면 그 뒤에 남암을 세웠다고 해도, 800년이라는 수령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밑동 한편에는 알 수 없는 구멍도 있어

이 전나무의 크기는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높이 35m정도에 가슴높이의 둘레는 자그마치 5.7m 정도이다. 이렇게 큰 전나무는 보기기 힘들다. 나무의 폭은 동서로 16.6m, 남북으로 16m 정도의 크기로 자랐다. 나무 밑동은 옹이가 진 듯 대단하다. 나무의 밑에서 위로 오르며 거북의 등껍질 같은 표피로 쌓여있고, 가지는 윗부분에 나 있다.

나무 밑을 돌다가 보니 팔이 드나들 정도의 구멍이 있다. 안을 들여다보아도 잘 보이지가 않는다. 무슨 짐승의 구멍 같기도 하다. 돌을 하나 던져보았다. 바로 소리가 나질 않는다. 이럴 때는 괜한 상상도 해본다. 현재까지 알려진 우리나라의 전나무 중에서 가장 크다는 천황사 전나무. 전나무 중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최초의 나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밑동에 난 구멍과 수령이 800년임을 알리는 안내석

날은 쌀쌀하고 걸어 오르는 길이 미끄럽고 가팔라 힘은 들었지만, 오랜만에 만나 본 전나무의 아름다움에 반해 추운 줄도 모르겠다. 이런 즐거움만 있다면, 문화재 답사 길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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