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 무예 신체관 연구펴내

 

지난 해 <조선 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를 펴낸 박사무사인 최형국이 이번에는 송일훈과 공저로 <정조대왕 무예 신체관 연구>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정조대왕의 실학사상과 무예사상, 그리고 수원화성을 탐하여 전통무예에 빛을 발하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최형국은 현재 수원문화재단 무예24기 시범단의 일원이다.

 

598쪽에 달하는 정조대왕 무예 신체관 연구는 모두 4편으로 구분되어 기술하였다. 1부는 정조대왕 무예 신체사상관의 거시적 관점으로 본 무예도보통지의 복원 재현 연구, 2부는 정조대왕 무예 신체사상관과 연구동향으로 바라 본 전통무예의 정체성 제시, 3부 전통무예와 군사사를 활용한 문화콘텐츠 개발 연구, 4부 정조대왕 궁술무예 사상관의 신체지와 현시대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에 관한 연구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두 사람의 무예 연구가가 심혈을 기울인 연구서

 

<정조대왕 무예 신체관 연구>는 송일훈, 최형국 두 사람의 무예연구가들이 심혈을 기울인 저서이다. 송일훈은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무예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무예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용인대학교 무도대학 무도연구소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일훈은 2008년 최우수 박사학위 논문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11년에는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인 <한중일 격투무예 연구>, 2011<무신 장보고의 꿈>, 2012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 도서 <신유론 강독서> 외 다수가 있다.

 

 

최형국은 중앙대 대학원 역사학과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경기대학교에서 Post-doc연구원으로 문화사, 전쟁사, 무예사를 연구해 왔다. 현재 중앙대에 출강하고 있으며, 한국전통무예연구소 소장이기도 하다. 수원문화재단 무예24기 시범단 수석으로 조선무예를 수련하고 있다.

 

저서로는 2007<친절한 조선사>, 2009<조선무사>, 2013<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2013<조선전기 무과에서의 격구 도입배경과 그 실체>, 2011<조선후기 진법 원앙진의 군사무예 연구> 외 다수가 있다.

 

 

정조대왕의 무예 신체관의 결집서

 

이 저서는 정조대왕의 무예 신체관의 결집서라고 볼 수가 있다. 역사적 고증을 들어 신체관 연구를 한 본 저서는 무예실체의 움직임에 관한 체험을 통해 새로운 신체기법을 습득하여 다시 몸()에서 얻는 것()으로 완성을 시키고자 했다.

 

특히 부록으로 많은 양이 수록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정조무예신체관의 활쏘기에 관련된 원전기사해석은 이 책이 얼마나 많은 노력으로 완성이 되었는가를 가늠하게 한다. 활쏘기의 기초에서부터 신궁의 경지에 이룰 수 있는 모든 비법 및 기법들이 서술되어 있는 <사법비전공하> 소개서부터, 무과 갑과와 을과의 문답풀이 등도 빠트리지 않았다.

 

 

책 말미에 도록은 저자 최형국이 무예24기의 시범 중에서 칼, , 활 등의 시연을 하는 사진과 마상무예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2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도록은 저자가 우리무예에 관해 얼마나 많은 애착을 갖고 심혈을 들여 연마를 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발행일 : 2014228일 발행

발행처 : 레인보우북스

정 가 : 30,000

 

무예 24기는 정조임금이 실전에 맞게 집대성한 것으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수록되어 있는 무예를 말한다. ‘무예24(武藝二十四技)’는 조선시대 군사무예교범인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24가지의 무예로, ‘무예이십사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 무예도보통지 속에는 무예이십사기로 기록되어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각종 외침을 겪었던 조선이 자주국방을 이루기 위해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양 삼국의 무예 중 정수만을 집대성한 실전무예이다. 더욱 무예도보통지에는 우리나라의 무기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 사용하던 무기들까지도 그 동작 등을 실어 실전의 교범으로 삼고 있다는 데에서, 가히 당대 최고의 무예지라고 볼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에는 무예 24기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본국검 2. 예도 3. 제독검 4. 쌍수도 5. 쌍검 6. 마상쌍검

7. 등패 8. 왜검 9. 왜검교전 10. 월도 11. 마상월도 12. 협도

13. 장창 14. 기창(騎槍) 15. 죽장창 16. 기창(旗槍) 17. 당파 18. 낭선

19. 권법 20. 곤봉 21. 편곤 22. 마상편곤 23. 격구 24. 마상재 등이다.

