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산 고인돌길'.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난 이 길의 이름을 이렇게 붙이고 싶다. 이 길은 지방유형문화재인 팔달산 ‘지석묘군’을 답사하기 위해 올라갔다가 우연히 붙인 이름이다. 그저 뒷짐을 지고 몇 바퀴를 돌기에 적당한 길이고, 아이들과 함께라면 자연과 문화를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도심에서 이런 길을 만난다는 것도, 알고 보면 행운이란 생각이다.

 

그저 혼자 40분 정도를 걷다가 여러 가지 이름을 생각해 냈다. 용도길, 화양루길 등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제일 적당한 이름이 '팔달산 고인돌길'이란 생각이다. 이런 이름을 붙여놓고 혼자서 싱글거린다. 지나는 사람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뒷짐을 지고 소나무 길을 걸어본다.

 

 

'팔달산 고인돌길', 이름 어때요?

 

나름대로 이렇게 이름을 붙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요즈음 조금만 경치가 좋아도 사람들은 길에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나야 길 전문가도 아니니, 구태여 길에 이름을 붙여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 적당한 이 길을 그냥 지나친다면, 그래도 명색이 문화재를 소개하는 사람의 본이 바로서질 않는다는 생각이다.

 

수원 팔달산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시립중앙도서관을 좌측에 놓고,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9월 4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작은 손 카메라 하나만을 주머니에 넣고 산을 오른다. 비가 내리는 날 숲으로 들어가면 숲의 향기가 온몸을 감싼다. 가끔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후두둑’ 소리를 낸다면, 그 또한 자연의 소리일진데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이라고는 하지만, 구태여 산이라고 이름을 붙일 이유도 없을 듯한 경사이다. 조금만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지석묘군.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지석묘를 비켜나면, 팔달산의 남쪽 능선을 따라 쌓은 화성의 용도 방향으로 오르게 된다.

 

그보다는 지석묘를 알 수 있는 이름이 좋다

 

이 길을 걸으면서 '용도길'이나 '화양루 길'이라고 생각을 한 것도, 이 길을 따라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화양루와 그 옆에 용도 곁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성 안으로 걷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화성의 이름을 붙이기보다는, 그저 '고인돌길'이란 명칭이 더 정감이 가기 때문이다.

   

 

지석묘군을 지나면 용도의 끝에 마련한 화양루가 보인다. 이 길은 온통 암반이다. 이곳의 돌들은 과거에 화성을 쌓기 위해 성돌을 채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바위를 잘 살펴보면 돌을 쪼아낸 흔적도 보이고, 성돌로 사용함직한 크기의 돌도 보인다. 그 바위와 소나무들이 어우러진 길 위에 화양루와 용도가 보인다.

 

소나무와 암반이 어우러진 길

 

용도의 성벽을 우측으로 두고 천천히 걷는다. 용도 안에서는 용도가 꽤 높이 쌓은 줄로 알았다. 그런데 막상 용도를 끼고 걸어보니, 이렇게 낮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에전에는 성벽 밑이 가파른 비탈이었을 텐데, 세월이 지나다보니 이렇게 길이 생겨났다. 조금 걷다보면 용도서치를 지나고, 잠시 후 서남암문 위에 올려 진 서남포사가 보인다.

 

 

서남포사를 지나 조금만 가면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은 노송 숲이다. 비가 내리는 날 숲속에서 맡아보는 솔 향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누군가 돌탑을 쌓아놓았다.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는 지석묘. 두어 바퀴를 더 돌았는데도 시간이 40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여러 번 그 길을 반복해서 지나는 분에게 몇 바퀴나 도느냐고 물었다. 그저 걷고 싶은 대로 걷는단다.

 

 

'걷고 싶은 대로 걷는 길'. 그것이 바로 팔달산 고인돌길의 멋이다. 제법 빗줄기가 굵어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을 수 있나? 괜히 그 길에 취해 멈춰 선다. 저만큼 비에 젖은 새 한 마리가 가지에 외롭게 앉아있다. 그 또한 자연이란 생각이다. 바위와 소나무가 적당히 어우러지고, 화성을 손으로 느껴가면서 걸을 수 있는 길. 아이들과 함께 걸어도 부담이 되지 않는 이런 길이 나는 좋다.

옛 풍습에 ‘매향(埋香)’이란 의식이 있었다. 이 의식은 하늘과 땅의 신을 모시기 위한 의식으로, 향나무를 땅에 묻거나 피우는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 때 이러한 의식을 행하는 과정과 시기, 그리고 관련된 집단이나 사람들을 기록한 돌을 <매향비>라고 한다. 매향비는 다듬은 돌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커다란 바위에 기록을 해 놓는 형태이다.

