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소중한 물에 대해 알려줄 수 있어

4대강, 물론 그 외에도 많은 강이 있다. 하지만 한강과 금강, 섬진강과 낙동강은 그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강들이다. 이 강을 찾는 것이 아니고, 그 강이 시작되는 발원지를 찾아간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아이들이 방학을 하게 된다. 올 겨울방학을 아이들과 함께, 뜻 깊은 4대강 발원지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지.

이 중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과,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이 하루에 돌아볼 수 있는 거리이다. 뜬봉샘은 전북 장수에, 데미샘은 전북 진안에서 발원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와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는 같은 태백에 자리하고 있다. 두 번에 나누어 돌아볼 수 있는 4대강 발원지로의 여행, 주말여행으로 추천한다.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 기슭에는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가 자리하고 있다. 검룡소 일대의 계곡은 아름다운 계곡과 지형 등이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희귀한 동식물이 많이 서식하는 곳이다. 검룡소는 석회암반을 뚫고 솟아오르는 냉천이, 하루 2천 톤 가량이나 용출된다. 사계절 9℃ 정도의 수온을 유지하고 있는 검룡소의 물은, 20m 이상 계단처럼 된 자연암반을 따라 폭포를 이루며 흐른다.

검룡소에는 재미난 전설이 전한다. 옛날에 용이 되려는 이무기 한 마리가 검룡소에 살았다. 이 이무기는 서해바다에 살던 이무기 이었는데, 용이 되려고 강줄기를 거슬러 이곳까지 올라왔다는 것이다. 이 이무기는 검룡소가 강 상류의 가장 위쪽 연못임을 확인하고, 연못에 들어가 용이 되기 위한 수업을 하였다고 한다. 검룡소 앞 바위에는 할퀸 모양의 자국이 나있는데, 이 자국은 이무기가 연못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생긴 자국이라 한다.



검룡소는 입구에서 걸어 들어가야 한다. 검룡소를 찾아간 것은 눈이 하얗게 쌓인 겨울이었다. 눈길에 미끄러지며 찾아간 검룡소.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솟아오르는 물이 계곡을 따라 힘차게 흐른다. 검룡소 주변으로는 산짐승들이 물을 먹으로 온양, 발자국이 여기저기 나 있다. 생명의 근원인 물은 그렇게 인간만이 아니고, 수많은 생명을 살리고 있다.


섬진강의 발원지 ‘데미샘’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의 원신암 마을을 지나서 북쪽 오계치를 향해 오르다가 보면, 오른쪽 계곡으로 들어서는 길이 나온다. 이정표가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이 1.19km 앞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해발 1,151m의 팔공산 북쪽 기슭을 흐르는 상추막이골에 자리한 데미샘. ‘데미’란 이 고을 말로 봉우리를 뜻하는 ‘더미’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데미샘 동쪽에 솟은 작은 봉우리를 동네 주민들은 천상데미(해발 1,080m)라 부르는데, 이는 섬진강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봉우리라는 뜻이다.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의 원신암 마을을 지나서 북쪽 오계치를 향해 오르다가 보면, 오른쪽 계곡으로 들어서는 길이 나온다. 이정표가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이 1.19km 앞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해발 1,151m의 팔공산 북쪽 기슭을 흐르는 상추막이골에 자리한 데미샘. ‘데미’란 이 고을 말로 봉우리를 뜻하는 ‘더미’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데미샘 동쪽에 솟은 작은 봉우리를 동네 주민들은 천상데미(해발 1,080m)라 부르는데, 이는 섬진강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봉우리라는 뜻이다.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

