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 단을 올린 위에는 한 날 작도가 놓여있다. 그리고 한 남자가 그 위로 오르더니 천을 작도 날에 갖다 문지른다. 그 순간 천이 석석 비어진다. 잘 갈아놓은 작두의 날이 번들거리는 것이, 바라다만 보고 있어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3일 오전 9시가 가까워지면서 화성시 장안면 면시무소에는 버스와 차량 등을 이용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가을비치고는 빗줄기가 세찬 편이었지만, 면사무소 강당 안과 밖에는 테이블이 놓이고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하고 앉았다. 장안면 각 마을에서 모인 어르신들은 1,500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1,500명 어르신 모시고 효 잔치 및 제6회 대동문화제 열어

 

3일 오전서부터 열기로 했던 장안면 효 잔치 및 제6회 대동문화제를 개최하는 날에 가을비가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면사무소 앞 공연장에서 열기로 했던 효잔치 및 대동문화제는 장소를 강당으로 옮기고, 그 밖에는 비닐로 차일을 치고 그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날 프로그램은 1부에서는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보존회원들이 판굿을 벌이는 대동굿 재현과, 2부에서는 유래비 제막식 및 개회식, 그리고 3부에서는 효 잔치 한 마당이 벌어졌다. 이날 음식을 준비한 장안면 조종애(, 58) 부녀회장은 1,500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했다고 한다.

 

 

어제부터 저희 장안면 48개리 부녀회장 및 회원들이 모여 음식을 준비했어요. 음식은 어르신들이 비가 오는 날 따듯하게 드실 수 있도록 고깃국과 불고기, 잡채, 수육, 도라지무침, 버섯전, 나박김치, 과일, 떡 등 10여 가지가 넘어요. 오늘 인근 부대에서 봉사를 나온 군 장병들과 함께 이 음식을 어르신들께 나누어 드릴 겁니다.”

 

비가 오는데도 취사장 근처에서 송산면에서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포도를 일일이 정리하고 있는 부녀회원들은 수백 상자 째 다듬고 있다면서 팔이 아프다고 한다.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프로그램이l 진행될 대마다 큰 박수를 치면서 즐거워한다.

 

 

채인석 시장 등 참석, 유래비 제막식도 진행 해

 

이날 행사는 비가 오는 바람에 예정시간보다 늦은 10시 경부터 강당 안에서 먼저 대동굿이 벌어졌다. 앉은부정에 이어 경기도당굿 이수자인 김경진(도당굿보존회 부회장)의 제석굿, 이수자인 승경숙(도당굿보본회 남부지부장)의 신장, 대감굿, 김경진의 군웅굿으로 이어졌다. 반주를 하는 악사로는 이수자인 변남섭(청배, 장고), 곽승헌(피리) 등이 맡았다.

 

11시 경에는 장안면에 채인석 화성시장이 도착을 했고, 곧 이어 장안면 청사 입구에 마련한 유래비의 제막식이 있었다.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리는 가운데서도 채인석 시장을 비롯한 시의원, 장안면장과 부녀회장, 이장 등이 참석해 함께 제막식을 가졌다.

 

유래비 제막식에 이어 강당 앞에 마련한 무대에서는 난타작두거리가 이어졌다. 계룡산 할아버지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공성구의 작도거리이다. 먼저 문하생들과 태평소 등이 빠른 장단을 치자 날이 선 큰 칼을 들고 혀에 대는 등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주변에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여기저기 휴대폰 등으로 촬영을 하느라 부산하다.

 

 

TV등에 출연을 하고 국태민안 나라굿을 주관하고 있는 공성구의 작도거리를 보고 있던 한 사람은 소름끼친다고 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한다.

정말 무섭네요. 저렇게 날이 선 칼로 어떻게 입에다 대고 문지를 수가 있죠. 다치지 않을지 걱정도 되고요. 오늘 이렇게 하는 행사가 우리 장안면이 평안하고 농사가 풍년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옛날에도 그래서 대동굿을 열었다고 하잖아요.”