 

미륵의 세계를 그린 민초들의 염원

 

매향의식은 내세에 미륵불의 세계에 태어날 것을 기원하며 향을 땅에 묻는데, 매향 의식은 고려 때도 성행하였으나, 그 후 불교에 대한 억제가 강화되던 조선조 초기에 극락정토로 갈 것을 기원하면서 비를 세우던 비밀 종교행위의 하나이기도 하다. 매향은 주로 민초들이 즐겨했으며, 순수한 민간신앙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발견된 매향비로는 1309년 8월에 세운 고성삼일포 매향비를 비롯하여, 1335년 3월에 세운 정주 매향비, 1387년에 세운 사천 매향비, 1405년에 세운 암태도 매향비, 1427년에 세운 해미 매향비 등이 있다.

 

보물 제614호 사천 매향비

 

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 산48 소재한 보물 제614호 사천매향비는 보호각을 지어 보호를 하고 있다. 사천 매향비를 답사한 해가 2005년이었으니, 벌써 4년이 훌쩍 지났다. 하기야 벌써 20여 년을 전국을 돌아다녔다. 꽤 오랜 시간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서 마음은 조급하고, 그 수많은 경비며 시간이 점차 부담스럽다.

 

자연석에 15줄 202자를 썼다. 매향은 민간들이 행한 의식이다

 

그래도 그동안 현장에서 담아 온 것을 정리하여 이렇게 소개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퍽이나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사천 매향비는 거의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비문을 새겨 놓았는데, 표면의 굴곡이 심하다. 그저 바라보면 글자를 제대로 판독하기도 어려운 글자가 많은 듯하다. 글자 크기도 각자가 다르고 종횡도 잘 맞지 않아 보기가 힘들다.

 

전체 15줄 202자를 각인한 사천 매향비의 판독된 내용에 보면, 고려 후기 사회가 혼란하던 때에 불교 승려들을 중심으로 4,100여 명이 계를 조직하여, 왕의 만수무강, 나라의 부강, 백성의 평안 등을 기원하기 위해 이곳에서 매향의식을 치렀다는 것을 기록했다. 당시 매향의 주도집단은 주로 보(寶)·결계(結契)·향도(香徒)였다.

 

소중한 민간신앙의 형태를 알아 볼 수 있는 문화재로 가치가 높다

 

비문은 승려 달공이 짓고, 수안이 썼으며, 김용이 새긴 것으로, 고려 우왕 13년(1387)에 세워졌다. 건립목적과 세운 연대가 확실한 비로, 잊혀진 우리의 옛 민속을 알려주고 고려 후기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대에 맞는 매향의식이 필요해

 

매향의식을 거행할 때 땅에 묻는 향은 주로 침향이란 희귀약재로 쓰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가의 향을 땅에 묻는다는 것은 그만큼 민초들의 절박한 마음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흔치 않은 문화재인 매향비. 사천 매향비를 답사한 지 오래 전이지만, 지금도 그 매향비 안에 깃든 민초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것만 같다. 어차피 민초들이야 권력이나 금력을 가진 자들과 함께는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니 말이다.

 

보물 제614호 사천 매향비

 

갑자기 사천매향비가 생각이 난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이 너무 절박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굳이 매향의식이 아니라고 해도,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정작 국민들을 위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잔치에 빠져 있는 것이 요즈음의 현실이다. 과연 이네들을 믿고 살아야만 할까?  이제는 이 시대에 ‘매향의식’이 필요한 때일 것이란 생각이다.

옛 임금들의 능원이나 제를 지내는 전각 옆에는 우물이 있기 마련이다. 이 우물은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가 없다. ‘어정(御井)’ 혹은 ‘제정(祭井)’이라고 부르는 이 우물은, 임금의 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물을 긷는 곳이다.

사적 제115호인 정조 임금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에는, 운한각을 바라보고 좌측 담 너머로 우물이 자리한다. 이 우물은 일반적인 어정이 둥근 형태로 조성을 한데 비해,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려 우물을 조성하였다. 아마도 이 우물은 화령전을 축조할 당시인 1801년에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복원이 된 제정과 전사청

2011년 12월 10일 찾아간 화성 행궁. 날이 쌀쌀하긴 해도, 빠른 시간 안에 많은 곳을 돌아보자니 등줄기에 땀이 밴다. 언제나 그렇듯 답사는 늘 발길이 바쁘다. 그저 남들은 사진 하나 찍으려고 있는 대로 폼을 잡고는 하지만, 나 하고는 거리가 멀다.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더 많이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제정의 옆에는 전사청을 비롯하여 제기고와 향대청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005년도에 복원이 된 제정과 전사청만이 있다. 전사청이란 제사를 관리하는 관청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젯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고는 했다. 제기고는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 등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향대청은 전사청 부근에 있었으며,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초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조선조 순조 1년인 1801년에 축조된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인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납일(臘日)’이란 동지로부터 세 번째 미일(未日)을 말한다,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그 날이 달랐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동지 이후 세 번째 미일(=양의 날)로 정한 것이다. 이 날은 궁에서는 종묘사직에 제사를 올렸고, 민간에서도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납향(臘享)'이라고 했다.