장수군 장수읍 수분 마을 뒷산인 신무산의 계곡을 따라 2.5km 올라가면,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이 있다. 뜬봉샘은 봉황이 날아올랐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뜬봉샘에는 조선의 개국조인 이성계와 얽힌 설화가 전한다.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얻기 위해 전국 명산의 산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으려고, 신무산에 올라 중턱에 단을 쌓고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백 일째 되는 날 새벽에 이성계가 기도를 하고 있는 단을 조금 벗어난 골짜기에서,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떠오르더니 그 무지개를 타고 봉황새가 하늘로 비상을 하는 것이었다. 봉황이 날아간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정신을 차리고 들어보니 새 나라를 열라는 천지신명의 계시였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정신을 가다듬고 봉황이 날아간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풀숲에 덮인 옹달샘이 있었다. 이 옹달샘에서 봉황이 떴다고 하여 샘 이름을 ‘뜬봉샘’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뜬봉샘이 바로 금강의 발원지이다. 수분마을에서 뜬봉샘까지 천천히 걸어올라 가는 길.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 금강의 발원지도 볼 수 있는 뜬봉샘. 한 번쯤은 가볼만한 곳이다.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

태백시 황지3동 시가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 둘레가 100m인 상지와 50m인 중지, 그리고 30m인 하지로 된 3개의 못으로 나뉘며 상지의 남쪽에는 깊이를 잴 수 없는 수굴이 있어 수원이 된다고 한다. 황지에서 분출되는 물의 량은 가뭄에도 변함없이, 하루에 약 5000톤 정도가 용출되며 수온 또한 상온 15도를 유지하고 있다.

황지는 고지도를 비롯한 <동국여지승람>, <택리지> 등 옛 문헌에 의하면. 1,300리 낙동강의 발원지라는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낙동강의 근원으로서 관아에서 제전을 두어 가물 때는 기우제를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심 한 복판에 발원지가 있다는 것도 색다르지만, 이 황지의 주변은 공원을 조성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하고 있다. 황지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황지는 원래 황부자가 살고 있던 집터로, 주인 황씨는 많은 재산을 지닌 부자였으나 인색하기 짝이 없는 자린고비였다. 어느 봄날 황부자는 외양간에서 쇠똥을 쳐내고 있었는데, 옷차림이 남루한 노승이 시주를 청했다. 황부자는 시주하기를 거절했으나, 노승은 물러나지 않고 거듭 염불을 외며 시주를 청했다.

화가 치민 황부자는 쇠똥을 한가래 퍼서 시주바랑에 넣어주며 "이거나 받아가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노승은 노하기는커녕 공손히 인사하고 돌아가는데, 마침 방아를 찧던 며느리가 이런 모습을 보고 시아버지 몰래 쌀 한바가지를 퍼내어 노승에게 시주를 했다.

"이 집은 이미 운이 다 했으니 아기를 업고 속히 소승의 뒤를 따라오시오.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시오."라고 이야기를 한 노승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고, 며느리는 곧 노승의 뒤를 따랐다. 송이재를 넘어 구사리 산마루에 이르렀을 때, 뇌성벽력과 함께 땅이 갈라지는 소리에 놀란 며느리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돌이 되어 버리고 황부자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지금의 황지는 원래 황부자 집터였다고 하며, 상지는 집터, 중지는 방앗간, 하지는 측간자리라고 한다. 물론 전설이긴 하지만, 그런 내용을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여, 세상 살아가는 도리를 알려줄 수 있다면 그 또한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주말여행. 4대강의 발원지가 어떨까?


문수스님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소식을 접한 것은 5월 31일 오후 4시께였다.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밤 10시 쯤 전주를 출발해 군위 삼성병원에 도착한 것은 6월 1일 새벽 한 시께. 스님 몇 분과 신도 몇 사람이 빈소를 지키고 있다.

 

스님을 처음 뵌 것은 아마 한 15년 전인가 보다. 항상 말씀이 없으시고 과묵하신 스님은, 언제나 뵐 때마다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는 하셨다. 그렇게 강직하던 분이셨는데, 이렇게 빈청에 마련된 영정을 보면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지금이라도 '세상은 그저 강직하게 살아야만 해요. 세상에 나왔으면 할 일은 하고 가야지'라고 말씀을 하실 것만 같다.

