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정(茅亭)'이라 하면 어떤 정자를 생각할까? 모정이란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정자dl다. 또한 민초들이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 직접 지은 정자이기도 하다. 모정은 여름철에 농사를 짓다가,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 짚이나 새(마른 풀) 등으로 지붕을 덮어 만든 작은 정자를 말한다.

 

모정은 농정(農亭), 농청(農廳) 혹은 양정(凉亭) 등으로도 부른다. 모정은 일반적인 정자들이 경관이 수려한 곳에 짓는데 비해, 논이나 밭 등의 주변에 짓는다. 주로 논농사를 많이 짓는 곳에서 볼 수 있는 모정은 농사일을 많이 하는 남성들이 많이 이용을 한다. 모정에서는 청·장년층의 농민들이 쉬는 시간을 이용해 이야기꽃을 피운다. 모정에서 나누는 대화는 양반가의 정자가 시를 짓고 세상을 논하는데 비해서,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주민 모두가 주인인 모정

  

모정에 모인 사람들은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쉽게 대화를 할 수 있으며, 마을의 잡다한 이야기가 이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모정은 마을 공동체의 산실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정자 모정은 특별한 정자의 명칭을 붙이지 않는다. 혹은 멋들어진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만, 통상 모정이란 명칭으로 불린다.

 

대전시 무수동에 자리한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29호 안돈권씨 유회당 종가

 

유회당은 권이진이 부모를 위해 지은 것이다.

 

대전시 중구 무수동에 가면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가 있다. 유회당은 영조 때 호조판서를 지낸 유회당 권이진(1668 ~ 1734)이 처음으로 터를 잡았던 곳이다. 이곳에는 종가 외에 권이진이 부모를 생각하여 지은 유회당이 있다. 이곳 무수동 대전 보문산 남쪽에 자리 잡은 종가 앞에 모정이 서 있다.

 

옛 전통이 살아있는 마을

 

무수동의 모정은 안동권씨 종가의 정원을 함께 어우르며 서 있다. 길가 곁에 서 있는 모정은 작고 소박하다. 모정 곁에는 연못이 있고, 가을이면 불게 물드는 나무들이 모정을 더욱 정답게 만들어 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무수동 모정. 요즈음에는 천편일률적으로 만들어 놓은 시멘트 모정이나, 기와를 올린 모정들이 옛 정취를 사라지게 만든다.

 

 

유회당을 한 바퀴 돌아 내려오다가 모정에 피곤한 발길을 맡긴다. 사대부가의 양반네들이 지은 화려한 정자는 사람을 가린다. 문을 달아 내거나 집 안, 혹은 근처에 있어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다. 하지만 모정은 다르다.

 

길을 걷는 사람이거나, 그 마을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누구나 그 모정을 이용해 피곤한 다리를 쉴 수가 있다. 그래서 모정은 담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문을 달지도 않는다. 그저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새 기운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모종이다. 

 

그래서 모정은 마을마다 논두렁이나밭두렁, 혹은 입구 정자 나무 그늘에도 하나씩 서 있었다. 지나는 사람까지도 반갑게 맞아들이고, 마음놓고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소이다. 무수동 모정에 걸터 앉나본다. 미처 새로 바꾸지 못한 초가의 짚 냄새가 정겹다. 어디를 가나 있었던 지역 공동체의 산실 모정. 그 정취가 그립다. 

45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한 곳에서 마을주민들을 지켜 온 돌미륵. 그저 평범한 돌에 얼굴은 언제 사라졌는지, 딴 것을 올려놓았다. 아마 이 미륵이 영험하다고 소문이나 났던 것일까? 이천시 모가면에 있는 미륵댕이가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를 하고 있는 곳은, 이천시 두미1리에 속한다.

이 마을은 200여 년 전에 두역동(豆亦洞)이라는 마을과 시미동(侍美洞)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 두 마을에서 한자씩 따서 두미리라고 불렀단다. 미륵댕이라고 부르는 두미1리에는 450년 전 난폭한 산적이 찾아들었다. 사람들은 그 산적으로 인해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장사가 마을에 찾아들어 이 산적을 내쫒고, 이곳에 큰 미륵을 세웠다고 한다.


450년 주민들과 함께 한 미륵

그 뒤부터 이 마을을 미륵댕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마을에 전해지는 설화야 진위여부를 따질 것이 없지만, 마을에 미륵이 450년 정도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미륵댕이 설화를 뒷받침 하는 것이 바로 미륵댕이 숲이다. 오래 묵은 고목들이 미륵이 있는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뒷받침하고 있다.

가을이 되면 두미리의 미륵댕이 숲은 가히 절경이다. 돌미륵 앞에 떨어진 낙엽들이 장관이다. 왜 치우지 않느냐고 마을 사람에게 물었더니 '보기가 좋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보다 미륵댕이 숲에 나무를 함부로 다치면 벌을 받는다고도 한다. 어디를 가나 전하는 신령한 나무에 관한 이야기지만, 미륵댕이 숲의 분위기는 그보다 더 신비할 듯하다.


