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주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마지막 큰 만신이다. 스스로를 ‘만신’이라고 자처하는 고성주는, 4대 째 경기도 굿제를 이어오고 있다. 그 중 고성주를 비롯한 3대가 독자적인 가계로 이어진다. 중간에 고성주에게 내림굿을 주관한 신어머니인 경주 최씨를 빼고도, 조모 - 고모 - 고성주로 이어지는 순수한 무가(巫家)의 집안이다.

 

물론 그 윗대의 만신들과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굿거리의 절차는 항상 대물림을 하면서 신의 세계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가계의 전승은 무형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는 가장 큰 자산으로 본다.

 

 

어려서부터 익힌 춤과 노래솜씨 뛰어나

 

“저는 만 18세가 되던 해 내림을 받았어요. 어려서부터 수원에서 살았는데, 몸이 아파 이천으로 다시 내려가 살았어요. 그러다가 다시 수원으로 올라오는 바람에 학교생활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죠. 일 년이면 한 두어 달만 괜찮고 나머지는 골골했죠. 그러다가 화성재인청 이동안 선생님께 가서 재인청 춤과 소리 등을 배우면서 몸이 좀 좋아졌어요. 당시는 저를 보고 초립동이라고 불렀죠.”

 

어려서부터 기구한 삶을 살았다. 몸이 마르고 며칠씩 물 한 모금 먹지 않다가도, 또 먹을 때는 엄청 먹어 치웠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아는 소리를 해 주변에 눈총을 산 일도 허다했단다.

 

“내림을 받고나서 이천 대월면 송라리 뒷산을 대명산이라고 하는데, 그곳에 가서 탱화하고 놋쇠그릇, 관음보살, 대감항아리, 책 두 권을 가져왔어요. 예전에는 가족들이 그곳에서 살았다고 해요. 지금은 아무도 안 계시지만, 제 뿌리가 그곳인가 봐요.”

 

 

고성주는 요즈음의 사람들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내림을 받고나서 문서를 익히고 재주를 익히는데 한 10년은 실히 걸린 것 같다고 한다. 경기도 안택굿은 적어도 그 정도의 학습기간을 잡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요즈음 사람들처럼 몇 달 뚱땅거리다가 나가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10년 세월은 배워야 안택굿의 장단 가락, 징, 춤사위, 거성, 노래, 사설 등을 익힐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저는 사람들에게 점을 신을 모시기 전부터 보아 주었어요. 괜히 지나는 사람을 붙들고 아는 소리를 하고요. 신어머니인 경주 최씨 어머니 집에 와서 있었는데, 어머니가 굿을 하러 가면 사람들을 보고 얼마를 가져오라고 했으니까요. 한 3년 신어머니 집에서 음식 하는 법 등을 배웠는데, 당시는 머슴살이를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손님들이 오면 점을 보아주고 굿을 떼고는 했죠. 그러다가 한 3년 뒤에 최씨 어머니가 전대자루 하나를 만들어 주면서 나가서 시주를 해오라고 하데요. 그래서 인계동서부터 매교동 일대까지 3개월을 다녀서, 돈 67원하고 쌀 두말 조금 넘게 걷었어요. 그래서 내림을 했죠. 굿을 처음 한 것은 내리면서 바로 굿을 했어요. 수원 큰 만신들이 굿판에 데리고 다니는 바람에 빨리 배웠죠.”

 

첫 굿판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해

 

처음 굿판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이 난리를 쳤단다. 당시에는 밤을 새워 굿을 했는데, 사람들이 춤 잘 추고 소리 잘하는 애기만신이 나왔다고 자리를 뜨질 않았다는 것. 경기도 안택굿에 어떤 특징이 있느냐는 질문에 깊은 한 숨을 쉬기도 했다.

 

“경기안택굿은 굿 속에서 마음에 닿는 느낌이 있어요. 사람들을 울리고 웃고, 함께 춤을 추는 그런 굿이에요. 예술적이면서도 신성이 함유된 굿이고요. 특히 굿판에서 세상사는 방법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굿이죠. 한 마디로 살아있는 굿이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일부 사람들은 경기도 안택굿이 서울굿과 비슷하다고 말들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예요.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한양 성내에서 굿을 할 수가 없었는데, 어떻게 서울에 안택굿이 있을 수가 있었겠어요. 수원을 비롯해 안산, 시흥, 화성, 용인 등지에서 큰 만신들이 많이 나왔던 것을 보아도 경기도 안택굿이 본류라고 보아야 하죠.”