 

문수 스님, 지난해부터 많은 고민 해와

 

"스님께서는 지난해부터 말이 없어지셨어요. 원래 과묵하신 분이신데 전혀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깊은 생각만 하고 계셨습니다. 3년 전부터는 공양도 하루에 한 끼 밖에는 들지 않으시고요. 배불리 먹는다는 것이 죄스럽다고 하시면서. 어제까지도 저와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렇게 소신공양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문수 스님과 지보사에서 함께 생활을 해 오셨다는 스님의 이야기다. 부여에서 먼 길을 달려오신 한 도반스님은,        

 

"문수 스님은 말씀이 없으신 분이죠. 그래도 가끔은 농담조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스님이 되어서 법랍 30년이면 살기가 편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날이 갈수록 어렵다고 하셨죠. 예전에는 모르고 지나치던 것이 이제는 발걸음 하나도 마음대로 뗄 수가 없다고요. 발 밑에 개미라도 한 마리 있으면 어쩌느냐는 것이죠. 그리고 지난해 부터는 4대강 개발을 두고 많이 고민을 하셨습니다. 스님이 되어서 세상 사람들처럼 싸울 수도 없고, 차라리 한 몸을 불살라 소신공양이라도 하고 싶다고요."

 

▲ 유서 문수스님이 자필로 쓴 유서. 4대강 개발 중지와 부정부패 척결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아마 스님께서는 이미 작정을 하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강직한 성격 탓에 불의와는 타협을 할 줄 모르는 스님이셨다. 언제나 말을 앞세우는 것을 싫어하시던 그 마음이 소신공양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하셨나보다.

 

서민들의 고통을 멈출 수만 있다면

 

"스님의 또 한 가지 고민은 바로 서민들의 고통이었습니다. 국가가 정책을 잘 펴서 없는 사람들이 편해야 하는데, 어떻게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느냐고 늘 노엽게 생각하셨죠. 소신공양 이야기 하실 때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되신다'고 했는데도, 결국 이렇게 소신공양으로 세상을 떠나셨네요. 스님의 소신공양은 순교라고 생각합니다."

 

스님이 자필로 쓴 유서에는 4대강 개발 중지와 부정부패의 척결 그리고 서민생활을 위한 정책을 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친필로 쓴 유서는 수첩에다가 쓴 것이다. 그리고 스님이 평소 입으시던 삼베 법복에도 유서와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늘 강직하시던 문수 스님. 오늘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군위 삼성병원 문수 스님의 빈소에서 말을 잃었다. 그저 하릴없이 스님의 영정만 바라보고 있는데 한 남자분이 이야기를 한다.

 

▲ 법복에 쓴 유서 명주로 지은 법복에 쓴 유서.

 

"문수스님의 법구를 보고 놀랐습니다. 스님의 법력이 대단하시다고 느꼈죠. 사람이나 짐승이나 불에 타면 신체가 오그라드는데, 스님께서는 일자로 꼿꼿이 숨지셨습니다. 가슴께로 두 손을 모으신 채로요. 몸이 타는데도 정신을 잃지 않으셨다는 것이죠."

 

이야기를 들으면서 억장이 미어지는 듯하다. 4대강은 인간들만을 위한 것이지만, 그 많은 생명들은 다 어떻게 할 것이냐고 하시던 문수 스님. 소신공양으로 인해 스님의 그 큰 뜻이 이루어질 수만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6, 1)


탈도 많고 말도 많은 4대강 정비. 밀어붙이기식으로 진행이 되는 4대강 정비는, 연일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년에 막대한 예산을 집행한다고 한다. 많은 부작용이 우려되는 가운데 4대강의 정비로 인한 문화유적지의 훼손이 가장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4대강 유역에는 많은 유적지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빠른 시일 내에 지표조사를 마치겠다는 이야기에 어이가 없을 뿐이다.