두미리의 사람들은 이 미륵댕이 숲에 자리한 미륵이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미륵은 마을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1m 남짓한 미륵, 마을의 구심점이 되

미륵은 1m 남짓하다. 머리는 얼굴모양의 돌을 얹었는데 원래의 머리가 아닌 듯하다. 목 부분을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미륵의 몸통에는 희미하나마 윤곽이 보인다. 아마 처음에는 미륵의 형태를 가졌던 것이 아닐까싶다. 몸통에 비해 큰 머리를 얹어 균형이 잡혀있지는 않다. 앞에는 시멘트로 단을 만든 것으로 보아, 이 돌미륵을 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의 사방에는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네모난 커다란 돌을 얹어놓았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돌지붕도 산적을 내쫒은 장사가 얹어 놓은 것이 된다.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야 어떻든, 이 돌미륵으로 인해 마을에는 공동체가 형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450년이라는 긴 세월을 마을을 지키는 구심점이 되었다. 가을날 찾은 미륵댕이. 그것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았다.


장수군의 산서면은 태백정간 중 소백산맥의 일맥이 무룡궁재에서 시작하여, 장안령봉을 병풍처럼 펼쳐 놓고 있다. 다시 서쪽으로 뻗어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인 수분치를 이룬 뒤, 줄곧 서쪽으로 뻗어내려 성적산을 이룬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팔공산(노령산맥)에서 남북으로 뻗은 양 줄기가, 마치 암탉이 양 날개로 알을 품은 듯한 분지가 있어, 옛 부터 명당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이 산서면의 오산에서 임실군 성수면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아침재로 가다가 보면 마을이 나타난다. 초장마을이라고 하는 이 마을은 산서면 오산리의 안마을로 입구 길가 양편에 두 개의 돌탑이 서 있다. 마을을 바라보면서 우측에 있는 탑은 할아버지 탑인 남탑이고, 좌측 소나무 아래에 장승 곁에 있는 탑은 할머니 탑인 여탑이다. 탑 위에 뾰족한 돌을 세워 놓은 것이 할아버지 탑인 남탑이다. 맨 위에 돌은 남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권이종이 태어 난 초장마을

오산리 초장마을은 교육자학인 권이종 박사가 태어난 곳이다. 권이종 박사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독일에 파견한 광부 2기에 지원을 했다. 소를 팔아 여비를 마련해준 가족에게 보답하고자, 연장 근무에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공부를 한 권이종 박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불러 일으켰다.

마을 앞 석비에는 ‘초장마을’ 이란 글씨 밑에 권이종 박사가 태어난 곳이라고 써 놓았다. 권이종 박사는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딴 후 귀국하여 전북대 교수가 됐고, 1985년부터 한국교원대에 재직하다 2006년 정년퇴직했다.


권이종박사가 태어난 초장마을 석비(위). 위에 뾰족한 돌을 새긴 것이 바로 할아버지 탑이다.
   
길가 양편에 있는 누석탑은 오랜 흔적이

초장마을은 마을의 형상이 ‘초중반사형’이라고 한다. 그만큼 명당이라는 곳이다. 이는 풀숲에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이름을 ‘초장마을’이라고 붙였다고 한다. 이 마을 인근에는 고인돌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록에 나타난 최초로 이 마을에 사람이 들어와 산 것은, 약 500여 년 전이라고 한다. 원주이씨와 상산이씨가 들어와 살다가 상산이씨는 모두 이주를 해버리고, 현재 원주이씨는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 안동권씨들이 마을에 이주를 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 있는 누석탑이 언제부터 전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마을 안에 있는 정자인 ‘만취정’ 앞에서 만난 어르신은 “저 탑은 우리 어릴 적에도 있었는데 오래된 것인지만 알지, 언제 적부터 있었는지는 몰라” 라는 대답이시다. 첫눈에 보기에도 남탑은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탑은 아마 최근에 새롭게 쌓아 올린 듯하다.

마을 공동체를 창출하는 돌탑

돌로 탑을 쌓아 마을 어귀에 놓는 탑은 누석탑, 혹은 할아버지·할머니 탑이라고 부른다. 누석탑이란 돌을 쌓아올려 봉분처럼 만든 것을 말하는데, 이 탑은 강원도 일대서부터 태백산맥을 따라 내려가면서 많이 보인다. 처음에는 어떤 목적으로 쌓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현재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김을 받고 있다.


돌탑 앞에서는 정월 초에 길일을 택해 마을주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거나, 정월 대보름에 제를 올리기도 한다. 대개는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을 가려 제관을 뽑아 제를 올리게 한다. 이 돌탑은 원시형의 신앙물로 추정하고 있다. 돌을 쌓을 때는 시멘트 등은 섞지 않으며, 단순히 돌만 갖고 위로 올라 갈수록 뾰족하게 쌓아올린다.

명당이기에 명사가 배출된다는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초장마을. 산림청과 유한킴벌리가 주관한 녹색마을 찾기에서 선택이 된 것도 다 돌탑 덕분이라고 한다. 마을주민들은 돌탑이 있는 한 마을에는 어떠한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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