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우리 전통가옥들이 아직도 잘 보존이 되어 있다. 대개는 중요민속문화재나 지방문화재 자료 등으로 지정이 되어 있는 집들이다. 요즈음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야 생활에 불편을 느끼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옛 모습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보존을 해야 할 중요한 문화자산이다.

 

이 집들은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지만, 일반적인 모습 외에 그 나름대로의 멋을 지니고 있다. 그 멋은 무엇일까? 집의 소개는 안내판을 읽어본다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이미 잘 나와 있다. 그래서 지나쳐 버리기 쉬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쉽게 넘겨서는 안 될, 그 숨겨진 멋을 찾아본다는 겻은 고택답사의 또 다른 재미이다.

 

 

회재 이언적 선생의 온기가 서린 집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1491 ~ 1553)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지은 사랑채다. 조선조 중종 27년인 1532년에 세운 집이니 벌써 50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집이다. 독락당은 중요민속문화재가 아닌 보물 제413호로 지정이 되어 있어, 남다른 집인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독락당은 사랑채인 독락당 건물과, 선조 33년인 1601년 이언적의 손자인 순과 준 두 형제가 화의문을 작성하고 지은 경청재 등으로 조성이 되어 있다. 경청재는 1900년대 이후에는 머슴들이 기거하기도 했다. 경청재를 지을 때, 순과 준 두 후손은 이언적에게 후손들이 누를 끼칠 것을 우려해 화의문을 작성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정과 독락당은 우리 선조고(先祖考) 문원공(文元公) 회재선생의 별서이고 이외 유택에는 우리 부모(휘 전인, 호 잠계)의 혈성이 가득하다. 당우와 담장을 수호하기 위해 우리 형제가 약간의 토지를 출현하였다. 후손들 가운데 혹 궁벽하여 토지에 대해 다투는 일이 있으면 불효로써 논단할 것이다.

 

흙 담이 자연과 순응하고

 

독락당을 돌면서 가장 편하게 보이는 것은 흙담과 흙길이다. 기와와 돌을 이용해 문양을 넣고 쌓아올린 흙담은 투박하다. 그러나 그 흙담이 주는 편안함이 있어, 독락당이 더 편한 집이란 생각이다. 거기다가 담과 담 사이에 난 흙길 또한 백미다. 독락당은 전체적인 집의 구조물을 감싼 담장 안에 또 다른 담장들이 건물을 가르고 있다. 어찌 보면 한 채 한 채가 다 별개의 집으로 조형이 된 듯하다. 집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가장 편안하게 배려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독락당을 지은 이언적은 건축에도 많은 신경을 쓴 것을 알게 된다. 한 마디로 자연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것을 적절히 이용해 집을 지었다. 독락당을 돌아보면 집의 우측에 계곡이 있다. 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쪽으로 난 담장에, 흙 담이 아닌 나무로 만든 창이 있다.

 

말은 창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창살도 나무로 만든 이 담 벽에 붙은 창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시원한 계곡의 바람이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자연을 그대로 이용한 독락당의 건축미학이 이런 곳에 있다. 계곡의 바람도 들어오고, 이 담 벽의 창으로 계곡의 경치까지 볼 수 있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길이 아닐는지.

 

 

담 벽에 붙여 지은 건물의 용도는?

 

계곡을 돌다가 보면 또 하나 볼거리가 있다. 담의 한쪽에 대를 만들고, 그 위에 반은 밖으로 반은 안으로 들어가 있는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의 용도는 무엇일까? 곁으로 지나가다가 보니 이 건물의 용도가 궁금하다. 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뒷간의 용도가 아닌가 한다. 담의 밖으로 돌출을 시켜 안의 공간을 확보하도록 한 이런 여유가 독락당의 또 하나의 묘미다.

 

 

 

넌 도대체 무슨 연유로 그곳에 있느냐?