 

 

월도를 앞에 놓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월도를 하늘 높이 받쳐 들었다. 선대의 장용영 무사들에 대한 예의였다. 햇볕에 번쩍이는 월도가 바람을 가른다. 순간 단단하게 묶어 놓은 5개의 짚단이 한 순간에 동강이 난다. 짚단의 검불이 날아오른다. 기합소리에 함께 순식간에 짚단이 날아간 것이다.

 

지난 20, 수원 화성 동문인 창룡문 앞에서 수원문화재단 소속인 무예24기 시범단의 공연이 있던 날 수석단원인 무사 배국진(, 45)의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정조시대의 장용영 무사들이 저런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날이 지나면서 그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24일 오후, 시범공연을 하는 화성 행궁 신풍루를 찾았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관심이 높아

 

이제 무예를 시작한지는 20년이 되었나 봐요. 1994년부터 시작했으니까요. 그 이전부터 우리 무예에 관해서 관심이 많았어요. 그 전에는 태권도를 했거든요. 공인 5단예요. 그런데 무예 24기가 더 하고 싶어서 무예를 시작했어요. 제 갈 길을 바로가지 못한 것이죠.”

 

말을 하는 것이 칼을 휘두르고, 월도로 짚단을 베는 우락부락한 무사이기 보다는 곱상한 처자같이 조심스럽다. 배국진씨는 어려서부터 태권도로 단련되었다. 공인 5단이라고 한다. 부친이 태권도 공인 9단이시고, 어려서부터 부친이 운영하는 태권도 도장에서 수련을 했단다. 대학은 전기공학과를 나왔지만 무예에 깊이 빠진 마음은 자꾸 그곳으로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무예24기 시범단 창단 멤버

 

무예24기를 시작한지 10년이 지난 2003년에 무예24기 시범단이 수원에서 창단되었어요. 그때 이곳에서 본격적인 무예 시범을 보일 수가 있어서 행복했죠. 지금은 시범단 3명의 수석단원 중 한 명입니다. 날마다 두 차례씩 오전 11시와 오후 3시에 화성 행궁 신풍루 앞에서 시범을 보이고 있어요.”

 

자신이 좋아서 택한 길이란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나니 생계가 걱정이 되었다고 한다. 아내가 함께 맞벌이를 하지만 그래도 윤택한 생활은 아니라는 것. 늘 아내와 아이들에게 마안하다는 것이다.

 

 

남들처럼 돈을 많이 벌면 좋죠. 하지만 저희들은 정규직이 아니기 때문에, 시범을 보이는 날만 일급으로 수당을 받고 있어요. 비가 오거나 눈이 와서 시범을 보이지 못하면, 대체 근무를 서죠. 그것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는 그런 날은 아예 공치는 날이었거든요. 고생을 하는 집사람에게는 늘 미안하죠.”

 

수원 최고의 문화 콘텐츠, 활성화 되어야

 

수원 화성 행궁을 찾는 사람들은 수원의 최고 문화 콘텐츠는 바로 무예24기라고 한다. 그들이 무예24기 시범이 열리는 행궁 신풍루 앞을 떠나지 못하는 것도. 바로 무예24기 시범 때문이다. 수원 화성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 무예24기 시범단의 생활은 넉넉지가 않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지금 화성열차가 달리는 길을 옛 무사들이 말을 타고 달리듯, 그렇게 함께 말을 타고 달리는 꿈을 꾸죠. 그리고 동장대에서 활을 쏘고 무예 시범을 보이면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무예24기를 즐겨 찾을 것 같아요.”

 

조심스럽게 말을 하지만 무사 배국진씨는 정말 마음속에 깊이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전수관과 시범을 보일 수 있는 실내 공연장이 필요한 것은, 눈이오나 비가오나 이들이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는 머리가 하얗게 백발이 날리더라도 무예24기를 할 것입니다. 멋있잖아요, 예전 무사들처럼 백발을 날리면서 말을 타고 창검을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이.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는 무예24기와 함께 할 것입니다.”

 

신풍루 앞에서 보인 오후 3시 시범장을 정리해야 한다고 일어서는 무사 배국진씨. 몸이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 무예24기 시범을 보이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그에게서 정조대왕 시대의 장용영 무사의 기개가 보인다. 딴 고장에서처럼 수문장 교대행사를 벌이는 것이 아닌, 진정한 무예를 보여주는 무예24시 시범. 장용영의 후예 무사 배국진씨가 자긍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조대왕은 화성을 축성할 때, 직접 화성축성 장소까지 행차를 하기도 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보면 8일 간의 화성행차(1795년 윤 2월 9일 ~ 16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은 물론, 행차에 들어간 비용과 물품, 재료, 비용 등 하루의 일과를 자세히 적고 있다.