 

1130분부터는 민요, 노래자랑, 어린이 벨리댄스 등 본격적인 효 잔치가 벌어졌다. 장안면 효 잔치를 보러왔다는 일본인 관광객중 한 사람은 모처럼 한국에 와서 효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고 간다.”면서 대동굿과 작도거리를 보면서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한국의 문화를 더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가끔은 이런 집들을 볼 수가 있다. 양을 너무 많이 주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음식을 남겨야 하는 집. 이런 집이 있다고 하면 남들은 ‘맛이 없겠지’라고 생각을 하기가 쉽다. 하지만 맛도 좋고 음식 값도 착한데 양까지 푸짐한 집이 있다고 하면, 도대체 어떤 집일까? 라는 궁금증이 든다.

 

27일(토) 아우와 함께 화성시의 산 한 곳을 산행을 했다. 산은 그리 높지는 않았으나 숲 전체가 벌목으로 베어놓은 나무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정말로 최근에 한 산행 중에 가장 힘들고 위험한 산행이었던 것만 같다. 그렇다고 소득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그저 장수 버섯 몇 개를 채취한 것이 고작이었다.

 

 

비 온 뒤에 습한 숲, 땀으로 범벅이 돼

 

장마 끝에 올라가는 산행은 힘들다. 그것도 등산로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니다. 계곡을 따라 사선으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미끄러지고 만다. 낙엽 밑에 물기라도 있으면 영락없이 미끄러지니, 그 또한 산행에서 힘든 일중 하나이다. 그렇다고 편한 길도 아니다. 온 산 전체가 벌목 한 나무들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어. 딴 곳보다 몇 배나 더 힘들었나 보다.

 

그렇게 몇 시간을 산을 헤맸지만 결국 찾아야 할 것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이 각각 물을 얼려 두 통씩이나 준비를 했지만, 그것마저 오래 가지를 않을 듯하다. 워낙 숲이 습하다가 보니 땀이 비 오듯 한다. 전날 과음을 했다고 하는 일행은 어지간히 힘이 들었나보다. 결국 몇 시간 산행을 하지도 못하고 포기를 하는 수밖에.

 

 

이 칼국수 먹다보니 대박일세.

 

돌아오는 길에 보니 ‘얼큰 바지락 칼국수’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나나 일행이나 땀도 흘리고 그 전날 먹은 술기운 탓에 두 사람이 다 ‘얼큰 칼국수‘라는 글씨가 눈에 띠었나보다. 차를 돌려 칼국수 집으로 들어갔다. 화성시 봉담읍 덕리 244-2번지. ’덕봉 해병대 칼국수‘라는 간판이 달려있다. 이곳 가까운 곳에 해병대 사령부가 있어서, 해병대 칼국수 집인가 보다.

 

이 집은 칼국수와 만두 밖에는 메뉴가 보이지 않는다. 칼국수 전문점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메뉴를 보니 얼큰 바지락 칼국수 6,000원, 바지락 칼국수 5,000원, 멸치 칼국수는 4,000원이다. 한 편에는 ‘보리밥’과 ‘막걸리 1인1잔은 공짜’라는 문구도 보인다. 가격도 착한데다가 서비스까지 좋다.

 

 

얼큰 바지락 칼국수 2인분을 시켰다. 큰 사기그릇인 함지박에 하나 가득 담아다 주는 칼국수. 2인분이라고 한다. 국자로 저어보니 바지락이 더 많은 듯하다. 작은 그릇에 옮겨 국물을 먹어본다. 정말 얼큰하다. 아뿔싸! 그런데 먹느라고 바빠 사진 찍는 것을 잊어버렸다. 지금이라도 찍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휴대폰을 이용해 사진을 찍었지만 폼이 안 난다.

 

무슨 2인분이 이렇게 많아요?

 

두 사람 다 산행을 하고 내려온 뒤라 속도 허하고, 더구나 전날 과음을 한 탓에 얼큰한 것도 당기고. 과음 후에 딱 맞는 음식인데 이건 고민이 하나 생겼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를 않는다, 웬만한 양은 두 사람이 바닥까지 먹어치운다. 그런데 배가 불러 오는데도 함지박 안에는 그대로 남아있는 칼국수.

 

 

“2인분이 왜 이렇게 많아요?”

“여기 오시는 분들 중에는 그 양도 적다고 하는데요.”

“군인들이라 그런 것 아닌가요?”

“아뇨. 마을 분들도 양이 적다고 하세요.”