 

선대의 신어머니에게서 학습을 할 때는 주로 어떤 것을 배우게 되었는냐고 묻자, 옷 개는 법, 굿의 순서대로 무복을 착용하는 법, 상 차리는 법, 상 차리는데 필요한 음식, 떡, 과일, 전, 사탕, 밤, 대추, 나물, 적 등을 어디에 차려야 하는지 까지를 다 배운단다. 그리고 나면 바라, 징, 장고 치는 법 등을 익히고. 그 후에는 덕담과 사설, 소리 등을 배워야 한다는 것.

 

 

경기도 굿은 독창적인 지역의 굿이다

 

“경기도 안택굿은 사설이 많아서 어떻게 소리를 해야 잘 할 수 있을까 등도 배웁니다. 거기다가 사람들을 만날 때 해야 하는 예의범절 등까지 배우게 되죠. 그래야 전통 안택굿의 맥을 이어갈 수가 있는 것이죠. 학습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다 허사입니다.”

 

제자들을 배출한 것은 자신이 학습을 하고 난 뒤 10년 정도가 지나서부터 가르쳤단다. 그 전까지는 자신의 학습도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고.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선대에게서 배운 학습을 복습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는 것. 요즈음 많은 무속인들이 남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애가 타기도 한단다. 내가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먼저 배워야하는데, 요즈음은 그저 자신도 잘 모르면서 남을 가르친다고 나서는 것을 보면 위험하단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동안 굿을 배운 제자들이 한 120명 장도는 될 거예요. 현재는 18명 정도가 배우고 있어요. 그런데 제자들이 배우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 마음이 아파요. 어렵기는 하지만 끝까지 가지 못하고 배우다가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만큼 경기전통 안택굿은 배우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배우겠다고 오는 사람은 가르쳐 주어야죠.”

 

굿판에 들어서긴 했지만, 그렇게 순탄하게 굿을 한 것은 아니다. 제가 집에 굿을 하러 가면 큰 만신들이 안당제석을 하라고 한 후, 굿을 마치고나면 느낌이 없다고 굿을 다시 하라고 한다는 것. 그럴 때면 창피하기도 하고 정말 그만두고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속으로는 울면서 굿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란다.

 

“그 때 선생님들은 신복 접는 법을 한번 알려주고, 그걸 따라하라고 해요. 못하면 바로 지청구를 받게 되죠. 정말 힘들게 굿을 배웠어요. 그리고 그렇게 배운 굿이기에 지금 남을 가르칠 수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들이 워낙 험하게 다루셨으니 까요. 자존심도 버리고 살아 온 세월이죠.”

 

 

 

8세에 내림굿을 받은 고성주의 신어머니인 경주 최씨는, 고성주의 친고모인 제주 고씨의 신딸이다. 또한 제주 고씨는 당대에 명성을 날린 남양 홍씨를 신어머니로 모셨다. 남양 홍씨는 고성주의 증조모이자, 제주 고씨의 친정어머니이다. 하기에 고성주의 신의 계보는 남양 홍씨 - 제주 고씨 - 경주 최씨 - 고성주로 이어진다. 이들 굿의 세계는 근 100년 이상을 경기도굿을 본바탕으로 이어오고 있는 무가(巫家)의 내력이다.


판소리를 하는 명창들의 이야기는 참 우리로서는 상상을 초월하게 만든다. 소리를 얻는 것을 ‘득음(得音)’이라 하지만, 그 득음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노력은 가히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짧게는 3~4년 길게는 10년 이상을 혼자 소리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우리는 ‘독공(獨功)’이라고 한다.

 독공의 과정은 정말 이야기만 들어도 아찔하다. 전공을 국악을 했기 때문에 고 박동진 명창을 스승으로 모셨었다. 그리고 방송국에서 생활을 하면서, 박동진 명창과 몇 날을 함께 방송제작을 하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닌 적이 있다. 그러면서 들은 이야기가 바로 명창들의 득음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동백 명창이 득음을 했다는 동굴이 있는 흐리산

‘독공(獨功)’은 ‘독공(毒恐)’이라니.

