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처음 생일 축하 케이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좋은 식당의 멋진 정원에서 촛불을 켰죠.초는 모인 인원이 세 사람이라 세 개만 켰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런 세상을 살다가 보면 즐거운 일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날마다 힘든 세상을 산다고 불평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1128일은 음력으로 1026일입니다. 참 말하기 쑥스럽긴 하지만 저라는 인간이 세상에 나온 날이랍니다. 올해 1128일은 참 잊지 못할 날이 될 것 같습니다.

 

참 세상을 살면서 험하게 살았습니다. 아마 단 1년도 편안 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을 해보면 그동안 왜 그렇게 허덕이면서 살아나 싶을 정도로 험하게 살았으니까요. 그렇게 살다가보니 생일이라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생일이란 것을 머리에서 지우고 살았던 것도 같습니다.

 

가까운 지인이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준 화장품 세트입니다. 겨울에 취재다닐 때 트지 말라고요.


 

바쁘게만 살아온 날들

 

참 그동안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아마 그 누구보다도 바쁜 시간을 보낸 듯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바쁘게 살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상하게 생일이라는 것을 제대로 챙기지를 못했습니다. 생일만 되면 타지에 가 있거나 산꼭대기, 혹은 섬에 들어가 있는 날이 대분이었으니까요. 답사를 시작하면서는 거의 생일을 외지에서 맞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벌써 오랜 세월을 생일이라는 것을 잊고 살았다고 보아야죠. 이렇게 살아 온 세월이 오래이다 보니 아예 생일이 무엇인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아마 십 수 년을 그렇게 따듯한 미역국 한 그릇을 제대로 먹고살지 못한 나날이었습니다. 어쩌면 생일을 혼자 보낸다는 것이 마음아 아파 일부러 답사 길을 나섰는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생일 날 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혼자서 떠나는 답사. 남들에게는 말이 좋아 답사를 떠났다고 둘러대지만, 그 속이야 사실 편할 리가 없었던 것이죠. 그저 혼자 궁상스럽게 상을 차리는 것 보다는, 오히려 답사를 하면서 모든 것을 잊고마는 것이 더 편했다고 보아야죠.

 

취재할 대 추울까봐 두툼한 장갑과 털모자도 선물을 받았습니다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

 

올 해도 사실 큰 기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 나처럼 생일 전날에 답사를 나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생일에 혼자라는 것이 나이가 먹어가면서 점점 서글퍼진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이상하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생일을 물어보고, 생일에 약속을 미리 하기도 했습니다.

 

혼자 늘 생활을 하다 보니 그렇게 사람들이 신경을 쓰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고, 괜히 쑥스럽기도 하고요, 어제인가 가까운 지인들이 점심을 함께 하자고 해서 따라 나섰습니다. 점심을 먹으러 조금 멀리 나간다 싶었는데, 중간에 차를 세우더니 한 사람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케이크 상자 하나를 들고 왔습니다.

 

가득 쌓인 생일 선물, 이런 일 처음입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라 당황스럽기도 하고요. 점심을 먹은 식당이 워낙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그런 곳에서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박수를 받아야한다는 것이 영 쑥스러워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왔죠. 결국엔 쌀쌀한 바람이 부는 야외에서 촛불을 켜고 박수를 받았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영 민망스러워 혼났죠.

 

아우는 겨울에 춥다고 점퍼와 안에 속을 댄 바지까지 들고 왔네요


 

그리고 저녁에는 e수원뉴스의 사람들과 미리 조촐하게 술을 한 잔 하려고 약속을 하고 그 장소로 나갔더니, 들어오는 사람마다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오데요. 한 사람은 겨울에 찬 바람에 취재를 다니면 피부 트지 말라고 화장품을 주면서, “행님 냄새 좋은 이 화장품 쓰고 좋은 여자 만나요.”랍니다.

 

또 한 사람은 취재를 다닐 때 춥다고 장갑과 털모자를 들고 왔습니다. 그리도 한 사람은 담배를. 용케도 내가 잘 피우는 담배를 선물로 받았죠. 그날 낮에는 아우가 날이 추운데 따듯하게 입고 다니라면서 점퍼와 속이 두꺼운 바지를 사들고 왔습니다. 이래저래 선물이 쌓였죠. 막말로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생일 케이크를 받아보았습니다.

 

참 그동안 살아오면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생일 케이크와 선물 상자들. 살다보니 이런 날이 다 있네요. 낮에 아우가 하는 말이 자꾸만 고맙습니다.