 

세상에 이렇게 많은 양을 갖고도 양이 적다고 하면, 그 분들 정말 칼국수 무지 좋아하는 모양이다. 정말 얼큰하고 시원한 것이 속이 확 풀렸다. 이렇게 맛이 있는 칼국수가 양까지 푸짐하니 이야말로 대박집 아닌가? 두 사람이 결국 다 못 먹고 남기고 말았다. 어디가서 음식을 먹을 때 남기는 법이라고는 없었는데 말이다.

 

 

세상에 이런 식당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맛도 좋고 가격 착하고 거기다가 양까지 푸짐한 이 해병대 칼국수집. 식당 앞에는 저수지가 있어, 칼국수를 먹고 난 후 물가에서 잠시 바람도 쏘일 수가 있다. 이래저래 맛있는 집, 자칫 이 좋은 집을 놓칠 뻔 했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에는 사적 제217호인 '당성(唐城)'이 자리하고 있다. 이 당성이 소재하고 있는 남양 지역은,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이라 불린 중국과의 교통 요지였다.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삼은 중요한 곳이었다.

 

424(), 채인석 화성시장과의 인터뷰를 마친 후, 당성으로 올랐다. 당성은 옛 명칭으로 당항성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름 그대로 당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곳이다. 4월인데도 날이 덥다. 성벽 위로 걷는데, 숨이 가쁘다. 그도 그럴 것이 오후에 나선 답사 길을 재촉하느라, 무리를 했기 때문이다.

 

 

삼국이 번갈아 차지했던 교통의 요지

 

당성은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은 남북으로 기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당성은 동문과 남문, 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성은 현재 복원 중이다. 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니 세 곳 정도로 나누어서 복원을 하고 있는 듯하다.

 

당성은 화성 남양반도의 서신, 송산, 마도면의 3개면이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향으로 경사진 계곡을 이용하여 석루를 돌려 축성을 하였다. 전장이 1.148m 정도가 되는 이 당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불렀다.

 

후일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했다.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당성은 그 쌓은 시기를 달리하는 3중의 성벽으로 구성되었다. 처음 이 당성의 성벽은 테뫼식으로 쌓은 토축 산성이었다, 그 길이는 336m이다. 쌓은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서 쌓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복원을 마친 곳 외에 드문드문 옛 성의 흔적들이 잡풀과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망해루터와 건물지, 우물터 등이 남아있어

 

얼마를 돌아보니 지대가 높은 곳에 돌이 쌓여있고, 뒤편으로는 넓은 터가 보인다. 아마도 건물이 들어있던 곳 같다. 앞에는 '망해루 터'라는 석비가 있다. 이곳에 망해루라는 누각이 서 있었다는 것이다. 망해루는 목은 이색이 지은 남양부 망해루기에 보면, 고려말 남양부사 정을경이 고을의 치소에 외관을 웅장하게 하고 찾아오는 손님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직은 복원이 되지 않은 곳에 문지인 듯한 곳이 보인다. 성을 한 바퀴 돌아 밑으로 내려오니, 우물터가 보인다. 이 우물터는 당성 안에 식수를 공급한 곳으로 추정한다. 지름이 50cm 정도에 깊이는 1m 정도로 비교적 작은 우물이다. 우물은 원형으로 땅을 판 후, 주변에 돌을 쌓아 올렸다.

 

 

당항성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원효

 

원효(617-686)대사는 신라 진평왕 39년인 617년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동이었다.

 

원효대사의 행적 가운데서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두 차례에 걸쳐 당으로의 유학을 시도했던 원효대사가 스스로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린 일이 그것이다. 원효대사는 45세에 두 번째로 의상대사와 함께 이번에는 해로로 해서 당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당항성 아래에 도착을 하였다. 당항성 아래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한 땅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땅막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원효대사는 거기서 깨들음을 얻는다.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는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며 다시 서라벌로 발길을 돌렸다. 원효대사의 이 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게 알려진, 무덤 속에서 해골을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채인석 화성시장 대담

 