 

고달사지 정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여주 해목산 기슭 고달사지는 사적 제382호로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달사는 고려 초기 국가가 관장하는 3대 선원 가운데 하나로 왕실 비호를 받는 대가람이었다. 광종 1년인 950년 원감국사가 중건했다. 고종 20년인 1233년에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했으며, 1260년(원종 1)에 절을 크게 확장하고 중건했다고 기록에 나타나고 있으나, 그 후 기록이 없어 고달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은 것으로 전해온다.

 

  
▲ 고달사지 발굴 위에서 내려다본 고달사지 발굴현장. 7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6차발굴까지 이루어졌다.

  
▲ 정비된 고달사지 2009년 10월 18일 찾은 고달사지. 이렇게 정비를 하는데 꼭 10년이 걸렸다

975년에 세워진 원종대사 비의 명문에 의하면 당시에는 <고달원> 또는 <고달선원>이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고달사가 나타나고 있어, 조선조 중기까지도 고달사가 번창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고달사지에는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부도를 비롯해 보물 제6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보물 제7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 보물 제8호 고달사지석불좌가 절터에 남아 있으며, 보물 제282호 쌍사자석등 및 원종대사혜진탑비의 몸체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 보관하고 있다.

 

처음으로 고달사를 찾았을 때는 한창 발굴 작업이 진행되던 2004년 8월 12일이었다.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드러난 석물들을 한 곳에 모아 정리를 하고 있었다. 보물 등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석조물은 보호철책을 둘렀고, 발굴 작업을 한 곳이 비에 훼손이 될 것을 우려해 천막으로 덮어놓았다.

 

  
▲ 보물 제8호 고달사지석불좌 고달사지에 있는 보물 제8호 석불좌. 주변은 다 파헤쳐지고 보호철책이 둘러쳐 있다

  
▲ 정비된 고달사지석불좌 2009년 10월 18일에 찾은 고달사지 석불좌는 보호철책을 없애고 탐방로를 만들어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했다

  
▲ 고달사지석불좌 고달사지 석불좌가 있던 곳이 대웅전이었을 것이다. 주추돌이 남아있고 오르던 계단이 복원되었다.

빠른 시일 내에 4대강 유역 지표조사를 마치겠다고?

 

고달사지는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처음 발굴을 시작한 것이 2000년이었으니 고달사지 한 곳을 발굴, 정리하는데 6차 작업을 마친 2006년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4대강 정비라는 명목 하에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날림으로 조사될 확률이 높다. 강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적지가 있다. 사람들은 물이 많은 강 주변을 터전으로 삼아 마을을 형성한다. 하기에 4대강 정비를 하기 전에 문화재보호법에 규정돼 있는 문화재 보호절차 등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4대강 일대는 어느 지역보다도 유적지일 가능성이 큰 지역이기 때문에, 먼저 지표조사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 보물 제6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고달사지에 있는 보물 제6호 우너종대사혜진탑비 및 이수. 탑비의 몸통부분(비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다.

  
▲ 보물 제6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2009년 10월 18일에 찾은 고달사지는 보호철책을 없애고 주변을 정리하여 누구나 다가가 자세히 관찰할 수 있도록 헸다

2009년 10월 18일, 다시 찾은 고달사지는 말끔히 정비가 되어있었다. 보호철책으로 둘러  쌓았던 보물들은 철책 대신 주변 정리가 되어 있었고, 탐방로가 마련되어 있어 문화재를 둘러볼 수 있도록 하였다. 결국 이렇게 정비를 마칠 때까지는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빠른 시일 내에 지표조사를 마치겠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회마을에 보를 설치하겠다고 발표를 했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치자, 취소를 하는 등 개발계획을 남발하는 관계당국이다. 이런 관계당국이 올바른 지표조사를 하리라고 믿음이 가질 않는다. 4대강 유역의 문화재지표조사는 한 두 해에 마쳐질 것이 아니다.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 조사를 해보아야 한다. 여주 고달사지 발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09,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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