형님 날도 추운데 밖에 나가면 번거로우니까 그냥 집에서 사람들 초대해서 삼겹살에 술 한 잔 하죠. 준비는 제가 해 놓을게요.” 이래저래 행복한 날입니다.


예전에는 ‘동동구루무’라는 것이 있었다. 여자들이 즐겨 쓰던 화장품이다. 지금으로 따진다면 ‘동동’은 그 제품의 명칭일 테고, ‘구루무’란 크림을 말하는 것이란 생각이다. 이 동동구루무에 대한 그리움은, 아마 지금 70~80대 정도의 아르신이라면 한두 가지 재미난 일화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제는 내 나이도 60이 지났지만, 어릴 적 어머니의 화장대 앞에 놓인 동동구루무를 본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구루무 통이 자취를 감추고, 당시 말로 꼬부랑글씨가 쓰인 화장품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동동구루무가 사라진지도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이다.

2004, 9 용인 한국민속촌에서

영화 속에서나 나올만한 장면

동동구루무 한 통만 사면
온 동네가 곱던 어머니
지금은 잊혀진 추억의 이름
어머님의 동동구루무
바람이 문풍지에 울고가는 밤이면
내 언 손을 호호불면서
눈시을 적시며 서러웠던 어머니
아~ 동동구루무

김용임이라는 가수가 부르는 ‘추억의 동동구루무’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예전에는 이 동동구루무가 여성들에게는 꽤나 호사스런 품목이었던 것만 같다. 가끔은 퇴색한 영화 속에서 장에 나갔던 돌쇠녀석이, 세경을 받은 돈으로 동동구루무 한 통을 사오는 모습이 그려진다. 물론 그 동동구루무는 돌쇠가 연모하던 마을 양반집의 여종인 옥분이에게 건너갔을 테고.


인터넷검색으로 찾아낸 이미지

동동구루무 한 통을 받은 옥분이는 그동안 벌처럼 돌쇠만 보면 쏘아대던 말투가, 얼굴에는 가득 미소를 띠면서 고분고분해졌을 것이다. 이런 추억을 가진 동동구루무는 꽤 오랜 시간동안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동동구무루란 명칭도 아마 화장품을 팔고 다니던 장사꾼의 모습 때문에 나온 이름인 듯하다.

등 뒤에 짊어진 북소리 ‘둥둥’

어릴 적에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동동구루무를 파는 장사를 본 적이 있다. 1950년대야 지금처럼 대형 슈퍼마켓 등 종합적인 물건을 파는 곳이 없었다. 그저 마을마다 몇 개씩 있는 ‘○○상회’ 혹은 ‘○○상점’이라는 간판을 단 구멍가게들이 다였으니까 말이다. 이때는 간장과 같은 찬거리며, 이것저것을 팔러 다니는 장사들이 연신 마을을 돌아칠 때다.



아마 당시에는 이 동동구루무만큼 인기가 있었던 상품도 그리 흔하지가 않았다. 등 뒤에는 대북을 메고, 손에는 작은 북이나 하모니카 등을 들고 다닌다. 북소리가 나면 여기저기 흩어져 놀고 있던 아이들이 쫒아와,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마을의 아낙네들이 몰려나오면, 용기에다가 듬뿍 큰 통에 든 구루무를 퍼 담아 주기도 했다. 벌써 그런 모습을 본 것이 50여년이 훌쩍 지나버렸으니, 이도 당시의 신풍속도였다는 생각이다.

어머니의 정이 그리운 동동구루무

한 겨울에 찬바람이라도 나가서 쏘이고 들어오면, 어머니는 당신이 아끼시던 동동구루무를 듬뿍 손에 발라 비벼주시고는 했다. 그 냄새가 그때는 왜 그리도 좋았는지 모른다. 아마 그 냄새는 당시 일을 하느라 땀에 절어버린 어머니의 냄새와 함께, 지금도 기억을 할 만한 나름의 포근한 어머니의 냄새를 만들어 냈던 것 같다.


요즈음 여인들은 동동구루무라고 하면 싸구려 화장품으로 생각을 하겠지만, 당시의 동동구루무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그 구루무 한 통에 수많은 사연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구루무 한 통으로 사랑을 얻기도 하고, 많은 눈물도 흘렸기 때문이다. 연일 영하로 떨어져 올라갈 줄 모르는 날이 계속돼서인가? 어머니의 동동구루무가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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