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제(告由祭)’란 개인의 집이나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나 치른 뒤에 그 사정을 신명이나 사당에 모신 조상에게 고하는 제사를 말한다. 11일 오전 10시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 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수원 향교에서는 100여 명의 향교 남녀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민선 6기를 열어갈 염태영 수원지장의 고유제가 열렸다.

 

염태영 시장의 고유제를 주관하기 위해 수원향교의 관련자 70여 명과 일반인 들 100여 명이 수원시 팔달구 항교로 137번길 43(교동)에 모였다. 건과 도포를 입은 유림들은 고유재가 시작되기 전 먼저 성균관으로 올랐다. 이곳에서 사배를 한 후, 대성전으로 올라 문을 열고 제관을 맞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수원 향교 명륜당 뒤편 대성전을 오르는 게단 밑에 모인 향교 관계자들은 염태영 시장이 도착을 하자, 대성전으로 오르는 계단의 우측문을 사용한다. 향교의 모든 의식은 반드시 우측문으로 들어가서 좌측문으로 나오는 것이 원칙이다. 사람들은 일렬로 줄을 지어 우측문으로 대성전 아래 단에 도열을 했다.

 

 

앞으로 4년 동안 수원을 변화시키겠다.

 

고유제를 지내기 전에 미리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말을 한 염태영 시장은

지난 5기 때 이곳을 들렸다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과 약속을 하고 혼이 난 적이 있다. 이제 4년 만에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됐다 오늘 이 자리이서 나는 수원을 변화시키겠다는 다짐을 하겠다. 사람 중심의 도시 수원, 사람이 먼저인 도시 수원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고유제를 시작하기 전 마음을 전했다.

 

유림들과 관계자들이 모두 대성전을 행해 4배를 한 후 염태영 시장은 손을 씻은 후 대성전으로 올랐다 이 곳 대성전에 모셔 놓은 공자의 신 위 앞에서 향을 사른 후 고유축을 낭독했다. 그런 다음 대성전이 서편 문으로 나와 제단 아래서 4배를 하는 것으로 모든 행사는 끝이 났다.

 

수원향교는 원래 화성시 봉담면 와우리에 소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조 13년인 1789년 수원읍치가 지금의 수원시로 이전되면서, 팔달산 남쪽 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향교의 전형적 베치 형태인 전학후묘의 형태로 구성한 수원향교는 이곳의 지형을 고려하여 건물마다 장대석으로 층을 쌓아 건물을 짓게 하였다.

 

현재 수원향교에는 공자와 맹자를 비롯해 우리나라의 성현 18위를 함께 봉안하고 있다. 수원 향교는 1795년에는 성 밖에 조성하였으니 정조가 친히 이곳까지 행차한 유서 깊은 건물이기도 하다.

 

 

고유제 성신사에서 지내는 것이 맞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71일 민선 제6기가 새롭게 출발하던 날 아침 일찍 현충탑에 참배를 한 후 화성 행궁 화령전으로 찾아갔다.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을 모셔놓은 곳으로 이곳에서 6기 시장으로서 책무를 시작할 것을 알리는 고유제 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11일 오전 수원향교에서 공맹과 우리나라 선영들에게 고유를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반드시 짚고 가야할 일이 하나 있다. 염태영시장은 반드시 팔달산에 있는 성신사를 찾아가 팔달산 성신에게 고유제를 지내야 옳다고 생각한다. 팔달산은 수원의 안산이다. 수원은 모든 기운은 팔달산에서 시작이 되며, 팔달산의 중심은 바로 화성의 성신을 모셔놓은 성신사이다.

 

정조대왕은 화성 성역이 완료되는 시기에 맞추어 특별지시를 내렸다. 바로 성신사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성신사는 화성을 지키는 신이기는 하지만, 당시로 보면 수원전역을 보호하는 신이기도 하다. 팔달산 중턱 서장대 아래 성신사를 축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성신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며 화성과 화성 백성들을 사랑하는 축문을 직접 지어 하사를 하기도 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711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약 한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사당이 완성된 후에는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길일을 기려, 1796919일에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정작 수원시장으로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고유제를 지내야 할 곳은 바로 성신사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성신사는 정조대왕의 지시에 의해 팔달산 중턱에 신령을 모신 진정한 화성의 사당이기 때문이다. 성신사는 그야말로 수원과 화성, 그 모든 곳의 안녕을 관장하는 화성의 성신이 좌정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등을 답사하다가 보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바로 자연을 사랑하는 선조들의 마음이다. 깊은 산속에 지어진 절을 보면, 늘 선조들의 마음을 읽어내고는 감탄을 할 때가 많다. 꽤 많은 전각들이 절의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좋게 절의 앞까지 길을 내고는 하지만, 과거에는 절은 힘들게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그런 것 하나도 섬김의 도라고 한다면, 그 섬김 안에는 항상 자연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절을 다니면서 들러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자연을 벗어난 웅장함은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사랑을 실천한 우리 선조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선조들이었다. 대표적인 축조물은 바로 수원 화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공격과 방어라는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내기 위한 거대한 축조물이지만, 화성은 그 어느 곳 한곳도 자연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 스스로가 자연이 되어 아름답게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 일이 있어 이천으로 발길을 옮겼다. 관고동에 자리한 이천시립도서관을 찾아가면, 그 바로 아래에 이천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이천시 창천동 336번지에 소재한 이천향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2호이다. 우르 수원의 경우에도 팔달산에 위치한 중앙도서관 아래 수원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향교라는 조선시대의 배움 터가 있기 때문에, , 주변에 도서관을 마련하는 듯하다.

