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람들이 글을 썼다. 글마다 광한루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광한루는 조선조 세종 원년인 1419년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천경계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에는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이라는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후 ‘광한루’라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 후 광한루는 1461년 부사 장의국에 의해 보수가 되고, 1582년에는 전라도 관찰사인 정철이 광한루를 크게 지었다. 현재의 광한루는 정유재란 불에 탄 사라진 것을, 인조 16년인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 광한루원 전체는 명승 제33호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광한루만은 보물 제28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호남제일루'라 명성을 얻어

'호남제일루', 광한루는 그런 명성에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 누각이다.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지은 누각을 말한다. 밑으로는 사람이 서서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높인 전각이다. 광한루의 규모는 정면 5칸에 측면이 4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누마루 주변에는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4면 모두 문을 달아 놓았는데, 여름에는 사방이 트이게끔 안쪽으로 걷어 올려 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또한 누의 동쪽에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부속건물인 날개채를 들였다. 주위로는 툇마루와 난간을 둘렀고 안쪽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뒷면 가운데 칸에 있는 계단은 조선 후기에 만든 것이다. 춘향전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진 강한루.앞으로는 넓은 인공 정원과 인공 섬, 그리고 정자들이 서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광한루 뒤집어 보기, 문화재 관리의 양면성

누구나 광한루를 가면 그 누정에 올라 춘향이와 이몽룡의 사랑을 한 번쯤 흉내를 내보고 싶어한다. 한 때는 광한루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소중한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어째 우리나라 문화재의 보존 관리는 공무원들의 사고에 의해서 멋대로 바뀌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출입을 시켰을 때는 문화재 보호가 되지 않는 것인지.

그렇게 문화재 관리를 통제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입장료 받고 광한루원에도 출입을 시켜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 정작 광한루원은 돈을 받고 출입을 시키고, 광한루는 보존을 해랴하기 때문에 출입을 시킬 수 없다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광한루의 주추는 특이하다. 밑에는 네모난 덤벙주추를 놓고 그 위에 막다듬은 장초석을 올렸다. 다시 원형의 기둥을 놓고 누마루를 받치게 하였다. 일부는 장초석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동편에 붙여지은 날개채는 온돌방이다. 그런데 그 밑에는 네모난 장초석으로 받쳐놓고 있다. 그 날개채 밑을 한 바퀴 돌아본다. 그러나 온돌방 밑에 있어야 할 아궁이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 돌 담으로 막아 놓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아궁이만 볼 수 있어도 한결 문화재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화재 관리의 양면성을 본다. 한편에서 보존이라는 허울아래 출입을 통제시키면서, 정작 온돌방의 밑 부분은 모두 돌담을 쌓아 막아버리다니. 이런 양면적인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씁쓸하다. 아마도 저 막아버린 돌담 안에는 한편을 높게 싼 아궁이가 있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광한루, 월궁의 선녀인 항아가 노닐만 하다는 곳. 그리고 춘향전의 무대가 되었던 곳. 그 무대 주변만 맴돌다가 결국엔 열어서 위로 붙들어 맨 창틀만 찍고 말았다. 느껴야만 하는 문화재를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단절시키는 이런 행위, 이것만이 정말 보존일까? 제대로 된 문화재 정책이 아쉽다. 어느 곳은 보물인데도 사람들을 출입시켜 더욱 마루가 반들거리고 보존만 잘 되던데...

왜? 탱자가 익어가는 가을에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순흥을 가? 이상한 사람이구만’ 그래 난 이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려, 안 가고는 견디질 못한다. 나하고 순흥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순흥은 경북 영주시에 속한다. 순흥에는 유명한 소수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 순흥을 왜 술병을 들고 찾아갈까?

소수서원은 조금 지나면 금성대군 신단이 있다. 그곳을 조금 지나 좌측 마을 길 안으로 들어서면, 내가 가을마다 찾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다. 이 계절, 탱자가 익어가는 계절만 되면 그곳을 찾아가 술 한 잔 따라놓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허허로운 벌판의 땅굴 속에서 죽어간 금성대군 때문이다.


32세에 처형이 된 불귀의 원혼

금성대군은 이름이 유이며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이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단종의 숙부이기도 한 금성대군은, 세종 15년인 1433년에 대군으로 봉해졌다.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복위하자 형 수양과 함께 단종을 도울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수양이 왕위에 오를 야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반대한다.

단종 3년인 1455년 금성대군은 모반을 했다는 협의를 뒤집어쓰고, 현 경기도 연천인 삭녕으로 유배가 된다. 세조 2년인 1456년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를 하자, 이에 연루되어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옮겨졌다. 금성대군은 이곳에 와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관노의 고발로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을 당한다.



위리안치, 그 통한의 형벌이여

조선시대 형벌 중에 유배형에 해당하는 것은 부처와 안치가 있다. 부처란 유배형을 당한 죄인이 부인과 함께 유배지에 머물며 생활을 하는 형벌이다. 안치란 부처형을 받은 죄인이 왕족이나 고관일 경우, 유형을 받은 장소에서 주거와 행동을 제한시키는 형벌제도이다. 아마도 처음 이곳 순흥에 온 금성대군은 단순한 안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치에도 종류가 있다. 고향 등으로 행동을 제한시키는 본향안치. 육지와 떨어진 절해고도에 안치를 시키는 절도안치. 그리고 가장 중형에 속하는 위리안치이다. 위리안치는 형벌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형벌이라고 한다. 큰 죄를 범한 죄인을 허허벌판에 돌우물 같은 웅덩이를 파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형벌이다.