납향일은 그 해의 끝에 해당하므로, 일 년을 정리하면서 조상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제를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순조도 이 납향일에 이곳 화령전에 와서 아버지인 정조에게 제를 지냈으며, 제정의 물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 제사는 정조의 어진이 화령전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우물 하나에도 정성이 깃들어

화령전에서 제를 지낼 때 물을 떠 사용을 하던 제정은, 정방향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도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높이는 5.5m이고 바닥에서 물이고인 높이는 약 4m 정도이다. 우물의 밖으로 뻗어 나온 돌은 서로 반을 갈라내어 엇물려 놓았다. 장대석을 쌓아올려 우물을 만들었다는 것도 색다르다.



현재 복원이 된 화령전 안의 제정은 밑에 복원된 전사청 앞으로 물이 흐르도록 되어있다. 전사청은 ㄱ 자형으로 지었는데, 동편 끝이 한 칸 돌출이 되도록 하여 마루를 깔았다. 모두 8칸으로 지어진 전사청은 동편에 방과 툇마루를 놓고, 4칸 째에 문을 두었다. 이 문을 통하여 운한각으로 음식 등을 날랐을 것이다.

좌측 4칸은 한 칸의 광과 세 칸의 방으로 되어있다. 전사청 앞에 굴뚝을 보아 이곳은 온돌방을 꾸몄을 것이다. 납향일이면 추운 동지 때를 지나서이기 때문에, 온돌방이 아니라면 전각 안이라고 해도 추위 때문에 제를 준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향대청과 제기고가 복원이 되는 날, 사라져버린 역사의 한 조각이 맞춰질 것만 같다. 2011년 12월 10일에 찾아간 행궁 곁 화령전은, 그렇게 하나하나 역사를 되살리고 있었다.

김제 금산사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외국인들도 보인다. 10월 17일 김제 모악산 금산사에 개산대제가 열리는 날이다. 개산대제란 금산사가 처음으로 문을 연 날을 말한다. 절을 ‘산문’이라고 한다. 개산대제는 바로 절문을 처음으로 열었다는 뜻이 된다. 금산사의 개창일이 되는 셈이다.

금산사는 조선 성종 23년인 1492년에 작성된 <금산사 5층 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진표율사는 중건자로 보아야 한다.

금산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그 이유는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보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날 금산사에 모인 인파는 5,000명 정도라고 한다. 아마도 절집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인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금산사 개산대제에는 언제나 그 정도의 인원이 모여, 부처님의 도량이 문을 열었음을 축하하는 것이다. 금산사 개산대제의 이모저모를 둘러본다.


개산대제를 거행하는 기념식장에는 외국인들도 보인다. 종교에는 벽이 없어서인지, 파란 눈의 외국인들도 개량한복을 똑같이 차려입고 많은 사람들이 참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행사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일어섰다. 죽장자를 짚은 전 조계종 총무원장이신 월주 대종사께서 현 금산사 주지 원행스님과 많은 인파를 대동하고 식장으로 입장을 하고 계시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사람들이 차를 받치고 입장을 한다. 그 뒤로는  쌀, 향, 꽃, 등, 과일, 차 등 공양물을 부처에 바치는 의식인 육법공양물을 손에 든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육법(六法)'이란 깨달음과 관련된 6가지 공양에 정신적인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다.

(1)등(보시) - 지혜의 등불이다. 등은 세상을 밝히는 광명 지혜인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2)향(지계) - 해탈의 향기이다. 향은 가려진 곳에도 향기를 두루 나눠 주는 공덕이 있다.
(3)꽃(인욕) - 보살 행의 아름다움이다. 열매가 맺기 위해서는
먼저 꽃을 피워야 한다.
(4)과일(정진) - 깨달음의 열매이다. 지극히 바른 도로써 성취 하겠다는 정진을 표현한다
(5)차(선정) -열반의 맛을 의미한다. 부처님께 올리는 차는 보통 차가 아니라 '감로차(甘露茶)'이다.
(6)쌀(지혜) - 깨달음의 기쁨이다. 봄부터 수많은 노력을 한 후
가을에 추수할 때의 기쁨을 상징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두 손을 모으고 부처님을 찬양한다. 그리고 월주 대종사의 개산대제를 기념하는 법문으로 이어진다. 특히 이 날은 만등불사와 불자들이 법명을 받고 새로운 생을 시작하는 '보살계'가 함께 이루어져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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