 

 

새를 불렀다는 봉호탑(鳳呼塔)’

 

이천 향교를 들러보고 나오려는데, 옆 산 한편에 무슨 안내판 같은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바위에 무슨 각자(刻字) 같은 것도 보인다. 올라가 보았더니 바위에는 봉호탑(鳳呼塔)이라고 바위에 음각을 해 놓았다. 바위를 네모나게 파낸 후 그 안에 다시 깊게 음각을 한 글씨이다.

 

말 그대로 하면 봉황을 불러들이는 탑이라는 뜻이다. 탑이라면 돌을 깎아 세워야 하는데, 그저 향교 옆 산에 있는 자연적인 바위에 이렇게 음각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앞 안내판에 쓰인 문구를 보니 이해가 간다. 이 바위에서 새를 부르는 의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읽어보고는 다시 한 번 자연과 함께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지금도 이천향교 주변에는 큰 느티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다. 그런데 예전에는 주변에 큰 느티나무 숲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숲이 우거지다가 보니, 하절기가 되면 꾀꼬리 등 많은 새들이 찾아와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다웠을 것이다. 향교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도 그 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즐거워했을 것이고.

 

망치소리에 놀라 사라진 새들

 

그런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이천 향교를 중수를 했다고 한다. 향교를 중수하면서 대목장들이 나무를 다듬기 위해 내는 망치소리에, 새들이 놀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유생들은 늘 듣던 새소리가 사라지고 나자, 아름다운 새소리가 그리워졌을 것이다. 유생 중에 박정수, 이면용 두 사람이, 이 바위 앞에 먹이를 놓고 새를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봉호탑은 바로 먹이를 놓고 고사를 지낸 곳이라고 한다, 관고동 주민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이 이야기는,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당시의 유생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이 봉호탑을 보면서 또 한 번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과연 우리 선조들처럼, 자연을 아끼고 있는가를 스스로 질문을 해본다. 바위에 새겨진 각자 하나, 그것이 주는 교훈이다.

고성군 간성읍에서 건봉사를 항해 가다가 보면, 해상 2리 마을이 있다. 이곳에서 개울 건너에 보면 커다란 노송 두 그루가 서 있는 곳에 작은 전각 한 동이 보인다. 개울 건너편에는 간성향교 기적비란 돌 표지석 한 기가 서 있다. 간성항교 기적비란 말에 개울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면 맞배지붕으로 지은 비각을 만난다. 비각은 정면과 측면 각 한 칸으로 지어졌으며, 높이 70cm 정도의 장초석 위에 기둥을 올렸다. 내부에는 홍살을 두른 안에 비 한 기가 서 있다. 이 비가 바로 간성형교 기적비이다. 이 비를 세우게 된 내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임진왜란에 성인의 위패를 모신 곳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병들이 간성항교로 들이닥쳤다. 왜병들은 간성향교를 점령하고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 때 향교의 재임이었던 김자발과 박응열 등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인의 위패를 거두어 정결한 곳에 봉안을 했다는 것이다. 간성항교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왜병들은 위패를 두 사람이 거두어 간 뒤 간성항교에 불을 질렀다. 전소한 향교는 위패를 피신시켰던 김자발과 박응열의 발의로, 임진왜란 때인 1592년에 10월에 중건을 시작하여 이듬 해 2월에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이 기적비는 순조 5년인 1805년에 향교 유림인 김, 박 등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나를 부끄럽게 만든 비각

 

소나무 두 그루가 전각을 내려다보듯 서 있다. 그 아래 맞배집 한 칸으로 서 있는 비각. 그저 시골 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비각이다. 내 앞에 서 있는 향교 기적비란 표지석이 아니라면 누구의 열부각이나 효자각 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몇 년 전에 이곳을 몇 번이나 지나면서도 그리 생각이 들어 들리지 않았던 곳이다.