이곳 순흥에 바로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 남아있다. 위리안치는 그야말로 인간을 말려죽이기에 적당한 형벌이다. 장정의 키보다 높은 돌 웅덩이 안은 지름이 2m가 조금 넘을만한 둥근 형태이다. 그 안은 맨바닥이고, 어디 편하게 기댈 수조차 없다. 사방이 모두 돌로 쌓여 있으니, 벽에라도 기댈라치면 배기기 일쑤이다.

거기다가 인근에는 물이 흐르기 때문에 바닥은 축축하다. 어디 한 곳 발을 뻗고 편히 몸을 누일만한 곳이 없다. 지붕은 비를 피하도록 덮었다고 하지만, 비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웅덩이 안으로 물이 차 들어올 것이다. 웅덩이 밖으로 나간다 해도 도망을 갈 수가 없다. 위리안치지 주변이 모두 탱자나무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촘촘히 심어 놓은 탱자나무 울타리를 어떻게 빠져 나갈 것인가? 가시에 온 살이 찢겨도 빠져 나가지를 못한다. 나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입구뿐이다. 그곳은 더욱 나갈 수가 없다. 결국 처형을 당할 때까지, 그 습한 웅덩이에서 발 한 번 제대로 뻗지 못하고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 그것이 위리안치이다.

오늘 이 술 한 잔으로 몸이나 녹이시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순흥을 간다. 술 한 잔 따라놓지 않으면 죄 없이 역사의 제물로 희생이 된 분에게 너무 죄스럽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처음으로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찾아간 곳에서, 역사의 아픔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0월에 이곳을 다시 찾았다. 술 한 병을 사들고. 그 뒤 10월이면 이곳을 간다. 요즘 사극이 인기를 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재미로 보는 사극 뒤편에는 이런 엄청난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저 술 한 잔 따라놓고, 넋두리를 해댄다. 세상을 달라졌다고 해도, 아직 대군의 통한의 아픔을 따라 사는 자들은 그치지를 않았노라고.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순흥으로 길을 나서야겠다.


전북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에 가면 전북 유형문화재 제93호인 여산동헌이 자리하고 있다. 이 동헌 건물은 조선 시대에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보던 청사이다. 이 건물은 3단의 계단식 건물 제일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맨 아래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을 피로 물들인 병인박해로 인한 아픔의 장소이다.

조선 고종 3년인 1866년 정월에 대원군은 전국에 천주교의 탄압 교령을 포고했다. 병인사옥, 혹은 병인박해라고 하는 이 천주교의 탄압 포고령으로 인해 여산 동헌의 맨 아래 뜰에서는 천주고 신도들을 잡아와,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여러 겹 붙여 호흡을 못하게 만드는 백지사를 행한 곳이다.


한식 건물의 아름다움을 지닌 동헌

여산동헌은 조선 조 말기에 벽과 방의 구조를 일부 개조하기는 했지만,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특히 추녀와 대청마루에서 한옥의 멋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동헌 앞뜰 우측에 서 있는 수령 600년이 넘는 느티나무는 이 동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전북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느티나무는 여산 동헌과 주변에 7그루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여산 동헌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느티나무를 보면 여산 동헌은 조선조 태종 조에서 세종 조대에 설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느티나무는 가슴 높이 둘레는 4.5m, 높이는 22m 정도이다.



여산동헌은 한옥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여산동헌을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었다. 동헌을 바라보면서 좌측 2칸은 뒤로 물린 방을 드리고, 우측 세 칸은 마루로 놓았다. 이 대청에서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맡아 본 것이다. 여산은 고려 공양왕 3년인 1391년에는 감무를 두었고, 조선 태종 2년인 1402년에는 여산현으로 불렀다. 그 뒤 세종 18년인 1436년에는 원경황후의 외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이 되기도 했다.




동헌은 장주추를 써 높였다. 그리고 기둥은 보수를 한 흔적이 역력하며, 대청의 뒷벽은 판벽으로 구성했다.
 
동헌 한 편에 남아있는 아픔, 척화비

동헌은 구조가 간단하면서도 한옥의 멋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다. 대청마루 밑은 앞을 벽으로 막아 그 안에 아궁이를 내고, 주초는 장초석을 사용했다. 마르를 높게 만들고 그 밑으로 아궁이를 낸 것도 이 건물의 특징이다. 대청의 뒷벽은 모두 판벽으로 마감을 했으며, 판자문을 내었다. 3단으로 구성된 축대 맨 위에 자리한 동헌. 아마 이곳에서 호령을 한다면 밑 뜰에 모인 사람들은 오금이 저렸을 것이다.


동헌 앞뜰에 서 있는 느티나무는 수령이 600년이 넘었다

동헌의 우측에는 일각문이 있는데, 그 사이에 비석이 줄지어 서 있다. 송덕비라도 모아 놓은 것일까? 그런데 그 앞에 철책으로 둘러 친 한 기의 비석이 눈에 띤다. ‘척화비’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펴면서 전국에 세운 척화비 중에 하나이다. 그 비를 보면서 마음이 아프다, 저 비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이 앞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인지.

더위는 한풀 간다고 하지만 아직 한 낮의 더위는 따갑다. 동헌마루에 올라 앉아 그늘을 드리운 느티나무를 바라다본다. 철 늦은 매미 한 마리가 목청을 돋는다. 저 매미도 이 여름이 가는 것이 안타까운가 보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어도 동헌 앞마당의 느티나무가 변하지 않듯, 이곳의 아픔도 쉬이 가라앉지는 않을 것만 같다.

동헌의 경내에 서있는 송덕비와 그 앞에 섰는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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