 

흙으로 올린 담장 사이로 난 길을 걸어 계곡 쪽으로 가다가 보면, 담장 끝에 난 조그마한 문 하나가 있다. 이 작은 문을 왜 이곳에 두었을까?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지만, 그 중에 하나가 이 문의 용도는 계곡으로 드나드는 문이란 생각이다. 즉 이 작은 문을 나서면 바로 계곡이다. 여름철 더위를 씻어내고 싶을 때, 이 담벼락에 붙은 쪽문을 나서 계곡에서 목욕이라도 했던 것일까?

 

 

이 문이 아니면 담장을 돌아 나와야 한다. 이 작은 문 하나가 계곡을 가기 위한 것이라면, 이 집주인의 작은 배려 하나가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가를 느낄 수 있다. 독락당은 자연이다. 어느 것 하나 자연을 거슬리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자연이 되어버렸다. 독락당의 매력은 바로 그런 점이다. 남들이 돌아보지 않는 곳, 그 안에 또 다른 독락당이 있었다.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소재한 보물 제413호 독락당. 그 독락당 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이, 바로 계곡 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정자 계정이다. ‘계정(溪亭)’이란 이름이 딱 알맞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이 정자가 독락당 옆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계정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다. 아니, 자연과 스스로 동화가 되어 자연의 일부분인 양 서 있다. 널찍한 암반을 발아래 두고, 그 암반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른다. 물은 맑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정도로 푸르다. 계곡을 볼 수 있는 정자의 앞면은 축대 밖으로 돌출이 되어 있다. 기둥으로 떠받쳐 놓은 마루가 이 정자의 또 다른 멋을 연출한다.

 

 

500년 세월, 계곡과 함께 지내 온 정자

 

계정은 자손들이 독락당을 중건하면서 당시에 이미 있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처음 이언적이 독락당을 건축할 때 같이 조성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500년 가까운 세월을 이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이젠 스스로가 계곡이 되었을 것 같다. 그래서 전국의 수많은 정자를 답사하면서, 늘 마음속에 정자 하나를 그리워하는가 보다.

 

독락당 안으로 들어가 양편에 황토와 돌로 쌓은 담을 따라 들어가면 계곡으로 나가는 출구가 있다. 이곳은 건물을 모두 담장으로 둘러쌓았으면서도, 담장마다 계곡으로 출입을 하거나 계곡 바람이 통하게 문을 내어 놓았다, 그리고 그 한편에 높은 축대 위에 걸터앉은 계정이 자리하고 있다.

 

 

 

 

호화롭지 않은 정자, 선비의 마음을 닮아

 

계정의 뒤편으로도 건물을 달아내어, 땅을 밟지 않고도 계정으로 옮겨 다닐 수 있도록 한 점도 눈에 띤다. 그저 호화롭지는 않지만, 계곡의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도록 공간을 확보했다는 점이 계정의 매력이다. 밑에서 계정을 올려다보면 마치 계곡 위에 떠 있는 선계의 누각과 같은 느낌이 든다.

 

아마도 이언적 선생의 마음이 그대로 이 정자에 배어 있는 것은 아닐까? 화려함을 멀리하고 올곧은 생활을 하고자 하는 계정의 주인이 심성이 그대로 배어 있는 듯하다. 계곡에서 정자를 바라보면 마루 좌측 벽에 '계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자연은 정자 내에도 자리해

 

오른쪽에는 방을 두었고, 방 앞에는 '인지헌(仁智軒)'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어질고 지혜롭기를 바라는 이언적의 마음인가 보다. 바로 주인의 마음이 그대로 정자에 소롯히 담겨져 있다. 인지헌의 밑에는 축대 중간에 아궁이가 있다. 그 밑에서 불을 땔 수 있도록 하여, 공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계정 역시 담에 붙여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안에서 보면 단층이지만, 밖에서 보면 중층 누각처럼 보인다.

 

 

독락당의 모습도, 계정의 모습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자연이 되어 있다. 계곡을 닮아 있는 정자, 계정의 아름다운 까닭이다. 이 계절, 날이 더워질 때가되면 더 없이 계정이 그리운 까닭이기도 하다.