 

정조대왕은 사도세자를 모신 현릉원에 참배를 한 후, 8일간의 행차 중 넷째 날인 윤 2월 12일에 오후와 야간에 화성에서 두 차례 대단위 군사훈련을 한다. 이 군사훈련의 모습은 ‘성조(城操)’와 ‘야조(夜操)’라고 하여, 김홍도의 그림 ‘서장대 성조도’와, <화성성역의궤> ‘연거도’ 등에 자세히 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연거도에 보면 횃불을 든 군사들이 성을 에워싸고 있으며, 성안의 집집마다 등불을 밝힌 모습이다.

 

 

이산 정조의 꿈인 야조

 

정조대왕은 왜 두 차례에 걸쳐 화성에서 군사훈련을 강행하였을까? 정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무단히 노력을 한 군왕이었다. 그런 정조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화성에 행차를 한 것도, 군사 훈련을 두 차례 실시한 것도 알고 보면 그 안에 내재된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즉 친위부대인 장용영 외영의 1만 명이 넘는 군사의 막강한 군세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당시 화성의 장용영 군사들은 팔달문 일대에 주둔하는 팔달위에 3,218명, 행궁 일대인 신풍위에 1,651명, 화서문 일대의 병력인 화서위에 3,028명, 장안문 일대인 장안위에 병력이 3,098명, 창룡문 일대의 병력인 창룡위에 2,906명이었다. 그 전체 병력이 자그마치 13,899명이었다.

 

 

이 많은 인원이 군사훈련을 했다고 하면, 그 위세는 실로 대단했을 것이다. 더욱 장용영의 군사들은 가장 무예가 뛰어난 군사들로 구성되었다고 하면, 그 훈련을 보면서 누구도 왕권에 대한 도전을 생각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훈련자체가 실로 어마어마한 압박으로 다가왔을 테니 말이다.

 

제50회 화성문화재의 야조 이렇게 기대한다.

 

올해는 화성문화재가 반백년을 지난해이다. 그만큼 의미 있는 해이기도 하다. 하기에 올해 화성문화재에서 선보일 ‘야조’는 그야말로 수원시민들이 참여를 하고, 정조대왕의 애민과 강한 국권을 상징 할 수 있는 그러한 모습이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외형적으로 화려하게 포장을 한 야조가 아닌, 그야말로 내적인 면에 충실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조대왕의 뜻을 야조에 보여주기 위해서는, 먼저 야조를 제대로 꾸밀 수 있도록 ‘추진단’이 필요하단 생각이다. 정조의 뜻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야조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문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생태교통에 맞물려 열리게 되는 화성문화재에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들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보여줄 것은 다 보여주어야

 

조선 후기에 사용되었던 진법 중에는 ‘원앙진(鴛鴦陣)’이 있었다. 원앙진은 12명이 한 조를 이뤄 짜인 진법으로 대장 1명, 등패수 2명, 낭선수 2명, 장창수 4명, 당파수 2명, 화병 1명으로 구성되었다. 원앙진은 한 쌍의 원앙은 암수 중 한 마리가 죽으면, 남은 한 마리도 따라 죽는다고 한다.

 

원앙진은 만일 12명의 무사 중 한 명이라도 전사하여 패배를 할 경우, 남은 무사들도 모두 침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명나라 장수인 척계광이 왜구를 상대하기 위해 발명한 진법으로, 우리나라의 군제에서도 사용을 했다. 화성 행궁 앞에서 무예24기 시범단이 시범을 보일 때마다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원앙진이다.

 

장용외영의 무사들은 가장 강한 군제였다. 그들을 그렇게 강하게 만든 것도 알고 보면 무예24기의 훌륭한 무술도 있었겠지만, 이와 같은 원앙진 등이 있어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면서 진법을 펼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원앙진이 대거 등장한다면 그도 놀랄만한 위용을 자랑할 것이다. ‘학익진’이 아닌 ‘원앙진’이 보여야 한다.

 

 

야조는 군사훈련이다.

 

‘정조의 꿈’이라는 야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뜬금없이 나타나는 도살풀이나 신칼대신무의 변형 춤이 나타난 지난 해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 춤들은 모두 사람이 죽고 난후 넋을 위로하기 위한 춤이다. 그런 춤들이 장용외영의 군사들의 잔치에 나타나다니, 실로 아연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올해는 이런 화려한 포장보다는, 실질적으로 정조의 강한 국권을 상징하는 무예 24기에 중점을 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상재와 검술 등의 강한 정조대왕의 국권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이지 않은가?