대개 독공을 하고자 하는 소리꾼들은 동굴이나 폭포를 찾아간다. 동굴 속에 들어가면 2~3년을 동굴을 막아버리고, 겨우 음식물이나 변기 정도가 드나들 구멍 하나만 남겨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리를 얻어, 그 동굴을 막아 놓은 것이 무너져야 나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명창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폭포 독공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권삼득 명창이 콩 서 말을 들고 남원 용담폭포로 가서, 소리 한 바탕을 할 때마다 콩알 하나씩을 폭포의 소에 던졌다는 이야기도 맥락을 같이한다.

“독공이란 것은 스스로 독을 마시는 것과 같아. 그래서 목에서 피가 넘어오지. 터진목에 예닐곱 번은 그렇게 터지고 아물어야 혀”

얼마나 그 독공이란 것이 힘이 들었을까? 그렇게 십년 가까이 소리공부를 마친 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서 소리 한 대목을 한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하면 ‘귀명창’들에게 시험을 보는 과정이다. 그 소리판에서 명창 반열에 들지 못하면, 다시 독공을 시작해야 한다니. 독공이란 것이 과연 독을 마시는 것과 같은 두려움이 있을 만도 하다.



흐리산 중턱에서 소리가 들려

이동백 명창은 ‘전무후무한 대명창’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생긴 것이 준수하고 소리의 성음이 남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동백 선생님이 소리를 할 때면 객석에서 난리가 나지. 서로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려고. 그래서 소리를 할 때 선생님은 항상 맨 뒤에 순서를 맡았어. 선생님이 일찍 순서를 마치고 나면, 사람들이 다 가버렸거든.”

얼마나 그 생김새가 준수했는지, 지금의 인터넷 등에서 검색을 할 수 있는 자료를 보아도 알만하다. 이동백 명창은 어렸을 때는 한문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공부에는 취미가 없고 소리에만 전념을 하다가, 서천 장항 빗금내에 있는 김문의 소리꾼인 김정근 문하로 들어간다. 무숙이타령의 대가라고 하는 김정근 명창은, 김창룡 명창과 김창진 명창의 부친이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에서 ‘조선의 소리는 김문에서 되다시피 했다’고 적고 있다.


그 후 김세종 문하로 들어간 이동백 명창은 고향인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로 돌아온다. 그곳 흐리산(희이산) 중턱의 동굴 앞에 나무를 엮어 초가를 짓는다. 멀리 장항으로 나가는 길목이 보이는 이곳에서 2년간 동굴독공을 한다. ‘그 2년 동안 북채가 10다발은 끊어졌다’고 후세 사람들은 즐겨 이야기를 한다.

“정말 잘났지. 새색시 때도 힐금거리며 보았으니까?”

벌써 20년이 지났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이동백 명창의 생가마을을 찾았었다. 그곳에서 평소 이동백 명창을 보았다는 김부월 할머니(당시 93세였던 것 같다)는 이동백 명창을 이렇게 소개했다.

“정말 잘났지. 논둑길을 걸어오면서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대장부였어. 새색시였었는데 옆에 시아주버님도 계셨지만 곁눈질로 보았으니까”

아마도 당시로 치면 지금의 인기가수 뺨칠 정도였는가 보다. 그렇게 흐리산 중턱 동굴에서 독공을 마친 이동백 명창은, 어전에 나아가 소리 한 대목으로 벼슬을 얻는다. 당상관인 통정대부를 제수 받았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소리였나 보다. 신재효의 ‘광대가’의 첫 머리는 바로 이동백 명창을 기준으로 삼았을 정도라는 소문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는 동굴독공. KBS 다큐멘터리 '중고제'장면 캡쳐

흉내 낼 수 없는 소리 ‘새타령’

이동백 명창의 소리는 일본 빅타레코드사에서 취입을 한 것을, ‘서울음반’에서 CD로 복각을 하였다. 그래서 많은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그 중 압권은 당연 새타령이다. 뻐꾸기 울음소리 대목으로 가면, 정말로 뻐꾸기가 우는 듯한 착각을 할 정도이다. 오랜 독공에서 얻은 명창이라는 칭호가 명불허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제는 소리로만 기억할 수 있는 이동백 명창. 1993년에 들려본 후 15년 만인 2008년 9월 9일 생가터를 찾아갔을 때는, 예전의 집이 아닌 잘 지어진 가옥이 그 자리에 있었다. 마당에는 철을 알리는 코스모스가 한껏 자태를 자랑하고. 저 뒤편에 보이는 흐리산 자락에서는, 금방이라도 새타령 한 대목을 부르며 논둑길을 걸어오는 명창의 모습이 눈에 보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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