 

새삼스레 세워 놓은 표지석 하나 때문에 이 비각의 남다름을 알아낼 수 있었다니. 더구나 지정문화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저 홀대를 하고 지나쳤던 것이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매번 떠들어대는 것이 문화재의 가치는 지정, 비지정, 혹은 그 품격을 갖고 논하지 말라던 나였기 때문이다.

 

 

형조판서 서영보의 글씨

 

비각은 단출하다. 정면과 측면 한 칸이지만, 정면이 측면보다 약간 넓게 조성하였다. 홍살을 띤 안에는 비가 한 기 서 있다. 비의 대좌와 머리에 놓은 개석은 화강암으로 하였으며, 개석의 앞뒤로는 당초문과 꽃 봉우리가 새겨져 있다.

 

몸돌은 섬록화강암으로 조성하였으며, 높이는 142cm이다. 붉은색의 비문으로 써 있는데, 비문은 영의정이던 이병모가 찬하고 형조판서 서영보의 글씨라고 한다. 조선후기의 문신인 서영보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니, 당대 최고의 명필이 글을 쓴 셈이다. 글을 전각한 것은 유한지이다.

 

그저 모르고 지나쳤던 비각 하나.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아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작은 비 하나에도 큰 뜻이 있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건봉사의 문화재를 답사하러 가다가 만난 이 비 하나로, 다시 한 번 문화재답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가급적이면 들리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향교와 서원이다. 향교나 서원은 예전 교육기관이란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교육기관인 향교나 서원을 가급적 들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시간을 내어 깊숙이 자리한 향교나 서원을 찾아가보았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 향교나 서원은 꼭 문을 닫아 놓는 것일까? 그것도 보물 등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은 오히려 개방을 한다. 또 어느 지역을 가면 그 안에서 사람이 살고 있으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거개의 향교와 서원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다.


꽁꽁 닫혀있는 향교, 연락처 하나 없어

출장을 가는 길에 문화재 한 점이라도 조사를 할 양으로, 일부러 금산으로 길을 잡았다. 대둔산을 넘어 금산으로 가는 길은, 이치재를 넘어서 바로 진산면이 된다.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 355번지에 진산향교가 있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찾아갔지만, ‘역시나’ 였다.

문은 굳게 잠겨 있는데, 그 흔한 전화번호 하나 남겨놓지 않았다. 이렇게 굳게 잠가놓을 것 같으면, 전화번호라도 하나 남겨주던지 정말로 어이가 없다. 일부러 길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향교까지 찾아들어 갔는데. 마을 주민들에게 여기 관리자가 없느냐고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하긴 요즘 사람들, 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면 도통 신경을 쓰지 않는다. 토요일 오후라서 어디 연락을 할 수도 없다. 향교 담장 밖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그러나 외형만 찍는 사진, 답답하기만 하다.

조선조 영조 51년에 복원한 진산향교

현재 충남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진산향교는, 원래는 조선조 초기에 현 진산중학교 자리에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영조 51년인 1775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6, 25 한국전쟁 째 훼손이 되었던 것을 다시 보수하였다.



진산향교는 외삼문, 내삼문, 전교실,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의실인 명륜당과, 그 뒤편에 마련한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선철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폐를 모셔 놓고, 봄과 가을에 석전제를 지내고 있다.

진산향교는 비탈을 그대로 이용하여 건물을 지었다. 향교를 바라보면 맨 아래 쪽에 외삼문이 있고, 그 뒤편에 명륜당이 자리한다. 진산향교를 찾아간 것은 바로 이 명륜당 때문이다. 누각 형태로 지은 명륜당은 딴 곳의 전각과는 다르다. 비탈진 곳에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원형기둥을 세웠다.



마루를 어떻게 깔았는지 볼 수가 없지만, 누각 형태로 되어있기 때문에 온돌은 없고, 누마루의 형태로만 되어있는 듯하다. 누각은 계단을 이용해 오르게 하였으며,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이다. 문은 정면과 후면을 세 칸의 판문을 달아냈다. 좌우에는 한 칸의 문을 내었으며, 양편으로는 풍판을 달아냈다.

주심포계로 지어진 진산향교. 밖에서 아무리 돌아다녀 보았지만, 안으로 들어갈 방법은 전혀 없다. 할 수 없이 담장 밖에서 명륜당 몇 장을 촬영하고 돌아서는 수밖에. 이럴 때는 정말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문화재는 가까이서 살펴보고, 느껴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이렇게 꽁꽁 닫힌 향교와 서원, 과연 바람직한 행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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