- 과거 당성의 무역항으로서의 역할과 역사적 가치는 무엇인지?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위치한 당성1971년 사적 제217호로 지정된 삼국시대 당항성으로 추정되는 산성으로 삼국시대 신라가 중국과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신라의 특산물을 수출하던 교역의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문헌 자료의 부족 등으로 그 동안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간 2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석축 성벽, 토석혼축 성벽과 망해루지 및 다각형건물지 등의 내부 건물지가 확인됐습니다. 특히, 산성 내부의 시설들은 군사적행정적 건물들뿐만 아니라 원형(다각형)의 건물지를 통해 당시 당성이 의례적 기능을 하고 있었던 국가적으로 핵심적인 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성이 원료 대사의 대오각성의 현장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661, 원효와 의상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중 토굴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고 그 날 해골에 괸 물을 마신 원효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진리를 깨닫고 발걸음을 돌렸다는 이야기, 즉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의 큰 깨달음을 얻은 현장이 당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입니다. 이렇듯, 당성은 문화재적 가치뿐만이 아니라 우리 53만 화성시민은 물론이고 전 국민에게 깨달음을 전하는 중요한 정신 문화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 화성시의 당성 복원을 위해 그간의 노력과 향후 계획은?

우리 화성시는 그간 2차례(1998, 2000)의 발굴조사를 실시했으며, 639m의 성곽을 복원했으며, 또한, 당성을 종합적으로 정비하고자 지난해 10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고, 127일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화성시 주최,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당성의 황해연안교류에서의 역할(당성의 역사지리적 가치)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이 세미나를 통해 당성의 황해 교통로, 실크로드의 관문으로서의 당성의 역사적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이을 통해 우리시는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당성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띨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동안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당성과 남양지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만들어졌으며, 앞으로 당성 정비에 있어 초석으로 작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시는 당성 종합정비계획을 통해 당성의 성벽과 내부시설물 정비는 물론 학술적인 발굴조사를 추진할 계획입니다.

 

- 당성 종합정비기본계획에 대해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당성복원과 관련한 세부사업으로는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해 주차장, 진입도로 등 부대시설 조성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당성 주변 토지 매입 시작하고, 2014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시작해 2017년까지 연차적으로 착수하려 합니다. 또한, 2014년부터 성곽, 건물지 복원과 외곽지역 종합정비를 위해 성내 시설물 보수 공사와 당성의 성벽과 내부 시설물, 성벽(석축), 망해루지 등의 복원을 연차적으로 착수할 계획입니다.

 

또한, 안내시설, 편의시설, 안전 및 방제시설을 설치하고 탐방로 정비, 홍보관 건립, 전시공간 등을 확보하고, 스토리텔링을 이용한 교육 및 관광 활용 방안도 마련해 당성의 역사 문화적 인식을 확대하고 타 지역의 문화재와 차별화된 전략을 통해 당성의 고유한 특성을 발현시킬 계획입니다. 특히, 당성 정비가 일정한 성과를 나타내는 2024년 이후에는 역사길 조성, 교육프로그램 개발 등을 통해 역사와 생태환경 교육 등 생동감 있는 현장을 전달할 수 있는 문화콘텐츠를 개발할 계획입니다.

 

- 역사적인 관점에서 과거 당성의 역할을 현재의 화성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중국을 비롯한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신라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통로의 역할을 했던 곳이 당성입니다. 오늘날로 보면 부산항이나, 인천항의 역할과도 같은 곳으로 무역은 물론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우리 화성시는 대한민국 최고의 역동적인 도시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시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세계로 거침없이 나가려는 도전과 개척정신의 상징이었던 당성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화성시와 화성시민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성이 상징하는 도전과 개척정신은 미래를 향해 큰 꿈을 갖고 달려 나가는 우리 시민들에게, 용기를 주는 어디에도 없는 정신문화재가 될 것입니다.

 

- 긴 시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섬 한 끝이 나를 불러

다시 돌아와 선

애월리 바닷가

 

不感

마른 생각 하나

솔숲에 묻는다.

 

꼭 손바닥만 하던

나의 열일곱,

시간은 늘

위태로운 몸짓으로

바다의 둥지 속으로 풀려가고

 

해풍에 절은 기다림이

점박이 나리꽃으로 붉던 날

억새꽃 마른 꽃대로

일어서던 섬이여(하략)

 

 

임애월의 시집 <정박 혹은 출항>에 실린 다시 애월리에서라는 시의 한 부분이다. 2013년 새해 들어 첫 만남을 가진 시인 임애월(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석천리 거주, , 54). 그녀를 만난 곳은 허름한 수원천변의 한 선술집이다. 그런 곳을 마다않고 선뜻 자리를 함께 해준 임애월 시인의 본명은 홍성열(洪性烈)이다.