고창읍에 있는 노동저수지를 끼고 돌아 호도마을 쪽으로 100m쯤 가면, 수백 년 된 노송과 거목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숲에 정자가 보인다. 고창읍 화산리에 속하는 곳에 자리한 취석정의 ‘취석(醉石)’이란 말은, 옛날 중국의 도연명이 한가로이 세상을 살 때 술이 취하면 집 앞 돌 위에 잠들기도 했다는 설에서 비롯한 것으로, 사람이 욕심 없이 한가롭게 생활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취석정, 말로만 들어도 운치가 있을 것만 같아, 해질녘인데도 발길을 재촉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멋을 풍기고 서 있는 취석정. 노계 김경희(1515∼1575)가 명종 1년인 1546년에 처음으로 세운 정자라고 하니, 벌써 460년을 넘긴 고정(古亭)이다. 김경희는 을사사회로 인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죽음 이만영, 규암 송인수, 둔옹 심광언 등 제현과 더불어 정자에 올라 시를 읊고 문의를 강론하였으며, 그때의 시집 노계집 1권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지석묘군과 함께 어우러진 취석정

흙담을 두른 취석정, 고창군내의 문화재에는 문을 담가놓지 않아 어디든지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일각문을 열고 들어가니 담장 안에는 7기의 작은 지석묘군이 자리하고 있다. 밖에도 3기의 지석묘가 자리하고 있어, 총 10기의 지석묘가 이 곳 정자와 함께 자리를 하고 있다. 고풍스런 정자와 함께 선사유적을 감상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정자를 찾은 나그네의 홍복이 아니던가.

1871년에 중건된 취석정 한 옆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다. 목조 와가인 취석정은 부재가 건실한 것이 그 오랜 세월을 튼실하게 버티고 있다. 건물의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담장 안에 있는 지석묘 한 기에는 ‘취석정’이란 글씨를 음각해 놓았다. 담장 안팎으로는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와 고목이 된 버드나무들이 자리하고 있어, 정자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자는 덤벙주초를 놓았으며, 댓돌도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했다. 주변 경관을 해하지 않고, 스스로 자연 속에 파묻힌 듯한 느낌이다. 이 정자의 특징은 정자 한 가운데 온돌방을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방 모두를 분합문을 내었으며, 전 후면에는 머름대를 시설해 두 짝의 분합문을 달고 나머지는 판벽으로 처리하였다. 이런 구성은 밖의 경치를 시원하게 구경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은 겸손함

취석정은 자연을 이기지 않는다. 그저 자연 속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듯하다. 앞으로는 실개천이 흐르고, 뒤로는 누렇게 익은 벼들이 가득한 논이다. 그 주변에 커다란 나무들이 서 있는데, 밑에 웅크리고 있다. 행여 누군가의 눈에라도 뜨일까봐 걱정을 하는, 새색시 같은 마음이다. 적어도 처음 취석정을 본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누마루 위로 올라본다. 문을 열어 천정에 붙들어 맨 창호들이 한껏 마음을 연 듯한 모습이다. 방은 온돌로 처리했다고 하나 지금은 그저 흙을 쌓아 방을 돋은 것 같아 보인다. 앞 내 건너편에 있는 고목이 된 버드나무에서 취석정의 세월을 읽어낸다. 그렇게 오랜 세월 이 정자는 수많은 시인묵객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정자와 지석묘가 어우러진 곳. 커다란 나무들이 정자를 감싸고 있는 곳. 그리고 앞으로 흐르는 내가, 절대로 물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았을 것만 같은 취석정에 해가 넘어가고 있다. 좀 더 일찍 이곳을 찾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돌리는 발길 머리에 긴 그림자 하나가 끌려온다.

사람들은 저마다 찾는 것이 있다. 같은 곳에 같이 가서 사진을 찍어도, 저마다 나름대로의 마음에 맞는 것을 선택한다. 물론 좋은 것을 찍으려는 마음은 동일하다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내가 유별난 것인지도 모른다. 난 어디를 가나 꼭 열심히 찍는 것이 있다. 바로 담벼락이다. 그리고 집안을 기웃거리며 장독대를 찍다가 가끔 경을 치기도 한다.

