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보산(七寶山), 수원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239m의 높지 않은 산이다. 조선시대에는 치악산으로 불렸다고 하며, 화성지에는 칠보산을 화산의 주맥으로 기술하고 있다. 칠보산은 원래 여덟 가지 보물이 있다고 하여 팔보산이었으며, 그 여덟 가지의 보물은 산삼, 맷돌, 잣나무, 황계수탉, 범절, 장사, , 황금 닭이 있었다고 한다.

 

그 여덟 가지 보물 중에 하나인 황금 닭을 가져가버려 칠보산으로 변한 것이라고. 이 칠보산에는 용화사라는 크지 않은 절이 자리하고 있다. 칠보산을 오르는 등산로 중 제2코스인 용화사 길은 산중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원시 권선구 호매실동 905에 자리한 용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용주사의 말사이다.

 

 

용화사는 절이 언제부터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는지, 또 누가 중창을 한 것인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다만 구전에 의하면 용화사는 조선조 후기에 세워진 절이라는 것이다. 이 절의 대웅전에는 마애불을 주물로 모시고 있는데, 그 마애불의 형태나 가장 오래된 전각인 대웅전을 보면 200년 정도 지난 절로 추정된다.

 

지방 장인의 솜씨로 보이는 투박한 마애불

 

17, 칠보산으로 길을 잡았다. 칠보산 등산로를 몇 곳 돌아보고 난 뒤 당수동 시민주말농장도 함께 돌아볼 생각으로 길을 나선 것이다. 용화사는 칠보맷돌화장실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겨도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절 입구는 공사를 하느라 부산한데 그곳을 피해 대웅전으로 향했다.

 

 

대웅전은 처마가 약간 뒤틀린 듯하다. 주초를 보니 잘 다듬어진 원형 주초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주초의 형태로 보아 이 대웅전이 지어진 것은 100년이 조금 지났을 듯하다. 이 대웅전 안을 들여다보니 정면에 마애불 한 기가 놓여있다. 선주형으로 다듬은 돌에 마애불을 선각했는데 조금은 투박한 형태이다.

 

이런 형태로 보아 이 마애불도 조선조 후기에 지방 장인에 의해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선각이 된 마애불은 육계가 크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눈은 좁고 길게 표현했으며 입이 작은 편이다. 전제적으로 보면 잘 조형되지는 않았지만 깊게 판 선각으로 인해 무게가 있어 보인다.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제작연대 알아보았으면

 

마애불을 조성한 바위는 우측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법의는 양 어깨에서 흘러내렸는데 가슴이 깊게 파여 있다. 하반신은 가려져 있어 정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마애불을 조성한 바위의 크기로 보아 좌상으로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 주변에 두광은 후에 누군가에 의해 다시 조성된 듯 둥그렇게 파 놓았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했는데 삼도치고는 그 간격이 너무 넓어 이상하게 보인다. 오른 손은 가슴께로 들어 올렸으며 왼손은 정확하게 알아볼 수가 없다. 용화사 종무소에 들려 혹 연대를 알아볼 수 있을까 해서 물어보았지만 알 수가 없다는 대답이다.

 

 

비지정문화재이긴 하지만 현재 대웅전에 모셔진 마애불이고 보면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조성연대라도 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투박하게 조성은 되었지만 나름 힘이 있어 보이고 아직은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으로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가끔은 이런 비지정 문화재를 만나는 일이 생긴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답답하기 일쑤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를 하고 싶지만, 알고 있는 식견이 짧은 것을 어찌하랴. 그저 답답한 마음을 털어버리려고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려 무능함을 다시 탓할 수밖에.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 51에 소재한 용화사. 그 경내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1호인 ‘이천자석리석불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의 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용화사 경내 노천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불입상이 자리한 곳은, 예로부터 미륵당이라고 전해진다.

 

전체 2개의 돌로 이루어진 이 석불은 머리에 원형의 넓은 갓인 개석을 쓰고 있으며, 긴 타원형의 얼굴에는 이마 중앙에 백호가 표현되었다. 양눈썹과 는, 돌출된 코와 입이 작게 표현되어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잃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간략하게 표현된 옷주름은 양 손의 표현과 더불어, 마멸이 심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용화사의 주존불

 

이 불상은 얼굴과 더불어 짧은 목, 몸체에 비해 좁은 어깨와 간결하게 처리가 된 옷주름 등을 볼 때 고려 후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용화사(龍華寺) 경내에 주존불로 노천에 봉안되어 있는 이 석불입상은, 높직한 석축을 쌓고 그 중앙에 석불을 모시고 있다. 뒷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이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기단이 이 석불입상을 조성할 때 있던 것이 아니다.  새로 조성을 한 것이다. 가슴 아래에 커다란 하나의 동과, 가슴 위 부분과 얼굴이 하나의 돌로 조성된 이 석불입상은, 모든 것이 간략하게 처리가 되어있다. 이는 고려 말 지방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천시의 경우 이러한 석불과 마애불 등이 딴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시장의 번영을 위해 세웠다고?