 

제가 필명을 임애월(林涯月)이라고 사용하면서, 사실은 많은 분들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 같아요. 숲과 물가 그리고 달, 그 세 가지를 아우르는 이름이거든요. 제주를 그리는 애월이란 호를 많은 분들이 시용하고 싶어 하셨는데, 제가 먼저 필명으로 사용을 하서 정말 죄스럽기도 하고요

 

책 읽기를 좋아했던 섬소녀

 

시인 임애월은 제주 출신이다.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5년 정도가 되었다. 정식으로 등단을 하기도 전에, 그 이전부터 벌써 문인지에 시가 실릴 정도였다. 그만큼 차곡차곡 쌓아왔던 어릴 적 책읽기가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었는가 보다.

 

기자님은 어릴 때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저희가 살던 곳은 어릴 적 교과서 외는 책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책을 읽는 것이 행복해 오빠들이 만화책을 빌려오면, 그것을 보고 자려고 밤늦게까지 졸린 눈을 부비며 기다리고는 했죠. 그래도 정말 재미있는 책은 국어 교과서였어요. 제가 초등학생 때 오빠가 중학교를 다녀서 오빠 국어책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죠. 오빠가 고등학생일 때는 제가 중학생인데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고는 했어요.”

 

어릴 적부터 책읽기가 좋았다는 섬 소녀 임애월은 그렇게 글과 접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한 후 서울을 거쳐 수원으로 화서 정착을 했다. 아이가 중학교를 다닐 때 어머니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수원문화원(당시 심재덕 원장)에서 백일장이 있다고 주변에서 나가보라는 권유를 했다.

 

벌써 20년이나 지났네요. 수원에서 하는 백일장은 초, , , 일반으로 나뉘어졌는데, 당시 일반부는 전국에서 많은 분들이 참가를 했어요. 거기서 운 좋게 시 부분 장원을 한 것이죠. 그 뒤 임병호 선생님께서 하시는 문학 강의 등을 듣게 된 것이 본격적으로 시를 배우게 된 계기가 되었고요. 등단은 1999년에 했는데, 그 이전인 1998년에 경기시학에 글이 실리고는 했어요.”

 

시인이 되어 정말 행복하다

 

임애월 시인은 감성으로 시를 쓴다고 한다. 시상(詩想)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주저없이 여행을 떠난다고. 그곳에서 만난 모든 것이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쎄요, 사람들은 흔히 시인을 영감설과 장인설로 나누고는 하는데, 저는 영감설 쪽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떤 지시에 의해서 80% 이상의 시를 쓰고 있으니까요. 시는 억지로는 되지 않잖아요. 오히려 억지로 글을 쓰려고 하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듯도 하고요. 그저 어느 순간 떠오르는 시어를 적어갈 때가 가장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듯해요

 

 

그저 막걸리 한 잔 앞에 놓고 이야기를 하는데도 즐겁다. 시를 쓰면서 가장 좋은 일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았다.

 

세상 모든 사람은 직업을 가지면 정년이라는 것의 올무에 갇히게 되죠. 하지만 시인은 그런 것이 없어요. 저는 시인이 되어서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나이가 아무리 먹어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해요. 물론 시를 쓴다는 것이 생활에 수단은 되지 않겠지만, 기댈 수 있다는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죠. 시는 자신과의 대화라고 하잖아요. 이 다음에 더 나이가 먹어도 나 자신을 들여다 볼 수가 있다는 것이죠.”

 

표정조차도 정말 행복해 보인다. 그 동안 <정박 혹은 출항><어떤 혹성을 위하여> 등 두 권의 시집을 펴냈다. 시를 쓰면서도 지역에서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 임애월 시인은 한국경기시인협회 이사와 수원시인협회 이사, 국제 PEN 한국본부 경기자역위원회 사무국장, 유네스코 경기도협회 이사, 기전문화연구회 연구위원 등을 역임하고 있다.

 

수원문학상과 경기문학인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임애월 시인. 시인이어서인가? 마주 앉아 있으니 시인의 고향 제주 바닷가의 한적한 길을 걷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절반쯤 버리고 나니

바다가 보였다

남양만의 밀물이

가슴 속으로 흘러왔다.