날이 아침부터 꾸무럭하다. 바람도 선선한 것이 엉덩이가 들썩거려 못 견디겠다. 팔이 아프다는 핑계로 한 사흘 가만히 있었더니, 병이 도졌는가보다. 얼른 카메라를 둘러메고 한옥마을로 향했다, 초입서부터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역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오늘(2010, 9, 9) 전주 한옥마을에서 내가 만난 담벼락들이다. 담벼락을 만나는 전주 한옥마을의 길, 가을철에 어슬렁거리며 걷기 딱 좋은 길이다.


담벼락이 늘어선 길을 어슬렁거리다.

담벼락이 늘어선 길을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노라면, 마음이 텅 비어버리는 것만 같다. 주욱~ 늘어선 담벼락이 마치 시간을 초월해버린 것만 같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변하는 담벼락을 만나면서 이것은 누구네 집, 저것은 누구네 집을 꼽아본다. 손가락이 열개인데 그 손가락을 몇번이고 접었다 폈다를 반복해도, 담장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이길이 좋다.



  
난 늘 이 담장을 좋아하면서 살았다. 그것은 이 담장 하나가 그리도 포근하게 어린 나를 감싸고 있던 기억 때문이다. 어릴 적 말썽을 피우다가 정말 눈물이 날만큼 혼이나고, 방에서 강제로 추방을 당했던 기억이 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었는데, 속옷 바람으로 밖으로 나왔으니 얼마나 추울 것인가? 아마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추웠던 것만 같다.

그렇다고 우리 가족이 어린이를 학대하는 사람들로 오해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 당시에는 누구나 그런 경험이 다 있을 테니까. 그때 담벼락 위에 삐죽 얼굴을 내민 기왓장이 눈을 막아주고, 담장은 한 겨울의 거센 바람을 막아주었다. 그 담장 밑이 왜 그리도 포근하든지.

황토와 기와의 만남, 그 자체가 예술이네




황토와 기와, 그리고 돌이 만나면 찰떡궁합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그것이 담장이 아니었어도 이렇게 궁합이 들어맞았을까? 천천히 걷는 한옥마을 길에는 이런 찰떡궁합이 늘어서 있다. 그래서 연인들이 전주 한옥마을 길을 걸으면, 잘 헤어지지 않는다는 믿지 못할 소문도 있다고 한다. 이런 소문이 헛소문이라도 좋고, 지금 내가 지어낸 소문이라도 좋다. 그저 좋다면 좋은 것이겠지 하는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니까.


돌담 또한 운치가 있다. 돌을 그대로 척척 쌓아올리고 그 위를 기와를 얹어놓았다. 참 담벼락이란 것이 묘하기는 하다. 어떻게 만들어 놓던지, 그 모습이 그곳과 어울리기 때문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담벼락이 거기에 있어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 사람이 언제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듯 말이다.



사람들도 그렇다.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에 따라 격이 있다고도 한다. 누구는 부자고, 누구는 가난하다. 누구는 잘났고, 누구는 못났다. 누구는 똑똑하고, 누구는 멍청하다. 누구는 착하고, 누구는 나쁘다. 이렇게 누구는 타령을 하다가 보면 석 삼일을 밤낮으로 해보아도 다 못할 것만 같다.

그런데 담벼락은 그런 것이 없다. 그저 담벼락일 뿐이다. 그 담벼락이 돈을 많이 들여서 조성을 했건, 아니면 그저 집에 있는 진흙덩이 조금에 이웃집에 있는 버린 기와 몇 장을 얻어다가 했건 그냥 담벼락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사람보다도 훨씬 좋단 생각이다.



담벼락 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다가 발견한 두 곳의 담벼락. 하나는 돌담 위에 수세미가 열려 나뭇가지로 기어오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고, 하나는 언제나 거기 붙어 있었다는 듯 그렇게 담벼락에 붙어있는 도판담장이다. 이렇게 볼 것이 많은 길을 걸으면서, 왜 우리는 이런 것에 인색하게 굴까? 그것은 바로 소통을 할 수 있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늘 전주 한옥마을을 어슬렁거리며 글 소재 하나는 괜찮은 것으로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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