 

일설에는 고려 현종 9年인 1018年, 장호원읍 선읍리에 감무를 두어 그 아문을 설치하였을 때 시장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에서 건립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석불입상을 시장의 번영을 위해 조성을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대개 시장이나 마을의 안녕 등을 위한 것이었다면 석장승을 세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석리는 본래 음죽군 근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새롭게 조성된 지역이다. 여주군 소개면의 흑석동 일부와 가서면의 자은동 일부를 병합하여, 자은과 흑석의 일부를 따서 자석리라 하였으며, 설성면에 편입되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불입상을 시장의 번영을 위해 조성했다는 것은, 타당하지가 않다.

 

화강암의 두 개의 석재를 이용하여 조성을 한 용화사 석불입상. 일반적으로 석불의 경우 몸에 팔을 조각하는 것이 통례인데 비해, 이 석불입상은 그저 통으로 두 개의 돌을 포개놓고 얼굴의 형상을 조각한 것처럼 보인다. 비록 팔은 찾아볼 수 없고, 균형은 맞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많은 석불을 만나보았지만, 그 중에 가장 약식화 된 석불입상이었다는 생각이다. 한창 더위가 기승을 떨 때 찾아갔던 용화사 자석리 석불입상. 올 가을이 짙을 때 이곳을 다시찾아, 가을의 풍취와 어울리는 또 다른 모습이 보고 싶다.

우리나라의 부처님의 조형물을 잘 살펴보면 두 손의 형태가 다르게 표현이 되어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렇게 손을 어떻게 취하고 있느냐에 따라 각각 그 의미가 달라지는데, 이를 ‘수인’이라고 한다. 천안시 목천읍 동리 178에 소재한 용화사 경내에는, 거대 석불입상 1기가 서 있다. 이 석불은 4m에 이르는 거대석불로 통일신라시대의 조각기법을 잇고 있는 고려 초기의 석불로 보인다.

이 석불은 손을 가슴께로 끌어올려 오른손은 손바닥이 밖을 위로 향하고, 왼손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이를 ‘시무외여원인’이라고 하며, 모든 중생의 두려움과 고난을 없애주고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의미이다. 이 수인은 불교전래 초기에는 석가모니의 모습이었지만, 이후 아미타불, 미륵불 등 보편적인 수인이 되었다. 하기에 ‘통인’이라고도 한다.


나라의 염원을 담은 고려초기의 거대석불

고려 초기의 불상을 보면 대개가 거대석불로 조형이 되었다. 이는 고려의 숭불정책과 아울러, 거대왕국으로 지향적 염원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은 조각 수법이 매우 수려한 대형의 거불이다. 일반적으로 거대석불의 경우 그 조각기법이 다소 떨어지는데 비해, 이 석조여래입상은 나름대로 특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은, 머리 위 육계는 둥글고 나발은 선명하고 높게 얹혀 있다. 이마에는 백호가 양각되어 있고 두 귀는 크고 길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보이고, 전체적인 형태는 중후하지만 약간은 비만형이다. 불상의 얼굴은 갸름하고 복스러운 얼굴에, 눈은 지그시 감고 있다. 콧날은 오뚝한 편이며, 입은 작고 단정하다.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법의는 통견으로 표현을 하였으며, 가슴께가 깊이 파여져 있다. 일반적으로 가슴에 보이는 매듭 등은 보이지 않는다. 법의는 양 어깨에서 U자 형으로 흘러내리다가 무릎에서는 민무늬로 표현을 하였다. 거대석불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잘 잡혀있으며, 옷주름이나 U자형의 법의 등이 형식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부분에는 앞으로 석조입상과 분리된 발이 있는데, 이는 후에 놓여진 것으로 보인다.

처음 이 석조여래입상이 발견되었을 때, 일대에서는 많은 기와 편과 팔각연화대석편, 석탑부재 등이 흩어져 있고, 불상 주위로 원형 주좌가 새겨진 방형초석이 7점이나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는 석조여래입상이 전각 안에 모셔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면과 측면은 섬세하게 조각을 한데 비해, 후면은 쪼아낸 그대로의 형태가 남아있다.




전국을 다니면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석조불상들. 그 나름대로 특징을 보이고 있는 것은 지역의 장인들에 의해서 조각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석불들은 당시 조각을 한 장인들의 깊은 불심을 엿볼 수 있어 소중함을 느낀다. 이렇게 거대석불을 조형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을까? 단순한 조형물이 아닌 그 안에 내재된 숨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어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