 

더불어 시민들이 참여를 하는 야조이기를 기대한다. 성 안 주변에 횃불을 들고 함께 동참을 했던 시민들이 야조를 보는 시각이 남달랐다고 한다. 흡사 자신도 장용외영의 군사가 된 기분이었다는 것. 그러나 외지에 빼앗겨 버린 정조의 꿈이 사라진 야조를 보면서, 의식 있는 시민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군부대를 동원한다고 해도 더 정조의 야조다운 야조를 연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화성문화재 50주년. 올해는 정말 ‘정조의 꿈’이 그대로 배어있는 강한 국권과 애민사랑이 깃든 그러한 ‘야조’를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사진은 수원시청 정책홍보담당관실 이용창님의 사진을 사용하였습니다) 

 

화성 행궁. 행궁이란 왕의 원행시에는 왕의 거처로 이용하는 궁을 말한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전배하기 위하여 행행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이다.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留守)가 집무하는 부아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재위기간인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 1년인 1801년 행궁 곁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하였는데, 그 뒤 순조·헌종·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

 

따라서 화성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수많은 행궁 중, 그 규모나 능행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친다. 또한 건축물의 규모뿐만 아니라, 성곽과 더불어 정치적, 군사적 면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곳이다.

 

 

주말에 즐거운 행궁 일원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왁자한 곳이 있다. 바로 행궁 광장 한 편에 물이 솟아오르는 분수대이다. 그 물줄기 속으로 아이들이 뛰어들어 물을 맞고 있다.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물놀이에 푹 빠진 아이들이다. 그것을 보고 있는 부모님들도 말릴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다. 오히려 함께 그 안에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을까?

 

사람들이 행궁 정문인 신풍루 앞으로 모여든다. 한 낮의 기온이 30도를 웃돌고 있지만, 그런 무더위도 이겨낼 있는 무대가 마련이 되어있는 것이다. 신풍루 앞에서는 주말이 되면 오후 2시부터 ‘토요상설문화공연’이 열린다. 각종 공연을 즐길 수가 있다. 거기다가 한 시간 정도 공연이 끝난 다음에는 무예24기를 연이어 볼 수가 있다.

 

 

“사실은 무예24기를 보기 위해 왔는데, 그 전에 공연이 있다고 해서 조금 일찍 이곳으로 왔습니다. 다양한 공연과 무예24기까지 함께 볼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일거양득이네요”

 

매탄동에서 주말을 맞아 가족과 함께 생태교통 시범지역인 행궁동 일대를 돌아보고 있다는 이아무개(남, 43세)씨는 이렇게 다양한 공연과 볼거리를 즐길 수가 있어 행복하다고 한다. 1시간 30분 가까이 진행된 신풍루 앞에서의 공연과 무예24기 시범이 다 끝나고 나면, 사람들은 행궁관람이나 공방거리 구경에 나선다.

 

생태교통 시범지역도 돌아볼 만해

 

요즈음 행궁 일원인 행궁동은 변화가 한창이다. 바로 9월 한 달 동안 이 일대에서 열리게 되는 ‘생태교통 수원2013’의 준비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음습하던 길은 소나무가 심어지고, 낡고 퇴락하던 건물의 외벽은 보기 좋게 목재와 벽돌 등을 붙여 새롭게 구미고 있다. 그동안 천차만별로 우중충하던 간판들도 보기 좋게 새로 바뀌고 있다.

 

 

거기다가 여기저기 작은 소공원들이 들어섰다. ‘쌈지공원’, 이름도 정겹다. 정말 쌈지만 하게 조성된 이 공원들은 주민들과 나그네들의 쉼터로 거듭나고 있다. 반대를 하던 일부 주민들도 찬성 쪽으로 돌아선 것을 보면, 역시 환경의 변화라는 것은 사람도 변화시킬 수가 있다는 것이다. 생태교통은 그런 변화를 기대하고 시행하는 것이다.

 

“우리 동네가 얼마나 좋아지고 있습니까? 골목이 다시 포장이 되고, 여기저기 공원이 들어오고 외벽 치장과 아름답게 꾸며지고 있는 간판들. 8월 말이 기다려집니다. 아마 수원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마을에 될 듯합니다.”

 

집 앞 골목에서 작은 화단에 풀을 뽑고 있던 주민은 생태교통으로 인해 동네가 달라졌다고 즐거워한다. 아직 시작도 하기 전이지만 카메라를 맨 젊은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변화는 기대를 가져온다고 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또 다른 변화의 시작이 된다. 요즈음 생태교통 시범지역인 행궁동 일대가 그러하다. 주말을 맞아 화성 행궁으로 찾아가보자. 거기 역사와 전통, 그리고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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