 

임애월 시인이 살고 있는 화성시 우정읍 석천리를 그린 시이다. 늘 그렇게 자연과 대화를 하고 사는 임애월 시인. 언젠가는 그녀를 졸라대 바람을 따라 길을 나서고 싶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149-1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470호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 화성 전곡리의 물푸레나무는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웅지마을 뒤편 산 밑에 위치한, 수령 350여년 추정의 노거수이다. 나무의 수고는 약 20m, 가슴높이 줄기의 둘레는 4.68m로, 물푸레나무로서는 보기 드물게 규모가 매우 크며 수형이 아름다운 노거수이다.

 

물푸레나무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자라는 키가 큰 나무로, 목재의 재질이 단단하여 괭이자루 등 각종 농기구와 생활용품 등의 용도로 널리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무껍질은 건위제나 소염제 등의 한방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큰 키로 자라는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서는 대부분 작은 나무만 볼 수 있다.

 

 사진 위는 11월 22일의 물푸레나무, 아래는 문화재청 자료로 잎이 무성한 모습의 물푸레나무 

 

마을에서 신목으로 섬기던 나무

 

11월 22일 오전, 모처럼 답사를 떠났다. 그동안 수원시 팔달구 지동의 마을지를 쓰느라, 거의 한 달여를 답사다운 답사를 하지 못했는데 모처럼 길을 나선 것이다. 화성으로 들어서서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이 바로 물푸레나무이다. 마을 어귀에 있는 작은 저수지를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산 중턱에 잎을 다 떨군 물푸레나무가 보인다.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한국전쟁 이전까지도 마을 주민들이, 이 나무 아래에 제물을 차려놓고 동제와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마을의 주민들이 모두 이 나무를 신성시하고 있으며, 이 나무를 해하면 마을에 불상사가 일어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마을 주민들의 신앙적 대상이 되어 온 나무로 문화적 가치가 높은 나무이다.

 

 커다란 구멍이 뚫려 속이 비어있는 나무의 밑동

 

나무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마을 주민들이 눈여겨본다. 아마 나무라도 어찌할까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사진을 찍는 모습을 한참이나 살펴보더니, 사진만 찍고 있다는 것은 것을 알고 안심을 했는가보다. 대개 마을에서 신목으로 삼아 섬기는 나무를 조사할 때는, 유난히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 주민들의 눈총 때문이다.

 

속빈 줄기 안에 또 작은 가지가 자라고 있어

 

수령이 350년이 넘어서인가, 나무는 여기저기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아래 밑동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다. 거의 밑동의 반 이상이나 속이 비어있다. 이런 것을 보면 상당히 마음이 아프다. 나무도 수명이 있으니 언젠가는 수령을 다 채워 스러지겠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이런 아픈 상처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륜을 느끼게 만드는 표피

 

나무 주변에는 굵은 동아줄을 쳐 놓았다. 안으로 들어가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 싶은 차에, 마침 한 편 줄이 늘어진 것이 보인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 나무의 형태를 살펴본다. 350년 세월을 그 자리에 서서 마을 주민들의 서원을 들어주었을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 새삼 그 위용에 압도를 당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들을 일부러 가을이 지난 후에 찾아보기도 한다. 여름에는 잎이 무성해 그 줄기나 속을 일일이 살펴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무의 한편에 이상한 것이 있다. 텅 빈 안으로 속이 들여다보이는데, 그 안에 무슨 뿌리 같은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좀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세상에 이럴 수가, 그 안에 줄기인 듯도 하고 뿌리 같기도 한 것이 자라고 있다.

 

 원줄기의 빈속에 또 다른 가지인 듯도 하고 뿌리 같기도 한 나무가 보인다 (붉은 원안)

 

한 마디로 표현을 한다면 나무의 원줄기 안에 또 다른 줄기가 자라고 있는 듯하다. 그 동안 수많은 노거수들을 보아왔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아마도 이 물푸레나무가 그 원 즐기 속에 또 다른 나무 하나를 키우고 있는 모양이다. 나무가 자식을 그 줄기 안에서 키우고 있는 것일까? 마치 새끼를 밴 듯한 놀라운 모습이다.

 

한참이나 그 속이 곳을 바라다보면서 걸음을 떼지 못한다. 이런 기이할 때가 또 있을까? 내년 여름에 이 나무의 잎이 무성할 때, 다시 한 번 찾아봐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 때는 뱃속에 든 것이 줄기인지 뿌리인지 확실하게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마을 분들도 만나 뵙고 나무에 얽힌 사연도 알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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